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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황비가 사라졌습니다
폐하, 황비가 사라졌습니다
Author: 모연미

제1화

Author: 모연미
"재헌 오라버니, 제가 일부러 연화의 눈을 멀게 한 것이 아닙니다. 몸을 보해 주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 약 때문에 두 눈을 잃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미안한 마음에 그랬을 뿐인데..."

방 안에서 여인의 가냘픈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송연화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익숙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송씨 가문에서 친딸처럼 자란 양녀이자, 지금은 송연화의 양언니가 된 송유란이었다.

이윽고 문틈 너머로 낮고 서늘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란아, 네 잘못이 아니다."

침착하고 다정한 음성에는 희미한 위로까지 묻어 있었다.

"연화가 박복한 탓이지."

찬 바람이 사내의 목소리를 싣고 송연화에게 불어왔다. 그녀는 넋을 잃은 채 방 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서재헌이 얼마나 냉담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송연화를 두고 그런 말을 했을지.

'팔자가 박복하다고...'

송연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재헌의 말은 그녀가 살아온 스무 해를 더없이 정확하게 설명했다.

송연화는 명문가의 귀한 딸로 태어났으나, 갓난아기 때 하인의 손에 신분이 뒤바뀌어 시골에서 평범한 여인으로 자랐다.

열네 살에 송씨 가문으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은 이미 송유란을 친딸로 여기고 있었다. 진짜 딸인 송연화가 오히려 양녀로 남아야 했다.

열여섯 살 무렵, 서재헌과 송유란은 정혼한 사이였다. 하지만 약에 취한 채 서재헌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 송연화는 언니의 정혼자를 빼앗은 천한 계집으로 낙인찍혔다. 한때 송연화를 유일하게 아껴 주던 서재헌마저 그날부터 누구보다 그녀를 미워하게 되었다.

열일곱 살 때, 서재헌과 혼인한 지 일 년 만에 그가 권력 다툼에서 패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송연화는 그를 따라 북방 변경으로 가서 가장 고되고 쓰라린 삼 년을 버텼다.

이제 스무 살이 된 그녀는 두 눈마저 잃었다. 그런데 부군이라는 사람은 그녀를 해친 이에게 괜찮다며, 송연화가 박복한 탓이라고만 했다.

송연화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금세라도 토할 것 같았다.

"연화에게 언제 사실을 밝히실 생각입니까? 결국 저희가 연화에게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때 어머니가 잘못 판단해 연화를 오라버니의 침상에 보내지만 않았어도, 오라버니와 혼인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지난 몇 년 동안 제 액받이 노릇을 해 온 셈입니다."

"다 제가 몸이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여인은 죄책감에 겨운 듯 목이 메었다.

송연화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입술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고, 눈앞의 어둠이 밀물처럼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날 내가 서재헌의 침상에 누워 있었던 건, 어머니가 약을 먹였기 때문이었단 말인가?'

온몸이 경련하듯 떨리는 가운데 서재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를 낳으면 짐이 모두 말해 주겠다."

"유란아, 걱정 말거라..."

애정 어린 그 목소리가 뺨을 후려치는 듯했다.

...

콰르릉!

천둥이 하늘을 뒤흔들고, 먹빛 하늘 아래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송연화는 앞을 더듬으며 걸었다. 빗줄기가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지만 넋이 나간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추워...'

당시 송연화는 송유란의 혼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온갖 모욕과 비방을 들어도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했으니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바보처럼 속고 있던 건 자신뿐이었다.

"마마, 비가 너무 거셉니다. 소인이 앞쪽 궁에 가서 우산을 빌려 오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곁에 있던 궁녀의 외침은 이내 사나운 비바람에 삼켜졌다.

시야는 온통 암흑이었다. 궁녀의 발소리마저 점점 멀어졌다.

송연화는 뒤늦게 혼자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곁은 텅 비어 있었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연이야? 연이야, 가지 마라. 무서워..."

그녀의 목소리마저 검은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송연화는 어둠을 몹시 두려워했다.

과거 서재헌의 정적들은 그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송연화를 납치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한 달이 넘도록 가둔 채 혹독하게 고문했지만, 송연화는 서재헌을 지키기 위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어둠에 대한 공포가 남았다.

혼자 어둠 속에 있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눈까지 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송연화는 의지할 곳 없는 아이처럼 빗속을 헤매며 연이를 찾았다.

그 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기울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단단하고 뜨거운 두 팔이 그녀의 허리를 받쳐 들었다.

눈보다 먼저 그를 알아본 것은 익숙한 기척이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서늘한 삼나무 향.

북방 변경에서 지내던 시절, 송연화와 서재헌의 삶은 몹시 고달팠다.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이가 많아 송연화는 매일 두려움 속에서 버텨야 했다. 서재헌의 곁에 누워 그의 체향을 맡을 때만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이를 가졌으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거라."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살갗에 자국이 새겨질 듯 세찬 힘이었다.

북방 변경에 있을 때도 그는 늘 이런 힘으로 송연화를 꼼짝 못 하게 누르며 몸을 섞었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은 듯.

하지만 지금은 역겨움만 치밀어 그를 밀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큰 병에서 막 회복한 데다 장대비까지 맞은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기력이 완전히 빠진 송연화는 그의 품에 축 늘어졌다.

그래도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애쓰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놓아 주십시오..."

사내는 잠시 굳었다가 나직이 탄식했다.

"어미가 될 사람이 어찌 이리 제멋대로란 말이냐?"

송연화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의식이 흐려졌다. 끝내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

송연화가 눈을 떴다.

앞을 볼 수 없으니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깨어났느냐?"

끝없는 어둠 속에서 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서재헌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고 손을 뻗어 정리해 주려 했다.

뜨거운 손끝이 닿는 순간, 송연화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움츠렸다.

허공에 멈춘 손을 바라보던 서재헌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젯밤... 들었느냐?"

평소 늘 침착하던 목소리가 유난히 가라앉아 있었다.

전날 청명전에서 나오던 그는 황급히 멀어지는 송연화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다시 그녀를 찾아 나섰다가, 홀로 빗속을 헤매는 모습을 목격했다.

송연화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폐하께서 언니와 나누신 말씀을 뜻하시는 것입니까?"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목소리.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서재헌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해졌다.

송연화가 말했다.

"폐하, 염려 마십시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박복하게 태어난 내가 달리 어쩌겠는가...'

서재헌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그가 묻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유란을 원망하지 마라.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방책이었다. 네 눈은 짐이 명의를 불러 치료하게 하고, 몸도 사람을 붙여 보살피게 하마. 아이를 낳으면 귀비로 올려 주겠다. 염려 마라. 짐이 반드시 보상하마."

"유란이는 줄곧 자책하고 있다."

마지막 한마디가 부드러운 칼날처럼 두 눈을 찔러 붉은 피를 도려내는 듯했다. 숨이 끊어질 만큼 아픈데도, 그는 송유란의 편에 서서 그녀의 무고함만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작 모든 것을 얻은 쪽은 송유란이었다.

"언니를 황후로 세우실 것입니까?"

너무도 차분한 물음이었다.

서재헌은 여윈 몸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점을 잃은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서재헌은 한밤중 꿈결에서 깨어나 문득 깨달았다. 그때의 눈빛과 질문이 어쩌면 송연화가 내민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하지만 그의 대답은...

"유란은 내가 유일하게 아내로 맞고 싶었던 사람이다. 황후 자리는 오직 유란의 것이다."

이번에는 황제의 자칭인 '짐'이 아니라 '나'라고 답했다.

그 순간 송연화가 소리 없이 웃었다.

"폐하, 염려 마십시오. 신첩은 언니와 다툴 뜻이 없습니다."

서재헌은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예상보다 훨씬 침착했다. 마땅히 마음이 놓여야 할 반응인데도 가슴속은 생각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송연화가 부드럽게 말했다.

"폐하,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서재헌은 그녀의 차갑고 소원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러나 늘 자신을 따르던 송연화였으니 그리 오래 화를 내지는 못하리라 여겼다.

그리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곧 해산할 테니 내일 네 어머니를 입궁시켜 곁에 두게 하마.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편히 태교나 하거라."

송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재헌은 오래 머물 수 없어 몇 번 더 그녀를 바라본 뒤 영휘궁을 나섰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송연화는 고개를 들고 가느다란 손으로 눈가의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을 닦아 냈다.

그리고는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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