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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기사와 공주(1)

作者: nomady
last update 公開日: 2026-05-20 08:00:26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차가운 진실의 문을 열 준비가 된 알브릭의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봉인된 편지를 시녀에게 전달하며 창밖의 차가운 정원을 응시했다.

​연회가 끝난 뒤의 공작저는 기묘한 평온 속으로 돌아갔다. 표면만 놓고 보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 보였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가 제공되고, 하인들은 늘 그렇듯 조용히 복도를 오갔으며, 정원에서는 잘 가꿔진 화단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햇빛을 받고 있었다.

아르덴은 마치 그날 테라스에서의 대화가 없었던 일인 양 행동했다. 그는 여전히 차가웠고, 식사 자리에서도 공적인 용건 외에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섞지 않았다.

라리엘 역시 그에게 다가가려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자신을 방치해 주는 것이, 저택 곳곳을 탐색해야 하는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알브릭 공작저의 안주인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하녀장 마르타가 가져오는 방대한 가계부와 고용인 명단, 저택 보수 목록, 그리고 끊이지 않는 사교계의 초대장들… 라리엘은 서류 위에 고개를 파묻은 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이 모든 게 나를 묶어두려는 그의 계략은 아닐까.’

​라리엘은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간의 고군분투 끝에 드디어 오후의 짧은 여유가 생긴 라리엘은 공작저 서고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남긴 ‘금기된 역사’에 대한 단서가 있다면, 수만 권의 장서가 보관된 이곳이 가장 유력했다. 그녀는 시녀들을 물린 뒤, 망설임없이 공작저 본관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육중한 자작나무 문을 밀고 들어가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을 듯 솟아오른 서가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수만 권의 장서가 뿜어내는 오래된 종이와 가죽, 그리고 마른 잉크 향이 서늘한 공기와 섞여 코끝을 간지럽혔다.

​천장 가까이에 난 높은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 입자들이 마치 금가루처럼 빛났다. ​라리엘은 홀린 듯 서가 사이를 걷다가, 창가 근처에서 서류를 훑고 있는 아르덴을 발견했다.

“……”

​창가 근처에 서서 서류를 훑던 아르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받아 그의 금발이 차갑게 일렁였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서류를 덮으며 낮게 비아냥거렸다.

​“공작부인이 책 향기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아니면, 며칠간 잠잠하다 했더니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가?”

​그는 천천히 다가와 라리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명백한 경멸과 냉소가 서려 있었다.

​“내가 다 말해줬잖아. 네 아버지는 그냥 호기심을 채워줄 도구였다고. 네가 찾고 있는건 부질없는 망상이야.”

​라리엘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턱을 치켜올렸다. 아르덴의 말은 여전히 가시 돋쳐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그 독설이 자신을 쫓아내기 위한 장벽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당당하다면 내가 뭘 찾든 신경 쓸 필요 없잖아. 네 말대로라면 여기엔 ‘망상’의 흔적밖에 없을 테니까.”

​“내 저택의 물건을 건드리는 건 신경 쓰이는 일이지.”

​“나 또한 이 저택의 안주인이야.”

라리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

“공작님께서 허락하신 그 ‘자비’로운 결혼 덕분에 말이야. 내가 이 서고의 먼지를 털든, 책을 읽든 네가 간섭할 명분은 없어.”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히 당겨졌다. 아르덴의 입술이 미세하게 비틀렸다.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거칠게 몸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 단, 아무것도 찾지 못해 절망하는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지만 마.”

​문이 닫히는 소리가 서고에 울렸다. 홀로 남겨진 라리엘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감정이 얼마나 소모되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라리엘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서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역사 서적부터 고대어 사전, 지리학 문헌까지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플로렌스’나 ‘금기된 역사’와 관련된 단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르덴이 미리 치워버린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이곳에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리가 저려올 때쯤, 라리엘은 구석진 낮은 서가 앞에 주저앉았다. 그때 문득 눈에 익은 낡은 가죽 표지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대륙의 신화와 전설 전집]

​먼지가 뽀얗게 쌓인 그 책들은, 어릴 적 아르덴과 그녀가 함께 읽었던 동화책들이었다. 이 유치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에 몰두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라리엘은 무심결에 전집 중 한 권을 꺼냈다. 책장을 넘기자 바스러질 듯한 종이 사이에서 오래된 추억이 스며 나왔다.

무서운 괴물에게 쫓기는 공주와 그녀를 지키는 기사의 이야기. 당시 아르덴은 기사의 용맹함보다는 그가 짊어진 비극적인 운명에 더 몰입했고, 라리엘은 공주가 기사를 구원하는 결말이 좋다며 우기곤 했었다.

​‘그때는 정말…… 우리 사이에 이런 벽이 생길 줄 몰랐는데.’

​긴장이 풀린 탓일까. 며칠간의 과로와 조금 전 아르덴과의 말다툼으로 쌓인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라리엘은 서가에 등을 기댄 채 책을 무릎 위에 펼쳐 두었다. 책장 너머로 스며드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그녀의 눈꺼풀을 무겁게 눌렀다.

​잠시만 눈을 붙이려던 결심은 옅은 숨소리와 함께 깊은 잠으로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집무실에서 일을 마친 아르덴이 다시 서고의 문을 열었다. 라리엘이 이미 처소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한 그는, 서가에서 작은 인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서가 구석에 웅크리고 잠든 라리엘은 비현실적일 만큼 평온해 보였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하얀 이마 위로 흩어져 있었고, 길게 뻗은 속눈썹은 그녀의 뺨 위로 옅은 부채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잠결에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규칙적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 독기를 품고 자신을 쏘아보던 그 날 선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었다.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비치는 그녀의 살결은 마치 정교하게 빚은 밀랍 인형 같았고, 무릎 위에 펼쳐진 낡은 동화책 위로 얹힌 가녀린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아르덴은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발치에 멈춰 섰다. 잠든 라리엘의 무릎 위에는 낡은 동화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가 읽던 책 페이지에 머물렀다.

[기사는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고, 공주를 어둠으로부터 구하기위해 가장 아름다운 얼음 성벽 안에 가두었습니다.]

어릴 적 두 사람이 함께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대목이었다. ​아르덴의 차가운 눈매가 일순간 흐트러졌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멈추었다.

​‘너는 왜 하필 이 책을 보고 있는 거야.’

​아르덴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직 이 순간만이, 그가 연극을 멈추고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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