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비마마가 꽃과 글귀를 하나씩 살폈다. 화려한 답들이 이어졌다. 매화의 절개, 작약의 풍요, 난초의 고고함. 모두 훌륭했지만, 조금 예상 가능했다.마지막으로 은하의 작은 들꽃이 올라왔다.대비마마는 꽃을 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윤설화는 이 꽃을 골랐느냐.”“예, 마마.”“궁중 화원에는 귀한 꽃이 많은데, 어찌 이런 들꽃을 골랐느냐.”규수들 사이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누군가는 은하가 꽃의 격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은하는 조용히 답했다.“귀한 꽃은 이미 많은 분들이 골라주셨으니, 저는 살아남는 꽃을 골랐사옵니다.”대비마마의 눈빛이 움직였다.“살아남는 꽃?”“예. 이 꽃은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피고, 바람이 불면 숙였다가도 다시 고개를 듭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오래 버티는 힘이 있사옵니다.”어제 문답에서 말한 ‘버티는 힘’과 이어지는 답이었다.대비마마는 글귀를 보았다.“밟혀도 다시 고개를 든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대는 참으로 버티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구나.”은하는 잠시 눈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버티지 못하면, 시작도 못 하니까요.”가벼운 대답이 아니었다.그 순간 이혁은 은하의 옆얼굴을 보았다.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웃고는 있었지만 아주 작았다. 무대용 미소도, 궁중식 미소도 아니었다. 어딘가 멀리서 혼자 걸어온 사람이 잠깐 뒤돌아보는 듯한 얼굴.이혁은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백시윤 역시 은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달랐다. 그는 감탄하고 있었다. 혹은 계산하고 있었다. 저 여자의 말, 저 여자의 시선, 저 여자가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가질 가치가 있다.백시윤은 미소를 감추었다.대비마마가 은하에게 말했다.“그 들꽃은 내 처소에 두겠다.”규수들의 얼굴이 굳었다.대비마마의 처소에 둔다. 그것은 단순히 꽃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은하의 답을 기억하겠다는 표시이자, 다른 후보들 앞에서 은하를 한 번 더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녀는 곧장 머리 장식 한쪽에 매듭을 달았다. 소박한 매듭은 화려한 비녀들 사이에서 조금 어색했지만, 이상하게 은하에게 잘 어울렸다.궁녀 둘은 거의 숨을 멈춘 듯 바라보았다.“아씨, 정말 달아주시는 것이옵니까?”“응. 내 첫 공식 굿즈잖아.”“굿… 무엇이옵니까?”“응원템.”두 궁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은하가 웃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듯했다. 그들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매화는 문을 닫고 조용히 말했다.“아씨, 방금 그 아이들 평생 아씨 편이 될지도 모르옵니다.”은하는 머리의 매듭을 손끝으로 만졌다.“그럼 좋지.”“궁에서 편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옵니다.”“알아.”은하는 창밖을 보았다.“그래도 혼자보단 낫잖아.”그 말에 매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날 오전, 간택 후보들은 궁중 화원으로 불려갔다. 이번 과제는 공식 심사는 아니었지만, 규수들이 각자 꽃을 골라 짧은 글귀를 붙이는 자리였다. 대비마마가 여인들의 취향과 문장을 보겠다는 명목이었다.은하는 화원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조금 밝아졌다. 궁 안에서 처음으로 숨이 트이는 공간이었다. 매화꽃, 작약, 난초, 국화, 이름 모를 들꽃까지. 향낭 사건 이후 향에는 신중해졌지만, 꽃은 그래도 조금 반가웠다.규수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꽃을 고르기 시작했다. 청순한 규수는 백매를, 화려한 규수는 붉은 작약을 학식 있는 규수는 난초를 골랐다. 모두 자신의 이미지를 잘 알고 있었다.은하는 꽃들을 천천히 보았다.“아씨께서는 무엇을 고르시겠사옵니까?”매화가 물었다.은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구석에 핀 작은 노란 들꽃 앞에 멈췄다. 다른 꽃들에 비해 화려하지도 않았고, 궁중 화원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범했다. 그러나 바람이 불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올라왔다.“이거.”매화가 놀랐다.“그 꽃을요?”“응.”“작약이나 매화가 더 눈에 띄지 않사옵니까?”“눈에 띄는 건 이미 충분히 하고 있어.”은하는 들
다음 날 아침, 은하는 처소 앞에 늘어난 감시 인원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문 양옆에 궁녀 둘, 회랑 끝에 별감 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기둥 옆에 누가 봐도 아닌 척 서 있는 무사 하나. 어제보다 확실히 많았다. 심지어 매화가 물을 가지러 나가려 해도 한 명이 따라붙었다.은하는 잠시 그 광경을 보다가, 매화를 불렀다.“매화야.”“예, 아씨.”“나 지금 간택 후보야, 아니면 VIP 죄수야?”매화는 매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전하께서 아씨의 안전을 염려하시어…”“안전이라는 이름의 감시구나.”“그리 말씀하시면 너무 정확하옵니다.”은하는 피식 웃었다.어제까지는 감시라는 말이 위협처럼 들렸는데, 오늘은 묘하게 우습기도 했다. 이혁이 직접 말했다. 백시윤의 선물도 말도 받지 말라고. 감시를 늘리겠다고. 대놓고 통제였다. 그런데 정작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묻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내가 온 것이 불만이냐.’그 질문도 자꾸 생각났다.은하는 머리를 흔들었다.“정신 차리자. 저 사람 폭군이다.”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전하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응.”“아씨께서는 전하가 무서우시다 하시면서도, 어째 점점 편히 말씀하시는 듯하옵니다.”은하의 손이 멈췄다.“내가?”“예.”“아니야. 안 편해. 전혀 안 편해.”“그러시옵니까.”매화의 표정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아주 약간 묻어 있었다. 은하는 억울해서 뭐라 하려다 포기했다.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혁은 무서웠다. 그러나 처음처럼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칼끝 같던 남자에게서, 가끔 삐딱하고 서툰 인간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그게 문제였다.폭군은 계속 폭군으로 보여야 안전하다.귀여워 보이면 망한다.은하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다.“절대 휘말리지 말자.”“무엇에 말이옵니까?”“전하 얼굴.”매화가 손에 든 빗을 떨어뜨릴 뻔했다.“아씨!”“농담이야.”“농담도 심장이 떨어지는 농담이옵니다.”“나도 알아. 근데 그 얼
이혁은 그날 밤, 침전에 돌아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왕의 침전은 넓고 고요했다. 불필요한 향도, 시끄러운 장식도,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없었다. 그가 원한 고요였다. 이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든 벽이었고, 아무도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게 쌓아 올린 밤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그 고요가 오늘은 성가셨다.‘자꾸 신경 쓰이잖아요.’이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 말은 가벼웠다. 윤설화, 아니 강은하라는 이름을 가진 것 같은 그 기이한 여자는 늘 그랬듯 말끝에 웃음을 묻혔다. 그런데 그 웃음 아래에 이상한 진심이 얇게 깔려 있었다. 너무 얇아서 잡으려 하면 사라질 것 같고, 무시하려 하면 오히려 손끝에 남는 진심. 그 여자도 자신을 신경 쓴다.그 생각을 하자 이혁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쓸데없는 말이다.”아무도 없는 침전 안에서 혼잣말이 낮게 떨어졌다. 그는 곧장 그 생각을 베어내려 했다. 윤설화는 미끼다. 정체가 불분명한 여자이고, 백가가 건드린 판에 갑자기 끼어든 변수다. 그 여자를 살려두는 것은 필요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백시윤의 나전함을 들었을 때 손끝에 남았던 불쾌감이 사라지지 않았다.그자가 그녀에게 비녀를 보냈다.그녀는 돌려보내려 했다.그러면서도 말했다. 정보는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맞는 말이다.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말을 들어야 한다. 독이 든 말도, 향이 묻은 말도, 칼보다 부드러운 말도. 자신도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왜 그 말이 거슬렸을까.이혁은 침상 곁에 놓인 탁자 위를 보았다.그곳에는 백시윤이 보낸 나전함이 있었다. 직접 돌려보내겠다고 가져왔으면서도, 아직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밤이 깊었기 때문이고, 내일 공식적으로 돌려보내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보다 더 솔직한 이유가 있었다.그 함을 백시윤에게 돌려주는 순간, 그가 어떤 표정으로 웃을지 떠올랐기 때문이다.분명히 웃을 것이다.저 다정하고 매끄러운 얼굴로.‘전하께서
은하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이건 정말 위험했다. 웃으면 안 된다. 지금 웃으면 이혁이 진짜로 화낼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 명백했다.이 남자는 자신이 질투라는 단어를 꺼냈다는 사실에 스스로 당황하고 있었다.은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안 묻겠습니다.”이혁은 그녀를 보았다.“대신 하나만 말씀드릴게요.”“하지 말라 했다.”“전하께서 정말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그렇게 불편해하실 필요도 없습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은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리고 저는 아직 공자님 편도 아니고, 전하 편도 아닙니다.”이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내 간택장에 올라와 있으면서 내 편이 아니라?”“살아남는 편입니다.”그 대답은 빠르고 선명했다.“지금은요.”그 말에 이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은.’아까 다과 자리에서 했던 ‘아직은’이라는 말처럼, 이번에도 그 말이 귀에 남았다. 마치 앞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이혁은 그 여지가 왜 신경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나전함을 집어 들었다.“이건 내가 돌려보내겠다.”“직접요?”“문제 있느냐.”“아니요. 받는 분이 좀 무서울 것 같아서요.”“그래야지.”은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이혁은 그 웃음을 보았다.이번에는 묻지 않았다.그 웃음이 무기인지, 습관인지, 진심인지.다만 이상하게도, 백시윤에게 보낸 웃음은 아니어서 마음에 들었다.이혁이 문가로 향하다가 멈췄다.“윤설화.”“예, 전하.”“내일부터 네 처소 앞 감시를 늘린다.”은하의 얼굴이 굳었다.“왜요?”“네가 자꾸 선물을 받고, 서찰을 받고, 사람을 끌어들이니.”“제가 끌어들인 게 아니라 알아서 오는 건데요. 전하도 포함해서.”매화는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이혁은 돌아보았다.“내가 온 것이 불만이냐.”은하는 답하려다 멈췄다.그 질문은 이상했다. 불만이냐고 묻는 목소리가, 정말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은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그날 저녁, 은하의 처소에는 뜻밖의 선물이 도착했다. 작은 나전함 하나였다. 보낸 이는 적혀 있지 않았다. 매화가 긴장한 얼굴로 함을 열자, 안에는 고운 비녀 하나와 짧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말은 칼보다 깊게 남습니다. 내일은 그 칼끝을 조심하시길.’은하는 쪽지를 보자마자 백시윤을 떠올렸다. 향은 없었다. 그러나 글씨의 선이 그와 닮아 있었다. 부드럽고 단정하며, 끝이 날카로운 글씨.매화가 낮게 물었다.“아씨, 또 그 공자님이옵니까?”“아마도.”“어찌하시렵니까?”은하는 비녀를 보았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 노골적이었다. 지금 자신과 백시윤 사이에 선물이 오갔다는 사실이 들키면, 이혁은 물론 다른 규수들에게도 공격당할 수 있었다.“돌려보내야지.”“그리하시는 것이…”매화가 말끝을 흐린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무엇을 돌려보낸다는 것이냐.”은하는 그대로 굳었다.또.또 이 타이밍.문이 열리고 이혁이 들어섰다. 이번엔 장 내관도 따라오지 못했는지, 뒤늦게 회랑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이혁의 시선은 은하의 손에 들린 나전함으로 향했다.“그것은 무엇이냐.”은하는 웃었다.“전하.”“말하라.”“요즘 너무 자주 오시는 것 아닙니까?”매화가 숨을 삼켰다.이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감시라 했다.”“네. 업무상.”“그렇다.”은하는 나전함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이혁을 보았다.“그런데 전하.”“무엇이냐.”“업무상치고는 타이밍이 너무 좋으십니다.”이혁의 눈빛이 굳었다.은하는 이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덧붙였다.“혹시 제 처소 앞에 알림 설정이라도 해두셨어요?”“알림?”“아니요. 그러니까…”은하는 한숨을 쉬고 나전함을 내밀었다.“누군가 보낸 선물입니다. 받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이혁은 함을 열어 비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쪽지에 닿았다. 글씨를 보는 순간,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백시윤.”은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역시 알아보네.’이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