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준 뒤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 하늘은 잉크를 쏟은 듯 검었고, 대지는 차가운 눈보라로 가득했다. 꿈을 꾸는 사람이 종종 그러하듯, 라리엘은 문득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지금 드레스 하나만을 걸친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을 달리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잠들기전 읽고 있던 동화책의 내용인 듯 했다. 등 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발이 얼어붙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순간, 눈앞에 거대한 얼음 성벽이 솟아올랐다. 성벽 위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눈부신 은색 갑옷을 입고, 차가운 금발을 휘날리는 기사. 그의 얼굴은 아르덴이었다. 기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벽 아래로 내려와 라리엘을 안아 올렸다. 그의 품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동시에 등 뒤의 어둠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단절시켜 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기사는 떨고 있는 라리엘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널 이곳에 가둬야해.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기사의 손이 닿는 곳마다 라리엘의 몸은 서서히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히기 시작했다. 가두는 것인지 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속박 속에서, 라리엘은 기사의 눈에 맺힌 지독한 슬픔을 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 라리엘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서고의 딱딱한 책장이 아니라, 부드러운 실크 커튼이 드리워진 자신의 침실 천장이었다. 창밖은 이미 이른 아침의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라리엘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어제 오후, 서고에서 낡은 동화책을 읽다가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일까. ‘설마 아르덴이?’ 직감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이 저택에서 자신을 안아 이곳까지 옮길 수 있는 사람, 그런 오만한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꿈속에서 자신을 얼음 성에 가두던 기사의 품. 차갑고 단단했던 팔. 그 서늘한 감각이 아직도 살갗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꿈이 아니라 기억의 연장선인 것처럼. “말도 안 돼...” 설렘과 혼란이 뒤섞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가슴 한켠이 이유 없이 들떠 오르는 동시에, 어제까지 자신에게 쏟아냈던 독설들이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라리엘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침 식사 시간, 식당의 공기는 평소보다 더 무거웠다. 긴 식탁의 양 끝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이 건조하게 울렸다. 아르덴은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라리엘은 접시 위의 음식을 깨작거리며 그를 살폈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아르덴이었다. 그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툭 던졌다. “앞으로 아무 데서나 잠들지 마. 공작저의 서고는 노숙자를 위해 개방된 곳이 아니니까.” 평소 같았으면 날 선 비아냥에 화가 났겠지만, 오늘따라 라리엘의 마음은 조금 달랐다. 자신을 옮기느라 수고했을 그의 팔을 생각하니 왠지 모를 여유가 생겼다. “서고가 워낙 조용하고 아늑해서 나도 모르게 실례했네. 너도 참, 깨워줬으면 내가 알아서 침실로 갔을텐데.” 라리엘이 은근슬쩍 떠보는 말에 아르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는 신문을 탁 소리 나게 접으며 라리엘을 쏘아보았다. “누가 너를 옮겨줬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시종들이 수고한 거야. 나는 그저 길을 비켜줬을 뿐이지.” “아, 그래? 시종들 힘이 장사인가 보네. 내가 꽤 무거웠을 텐데, 방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안 깨우고 옮기다니.” 라리엘이 살짝 미소 지으며 대꾸하자 아르덴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당황함을 가리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차갑게 말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해. 오늘 오후에는 외출 채비를 해둬. 헤르만 후작 부인의 만찬 초대가 있으니까.” “헤르만 후작 부인이라면…… 사교계의 중심이신 그 분?” “그래. 네가 알브릭의 안주인이 된 후 처음으로 대외적인 자리에 나가는 거야. 알브릭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품위를 갖춰.” 아르덴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리엘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비아냥거리긴 해도, 오늘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날카로운 가시가 조금 줄어든 것 같다고. 외출 준비는 점심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하녀장 마르타의 진두지휘 아래, 라리엘은 마치 하나의 정교한 예술품처럼 빚어졌다. 오늘 선택한 드레스는 은은한 광택이 도는 짙은 청록색 벨벳이었다. 목선이 깊게 파이지 않았음에도 우아한 곡선을 살려주는 재단은 라리엘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소매와 치맛단에는 미세한 은사와 진주가 수놓아져 있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숲속의 요정이 걸어 나오는 듯한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시녀들은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꼬아 올려 은색 핀으로 고정했고, 귀에는 물방울 모양의 에메랄드 귀걸이를 달아주었다. 단장을 마친 라리엘이 저택 홀로 내려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아르덴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그는 잠시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며 장갑을 고쳐 꼈다. “너무 공들였군. 늦겠어.” 칭찬 한 마디 없는 비정한 태도였지만, 라리엘은 이제 그의 그런 반응이 익숙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저택 앞에 대기 중인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말의 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좁은 마차 안은 두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저녁 노을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던 하늘은 점차 어두운 자주빛으로 가라앉았고, 먼 구름 가장자리는 마치 불에 그을린 천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오늘 밤은 또 어떤 가시 돋친 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리엘의 머릿속에 지난 연회에서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부채 뒤에 숨어 자신을 비웃던 입술들, 동정을 가장한 날카로운 조롱들. 헤르만 후작 부인의 만찬은 연회보다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결코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이곳은 사교계의 진짜 '권력자'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한 번의 실수나 위축된 태도는 곧 ‘알브릭의 공작부인’이라는 자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라리엘은 무의식적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떨지 않으려 애썼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클로디아는 다시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갔다.라리엘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만족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공작님의 의장직과 부인의 친정 문제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정치판이라는 게 그런걸 세세하게 고려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뭐, 부인께서는 고상한 꽃처럼 온실 속에만 계시니 이런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시겠지만요.”“클로디아 양. 도대체 무슨…”흔들리는 라리엘의 눈동자를 보며 클로디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그녀는 이제 자신의 본심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상체를 라리엘 쪽으로 바짝 기울인 클로디아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한 가지만 더 알려드리자면, 이 모든 위태로운 상황을 공작님께서도 이미 낱낱이 알고 계시다는 거예요. 가엾은 부인을 차마 쉽게 내치지 못하는 공작님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부인으로서, 남편의 앞길을 막고 있다면 조금은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결단을 내릴 필요도 있는 것 아닐까요?”라리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클로디아를 쳐다보기만 했다.신년회에서 아르덴을 향해 미소짓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겹쳐졌다. 그때, 클로디아가 라리엘의 손을 덥석 맞잡았다.“그러니까 부인, 제발 부탁이에요. 자꾸 공작님의 그늘 뒤에 비겁하게 숨기만 하지 말고 당당히 밖으로 나와요. 플로렌스 가문이야 그렇다 쳐도, 아무런 잘못 없는 알브릭 가문까지 물귀신처럼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꼴사납고 이기적인 짓인지 잘 알고 계시죠?”라리엘은 클로디아에게 붙잡힌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역겨울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이었다.그녀는 시선을 들어 클로디아의 탐욕스러운 눈동
“다만요?”베르너가 무거운 음성으로 덧붙였다.“재판을 함께 받으시게 되면 사교계의 평판이나 의회에서의 영향력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공작님처럼 높은 자리에 계신 분에게는 더욱더요.”라리엘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바닥에서 차가운 한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들이킨 숨을 아주 천천히 내뱉으며 물었다.“역시 그렇군요. 영향력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일까요?”“최악의 경우에는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황실에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님을 압박하려 들겠지요.”베르너의 목소리는 형집행관의 선고처럼 무겁게 라리엘의 어깨를 눌렀다. 라리엘은 시선을 아래로 툭 떨어뜨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녀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자 베르너는 그제야 괜한 말을 했다 싶어 급히 말을 보탰다.“하지만 공작님께서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부인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공작님께 그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베르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원망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현재로서는… 두 분이 갈라서지 않는 이상, 방법은 없을 겁니다. 알브릭의 이름을 지키려면 플로렌스를 잘라내야 하니까요.”갈라선다. 그 말이 라리엘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려왔다.아르덴을 위해서라면 그렇게라도 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그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베르너가 자백서 초안을 완성할 때까지도 라리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알브릭 공작저의 정문 앞. 클로디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거대한 석조 저택을 올려
제국 수도의 화려한 번화가 아래, 오물이 흐르는 하수도관 옆에는 버려진 지하 창고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감도는 이곳은 조직원들 사이에서 ‘피난처’라고 불리는, ‘녹스’의 심장부였다.미로 같은 복도 끝, 두꺼운 철문 너머 중앙 방에서 낮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쥐새끼들같이 교묘하게도 움직이는군. 그래, 탈레스 그 녀석이 전해달라는 이야기의 요지가 정확히 뭐야?”방 안은 촛불 몇 개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장의 책상 너머에서 연락책이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를 이어갔다.“요약하자면, 알브릭 공작의 성미상 플로렌스 백작의 죽음을 캐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이미 수사망이 좁혀오고 있으니 본부 차원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흠…”수장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수천 명의 암살자와 정보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의 수장이라기엔, 그의 외형은 의외로 평범하다 못해 왜소하기까지 했다.창백한 안색과 단정한 옷차림은 오히려 하급 관청에서 서류를 만지는 문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플로렌스 수도원까지 직접 발걸음을 했다면 이미 꽤 많은 것을 알아낸 상태겠군. 탈레스 녀석은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지?”그의 말투는 지독히 사무적이었다.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무미건조함에도 앞에 선 연락책은 마치 자신이 질책을 받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마, 말씀하신 대로 워낙 쥐새끼처럼 움직이는지라… 공작이 수도원에 나타나기 전까지 탈레스는 그가 이미 포기한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l
평소의 우아함은 간데없이 삐걱거리는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아르덴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그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라리엘의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뭘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 있어? 긴장한 거야?”“기, 긴장이라니? 하, 하나도 긴장 안했는데?”라리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아르덴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우, 우리는 부부잖아. 부부라면 당연히 한 침대에서… 그러니까…그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말을 이어갈수록 얼굴이 점점 붉어진 라리엘은 결국 말을 맺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버렸다.낮게 웃음을 터뜨린 아르덴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입을 맞춘 뒤 나직하게 속삭였다.“사실 난 조금 긴장돼.”“... 정말?”그의 뜻밖의 고백에, 굳어 있던 라리엘의 어깨가 조금 풀어졌다.그러고 보니 그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는 곧 라리엘의 눈가, 콧망울, 부드러운 볼을 따라 자잘하게 입을 맞추며 그녀를 천천히 침대 위로 눕혔다.“치, 거짓말쟁이.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잖아. 또 나 놀리는 거지?’“그런 속마음을 얼굴에 다 티 낼 수는 없잖아. 공작의 체면이 있는데.”아르덴은 흐트러진 라리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신년회에서의 화려한 모습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라리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
아르덴은 입을 열기 전에 잠깐동안 고민했다. 클로디아가 떠벌리던 수많은 말들… 그것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모두 잘라버리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응. 조만간 그쪽 사람을 직접 대면할 수 있을 것 같아.”소문이라는 불편한 변수를 감수하는 대신,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었다.이것도 수확으로 친다면,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아르덴은 비릿한 미소로 창밖을 보았다. 곧 라리엘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건 위험하지 않을까?”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르덴은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라리엘을 보았다.“그 계약서를 들고 법정으로 가기 전에 그들을 한번은 만나야 해. 이럴 땐 지체하지 않는게 가장 덜 위험한 방법이고.”계약서, 법정… 라리엘은 로베르 후작 부인의 말을 가만히 떠올렸다.위험한 건 그것만이 아닐 텐데. 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곳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아르덴은 일부러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짐짓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그건 그렇고, 황궁을 처음 방문한 소감은? 아까 보니까 입을 못 다물던데.”아르덴의 얼굴을 마주한 라리엘은 그에게 들킬새라, 얼른 눈빛에서 근심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괜히 턱을 살짝 치켜들며 새침하게 말했다.“흠, 처음엔 그랬지만, 조금 지나니까 별로 대단한 것도 없던걸?”“오오, 그래?”아르덴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샹들리에도, 화려한 연회장도, 다 알브릭 저택에 있는거잖아. 규모가 커서 조금 놀란것 뿐이야.”“으응, 그렇군.”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사교계의 낯익은 얼굴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로베르 후작 부인 아니신가요? 무슨 일이시죠?”후작 부인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른 사람들의 귀를 피하듯 라리엘의 팔꿈치를 살짝 감싸 쥐고 커다란 화분 옆으로 그녀를 이끌었다.그녀가 들고 있던 깃털 부채를 반쯤 넓게 펼쳐 자신의 입가를 교묘하게 가리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부인, 요즘 공공연하게 떠도는 그 끔찍한 소문이 정말로 사실인가요? 어휴, 제 귀로 듣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에요.”“무슨… 이야기를 들으신건가요?”“그게 그러니까, 돌아가신 플로렌스 백작님 말이에요. 사고로 돌아가신게 아니라 그 댁을 모시던 집사에게 살해당하셨다는게 사실이에요?순간, 라리엘은 머리를 거대한 둔기로 얻어맞은 듯 사고가 완전히 정지되며 멍해졌다.차가운 얼음물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 후작 부인은 충격으로 창백하게 질려가는 라리엘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실례가 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이런 흉흉한 소문은 당사자에게 확실히 확인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밀려드는 당혹감 너머로 라리엘의 머릿속에 제이드가 나루터 앞에서 했던 말이 번뜩이며 스쳤다.‘그들은 뼛속까지 잔인한 자들입니다. 일이 잘못되어 수사망이 좁혀올 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자를 편리한 카드 한 장이 필요했던 거지요.’그들, ‘녹스’가 퍼뜨린 이야기가 분명했다. 살며시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리엘은 다급히 표정을 정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후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
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 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
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 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를
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