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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얼음 가면(2)

작가: nomady
last update 게시일: 2026-05-19 08:00:38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엘에게 그의 질문은 또 다른 빈정거림으로 들릴 뿐이었다.

“향기가 독했던 게 아니라, 그 안에 섞인 사람들의 악취가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야. 물론 넌 그 악취를 즐기는 것 같았지만.”

라리엘은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르덴은 그녀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 오는 것을 느꼈다.

“말조심해. 이 결혼이 네게 안락한 도피처가 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진심을 보였다가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사과하고 싶어질 것 같았기에, 그는 더욱 잔인한 말을 골라 뱉었다.

하지만 라리엘은 이제 그의 냉대보다 더 시급한 확인이 필요했다.

“아르덴. 하나만 물을게.”

그녀는 품 안에 숨긴 아버지의 편지, 그 서늘한 문구들을 떠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금기된 역사’라는 게 대체 뭐야? 아버지가 너에게 보냈다는 그 사본들에 뭐가 적혀 있었던 거야?”

순간, 테라스의 공기가 일순간 멈춘 듯 정적에 휩싸였다.

아르덴의 눈동자가 아주 짧은 찰나 매섭게 빛나는 듯 했으나, 그는 놀랍도록 빠르게 평정을 유지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려 라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서려 있던 미세한 온기조차 지워진,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단어를 주워들었는지 모르겠군.”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섬뜩했다. 그는 라리엘의 어깨 너머 허공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공작저의 낡은 책장이라도 뒤진 모양이지. 하지만 주의해, 라리엘. 호기심은 가끔 무지보다 더 위험한 법이니까.”

“아니. 넌 알고 있어. 아버지는 널 믿고 그 문헌들을…”

“죽은 자의 흔적에 매달리는 건 몰락한 가문의 전형적인 습성이지.”

아르덴은 라리엘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와 라리엘과 시선을 맞췄다.

​“네 아버지는 그저 내 호기심을 채워줄 도구였을 뿐이야. 그가 죽은 건 나도 안타깝지만, 네가 그 뒤를 밟고 싶지 않다면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아.”

그는 라리엘의 뺨 근처로 손을 뻗는 듯하다가, 그녀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뒤로 넘겨주었다.

“그게 내가 너를 이 저택에 들인 유일한 자비니까.”

​도구. 인형.

라리엘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녀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맺혔지만, 라리엘은 그것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아르덴을 밀쳐내고 차갑게 돌아섰다.

​“……너라는 사람은 정말, 끝까지 못됐구나.”

​라리엘은 드레스 자락을 거칠게 휘날리며 연회장 안으로 돌아갔다.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홀로 남겨진 아르덴은 난간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라리엘의 뒷모습이 사라진 유리창을 보며, 그가 참아왔던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오늘처럼 차갑고 시린 달이 떠 있던 10여 년 전의 어느 밤이 떠올랐다.

*****

​아르덴은 자신의 15번째 생일 연회가 한창인 공작저에서 도망치듯 테라스로 나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날이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음악 속에서 그의 생일을 축하했지만, 소년 아르덴에게 그 소음은 어머니의 부재를 확인시켜주는 장송곡 같았다.

​검은 상복을 채 벗지도 못한 채, 소년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소리 없이 울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나약함이었다.

그때, 작은 손 하나가 그의 소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아르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라리엘이 서 있었다. 그 시절의 라리엘은 소년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단단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달빛 아래 선 그녀의 갈색 머리칼이 금빛으로 일렁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소년의 슬픔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여기서 울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어?”

​라리엘은 대답 없는 소년의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난간을 짚었다. 그녀는 소년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울고 있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대신,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께서 생전에 그러셨어. 슬픔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게 아니라, 누군가 옆에 있어 줄 때 비로소 견딜 수 있는 무게가 되는 거라고.”

​라리엘은 품 안에서 정성스럽게 손수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그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그녀가 직접 말린 꽃잎을 넣은 작은 향주머니였다.

​“어머니 향기가 그리울 때마다 맡아. 내가 부인께서 아끼시던 온실의 꽃들을 조금 모은거야.”

​그것은 소년이 그토록 갈구하던 어머니의 잔향이었다.

아르덴은 향주머니를 쥔 채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어깨를 숙였다. 라리엘은 그런 소년의 등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따뜻하게 다독였다.

​“울어도 괜찮아. 지금 이 테라스에는 우리 둘뿐이고, 내일이면 너는 다시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 돌아가야 하니까. 오늘 밤만큼은 그냥 내 옆에서 쉬어.”

​라리엘은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아무 말 없이 밤하늘을 함께 봐주었다.

아르덴은 난간을 짚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 손에는 향주머니 대신 차가운 권력과, 사랑하는 여자를 상처 입혀야만 지킬 수 있는 비극적인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뒤돌아선 라리엘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영원히 지워내야 했다. 그 때 그녀가 건네준 다정함을 배신하는 것만이 그녀를 이 ‘금기된 역사’라는 어둠으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길이었기에.

​달빛은 여전히 무심하게 테라스를 비추고 있었다. 아르덴은 그 시린 빛 속에서 홀로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금 얼음 가면을 고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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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13화. 기사와 공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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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12화. 어머니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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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10화. 얼음 가면(1)

    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 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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