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전 8시 23분.은서율은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협탁 위 달력을 바라봤다.11월 12일, 목요일.드디어 내일이었다.옆에 누워 있던 최태혁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벌써 일어났어?”“주인님, 내일이에요.”“뭐가?”서율이 고개를 돌렸다.“설마 모르시는 거예요?”태혁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우리 집에서 피자 만드는 날.”“주인님!”그가 웃음을 터뜨렸다.“알아. 네 드라마 첫 방송.”“일부러 그러셨죠?”“응.”서율은 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밀었다.“저 진짜 놀랐잖아요.”태혁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내일 밤 9시 50분. 잊을 리가 없지.”서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그럼 오늘은 일찍 주무셔야 해요.”“왜?”“내일 끝까지 같이 보셔야 하니까요.”“알겠습니다, 작가님.”오전 10시 41분.서율은 작업실에서 방송사 측이 보내온 인터뷰 영상의 최종본을 확인했다.영상에는 정이현과 나란히 앉아 작품을 소개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화면 속 서율이 말했다.“저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에 관심이 많아요. 내가 기억하는 일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누군가가 들려준 이야기를 내 기억이라고 믿는 건 아닌지요.”이어 이현이 대답했다.“그 질문을 여섯 편의 이야기로 완성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방향은 같았어요.”서율은 영상을 끝까지 확인했다.결말을 암시하는 장면도, 아직 공개되지 않은 주인공의 이름도 없었다.그녀는 확인 완료 메시지를 보냈다.잠시 후 정이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작가님, 영상 보셨어요?”“네. 잘 나왔더라고요.”“내일 오후에 공개된대요.”“이제 정말 마지막이네요.”“그러게요. 그런데 작가님, 저 한 가지 약속해주실래요?”“뭔데요?”“첫 방송 끝나고 반응이 어떻든, 저희끼리는 일단 수고했다고 말하기.”서율은 웃었다.“좋아요. 약속해요.”오후 1시 16분.태혁은 거실에서 작은 테이블을 옮기고 있었다.서율이 물
오전 8시 36분.은서율은 주방에서 사과를 깎다가 최태혁을 돌아봤다.“주인님, 내일이 목요일이죠?”“응.”“그럼 모레가 첫 방송이네요.”태혁은 접시를 건네받았다.“벌써 그렇게 됐네.”“저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제작발표회까지 했는데도?”“그건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거였잖아요. 이번에는 진짜 제 드라마가 방송되는 거니까요.”서율은 사과 한 조각을 태혁의 입에 넣어주었다.“맛있어요?”“응.”“그럼 하나 더.”태혁이 그녀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너도 먹어.”서율은 웃으며 사과를 베어 물었다.그때 식탁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정이현이었다.“작가님, 아침부터 죄송해요. 혹시 오늘 오후에 시간 괜찮으세요?”“네. 무슨 일인데요?”“방송사에서 작은 행사를 준비했대요. 제작진과 배우들이 첫 방송 전에 모여서 서로 응원하는 자리요.”“오늘이요?”“네. 갑자기 일정이 잡혔어요. 참석은 자유래요.”서율은 태혁을 바라봤다.“몇 시인데요?”“오후 4시요.”“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오전 9시 12분.통화를 마친 서율이 태혁 옆에 앉았다.“주인님, 오늘 제작진 모임이 있대요.”“다녀와.”“그런데 갑자기 잡힌 일정이라 조금 고민돼요.”“오늘 특별한 약속 없잖아.”“주인님이랑 장 보러 가기로 했는데요.”태혁이 웃었다.“피자 재료는 내가 사 오면 되지.”“같이 고르고 싶었는데.”“그럼 모임 끝나고 같이 가자.”서율은 그의 팔을 잡았다.“주인님도 같이 가시면 안 되나?”“제작진 모임이라며.”“그렇긴 하죠.”태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다녀와서 재미있었던 일 전부 이야기해줘.”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신 저녁은 같이 먹어요.”“약속.”오후 3시 51분.서율이 도착한 곳은 방송사 근처의 작은 행사장이었다.안으로 들어서자 정이현이 손을 흔들었다.“작가님, 여기예요!”“많이 기다리셨어요?”“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행사장에는 드라마 포스터와 촬영 현장 사진들이 전시
오전 9시 26분.은서율은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최태혁은 맞은편 의자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서율아, 전화.”“아, 네.”발신자는 정이현이었다.서율은 복도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작가님, 좋은 아침이에요.”“네, 이현 작가님. 무슨 일이세요?”“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첫 방송 전날에 짧은 인터뷰 영상이 공개된대요.”“저희 인터뷰요?”“네. 제작발표회 때 촬영한 영상 중 일부를 편집했대요.”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내용이 들어가나요?”“작품을 쓰게 된 계기랑 두 작가의 협업 이야기요. 결말에 관한 부분은 전부 제외됐다고 해요.”“그럼 괜찮겠네요.”“그리고 작가님.”“네?”“저희 드라마를 기다리는 분들이 꽤 많아졌나 봐요.”서율은 웃었다.“정말요?”“공식 채널에서 첫 방송 알림을 설정했다는 댓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대요.”서율은 창밖을 바라봤다.“이제 정말 방송하는구나 싶네요.”오전 11시 48분.태혁은 거실에서 작은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서율이 다가가 물었다.“주인님, 뭐 하세요?”“옛날 물건 정리.”“또 사진이에요?”“이번에는 조금 다른 거.”태혁이 상자에서 낡은 영화표 두 장을 꺼냈다.서율의 눈이 커졌다.“어머, 이거 아직도 있어요?”“응.”“언제 거예요?”“결혼하기 전에 같이 봤던 영화.”서율은 영화표를 받아 들었다.날짜는 오래되어 글씨가 희미했다.“주인님, 이거 제가 보고 싶다고 졸랐던 영화잖아요.”“맞아.”“그때 주인님은 별로 안 좋아하셨죠?”태혁은 웃었다.“영화보다 네가 옆에서 우는 게 더 신경 쓰였어.”서율은 그의 팔을 가볍게 때렸다.“저 그렇게 많이 안 울었거든요?”“휴지 한 통 가까이 썼는데?”“과장이에요!”태혁은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래도 재미있었어.”“영화가요?”“너랑 같이 본 시간이.”서율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주인님은 꼭 마지막에 그런 말씀 하시더라.”오후 2시 17
오전 9시 14분.은서율은 식탁에 앉아 제작사에서 보내온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최태혁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어제 온 온라인 시사회 안내야?”“네. 첫 방송 전에 관계자들끼리 영상을 확인하고, 방송 직후에는 시청자 질문에 답하는 일정이래요.”“참석하기로 했어?”“아직요.”서율은 화면을 넘겼다.“방송 직후에 30분 정도 진행한대요.”“그럼 밤늦게 끝나겠네.”“그렇죠.”태혁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하고 싶어?”서율은 잠시 고민했다.“시청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직접 듣고 싶기는 해요. 그런데 첫 방송은 주인님이랑 편하게 보고 싶기도 하고요.”“둘 다 하면 되잖아.”“어떻게요?”“집에서 같이 방송 보고, 끝나고 온라인으로 참여하면 되지.”서율은 눈을 깜빡였다.“아, 그러네요?”태혁이 웃었다.“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그러게요.”서율은 곧바로 참석 의사를 전달했다.오전 11시 27분.서율은 정이현과 통화하며 온라인 소통 진행 방식을 확인했다.“작가님, 저희 둘 다 집에서 접속해도 된대요.”“다행이네요. 저는 첫 방송을 남편이랑 보려고 했거든요.”이현이 웃었다.“좋으시겠어요. 저는 부모님이랑 보기로 했어요.”“부모님도 많이 기대하시겠네요.”“네. 벌써 친척들한테 방송 시간까지 알려주셨어요.”서율은 웃음을 터뜨렸다.“저희도 주변에서 물어보는 사람이 조금씩 생겼어요.”“그런데 작가님, 방송 직후 질문은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답변해야 한대요.”“알아요. 아직 5화나 남아 있으니까요.”“특히 주인공 이름이요.”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끝까지 공개하지 않는 방향으로 유지해야죠.”통화를 마친 서율은 노트에 짧게 적었다.첫 방송 이후에도 남겨둬야 할 비밀은 지킬 것.오후 1시 46분.태혁은 서율과 함께 오래된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작은 도서관에서 들을 음악을 고르기 위해서였다.서율은 진열된 음반들을 구경하다가 피아노 연주곡이 담긴 앨범을 집어 들었다.“주인님, 이거 들어볼까요
오전 9시 18분.은서율은 작업실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노트북 화면에는 드라마 《없는 역에서 내리는 여자》 1화의 마지막 장면이 멈춰 있었다.최태혁이 문을 두드렸다.“서율아, 아침 먹자.”“주인님, 이것만 한 번 더 듣고요.”태혁은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어제 그 효과음?”“네. 오늘 오전에 음향팀이랑 확인하기로 했거든요.”서율은 영상을 재생했다.낡은 승강장.희미하게 깜빡이는 형광등.0번 보관함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그리고 화면이 검게 바뀌는 순간.딸깍.서율은 이어폰을 벗었다.“확실히 잠기는 소리예요.”태혁이 물었다.“그 소리가 그렇게 중요해?”“네. 누군가 안에 있는 걸 꺼내려고 하는지, 아니면 숨기려고 하는지 완전히 달라지거든요.”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끝까지 확인해야겠네.”서율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대신 밥부터 먹을게요.”오전 10시 37분.정이현과 음향감독이 참석한 온라인 회의가 시작됐다.음향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작가님, 보내주신 의견 확인했습니다. 잠금장치 소리를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들면서 방향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안쪽에서 걸쇠가 풀리는 느낌이었어요.”“네. 기존 소리를 다시 가져와서 비교해보겠습니다.”잠시 후 두 가지 음향이 차례로 재생됐다.첫 번째는 날카롭고 짧은 금속음이었다.두 번째는 작은 걸쇠가 밀려나며 풀리는 소리였다.서율이 말했다.“두 번째가 좋아요.”이현도 동의했다.“저도요. 누군가 문을 열 수 있게 됐다는 느낌이 확실하네요.”음향감독은 수정본을 적용하겠다고 답했다.회의가 끝나자 서율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휴…….”태혁이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작은 소리 하나를 바로잡았을 뿐인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오후 1시 26분.태혁은 서율과 함께 동네 꽃집에 들렀다.서율은 작은 화분들을 구경하다가 연둣빛 잎이 촘촘한 식물 앞에 멈췄다.“주인님, 이거 도서관에 놓으면 예쁘겠어요.”
오전 9시 42분.은서율은 식탁에 앉아 토스트를 먹다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최태혁이 맞은편에서 물었다.“오늘 무슨 일정 있어?”“10시에 시청자 이벤트 시작해요.”“0번 보관함?”“네. 사람들이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상상해서 올리는 거요.”태혁은 시계를 확인했다.“18분 남았네.”“저도 하나 써볼까요?”“정답을 아는 사람이 참가하면 반칙 아니야?”서율은 웃음을 터뜨렸다.“정답 말고 엉뚱한 걸로요.”“예를 들면?”“주인님이 저한테 처음 써주신 연애편지?”태혁이 눈썹을 올렸다.“그게 왜 보관함에 있어?”“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으니까요.”“무슨 비밀?”서율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최태혁이라는 남자가 은서율을 얼마나 좋아했는지요.”태혁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떼어주었다.“그건 지금도 비밀 아닌데.”오전 10시 17분.공식 채널에 이벤트 게시물이 올라왔다.《당신이 0번 보관함을 연다면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서율은 댓글을 천천히 읽었다.‘10년 뒤의 내가 보낸 편지.’‘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주민등록증.’‘주인공이 잊어버린 생일 케이크 사진.’‘아무것도 없는 보관함. 대신 문 안쪽에 거울이 붙어 있음.’서율은 마지막 댓글에서 손을 멈췄다.“주인님, 이거 봐요.”태혁이 옆으로 다가왔다.“거울?”“네. 보관함을 열었는데 자기 얼굴이 보인다는 상상이래요.”“꽤 섬뜩한데.”“그렇죠? 제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데 재미있어요.”서율은 댓글을 하나 더 읽었다.‘잃어버린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 끝까지 기다렸다는 증거.’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사람마다 보고 싶은 게 다르네요.”태혁이 대답했다.“같은 문을 열어도 기대하는 게 다른 거지.”서율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주인님, 저 갑자기 밖에 나가고 싶어요.”“어디?”“진짜 오래된 보관함이 있는 곳이요.”오후 1시 28분.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오래된 기차역을 개조한 문화공간이었다.한쪽 벽에는 예전에 사용하던 동전식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