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서하는 아버지가 남긴 상자를 십 년 만에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열려고 했다. “……이걸 왜 이렇게 단단히 묶어 놓으신 거야?” 연화약방 뒤편의 작은 창고에는 오래된 약재 상자와 의서, 먼지가 쌓인 장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중 가장 안쪽,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선반 아래에 놓인 나무 상자는 다른 물건들과 확연히 달랐다. 상자에는 쇠로 만든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그 위로 낡은 붉은 실이 여러 번 감겨 있었다. 실은 오랜 세월이 지나 색이 바랬지만, 매듭만큼은 여전히 단단했다. 서하는 쪼그리고 앉아 매듭을 살폈다. 아버지는 생전에 약재를 정리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한다. 그러니 모르는 약에는 함부로 손대지 말고, 누가 가져왔는지 모르는 약은 더욱 조심하라고. 그런 아버지가 유독 이 상자에 대해서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어린 서하가 안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몰라도 되는 것들이란다.’ 그때는 단순히 값비싼 약재나 어려운 의서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청운별궁에서 본 붉은 흔적. 낯설면서도 익숙했던 달콤한 향. 그리고 폐세자 이현의 기억 공백. 그 모든 것이 이 상자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이번에는 좀 봐야겠어요.” 서하는 머리꽂이를 빼 들었다. 가느다란 금속 끝을 자물쇠에 넣고 몇 차례 움직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열쇠를 어디에 두셨는지라도 알려주시지.” 결국 그녀는 창고 구석에서 작은 망치를 가져왔다. 세 번쯤 내리쳤을 때 자물쇠가 부서졌다. 상자 안에는 생각보다 물건이 많지 않았다. 낡은 약서 세 권과 작은 청동 향로, 그리고 누렇게 변색된 종이 꾸러미 하나. 서하는 먼저 약서를 펼쳤다. 첫 번째 책은 평범한 본초서였다. 두 번째에는 독초의 종류와 증상, 해독에 사용되는 약재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문제는 세 번째 책이었다. 책의 앞부분이 통째로 뜯겨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지?” 서하는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중간중간 검은 먹으로 지워진 문장이 보였다. 누군가 특정한 기록만 골라 없애려 했던 것처럼. 그러다 한 장에서 손이 멈췄다. 향은 달고 끝은 쓰다. 처음에는 꿈을 흐리고, 다음에는 어제를 흐린다. 오래 머무르면 제 죄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서하의 손끝이 굳었다. 기억. 어제. 죄. 그녀는 어제 청운별궁에서 이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언제 들어왔지?’ 그는 자신이 약탕에 들어온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삼 년 전 황궁에서 벌어진 사건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설마…….” 서하는 급히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나 다음 장은 찢겨 있었다. 종이가 뜯긴 자리에는 마지막 문장 일부만 남아 있었다. 등에 붉은……. 그 아래는 읽을 수 없었다. 서하는 한동안 책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이현의 등에 있던 붉은 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 갈래. 피부 아래로 번진 듯한 흔적. “우연일 수도 있어.” 그녀는 일부러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기억을 흐리게 하는 약물은 한 종류가 아니었다. 붉은 피부 변화를 일으키는 독초 역시 존재했다. 두 가지 증상이 함께 나타났다고 해서 같은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감춰 둔 약서에 그 두 가지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서하는 책장을 다시 넘겼다. 이번에는 가장자리에 작은 글씨가 적힌 부분을 발견했다. 향로의 재를 버리지 말 것. 그 아래에는 다른 필체로 짧은 문장이 덧붙어 있었다. 물보다 연기를 먼저 살펴라.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청운별궁의 욕실에는 분명 향로가 있었다. 약탕 가장자리, 창문 아래에 놓인 작은 향로. 어제는 수증기가 너무 짙어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내가 왜 그걸 놓쳤지?” 그녀는 곧장 일어났다. 그리고 상자 안에 있던 청동 향로를 꺼냈다. 향로의 뚜껑 안쪽에는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연꽃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연꽃과는 달랐다. 꽃잎 가운데 하나가 비어 있었다. 서하는 향로를 창가로 가져가 빛에 비추었다. 그 순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제 이현의 등에 있던 붉은 선이 계속 자라난다면, 언젠가 이런 모양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웠다. 아직 증거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이 향로가 아버지의 물건인지,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확인부터 하자.” 서하는 약서를 천으로 감싸고 향로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때 약방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연화약방 주인 계시오?” 서하는 고개를 돌렸다. 이른 아침부터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밖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다급했다. “청운별궁에서 왔소!” 그 말에 서하의 표정이 굳었다. ⸻ 문을 열자 어제 보았던 늙은 내관이 서 있었다.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처럼 눈가가 퀭했다. “연 소저.”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께서 다시 쓰러지셨소.” 서하의 눈썹이 올라갔다. “다시요?” “새벽녘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계시오.” “약탕은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사용하지 않았소.” “그럼 다른 약을 드셨습니까?” 내관이 고개를 저었다. “어제 이후로는 물 외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소.” 서하는 잠시 생각했다. 어제 확인한 맥의 상태가 떠올랐다. 이미 몸에 들어온 약물이 천천히 작용하고 있다면 추가로 복용하지 않아도 증상이 악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밤사이에 방에 들어간 사람이 있습니까?” “없소.” “정말 아무도요?” 내관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뜻이오?” “확인하려는 겁니다.” 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약재함을 챙겼다. 침과 깨끗한 천, 맥을 확인할 때 사용하는 작은 시계, 열을 내리는 데 필요한 약재 몇 가지를 넣었다. 그리고 어제 가져온 약탕의 시료도 다시 확인했다. 밀봉한 병 바닥에 옅은 붉은 침전물이 가라앉아 있었다. 서하는 병을 흔들지 않고 천으로 감쌌다. “가시죠.” 내관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바로 가겠다는 것이오?” “사람이 쓰러졌다면서요.” “그렇소만…….” “그럼 더 늦으면 안 되죠.” 서하는 약방 문을 잠갔다. 내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앞장섰다. 청운별궁으로 향하는 마차가 골목 끝에 기다리고 있었다. ⸻ 별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서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어제보다 병사가 많았다. 정문에는 네 명이 서 있었고, 회랑 끝에도 무장한 사내 둘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하를 보자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서하가 묻자 내관은 짧게 대답했다. “전하의 명이오.” “전하께서 쓰러지셨다면서요?” “새벽에 잠시 정신을 차리셨을 때 내리신 명이오.” 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의 손을 살폈다. 모두 검자루에 가까이 손을 두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경계라기보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태세였다. 그녀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온돌방 문을 열자 짙은 약향이 코끝을 스쳤다. 서하의 발이 멈췄다. 달았다. 어제 욕실에서 맡았던 향과 비슷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오늘의 향에는 매캐한 기운이 더 강하게 섞여 있었다. “향을 피웠습니까?” 내관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평소 사용하시던 안정향이오.” “누가 가져왔습니까?” “오래전부터 별궁에 들어오는 물건이오.” “누가 보냈는지 여쭤본 겁니다.” 내관은 잠시 침묵했다. “황궁에서 보내는 물건이오.” 서하는 향로를 바라봤다. 작은 은제 향로였다. 뚜껑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함부로 만지면 증거가 훼손될 수도 있었다. “향을 꺼 주세요. 재는 그대로 두시고요.” 내관이 당황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그 향을 피우셔야 잠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확인해야겠습니다.” 서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살펴보기 전까지는 어떤 향도 피우지 마세요.” 그녀는 창문을 열어 공기를 바꾸게 한 뒤 이현이 누워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이현은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은 어제보다 창백했고,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 서하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맥은 여전히 불규칙했다. 그러나 어제와 다른 점이 있었다. 손끝의 냉기가 조금 줄어든 대신 가슴과 목 주변으로 열이 몰려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를 짚었다. “전하.” 반응이 없었다. “이현 전하.” 그 순간 남자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하는 몸을 조금 숙였다. “들리십니까?”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서하.” 그녀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제 이름은 기억하시네요.” “시끄럽군.”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직 괜찮으십니다.” 이현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흐릿한 눈동자가 서하를 향했다. “또 왔나.” “전하께서 쓰러지셨다기에 왔습니다.” “누가 불렀지?” “내관 어르신이요.” 이현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그 순간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관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전하, 상태가 너무 위중하셔서…….” “나가라.” “하지만…….” “나가라고 했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관은 더 말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서하는 이현을 내려다봤다. “왜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내 명을 어겼으니까.” “사람을 살리려고 한 건데요.” “그것도 내 허락이 필요한 일이다.” 서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다음에는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이현이 그녀를 바라봤다. “…….” “전하께서 부르지 않으셨으니 저는 약방으로 돌아가면 되겠네요.” 서하가 약재함을 들자 이현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아주 약한 힘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붙잡았다. “가지 마라.” 서하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아직은.” 서하는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제 욕실에서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던 힘과는 전혀 달랐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신 제 말은 들으세요.” 이현이 눈을 떴다. “명령인가?” “치료 조건입니다.” “그놈의 조건.” “계약서에도 적혀 있습니다.” 이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참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군.” “전하께서는 돈을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황족이니 그렇겠지.” “폐세자시잖습니까.”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서하는 자신의 입을 막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낮게 웃었다. “그래. 폐세자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가진 것이 별로 없군.” 서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현의 목소리에는 자조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듯했다. 그 점이 오히려 이상했다. ⸻ 서하는 이현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 뒤 등을 살펴야겠다고 말했다. 이현은 예상대로 눈썹을 찌푸렸다. “또 옷을 벗기겠다는 건가?” “어제보다 증상이 심해졌으니 확인해야죠.” “너는 참 쉽게 말하는군.” “전하께서도 이제 익숙해지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루 만에?” “어제 계약하셨잖아요.” 이현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라.” 서하는 그의 등 뒤로 자리를 옮겼다. 얇은 속옷의 끈을 풀자 넓은 등이 드러났다. 그녀는 순간 숨을 멈췄다. 어제 보았던 붉은 선이 달라져 있었다. “…….” 세 갈래로 뻗어 있던 선 가운데 하나가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이 다른 선과 맞닿으며 작은 꽃잎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서하는 손끝을 뻗었다가 멈췄다. ‘정말 변했어.’ 어제는 분명 없던 모양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흔적이 생긴 것이다. 이현이 낮게 물었다. “왜 말이 없지?” “……조금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붉은 선이요.” 이현의 어깨가 굳었다. “어떻게?” “꽃잎처럼 휘어졌습니다.” 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서하는 작은 종이를 꺼내 현재의 모양을 그렸다. 어제 기록과 나란히 놓자 변화가 더욱 선명했다. “전하.” “말해라.” “이 흔적이 처음 나타났을 때도 열이 심했습니까?” 이현은 잠시 생각했다. “그랬던 것 같군.” “기억이 끊기는 증상은요?” “…….” “그때부터였습니까?” 이현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모른다.” 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붉은 흔적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피부는 뜨거웠지만 부어 있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손끝이 가까워질수록 이현의 호흡이 조금씩 빨라진다는 것이었다. “아픕니까?” “아니.” “그럼 왜 그러십니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 그때 이현이 낮게 말했다. “네 손이 차갑군.” 서하의 손끝이 멈췄다. “……예?” “차갑다고.” “제가 원래 손이 조금 차갑습니다.” “그렇군.” 이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하는 그의 목덜미가 아주 미세하게 붉어진 것을 보았다. 열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그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기록을 마저 끝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서하가 옷깃을 정리해 주려는 순간이었다. 이현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서하의 손이 그의 가슴께에 닿았다. 숨결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현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연서하.” “……예.”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그녀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몸에 생긴 흔적.” 이현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그것을 보고 네 표정이 달라졌다.” 서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비슷한 기록을 찾았습니다.” “어떤 기록이지?” “아직 확인이 필요합니다.” “나에게도 말할 수 없나?” 서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잘못된 희망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그렇군.” 서하는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가 화를 냈다면 차라리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다는 듯 침묵했다. 서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남자는 지난 삼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기대했다가 실망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제는 기대하는 것 자체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지?” “전하의 몸에 생긴 변화는 단순한 열병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 흔적이 더 커졌습니다.” 서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니 원인을 찾을 때까지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이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언제까지?” “알아낼 때까지요.” “그게 얼마나 걸릴지 모르면서?” “예.”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르니까 찾아야죠.” 이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웃었다. “이상한 여자군.” “많이 듣습니다.” “그럴 것 같군.” 서하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이현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 오후가 되자 이현의 열은 조금 내려갔다. 서하는 그가 잠든 사이 방 안을 살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은제 향로였다. 향로의 뚜껑에는 작은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서하는 깨끗한 천을 깔고 향로를 조심스럽게 옮겼다. 뚜껑을 열자 안쪽에 검은 재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재를 작은 종이에 덜어 냈다. 그 순간 코끝에 희미한 단내가 스쳤다. 서하의 손이 멈췄다. 어제 욕실에서 맡았던 향과 닮아 있었다. 다만 오늘의 향은 조금 더 매캐했다. ‘같은 물건일까?’ 확신할 수 없었다. 서하는 재를 따로 보관하고 향로의 바닥을 살폈다. 그곳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내탕방. 서하의 눈썹이 올라갔다. 황궁의 내탕방. 황족이 사용하는 약탕과 향, 목욕에 필요한 물품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이 향로는 황궁에서 보내온 물건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누가 향을 보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서하는 향로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방 안을 둘러봤다. 그때 작은 서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침상 옆 협탁이었다. 서랍은 조금 열려 있었다. 안쪽에는 종이 몇 장이 보였다. 서하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뒤지면 안 되지.’ 그녀는 서랍을 닫으려 했다. 그 순간 안쪽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하는 몸을 숙여 종이를 주웠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종이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삼 년 전. 황제가 독을 마시고 쓰러졌던 날이었다.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날의 향은 평소와 달랐다. 서하는 숨을 삼켰다. 그 아래에도 글씨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향을 기억하지 못한다. “…….” 서하는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또 다른 문장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그날뿐인가.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보고 있지?” 서하의 몸이 굳었다. 천천히 돌아보자 이현이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전하…….” “내 서랍을 뒤졌나?” “아닙니다.” “그럼 손에 든 것은 무엇이지?” 서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종이를 내밀었다. “떨어져서 주웠습니다.” 이현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는 한동안 글씨를 바라봤다. 그러다 낮게 물었다. “읽었나?”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서하.” “……예.” “읽었느냐고 물었다.” 서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이현은 눈을 감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하는 그가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뜻밖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만 묻지.” “무엇입니까?” 이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네가 어제 맡았다는 이상한 향.” 서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예.” “그것이 사람의 기억을 빼앗을 수도 있나?” 서하는 숨을 멈췄다. 아버지의 약서에 적혀 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꿈을 흐리고, 다음에는 어제를 흐린다. 그녀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이현은 그런 서하를 가만히 바라봤다. “역시 알고 있군.”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있다는 뜻이겠지.”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삼 년 전에도 누군가 내 기억을 빼앗았을 수 있겠군.”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향로에 남은 재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리고 서하는 보았다. 검은 재 아래에 남아 있던 작은 붉은 알갱이 하나를. 그것은 불에 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마치 붉은 꽃씨처럼. 서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알갱이를 집어 들기 직전, 이현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연서하.” “……예.” “그것을 만지지 마라.”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없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그는 붉은 알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물건을 다시 본 사람처럼. “전하?” 이현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것.”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본 적이 있다.” 서하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어디서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삼 년 전의 기억 한 조각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붉은 향로. 흰 손. 깨진 찻잔. 누군가 웃고 있었다. 그는 그 얼굴을 보려 했다. 그러나 기억은 다시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이현이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 서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연서하.” “예.” “내가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느냐.”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러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무엇입니까?” 이현이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다오.” 서하는 숨을 삼켰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날 내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그것도 알아야겠다.” 서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전하…….” “하지만 누군가 내 기억을 빼앗고 죄를 뒤집어씌웠다면.” 이현의 검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자를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그 순간 서하는 깨달았다. 자신이 맡은 일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몸에 남은 이상한 흔적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삼 년 전 황궁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가 십 년 전 감추려 했던 비밀과 마주하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정말인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또 조건인가.”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서하는 그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리고 또렷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도 제게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현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전부 말씀해 주세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는 서하의 손을 내려다봤다. 작고 차가운 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손이 닿아 있는 동안에는 머릿속의 소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이현은 무심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오래 붙잡았다. 서하가 눈썹을 올렸다. “전하?” “…….” “손 놓으셔야죠.” 이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느릿하게 손을 놓았다. “치료라며.” “지금은 진찰이 끝났습니다.” “그렇군.”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서하가 몸을 돌린 뒤에도 한동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날 처음으로 이현은 생각했다. 이 여자가 내일도 왔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모레도. 자신의 병이 낫기 전까지는 계속. 아니. 병이 나은 뒤에도. 그 생각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연서하가 이 별궁에 들어온 뒤, 삼 년 동안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황궁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청운별궁의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폐세자 이현, 금일 새벽 고열 재발. 연화약방의 연서하가 재차 입궁. 약탕과 향로를 조사한 정황 확인. 보고서를 읽던 손이 멈췄다. “연화약방?”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이름이 아직 남아 있었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붉은 향이 담긴 종이 봉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십 년 전에도 그 약방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지.”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등불이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라.” 어둠 속에서 누군가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세자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지켜보지.” 남자는 조용히 웃었다. “꽃이 완전히 피기 전까지는.” 등불 아래로 붉은 봉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 봉투에는 작은 연꽃 문양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은. 이현의 등에 피어나기 시작한 붉은 꽃잎과 정확히 같은 모양이었다.연서하는 아버지가 남긴 상자를 십 년 만에 열었다.정확히 말하면 열려고 했다.“……이걸 왜 이렇게 단단히 묶어 놓으신 거야?”연화약방 뒤편의 작은 창고에는 오래된 약재 상자와 의서, 먼지가 쌓인 장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중 가장 안쪽,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선반 아래에 놓인 나무 상자는 다른 물건들과 확연히 달랐다.상자에는 쇠로 만든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그 위로 낡은 붉은 실이 여러 번 감겨 있었다. 실은 오랜 세월이 지나 색이 바랬지만, 매듭만큼은 여전히 단단했다.서하는 쪼그리고 앉아 매듭을 살폈다.아버지는 생전에 약재를 정리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한다. 그러니 모르는 약에는 함부로 손대지 말고, 누가 가져왔는지 모르는 약은 더욱 조심하라고.그런 아버지가 유독 이 상자에 대해서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확히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어린 서하가 안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몰라도 되는 것들이란다.’그때는 단순히 값비싼 약재나 어려운 의서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청운별궁에서 본 붉은 흔적.낯설면서도 익숙했던 달콤한 향.그리고 폐세자 이현의 기억 공백.그 모든 것이 이 상자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버지, 이번에는 좀 봐야겠어요.”서하는 머리꽂이를 빼 들었다. 가느다란 금속 끝을 자물쇠에 넣고 몇 차례 움직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열쇠를 어디에 두셨는지라도 알려주시지.”결국 그녀는 창고 구석에서 작은 망치를 가져왔다.세 번쯤 내리쳤을 때 자물쇠가 부서졌다.상자 안에는 생각보다 물건이 많지 않았다.낡은 약서 세 권과 작은 청동 향로, 그리고 누렇게 변색된 종이 꾸러미 하나.서하는 먼저 약서를 펼쳤다.첫 번째 책은 평범한 본초서였다. 두 번째에는 독초의 종류와 증상, 해독에 사용되는 약재들이 기록되어 있었다.문제는 세 번째 책이었다.책의 앞부
연서하는 남자의 옷을 벗길 생각이 없었다.적어도 청운별궁의 욕실 문을 열기 전까지는.“……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문틈으로 뜨거운 수증기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에는 여러 약재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당귀와 천궁, 말린 생강, 그리고 오래 끓인 황기 특유의 구수한 향까지. 평생 약재를 만지며 살아온 서하에게는 눈을 감고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냄새들이었다.그런데 그 사이에 낯선 향이 하나 섞여 있었다.달았다.꽃향이라고 하기에는 무겁고, 약향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꿀을 태우는 듯한 단내가 났지만, 숨을 조금 더 들이마시자 코끝에 서늘한 기운이 남았다.서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이상한데.’청운별궁에서 주문한 약재 가운데 저런 향을 내는 것은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향을 맡은 직후 혀끝이 아주 희미하게 저릿해졌다는 사실이었다.그녀는 곧장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약재를 다루는 사람에게 낯선 냄새란 두 가지 의미였다. 새로운 돈벌이가 될 물건이거나, 잘못 건드리면 목숨을 잃을 물건이거나.그리고 지금 이 냄새는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웠다.“전하?”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서하는 욕실 안쪽을 살피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애초에 그녀가 여기까지 들어올 이유는 없었다.오늘 해야 할 일은 약재를 배달하고 돈을 받는 것뿐이었다. 황족의 사생활을 엿볼 생각도 없었고, 청운별궁에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지 알아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도성 변두리에 자리한 연화약방으로 청운별궁의 주문서가 들어온 것은 사흘 전이었다.당귀 두 근, 황기 한 근, 백출과 천궁 각 반 근, 그리고 최상품의 인삼 세 뿌리.흔히 몸을 보하는 데 사용하는 약재들이었다. 다만 주문한 수량과 품질이 지나치게 까다로웠다. 특히 인삼은 뿌리 하나에 은자 몇 냥이 오가는 최상품만을 요구했다.서하는 주문서를 세 번 읽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직접 가져오셔야 합니다.’주문서를 전달한 늙은 내관이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