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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기사와 공주(2)

Author: nomad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0 08:01:59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준 뒤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

​하늘은 잉크를 쏟은 듯 검었고, 대지는 차가운 눈보라로 가득했다.

꿈을 꾸는 사람이 종종 그러하듯, 라리엘은 문득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지금 드레스 하나만을 걸친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을 달리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잠들기전 읽고 있던 동화책의 내용인 듯 했다.

등 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발이 얼어붙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순간, 눈앞에 거대한 얼음 성벽이 솟아올랐다.

​성벽 위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눈부신 은색 갑옷을 입고, 차가운 금발을 휘날리는 기사. 그의 얼굴은 아르덴이었다.

​기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벽 아래로 내려와 라리엘을 안아 올렸다.

그의 품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동시에 등 뒤의 어둠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단절시켜 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기사는 떨고 있는 라리엘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널 이곳에 가둬야해.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기사의 손이 닿는 곳마다 라리엘의 몸은 서서히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히기 시작했다.

가두는 것인지 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속박 속에서, 라리엘은 기사의 눈에 맺힌 지독한 슬픔을 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

​라리엘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서고의 딱딱한 책장이 아니라, 부드러운 실크 커튼이 드리워진 자신의 침실 천장이었다.

창밖은 이미 이른 아침의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라리엘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어제 오후, 서고에서 낡은 동화책을 읽다가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일까.

​‘설마 아르덴이?’

​직감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이 저택에서 자신을 안아 이곳까지 옮길 수 있는 사람, 그런 오만한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꿈속에서 자신을 얼음 성에 가두던 기사의 품. 차갑고 단단했던 팔. 그 서늘한 감각이 아직도 살갗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꿈이 아니라 기억의 연장선인 것처럼.

​“말도 안 돼...”

설렘과 혼란이 뒤섞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가슴 한켠이 이유 없이 들떠 오르는 동시에, 어제까지 자신에게 쏟아냈던 독설들이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라리엘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침 식사 시간, 식당의 공기는 평소보다 더 무거웠다. 긴 식탁의 양 끝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이 건조하게 울렸다.

아르덴은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라리엘은 접시 위의 음식을 깨작거리며 그를 살폈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아르덴이었다. 그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툭 던졌다.

​“앞으로 아무 데서나 잠들지 마. 공작저의 서고는 노숙자를 위해 개방된 곳이 아니니까.”

​평소 같았으면 날 선 비아냥에 화가 났겠지만, 오늘따라 라리엘의 마음은 조금 달랐다. 자신을 옮기느라 수고했을 그의 팔을 생각하니 왠지 모를 여유가 생겼다.

​“서고가 워낙 조용하고 아늑해서 나도 모르게 실례했네. 너도 참, 깨워줬으면 내가 알아서 침실로 갔을텐데.”

​라리엘이 은근슬쩍 떠보는 말에 아르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는 신문을 탁 소리 나게 접으며 라리엘을 쏘아보았다.

​“누가 너를 옮겨줬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시종들이 수고한 거야. 나는 그저 길을 비켜줬을 뿐이지.”

​“아, 그래? 시종들 힘이 장사인가 보네. 내가 꽤 무거웠을 텐데, 방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안 깨우고 옮기다니.”

​라리엘이 살짝 미소 지으며 대꾸하자 아르덴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당황함을 가리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차갑게 말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해. 오늘 오후에는 외출 채비를 해둬. 헤르만 후작 부인의 만찬 초대가 있으니까.”

​“헤르만 후작 부인이라면…… 사교계의 중심이신 그 분?”

​“그래. 네가 알브릭의 안주인이 된 후 처음으로 대외적인 자리에 나가는 거야. 알브릭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품위를 갖춰.”

​아르덴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리엘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비아냥거리긴 해도, 오늘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날카로운 가시가 조금 줄어든 것 같다고.

​외출 준비는 점심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하녀장 마르타의 진두지휘 아래, 라리엘은 마치 하나의 정교한 예술품처럼 빚어졌다.

​오늘 선택한 드레스는 은은한 광택이 도는 짙은 청록색 벨벳이었다.

목선이 깊게 파이지 않았음에도 우아한 곡선을 살려주는 재단은 라리엘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소매와 치맛단에는 미세한 은사와 진주가 수놓아져 있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숲속의 요정이 걸어 나오는 듯한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시녀들은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꼬아 올려 은색 핀으로 고정했고, 귀에는 물방울 모양의 에메랄드 귀걸이를 달아주었다.

​단장을 마친 라리엘이 저택 홀로 내려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아르덴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그는 잠시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며 장갑을 고쳐 꼈다.

​“너무 공들였군. 늦겠어.”

​칭찬 한 마디 없는 비정한 태도였지만, 라리엘은 이제 그의 그런 반응이 익숙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저택 앞에 대기 중인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말의 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좁은 마차 안은 두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저녁 노을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던 하늘은 점차 어두운 자주빛으로 가라앉았고, 먼 구름 가장자리는 마치 불에 그을린 천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오늘 밤은 또 어떤 가시 돋친 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리엘의 머릿속에 지난 연회에서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부채 뒤에 숨어 자신을 비웃던 입술들, 동정을 가장한 날카로운 조롱들.

헤르만 후작 부인의 만찬은 연회보다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결코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이곳은 사교계의 진짜 '권력자'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한 번의 실수나 위축된 태도는 곧 ‘알브릭의 공작부인’이라는 자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라리엘은 무의식적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떨지 않으려 애썼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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