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시선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장면만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테라스에서 마주했던 아르덴의 얼굴, 그 차갑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 ‘금기된 역사.’ 그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 아르덴의 눈동자에서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던 그 기묘한 정적을 라리엘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고, 오히려 비릿한 모욕으로 화제를 돌려 그녀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 침착함이 지나치게 완벽했다는 것이 라리엘에게는 역설적인 확신을 주었다. ‘그는 알고 있어.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목숨을 잃었는지, 그리고 그 문헌이 어떤 의미인지.’ 그러나 확신과는 별개로, 현실은 막막했다. 공작저는 거대했고, 구조는 복잡했으며, 모든 길은 아르덴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서재와 집무실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게다가 하녀장 마르타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그의 눈과 귀처럼 움직였다. 라리엘은 이곳에서 ‘주인’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깊숙이 고립된 존재였다. 화려한 보석과 비단에 둘러싸인 채,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그때, 라리엘은 문득 테라스에서 아르덴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차갑고 비정한 경고를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뺨을 스치듯 머리칼을 정리해주던 그의 손가락은 이상하리만큼 신중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던 그 찰나의 촉감. 그 눈빛에 아주 잠깐 머물렀던 이름 모를 깊은 감정. ‘설마…다정함이었을까?’ 그 기대는 스스로도 우스웠다. 잠시 그런 기대를 품었던 라리엘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바로 직후에 그가 내뱉었던 잔인한 말들이 귀를 때렸다. “네 아버지는 그저 내 호기심을 채워줄 도구였을 뿐이야…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아.” 그 말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라리엘의 가슴을 꿰뚫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아파올 만큼 선명한 고통이었다. 아버지를 욕보이고, 가문의 몰락을 방관하며, 자신을 채무의 대가로 끌고 온 남자. 그런 남자가 내비친 찰나의 몸짓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배신이었다. “악마야. 너는…….” 라리엘은 입술을 깨물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다정한 칼날로 목을 겨누는 듯한 그의 모순된 태도. 부드러운 손길과 잔인한 말, 보호하듯 다가왔다가 가차 없이 밀어내는 시선. 그것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각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하나의 인물 안에서 완벽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증오해야 마땅한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슬픔과 기묘한 보호 본능. 그것이 연기였는지, 아니면 진심이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질문은 답을 얻지 못한 채 맴돌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머릿속은 어지러워졌고, 결국 라리엘은 몸을 웅크린 채 이불을 끌어당겼다. 차가운 침대 시트가 뺨에 닿자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흘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울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라리엘은 눈가를 적신 채, 끊어진 숨을 고르다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틈으로 스며든 창백한 햇살에 라리엘은 눈을 떴다. 연회의 여파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무거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녀가 은쟁반 위에 편지 한 통을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부인, 플로렌스 백작령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가족이라는 말에 라리엘은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플로렌스. 그 이름은 이 거대한 공작저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장소였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 받아 들자, 익숙하고 포근한 종이 냄새가 났다. 봉투를 여는 순간 정성스럽게 적힌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반듯한 필체에는 군데군데 힘이 들어간 흔적이 역력했다. 편지에는 수도의 추위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언니를 그리워하는 동생들의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었다. 라리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편지의 마지막줄, ‘너는 우리 가문의 자부심이란다.’ 그 문장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는 말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조롱과 냉대 속에서 난도질당했던 영혼을, 그 한 문장이 조용히 감싸 안았다. 라리엘은 편지를 가슴팍에 꼭 끌어안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감촉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한 방울, 툭 하고 떨어졌다. 잉크 위로 번지며 글자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등으로 닦으려다 멈췄다. 이 흔적마저 사라지면, 정말로 혼자가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라리엘은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사각거리는 깃펜의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채웠다. 처음 몇 줄은 담담했다. 괜찮다는 말, 잘 지내고 있다는 말. 그러나 문장이 길어질수록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적고 있는 말과 마음이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아.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어요. 이곳 공작저의 생활은 걱정하시는 것보다 훨씬 안락하답니다. 공작님께서도 저를 배려해 주시고, 안주인으로서 부족함 없이 대우해 주고 계시니 부디 마음 놓으세요. 저는 이곳에서 아주 잘 적응해가고 있어요. 조만간 기쁜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도록 힘낼게요.] 마침표를 찍고 펜을 내려놓은 라리엘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안락함’, ‘배려’, ‘적응’. 종이 위의 단어들은 달콤했지만, 현실의 자신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어제 연회장에서 겪었던 그 비참한 조롱들, 남편이라는 남자가 뱉어낸 차가운 독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이 넓고 서늘한 방. 편지 속의 라리엘은 사랑받는 신부였으나, 현실의 라리엘은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힌 포로였다. 순간, 억눌러왔던 서글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라리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서워."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늘게 떨렸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 자신을 지켜보는 차가운 눈들, 그리고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르덴까지. 이 거대한 저택에서 홀로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는 막막함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눈물이 다시 떨어져 편지지의 여백을 얼룩지게 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죽여 어깨를 들먹였다.1월 1일, 황궁에서 치러지는 신년회는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인만큼 수많은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황궁 정문 앞은 문장을 새긴 귀족들의 마차 행렬로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반대편 구석에는 각 가문에서 황실에 바치는 진상품을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성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그 거대한 소란 속에 섞인 알브릭 공작가의 마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아르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라리엘에게로 흘러갔다.평소 내릴 때가 많았던 그녀의 갈색 고수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려 섬세한 은핀으로 고정되었고, 그 덕에 고스란히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가느다란 쇄골 아래로 늘어진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호흡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남청색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선과 가녀린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아르덴은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는 기분이 들었다.이 기묘한 갈증이 무엇인지,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시선을 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그의 시선을 느낀 라리엘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왜 자꾸 그렇게 봐? 어디 이상해? 화장이 번졌나?”그녀가 손등으로 제 뺨을 살짝 짚으며 묻자, 아르덴은 생각이라도 읽힐까 싶어 짤막하게 대답했다.“아니.”라리엘은 그의 반응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정리하며 중얼거렸다.“제일 예쁜 걸로 골라 입은 건데, 별로야?”라리엘이 속상한 듯 눈썹을 까딱이자 아르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문제는 ‘별로’인 게 아니라, ‘지나치게 예쁘다&rsqu
아르덴은 라리엘의 손에서 문서를 넘겨받아 등불 아래 바짝 가져다 댔다.만약 레몬즙이나 열에 반응하는 시약을 썼다면, 과거 플로렌스 백작이 발견했을 당시에 이미 갈색으로 변색된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하지만 그런 자국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이번에는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빛에 종이를 비춰보며 투과되는 문양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거친 가죽의 결 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서 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본이 중요하다고 했지, 원본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한건 아니잖아요. 그 문서 자체가 의미있는거 아닐까요?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느긋하게 꼬은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아르덴이 그녀를 한번 슬쩍 보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양피지가 무슨 마법의 양피지라도 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어.”“칫…”트리샤는 결국 입을 삐죽이며 뒤로 물러났다. 라리엘이 다시 문서를 받아들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양피지 위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희미한 얼룩들만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아버지가 여기서 뭔가를 발견했다면, 그리고 그걸 아르덴에게 보여주러 오는 길이었다면… 무언가 남아있지 않았을까? 여기에…”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양피지 한복판에 자리한 거뭇한 얼룩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그녀가 살며시 얼룩을 쓸어내리자, 놀랍게도 검은 자국이 미세하게 번져나갔다. 라리엘의 눈이 커졌다.“아르덴, 이것 좀 봐봐.”그녀는 번져나간 자국을 가리켰다.“이 얼룩말이야. 난 세월에 묻은 때인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냐.”그녀가 다시 한번 양피지를 손끝으로 문지르자, 마치 옅은 기
“난 이런 화려한 곳에서 지켜야 할 식사 예절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 어쩌죠?”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아주 미세한 위축감이 섞여 있었다. 라리엘이 편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들어요. 트리샤 씨가 맛있게 먹어주는 게 우리에겐 가장 큰 예의에요.”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그 말 속에 있는 저의를 파악하느라 머리를 좀 더 굴렸겠지만, 라리엘의 말이었기에 트리샤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곧바로 뻣뻣하게 쥐고 있던 포크를 제 손에 익숙한 방식으로 편하게 고쳐 쥐고는 식사를 시작했다.“그럼… 염치 불구하고 잘 먹을게요.”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와 신선한 채소를 입에 넣자, 며칠간 길 위에서 겪었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아르덴과 라리엘은 그녀가 식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소한 담소를 나누었다.이윽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달콤한 디저트 와인이 잔에 채워졌다. 아르덴이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낸 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제이드는 어떻게 되었지?”식탁 위의 촛불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아 서늘한 빛을 냈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어 목을 축인 트리샤가 대답했다.“계획대로 그놈들에게 잘 인도해 줬어요. 며칠에 걸쳐서 은밀하게 거처를 옮기더니, 최종적으로는 아이델의 상인 길드 본부의 지하에 머물게 하더라고요. 보안이 삼엄해서 쥐새끼 한 마리 들락거리기 힘든 곳이죠.”“상인 길드라…”아르덴이 낮게 중얼거리며 와인 잔의 테두리를 가만히 매만졌다. 곁에서 숨을 죽이고 듣고 있던 라리엘이 안쓰러운 기색을 감추지
오라비라는 말에 클로디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불만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지지 않겠다는 듯 날 선 목소리로 받아쳤다.“나한테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그저 시키는 대로 앵무새처럼 물어보라고만 하니까 진전이 없는 거잖아요. 도대체 그 부인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뭐죠? 그 보잘것없는 플로렌스 가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말했잖아.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라고.”남자의 단호한 거절에 클로디아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이대로 끌려다니다가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다.오라비도, 가문도, 그리고—자신이 원하는 것조차. 그녀는 조급함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승부수를 던졌다.“상황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흐르는 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사실 이건 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알브릭 공작님의 의중이기도 해요.”남자의 눈빛에 미심쩍은 빛이 스쳤다. 클로디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공작님께서는 공작 부인이 혹여 알브릭 가문의 명성에 흠집이라도 내지 않을까 고심이 깊으시더라고요. 만약 그분이 부인의 흠결에 대해 뭔가 실마리라도 잡는다면, 공작 부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거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이 하는 일도 수월해지지 않겠어요?”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바깥 멀리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부채를 매만지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클로디아의 손끝에 초조함이 서렸다.녹스의 입장에서 알브릭 공작이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가 부인에게서 등을 돌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할 일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제안에 내심 솔깃해하면서도, 겉으로는
응접실은 클로디아가 남기고 간 진한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달콤하면서도 지나치게 짙은 향이 공기 속에 눌어붙은 듯 맴돌았다. 아르덴은 닫힌 문을 향해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마치 복잡한 체스판의 다음 수를 계산하듯 날카롭게 가라앉아 있었다.“아르덴.”부드러운 목소리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정적을 깼다.아르덴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선 라리엘이 보였다. 그녀가 아르덴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레이먼 백작님이 안좋은 소식이라도 전하신 거야?”“아니, 그건 아니고…”아르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라리엘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조금 전까지 거짓과 계략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러왔다.차갑게 정리되어 있던 사고가 그 온기에 부딪혀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아르덴은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지금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만 더 미룰 것인가.그는 한 번 시선을 떨구었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결심하듯 입을 열었다.“라리엘. 여기 좀 앉아봐. 할 이야기가 있어.”“응? 정말 무슨 일이 있는거야?”라리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르덴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어 소파에 앉힌 뒤, 자신도 맞은편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았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레이먼 백작 영애 말이야. 지금까지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어?”갑작스러운 질문에 라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깜빡였다.“음
그녀는 고개를 들고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공작의 눈에 자신이 오직 가문을 걱정하는 가냘픈 여인으로만 비치길 간절히 바라는 몸짓이었다.“새로운 정보라기보다는…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공작 부인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공작님께서 혹여 무언가 알아내신 것이 있을까 하여 걱정스러운 마음에 들렀을 뿐입니다.”아르덴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따분하다는 듯 대꾸했다.“글쎄… 자네 말을 듣고 사람들을 시켜 공작 부인과 플로렌스 가문을 샅샅이 훑었지만, 달리 흠잡을 만한 건 없던데.”아르덴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히려 수상한 자들이 부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자네 말이 진짜인지 의구심이 드는군.”그의 말에 클로디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그럴 리가요! 제가 드린 말씀은 모두 추호의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아주 수상하고 질 나빠 보이는 사내였어요. 그자가 부인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의 소름 끼치는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아르덴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그래? 그렇다면 그 자를 내가 직접 만나게 해줄 수는 없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자가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직접 물어보고 싶은데.”클로디아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였다.그녀는 한참을 주저하며 손에 쥔 손수건을 짓이겼다. 아르덴은 그녀의 손에 시선을 두고 조용히 기다렸다. 결국 클로디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송구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제가 공작님께 이 일을 알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제 목숨뿐만
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 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를
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하아…… 하…….”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 그녀는
의회에서 돌아온 아르덴의 마차가 저택 정문에 들어선 것은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망토를 하인에게 넘겼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저택으로 들어온 그의 모습에는 금실이 수놓인 어깨 장식과 단정한 칼집, 그리고 하루 종일 그를 조여 왔을 격식과 피로가 한데 엉겨 있었다. 예복도 채 벗지 않은 채 그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라리엘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기보다는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그가 올 시간만을 헤아리며 경직되어 있었다. 촛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