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몸은.처음부터 내 것이 될 예정이었으니까.기록서 위의 검은 글자가 완전히 자리 잡는 순간, 지하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누구 하나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단테는 검을 든 채 책을 노려보고 있었고, 루시안은 창백한 얼굴로 가슴을 짚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엘라는 손바닥에 붙어 버린 기록서를 내려다봤다. 검은 문양이 손목 쪽으로 아주 조금 더 번지고 있었다.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엘라였다.“아니.”단테가 그녀를 돌아봤다.엘라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그건 당신 거 아니에요.”검은 글자가 잠시 멈췄다.무엇이.“단테 몸.”엘라가 이번에는 고개를 들었다.“태어나게 한 건 당신일 수 있어도, 그래서 당신 것이 되는 건 아니죠.”내 피다.“루시안도 당신 피예요.”루시안의 표정이 굳었다.엘라는 멈추지 않았다.“그렇다고 루시안 몸이 당신 거예요?”잠시.그 아이는 실패작이었다.루시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단테의 검 끝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엘라는 오히려 더 담담해졌다.“봐요.”그녀가 기록서 표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이런 말부터 고쳐야 한다니까.”…“아들한테 실패작.”엘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다른 아들한테는 그릇.”잠시.“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네요.”그 순간, 세리아의 보랏빛 글씨가 검은 글자 옆에 나타났다.엘라 말이 맞아.라제르의 글씨가 즉시 번졌다.끼어들지 마라.싫어.엘라가 아주 작게 웃었다.“역시 세리아.”에드윈은 그 광경을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이제 책 안에서도 싸우는 건가.”카시엘의 금빛 글씨까지 나타났다.라제르, 넌 원래도 말이 안 통했지.네가 아직 남아 있을 줄은 몰랐군.나도 네가 이렇게까지 질긴 줄은 몰랐다.엘라는 책을 한번 탁 쳤다.“다들 잠깐.”금빛과 보랏빛 글씨가 멈췄다.검은 글씨만 남았다.엘라는 곧장 물었다.“317년 동안 기다렸다고 했죠.”그래.“에드윈보다 오래됐네요.”에드윈의 표정이 굳었다.“그건 불가능해
단테 아르젠트의 사망까지.3일.엘라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숫자가 줄어드는 건 이제 낯설지도 않았다. 처음 30일이었고, 7일이 되었고, 다시 5일과 4일을 지나 이제 3일. 문제는 숫자 자체가 아니었다. 그 아래 적힌 세 번째 사망 원인이었다.엘라 에스텔.그리고.네가 단테를 살리기 위해 사용하게 될 힘이.단테를 죽인다.엘라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단테는 그걸 알아챘는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조금 전 심장이 멈췄다가 돌아온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손에 힘이 있었다.“엘라.”“응.”“또 혼자 생각한다.”엘라는 고개를 들었다.“이번엔 좀 해도 되잖아요.”“안 된다.”“왜요.”“지금 네 표정이.”단테가 잠시 말을 골랐다.“내가 혼자 문에 들어갔을 때 네 표정이랑 비슷하다.”엘라의 입이 닫혔다.그 말은 반박하기 어려웠다.조금 전 자신은 단테가 혼자 선택하러 갔다고 화를 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원인이라는 문장 하나를 보자마자, 똑같이 머릿속에서 혼자 방법을 찾고 있었다.단테와 떨어져야 하나.예지를 쓰지 말아야 하나.기록서를 버리면 되나.혹시.자기가 사라지면.“하지 마.”엘라의 눈이 커졌다.“뭐를.”“방금 생각한 거.”“제가 뭘 생각했는데요.”“네가 없어지면 된다는 종류.”엘라가 입을 다물었다.단테의 눈이 가늘어졌다.“맞군.”“…눈썹 안 움직였는데.”“이번에는 얼굴 전체가 움직였다.”루시안이 옆에서 힘없이 웃었다.“형 진짜 잘 아네.”엘라는 한숨을 쉬었다.“좋아요.”기록서를 다시 펼쳤다.“혼자 안 할게.”단테의 손에 힘이 아주 조금 풀렸다.“말해.”엘라는 책을 모두에게 보이게 돌렸다.“제 힘이 단테를 죽인대요.”“정확히는.”테오도르가 기록된 문장을 다시 읽었다.“스승님께서 본 미래를 현실 쪽으로 끌어오는 능력이 있고, 대공 전하의 죽음을 반복해서 관측하면서 그 가능성에 힘을 더하고 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단순하긴 해
“같이 고르면 되잖아.”엘라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닫힌 돌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단테를 삼킬 때는 지하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요란했으면서, 이제는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것처럼 잠잠했다.그 침묵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엘라는 검 끝으로 문 중앙을 가리켰다.“에드윈.”“말했잖아. 단테가 열쇠다.”“그건 들었고요.”“그럼.”“열쇠가 안쪽에 들어갔잖아요.”에드윈의 표정이 멈췄다.엘라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문이라는 건 원래 양쪽에서 열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단순한 구조가 아니야.”“그럼 복잡한 구조 설명해요.”“엘라.”“빨리.”조금 전까지만 해도 흔들리던 엘라의 목소리는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단테가 사라졌고, 남은 시간은 나흘이다. 무서운 건 여전했지만 지금은 그 감정을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찾는다.열고.들어간다.그리고 데리고 나온다.그것만 생각하면 됐다.에드윈은 그런 엘라를 잠시 바라보다 결국 문 앞으로 다가갔다.“최초의 문은 미래의 문과 다르다. 미래의 문이 수많은 가능성을 관측하기 위해 만든 통로라면, 이건 그보다 먼저 만들어진 원형이야.”“어디로 가는 문인데요.”“어디가 아니야.”“그럼.”에드윈이 문에 손을 댔다.“언제도 아니다.”엘라의 눈썹이 좁아졌다.“아까 기록서에는 단테 위치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했죠.”“그래.”“그게 뭔데요.”에드윈은 잠시 말이 없었다.“선택되기 전.”엘라가 굳었다.“뭐가.”“미래가.”그는 천천히 문에서 손을 떼었다.“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곳. 아직 어떤 선택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으로 확정되지 않은 공간이다.”테오도르가 치료 마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들었다. 루시안은 아직 의식이 있었지만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단테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다.“그렇다면 대공 전하는 지금 육체째 시간축 밖으로 이탈한 겁니까?”“아마.”“아마 말고.”
엘라의 검 끝에 모인 빛이 점점 짙어졌다.루시안은 침대도, 치료대도 아닌 차가운 지하 바닥에 앉아 있었다. 가슴 가까이에는 검은 결정 같은 핵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고, 그 중앙을 가르는 은빛 균열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마력을 펼쳐 핵의 위치와 심장 사이의 거리를 계속 확인했다.“스승님.”테오도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다시 말씀드립니다. 핵은 심장 바로 옆입니다. 검이 조금만 빗나가도 위험합니다.”엘라는 시선을 핵에서 떼지 않았다.“알아.”“그리고 핵만 부순다고 끝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내부 회로가 한꺼번에 붕괴하면 마력이 역류할 수도 있습니다.”“그것도 알아.”“그런데 왜 이렇게 태연하십니까.”엘라가 그제야 테오도르를 슬쩍 봤다.“안 태연한데.”“…”“손 떨려.”테오도르의 표정이 멈췄다.엘라가 검을 쥔 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 정말이었다. 아주 미세하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근데 떤다고 안 할 순 없잖아.”이번에는 루시안이 웃었다.“공녀님도 무서워해?”“사람인데요.”“항상 별거 아닌 얼굴이라.”“그건 표정 관리.”단테가 옆에서 말했다.“잘 못한다.”엘라가 홱 돌아봤다.“뭘 또 그렇게 단정해요.”“오른쪽 눈썹.”“그건 거짓말할 때고.”“지금 왼손 엄지가 움직인다.”엘라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정말.엄지가 검 손잡이를 아주 조금씩 두드리고 있었다.“…그걸 언제 봤어요.”“지금.”“이런 걸 왜 자꾸 찾아내지.”단테의 대답은 짧았다.“보니까.”엘라가 잠시 그를 바라봤다.그리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이.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누군가 자신을 계속 보고 있다는 것.괜찮은 척하는지.겁먹었는지.말하지 않아도.놓치지 않고.⸻루시안이 가슴에 떠오른 핵을 내려다봤다.“저거 부수면.”엘라가 다시 그를 봤다.“응.”“진짜 끝나?”이번에는 엘라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루시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모르죠?”“확실히
“실험체 0.”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루시안의 손목에 새겨진 시간 좌표가 검게 번졌다.엘라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낚아챘다. 피부 아래에서 퍼지는 검은빛은 단순한 마력 오염과 달랐다. 문양을 타고 움직이며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그 속도는 지금까지 봤던 인공 회로보다 훨씬 빨랐다.“루시안, 정신 들어요?”“응. 아직은.”루시안이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목소리는 멀쩡했지만 숨이 짧아져 있었다. 손가락 끝에는 이미 감각이 둔해지는 듯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엘라는 곧바로 손목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막아 볼게요.”하지만 자신의 마력이 닿는 순간, 검은 좌표가 오히려 반응했다.파직―!엘라가 손을 떼기도 전에 마력이 튕겨 나왔다.“윽.”“공녀님.”루시안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괜찮아요?”“괜찮—”엘라는 말을 멈췄다.단테가 없는데도.자기가 알아서 고쳤다.“손 저려요. 조금.”루시안이 피식 웃었다.“교육 효과?”“이럴 때 농담해요?”“긴장되니까.”엘라는 루시안을 한번 노려봤다가 다시 손목을 살폈다. 검은빛이 번진 자리에는 희미하게 숫자가 겹쳐지고 있었다.두 개의 연도가.한 문양 안에서 서로 밀어내듯 겹쳐졌다.“시간 좌표가 충돌해요.”엘라가 빠르게 중얼거렸다.“현재로 돌아갈 좌표랑 이 시대에 강제로 고정하려는 좌표가 서로 싸우고 있어.”“그럼 어느 쪽이 이기면?”“817이 이기면 돌아갈 수 있고.”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798이 이기면?”엘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그때.멀리 창가에 서 있던 선대 대공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검은 장갑.그 아래.익숙한 화상 자국.그리고.손가락 하나가.루시안을 가리켰다.검은 좌표가.더 강하게 빛났다.루시안의 몸이 휘청였다.“...윽.”엘라가 그를 붙잡았다.“저 사람이 조종하고 있어.”미래의 엘라도 어린 단테에게서 시선을 떼고 창문 쪽을 봤다.표정이 바뀌었다.그녀는 어린 단테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현재의 엘라에게 입
“그날 네 옆에 엘라가 있었다.”에드윈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누구 하나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무너진 미래의 문이 남긴 잔해 사이로 희미한 마력만 흐르고 있었다. 단테의 품에서는 아렌이 다시 졸기 시작했고, 엘라의 손에 들린 기록서만이 아직 희미한 보랏빛 빛을 머금고 있었다.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엘라였다.“잠깐만요.”엘라가 한 손을 들었다.“정리부터.”에드윈은 여전히 단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현재 제국력 817년. 저는 스물한 살. 단테는 스물여섯.”“그래.”“그러면 단테가 일곱 살이었던 건 798년.”테오도르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제 출생은 796년.”이번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엘라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제가 두 살이었어요.”그리고 기록서를 가리켰다.“그런데 스물여덟 살의 제가 제국력 798년으로 갔다?”“기억과 영혼만.”에드윈이 낮게 말했다.“육체는 이동하지 못했을 거다.”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그럼 누구 몸으로?”그 질문에 에드윈이 입을 다물었다.엘라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알죠?”“확실하지 않아.”“아는 만큼.”“엘라.”“지금까지 ‘확실하지 않다’면서 숨긴 게 너무 많아요. 이제 그 방식 금지.”에드윈의 미간이 좁아졌다.“내가 네 명령을 왜—”“갱생 2단계.”“...뭐?”“아는 거 숨기지 않기.”단테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대답하는 게 편할 거다.”에드윈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너는 언제부터 저 여자 조수가 됐지?”“조수 아니다.”“그럼.”단테가 잠시 생각했다.엘라도 괜히 그를 바라봤다.단테는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같은 편.”엘라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아까는 ‘내 사람’.이번에는 ‘같은 편’.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었다.“들었죠?”엘라가 에드윈을 바라봤다.“우리 둘이에요.”루시안이 손을 들었다.“나도 있는데.”“셋.”테오도르가 한숨을 쉬었다.“저도 포함되는 겁니까?”“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