Masuk제국력 798년.아르젠트 대공성.관측자 0.한 살의 루시안 아르젠트.루시안은 한동안 기록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한 살.자신에게는 당연히 기억이 없는 시절이었다. 단테가 일곱 살이던 해, 자신은 이미 태어나 같은 성 안에 있었고, 그곳에 현재에서 건너간 스무 살의 자신까지 존재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묘했는데 이제 기록서는 한 살의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미래 밖의 단테’를 관측했다고 말하고 있었다.“잠깐.”루시안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가슴에 남은 상처 때문인지, 방금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내가 뭘 봤다고?”기록서가 답했다.단테 아르젠트.“그건 알아.”루시안이 인상을 찌푸렸다.“형을 어떻게 봤는데.”미래가 아닌 단테 아르젠트를.“그러니까 그게 무슨—”“말 그대로일 거예요.”엘라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그녀는 기록서를 내려다보며 조금 전까지 이어진 내용을 머릿속에서 다시 맞추고 있었다. 단테의 아르젠트 혈통은 미래를 바꾸는 힘이 아니라 미래에서 벗어나는 힘이었다. 그래서 그가 예정된 선택을 거부할 때마다 그 미래는 사라지지 않고 몸 안에 축적되었다. 그리고 798년, 일곱 살의 단테가 처음으로 예정에 없던 선택을 했다.현재에서 온 루시안을.자신의 동생이라고 알아보고.아버지 앞을 막아선 것.최초 변칙 발생.대상 : 단테 아르젠트.발현 시점 : 제국력 798년.원인 : 보호 선택.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때였어요.”단테가 그녀를 바라봤다.“내가 루시안을 막아섰을 때.”“응. 그때 당신이 처음으로 예정된 미래에서 빠져나왔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변칙도 그 순간이었고.”테오도르가 곧바로 이해했다.“그렇다면 ‘미래 밖의 단테’란 그 변칙 직후의 대공 전하를 의미하는 겁니까?”“아마도.”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여전히 하나가 맞지 않았다.그 자리에 있었던 건 현재의 엘라와 루시안, 미래의 엘라, 어린 단테, 젊은 에드윈, 그리고 라제르였다
에드윈 아르카나.너는 내가 버리고 간 몸에서 태어난 아이니까.아무도 곧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에드윈은 기록서를 바라본 채 서 있었다. 평소라면 무엇이든 먼저 분석했을 사람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얼굴에서 생각이 읽히지 않았다. 놀란 건지, 분노한 건지, 아니면 이해조차 하지 못한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엘라는 그런 에드윈을 잠시 지켜보다가 기록서를 내려다봤다.“설명.”검은 글씨가 천천히 번졌다.무엇을.“전부.”너는 명령할 위치가 아니다.엘라의 눈썹이 올라갔다.“그럼 안 물어보고 찾아내도 되고요.”라제르의 글씨가 멈췄다.엘라는 책을 툭 쳤다.“둘 중 골라요. 직접 말할래요, 아니면 우리가 당신 비밀 하나씩 뜯어볼래요.”루시안이 옆에서 중얼거렸다.“두 번째가 더 무서운데.”단테가 담담히 대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당사자가 듣고 있는데요.”“들으라고 한 말이다.”미래의 엘라가 아렌을 안은 채 작게 웃었다. 현재의 엘라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기록서로 시선을 돌렸다.검은 글씨가 나타났다.317년 전.나는 아르카나의 몸을 사용했다.에드윈의 눈이 움직였다.“아르카나.”네 가문의 몸이었다.“누구.”잠시.네 아버지.에드윈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세리아의 보랏빛 글씨가 순간 흐트러졌다.에드윈의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릴 때 죽었어.에드윈이 낮게 말했다.“내가 세 살이었을 때.”카시엘의 금빛 글씨.기록에도 그렇게 남아 있다.라제르의 답은 간단했다.죽지 않았다.비워졌다.엘라의 표정이 달라졌다.“비워졌다는 게.”에드윈이 먼저 알아들었다.“영혼.”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몸만 남았다는 뜻이군.”그래.“당신이 들어가기 전에?”아니다.짧은 답.그리고.내가 나간 뒤에.정적.엘라가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잠깐.”그녀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정리했다.“원래 아르카나 사람이 있었고.”그래.“당신이 그 몸에 들어갔고.”그래.“나중에 빠져나왔는데.”그래.“몸은 죽지 않았고.”
“한 명만 남을 수 있대.”아렌의 말이 떨어진 뒤, 누구도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단테의 손만 엘라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감쌌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놓치지 않겠다는 의사가 너무 분명해서, 엘라는 오히려 그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지금의 자신.그리고 기록서 안에 남아 있다는 스물여덟의 자신.둘이 동시에 현재로 나오면 한 사람만 남을 수 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단테를 살리기 위해 내일 최초의 문을 열겠다고 정했는데, 또다시 선택지가 둘로 갈렸다.단테를 살리기 위해 문을 연다.그러면 두 명의 엘라가 생긴다.그리고.둘 중 하나가 사라진다.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싫은데.”테오도르가 눈을 깜빡였다.“예?”“둘 중 하나.”엘라는 아렌을 품에 안은 채 기록서를 바라봤다.“또 그거잖아.”에드윈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그도 알아들었다.지금까지 그들을 끌고 온 모든 선택이 그랬다.단테냐 루시안이냐.단테냐 아이냐.신뢰냐 의심이냐.과거냐 현재냐.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그리고 이번에는.현재의 엘라냐.미래의 엘라냐.“이상하잖아요.”엘라가 말했다.“우리가 여기까지 뭘 배웠는데.”단테가 그녀를 바라봤다.“세 번째 선택.”“맞아요.”엘라는 기록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그러니까 이번에도 찾으면 돼요.”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분 모두 남는 방법을 말씀이십니까?”“응.”“같은 사람이 같은 시간에 존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누가요.”테오도르가 멈췄다.엘라의 시선이 에드윈에게 향했다.에드윈도 입을 다물었다.“당신이 말했죠?”“그래.”“근거.”“시간의 문을 연구하면서 같은 영혼이 동일한 시간축에 겹치면 서로를 밀어내는 현상을 확인했다.”“직접?”“…”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직접 봤어요?”“완전한 형태로는 아니다.”“그럼.”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확정 아니네.”에드윈의 미간이 구겨졌다.“그렇게 단순하게 결론 낼 문제가 아니다.”“그러니까 확인하자는 거죠.
그 몸은.처음부터 내 것이 될 예정이었으니까.기록서 위의 검은 글자가 완전히 자리 잡는 순간, 지하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누구 하나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단테는 검을 든 채 책을 노려보고 있었고, 루시안은 창백한 얼굴로 가슴을 짚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엘라는 손바닥에 붙어 버린 기록서를 내려다봤다. 검은 문양이 손목 쪽으로 아주 조금 더 번지고 있었다.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엘라였다.“아니.”단테가 그녀를 돌아봤다.엘라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그건 당신 거 아니에요.”검은 글자가 잠시 멈췄다.무엇이.“단테 몸.”엘라가 이번에는 고개를 들었다.“태어나게 한 건 당신일 수 있어도, 그래서 당신 것이 되는 건 아니죠.”내 피다.“루시안도 당신 피예요.”루시안의 표정이 굳었다.엘라는 멈추지 않았다.“그렇다고 루시안 몸이 당신 거예요?”잠시.그 아이는 실패작이었다.루시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단테의 검 끝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엘라는 오히려 더 담담해졌다.“봐요.”그녀가 기록서 표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이런 말부터 고쳐야 한다니까.”…“아들한테 실패작.”엘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다른 아들한테는 그릇.”잠시.“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네요.”그 순간, 세리아의 보랏빛 글씨가 검은 글자 옆에 나타났다.엘라 말이 맞아.라제르의 글씨가 즉시 번졌다.끼어들지 마라.싫어.엘라가 아주 작게 웃었다.“역시 세리아.”에드윈은 그 광경을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이제 책 안에서도 싸우는 건가.”카시엘의 금빛 글씨까지 나타났다.라제르, 넌 원래도 말이 안 통했지.네가 아직 남아 있을 줄은 몰랐군.나도 네가 이렇게까지 질긴 줄은 몰랐다.엘라는 책을 한번 탁 쳤다.“다들 잠깐.”금빛과 보랏빛 글씨가 멈췄다.검은 글씨만 남았다.엘라는 곧장 물었다.“317년 동안 기다렸다고 했죠.”그래.“에드윈보다 오래됐네요.”에드윈의 표정이 굳었다.“그건 불가능해
단테 아르젠트의 사망까지.3일.엘라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숫자가 줄어드는 건 이제 낯설지도 않았다. 처음 30일이었고, 7일이 되었고, 다시 5일과 4일을 지나 이제 3일. 문제는 숫자 자체가 아니었다. 그 아래 적힌 세 번째 사망 원인이었다.엘라 에스텔.그리고.네가 단테를 살리기 위해 사용하게 될 힘이.단테를 죽인다.엘라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단테는 그걸 알아챘는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조금 전 심장이 멈췄다가 돌아온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손에 힘이 있었다.“엘라.”“응.”“또 혼자 생각한다.”엘라는 고개를 들었다.“이번엔 좀 해도 되잖아요.”“안 된다.”“왜요.”“지금 네 표정이.”단테가 잠시 말을 골랐다.“내가 혼자 문에 들어갔을 때 네 표정이랑 비슷하다.”엘라의 입이 닫혔다.그 말은 반박하기 어려웠다.조금 전 자신은 단테가 혼자 선택하러 갔다고 화를 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원인이라는 문장 하나를 보자마자, 똑같이 머릿속에서 혼자 방법을 찾고 있었다.단테와 떨어져야 하나.예지를 쓰지 말아야 하나.기록서를 버리면 되나.혹시.자기가 사라지면.“하지 마.”엘라의 눈이 커졌다.“뭐를.”“방금 생각한 거.”“제가 뭘 생각했는데요.”“네가 없어지면 된다는 종류.”엘라가 입을 다물었다.단테의 눈이 가늘어졌다.“맞군.”“…눈썹 안 움직였는데.”“이번에는 얼굴 전체가 움직였다.”루시안이 옆에서 힘없이 웃었다.“형 진짜 잘 아네.”엘라는 한숨을 쉬었다.“좋아요.”기록서를 다시 펼쳤다.“혼자 안 할게.”단테의 손에 힘이 아주 조금 풀렸다.“말해.”엘라는 책을 모두에게 보이게 돌렸다.“제 힘이 단테를 죽인대요.”“정확히는.”테오도르가 기록된 문장을 다시 읽었다.“스승님께서 본 미래를 현실 쪽으로 끌어오는 능력이 있고, 대공 전하의 죽음을 반복해서 관측하면서 그 가능성에 힘을 더하고 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단순하긴 해
“같이 고르면 되잖아.”엘라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닫힌 돌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단테를 삼킬 때는 지하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요란했으면서, 이제는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것처럼 잠잠했다.그 침묵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엘라는 검 끝으로 문 중앙을 가리켰다.“에드윈.”“말했잖아. 단테가 열쇠다.”“그건 들었고요.”“그럼.”“열쇠가 안쪽에 들어갔잖아요.”에드윈의 표정이 멈췄다.엘라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문이라는 건 원래 양쪽에서 열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단순한 구조가 아니야.”“그럼 복잡한 구조 설명해요.”“엘라.”“빨리.”조금 전까지만 해도 흔들리던 엘라의 목소리는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단테가 사라졌고, 남은 시간은 나흘이다. 무서운 건 여전했지만 지금은 그 감정을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찾는다.열고.들어간다.그리고 데리고 나온다.그것만 생각하면 됐다.에드윈은 그런 엘라를 잠시 바라보다 결국 문 앞으로 다가갔다.“최초의 문은 미래의 문과 다르다. 미래의 문이 수많은 가능성을 관측하기 위해 만든 통로라면, 이건 그보다 먼저 만들어진 원형이야.”“어디로 가는 문인데요.”“어디가 아니야.”“그럼.”에드윈이 문에 손을 댔다.“언제도 아니다.”엘라의 눈썹이 좁아졌다.“아까 기록서에는 단테 위치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했죠.”“그래.”“그게 뭔데요.”에드윈은 잠시 말이 없었다.“선택되기 전.”엘라가 굳었다.“뭐가.”“미래가.”그는 천천히 문에서 손을 떼었다.“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곳. 아직 어떤 선택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으로 확정되지 않은 공간이다.”테오도르가 치료 마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들었다. 루시안은 아직 의식이 있었지만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단테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다.“그렇다면 대공 전하는 지금 육체째 시간축 밖으로 이탈한 겁니까?”“아마.”“아마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