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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어머니의 편지

작가: nomady
last update 게시일: 2026-05-19 08:01:03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시선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장면만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테라스에서 마주했던 아르덴의 얼굴, 그 차갑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

​‘금기된 역사.’

​그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 아르덴의 눈동자에서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던 그 기묘한 정적을 라리엘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고, 오히려 비릿한 모욕으로 화제를 돌려 그녀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 침착함이 지나치게 완벽했다는 것이 라리엘에게는 역설적인 확신을 주었다.

​‘그는 알고 있어.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목숨을 잃었는지, 그리고 그 문헌이 어떤 의미인지.’

그러나 확신과는 별개로, 현실은 막막했다. 공작저는 거대했고, 구조는 복잡했으며, 모든 길은 아르덴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서재와 집무실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게다가 하녀장 마르타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그의 눈과 귀처럼 움직였다.

라리엘은 이곳에서 ‘주인’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깊숙이 고립된 존재였다. 화려한 보석과 비단에 둘러싸인 채,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그때, 라리엘은 문득 테라스에서 아르덴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차갑고 비정한 경고를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뺨을 스치듯 머리칼을 정리해주던 그의 손가락은 이상하리만큼 신중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던 그 찰나의 촉감.

그 눈빛에 아주 잠깐 머물렀던 이름 모를 깊은 감정.

​‘설마…다정함이었을까?’

​그 기대는 스스로도 우스웠다. 잠시 그런 기대를 품었던 라리엘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바로 직후에 그가 내뱉었던 잔인한 말들이 귀를 때렸다.

​“네 아버지는 그저 내 호기심을 채워줄 도구였을 뿐이야…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아.”

​그 말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라리엘의 가슴을 꿰뚫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아파올 만큼 선명한 고통이었다.

아버지를 욕보이고, 가문의 몰락을 방관하며, 자신을 채무의 대가로 끌고 온 남자. 그런 남자가 내비친 찰나의 몸짓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배신이었다.

​“악마야. 너는…….”

​라리엘은 입술을 깨물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다정한 칼날로 목을 겨누는 듯한 그의 모순된 태도. 부드러운 손길과 잔인한 말, 보호하듯 다가왔다가 가차 없이 밀어내는 시선.

그것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각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하나의 인물 안에서 완벽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증오해야 마땅한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슬픔과 기묘한 보호 본능.

그것이 연기였는지, 아니면 진심이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질문은 답을 얻지 못한 채 맴돌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머릿속은 어지러워졌고, 결국 라리엘은 몸을 웅크린 채 이불을 끌어당겼다. 차가운 침대 시트가 뺨에 닿자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흘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울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라리엘은 눈가를 적신 채, 끊어진 숨을 고르다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틈으로 스며든 창백한 햇살에 라리엘은 눈을 떴다. 연회의 여파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무거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녀가 은쟁반 위에 편지 한 통을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부인, 플로렌스 백작령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가족이라는 말에 라리엘은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플로렌스. 그 이름은 이 거대한 공작저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장소였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 받아 들자, 익숙하고 포근한 종이 냄새가 났다. 봉투를 여는 순간 정성스럽게 적힌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반듯한 필체에는 군데군데 힘이 들어간 흔적이 역력했다.

​편지에는 수도의 추위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언니를 그리워하는 동생들의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었다. 라리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편지의 마지막줄,

‘너는 우리 가문의 자부심이란다.’

그 문장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는 말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조롱과 냉대 속에서 난도질당했던 영혼을, 그 한 문장이 조용히 감싸 안았다.

​라리엘은 편지를 가슴팍에 꼭 끌어안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감촉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한 방울, 툭 하고 떨어졌다. 잉크 위로 번지며 글자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등으로 닦으려다 멈췄다.

이 흔적마저 사라지면, 정말로 혼자가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라리엘은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사각거리는 깃펜의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채웠다. 처음 몇 줄은 담담했다.

괜찮다는 말, 잘 지내고 있다는 말. 그러나 문장이 길어질수록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적고 있는 말과 마음이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아.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어요. 이곳 공작저의 생활은 걱정하시는 것보다 훨씬 안락하답니다.

공작님께서도 저를 배려해 주시고, 안주인으로서 부족함 없이 대우해 주고 계시니 부디 마음 놓으세요. 저는 이곳에서 아주 잘 적응해가고 있어요. 조만간 기쁜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도록 힘낼게요.]

​마침표를 찍고 펜을 내려놓은 라리엘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안락함’, ‘배려’, ‘적응’. 종이 위의 단어들은 달콤했지만, 현실의 자신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어제 연회장에서 겪었던 그 비참한 조롱들, 남편이라는 남자가 뱉어낸 차가운 독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이 넓고 서늘한 방.

편지 속의 라리엘은 사랑받는 신부였으나, 현실의 라리엘은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힌 포로였다.

​순간, 억눌러왔던 서글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라리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서워."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늘게 떨렸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 자신을 지켜보는 차가운 눈들, 그리고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르덴까지.

이 거대한 저택에서 홀로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는 막막함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눈물이 다시 떨어져 편지지의 여백을 얼룩지게 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죽여 어깨를 들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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