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엘에게 그의 질문은 또 다른 빈정거림으로 들릴 뿐이었다. “향기가 독했던 게 아니라, 그 안에 섞인 사람들의 악취가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야. 물론 넌 그 악취를 즐기는 것 같았지만.” 라리엘은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르덴은 그녀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 오는 것을 느꼈다. “말조심해. 이 결혼이 네게 안락한 도피처가 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진심을 보였다가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사과하고 싶어질 것 같았기에, 그는 더욱 잔인한 말을 골라 뱉었다. 하지만 라리엘은 이제 그의 냉대보다 더 시급한 확인이 필요했다. “아르덴. 하나만 물을게.” 그녀는 품 안에 숨긴 아버지의 편지, 그 서늘한 문구들을 떠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금기된 역사’라는 게 대체 뭐야? 아버지가 너에게 보냈다는 그 사본들에 뭐가 적혀 있었던 거야?” 순간, 테라스의 공기가 일순간 멈춘 듯 정적에 휩싸였다. 아르덴의 눈동자가 아주 짧은 찰나 매섭게 빛나는 듯 했으나, 그는 놀랍도록 빠르게 평정을 유지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려 라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서려 있던 미세한 온기조차 지워진,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단어를 주워들었는지 모르겠군.”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섬뜩했다. 그는 라리엘의 어깨 너머 허공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공작저의 낡은 책장이라도 뒤진 모양이지. 하지만 주의해, 라리엘. 호기심은 가끔 무지보다 더 위험한 법이니까.” “아니. 넌 알고 있어. 아버지는 널 믿고 그 문헌들을…” “죽은 자의 흔적에 매달리는 건 몰락한 가문의 전형적인 습성이지.” 아르덴은 라리엘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와 라리엘과 시선을 맞췄다. “네 아버지는 그저 내 호기심을 채워줄 도구였을 뿐이야. 그가 죽은 건 나도 안타깝지만, 네가 그 뒤를 밟고 싶지 않다면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아.” 그는 라리엘의 뺨 근처로 손을 뻗는 듯하다가, 그녀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뒤로 넘겨주었다. “그게 내가 너를 이 저택에 들인 유일한 자비니까.” 도구. 인형. 라리엘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녀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맺혔지만, 라리엘은 그것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아르덴을 밀쳐내고 차갑게 돌아섰다. “……너라는 사람은 정말, 끝까지 못됐구나.” 라리엘은 드레스 자락을 거칠게 휘날리며 연회장 안으로 돌아갔다.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홀로 남겨진 아르덴은 난간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라리엘의 뒷모습이 사라진 유리창을 보며, 그가 참아왔던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오늘처럼 차갑고 시린 달이 떠 있던 10여 년 전의 어느 밤이 떠올랐다. ***** 아르덴은 자신의 15번째 생일 연회가 한창인 공작저에서 도망치듯 테라스로 나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날이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음악 속에서 그의 생일을 축하했지만, 소년 아르덴에게 그 소음은 어머니의 부재를 확인시켜주는 장송곡 같았다. 검은 상복을 채 벗지도 못한 채, 소년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소리 없이 울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나약함이었다. 그때, 작은 손 하나가 그의 소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아르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라리엘이 서 있었다. 그 시절의 라리엘은 소년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단단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달빛 아래 선 그녀의 갈색 머리칼이 금빛으로 일렁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소년의 슬픔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여기서 울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어?” 라리엘은 대답 없는 소년의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난간을 짚었다. 그녀는 소년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울고 있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대신,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께서 생전에 그러셨어. 슬픔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게 아니라, 누군가 옆에 있어 줄 때 비로소 견딜 수 있는 무게가 되는 거라고.” 라리엘은 품 안에서 정성스럽게 손수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그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그녀가 직접 말린 꽃잎을 넣은 작은 향주머니였다. “어머니 향기가 그리울 때마다 맡아. 내가 부인께서 아끼시던 온실의 꽃들을 조금 모은거야.” 그것은 소년이 그토록 갈구하던 어머니의 잔향이었다. 아르덴은 향주머니를 쥔 채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어깨를 숙였다. 라리엘은 그런 소년의 등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따뜻하게 다독였다. “울어도 괜찮아. 지금 이 테라스에는 우리 둘뿐이고, 내일이면 너는 다시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 돌아가야 하니까. 오늘 밤만큼은 그냥 내 옆에서 쉬어.” 라리엘은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아무 말 없이 밤하늘을 함께 봐주었다. 아르덴은 난간을 짚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 손에는 향주머니 대신 차가운 권력과, 사랑하는 여자를 상처 입혀야만 지킬 수 있는 비극적인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뒤돌아선 라리엘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영원히 지워내야 했다. 그 때 그녀가 건네준 다정함을 배신하는 것만이 그녀를 이 ‘금기된 역사’라는 어둠으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길이었기에. 달빛은 여전히 무심하게 테라스를 비추고 있었다. 아르덴은 그 시린 빛 속에서 홀로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금 얼음 가면을 고쳐 썼다.아르덴은 입을 열기 전에 잠깐동안 고민했다. 클로디아가 떠벌리던 수많은 말들… 그것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모두 잘라버리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응. 조만간 그쪽 사람을 직접 대면할 수 있을 것 같아.”소문이라는 불편한 변수를 감수하는 대신,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었다.이것도 수확으로 친다면,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아르덴은 비릿한 미소로 창밖을 보았다. 곧 라리엘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건 위험하지 않을까?”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르덴은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라리엘을 보았다.“그 계약서를 들고 법정으로 가기 전에 그들을 한번은 만나야 해. 이럴 땐 지체하지 않는게 가장 덜 위험한 방법이고.”계약서, 법정… 라리엘은 로베르 후작 부인의 말을 가만히 떠올렸다.위험한 건 그것만이 아닐 텐데. 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곳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아르덴은 일부러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짐짓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그건 그렇고, 황궁을 처음 방문한 소감은? 아까 보니까 입을 못 다물던데.”아르덴의 얼굴을 마주한 라리엘은 그에게 들킬새라, 얼른 눈빛에서 근심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괜히 턱을 살짝 치켜들며 새침하게 말했다.“흠, 처음엔 그랬지만, 조금 지나니까 별로 대단한 것도 없던걸?”“오오, 그래?”아르덴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샹들리에도, 화려한 연회장도, 다 알브릭 저택에 있는거잖아. 규모가 커서 조금 놀란것 뿐이야.”“으응, 그렇군.”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사교계의 낯익은 얼굴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로베르 후작 부인 아니신가요? 무슨 일이시죠?”후작 부인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른 사람들의 귀를 피하듯 라리엘의 팔꿈치를 살짝 감싸 쥐고 커다란 화분 옆으로 그녀를 이끌었다.그녀가 들고 있던 깃털 부채를 반쯤 넓게 펼쳐 자신의 입가를 교묘하게 가리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부인, 요즘 공공연하게 떠도는 그 끔찍한 소문이 정말로 사실인가요? 어휴, 제 귀로 듣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에요.”“무슨… 이야기를 들으신건가요?”“그게 그러니까, 돌아가신 플로렌스 백작님 말이에요. 사고로 돌아가신게 아니라 그 댁을 모시던 집사에게 살해당하셨다는게 사실이에요?순간, 라리엘은 머리를 거대한 둔기로 얻어맞은 듯 사고가 완전히 정지되며 멍해졌다.차가운 얼음물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 후작 부인은 충격으로 창백하게 질려가는 라리엘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실례가 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이런 흉흉한 소문은 당사자에게 확실히 확인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밀려드는 당혹감 너머로 라리엘의 머릿속에 제이드가 나루터 앞에서 했던 말이 번뜩이며 스쳤다.‘그들은 뼛속까지 잔인한 자들입니다. 일이 잘못되어 수사망이 좁혀올 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자를 편리한 카드 한 장이 필요했던 거지요.’그들, ‘녹스’가 퍼뜨린 이야기가 분명했다. 살며시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리엘은 다급히 표정을 정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후
아르덴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스름한 테라스로 들어섰고, 뒤따라온 클로디아가 유리문을 닫았다.문이 닫히자 화려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잦아들었다.차가운 겨울밤의 공기가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클로디아는 숄을 한 번 여미고는 고개를 숙였다.“은밀히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연회장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게 되어 송구합니다, 공작님.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공작님께서 난처해지실 테니, 서둘러 말씀드릴게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이 대화가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닌,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은밀한’ 대화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뻔히 보이는 그녀의 속내가 자못 불쾌했지만, 아르덴은 기꺼이 그 연극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괜찮아. 지켜보는 눈은 없으니 편하게 말해봐.”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클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섰다.바닥에 스치는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저에게 접근한 그 수상한 남자가 부인에 대해 귀띔해주더군요. 플로렌스의 집사가 생전에 돌아가신 백작님과 심각한 마찰이 있었다고 해요. 정확한 내막은 베일에 싸여 있지만, 아마도 지저분한 금전 문제였던 모양이에요.”그녀는 ‘지저분한’이라는 단어에 미묘하게 힘을 주었다.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상대의 혐오를 자극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녀의 눈동자가 은근히 빛났다.“탐욕에 눈이 먼 집사는 결국 백작님을 살해하고 도망쳤고, 저에게 접근한 그 남자는 집사에게 받아낼 돈이 있어 그를 추적하던 중이었대요.”말을 이어가며 클로디아는 손끝으로 자신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이야기가 점점 자극적으로 흐르자,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고조되었다.
1월 1일, 황궁에서 치러지는 신년회는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인만큼 수많은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황궁 정문 앞은 문장을 새긴 귀족들의 마차 행렬로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반대편 구석에는 각 가문에서 황실에 바치는 진상품을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성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그 거대한 소란 속에 섞인 알브릭 공작가의 마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아르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라리엘에게로 흘러갔다.평소 내릴 때가 많았던 그녀의 갈색 고수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려 섬세한 은핀으로 고정되었고, 그 덕에 고스란히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가느다란 쇄골 아래로 늘어진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호흡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남청색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선과 가녀린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아르덴은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는 기분이 들었다.이 기묘한 갈증이 무엇인지,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시선을 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그의 시선을 느낀 라리엘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왜 자꾸 그렇게 봐? 어디 이상해? 화장이 번졌나?”그녀가 손등으로 제 뺨을 살짝 짚으며 묻자, 아르덴은 생각이라도 읽힐까 싶어 짤막하게 대답했다.“아니.”라리엘은 그의 반응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정리하며 중얼거렸다.“제일 예쁜 걸로 골라 입은 건데, 별로야?”라리엘이 속상한 듯 눈썹을 까딱이자 아르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문제는 ‘별로’인 게 아니라, ‘지나치게 예쁘다&rsqu
아르덴은 라리엘의 손에서 문서를 넘겨받아 등불 아래 바짝 가져다 댔다.만약 레몬즙이나 열에 반응하는 시약을 썼다면, 과거 플로렌스 백작이 발견했을 당시에 이미 갈색으로 변색된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하지만 그런 자국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이번에는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빛에 종이를 비춰보며 투과되는 문양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거친 가죽의 결 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서 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본이 중요하다고 했지, 원본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한건 아니잖아요. 그 문서 자체가 의미있는거 아닐까요?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느긋하게 꼬은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아르덴이 그녀를 한번 슬쩍 보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양피지가 무슨 마법의 양피지라도 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어.”“칫…”트리샤는 결국 입을 삐죽이며 뒤로 물러났다. 라리엘이 다시 문서를 받아들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양피지 위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희미한 얼룩들만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아버지가 여기서 뭔가를 발견했다면, 그리고 그걸 아르덴에게 보여주러 오는 길이었다면… 무언가 남아있지 않았을까? 여기에…”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양피지 한복판에 자리한 거뭇한 얼룩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그녀가 살며시 얼룩을 쓸어내리자, 놀랍게도 검은 자국이 미세하게 번져나갔다. 라리엘의 눈이 커졌다.“아르덴, 이것 좀 봐봐.”그녀는 번져나간 자국을 가리켰다.“이 얼룩말이야. 난 세월에 묻은 때인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냐.”그녀가 다시 한번 양피지를 손끝으로 문지르자, 마치 옅은 기
“난 이런 화려한 곳에서 지켜야 할 식사 예절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 어쩌죠?”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아주 미세한 위축감이 섞여 있었다. 라리엘이 편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들어요. 트리샤 씨가 맛있게 먹어주는 게 우리에겐 가장 큰 예의에요.”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그 말 속에 있는 저의를 파악하느라 머리를 좀 더 굴렸겠지만, 라리엘의 말이었기에 트리샤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곧바로 뻣뻣하게 쥐고 있던 포크를 제 손에 익숙한 방식으로 편하게 고쳐 쥐고는 식사를 시작했다.“그럼… 염치 불구하고 잘 먹을게요.”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와 신선한 채소를 입에 넣자, 며칠간 길 위에서 겪었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아르덴과 라리엘은 그녀가 식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소한 담소를 나누었다.이윽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달콤한 디저트 와인이 잔에 채워졌다. 아르덴이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낸 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제이드는 어떻게 되었지?”식탁 위의 촛불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아 서늘한 빛을 냈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어 목을 축인 트리샤가 대답했다.“계획대로 그놈들에게 잘 인도해 줬어요. 며칠에 걸쳐서 은밀하게 거처를 옮기더니, 최종적으로는 아이델의 상인 길드 본부의 지하에 머물게 하더라고요. 보안이 삼엄해서 쥐새끼 한 마리 들락거리기 힘든 곳이죠.”“상인 길드라…”아르덴이 낮게 중얼거리며 와인 잔의 테두리를 가만히 매만졌다. 곁에서 숨을 죽이고 듣고 있던 라리엘이 안쓰러운 기색을 감추지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식당에 남겨진 것은 차갑게 식은 커피 향기와 라리엘의 떨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정돈했다. 이제부터는 슬픔이나 분노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알브릭 공작저라는 거대한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우선 이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했다. 식당 문을 열고 나가자, 어제 연회장에서 보았던 중년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연미복, 차가운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예리한 눈매. 알브릭 가문의 가신이자 대대로 공
“저기 연못에 무지개가 떴어!” 아르덴은 숨을 고르며 달리다가도 그 말을 듣자 속도를 조금 더 냈다. “천천히 가, 라리엘.” 그는 애써 침착한 척 말했지만, 심장은 그녀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무지개는 도망가지 않아.” “도망가면 어떡해! 비가 그친 지 얼마 안 됐단 말이야!” 라리엘은 결국 연못가에 먼저 도착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연못 위에는 햇빛이 굴절되어 일곱 빛깔의 띠가 흔들리고 있었다. 물결이 살짝 일 때마다 색은 부서지듯 흩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라리엘은 숨을 죽인 채 그것을 바라
라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 역시 그가 설계한 잔인한 연극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경계를 늦추게 만든 뒤,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한 전조. 그녀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몸을 잠식한 한기가 너무도 지독해 결국 그 온기에 기댄 채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나왔다. 그는 상체를 드러낸 채 머리칼을 거칠게 털어내며 방을 가로질렀다. 거울을 통해 그의 모습이 라리엘의 시야에 들어왔다. 군더더기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상체,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선 위로 맺힌 물방울이
결혼식은 기괴할 만큼 조용하게 끝났다. 사람들의 박수는 의무적이었고, 던져진 꽃가루는 장례식의 헌화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연회장으로 옮겨온 뒤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화려한 음악과 산해진미가 차려졌지만, 공기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아르덴은 라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연회장의 귀족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다 돌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표정 관리 좀 하지.”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누가 보면 장례식인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