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 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그는 그 떨림조차 즐기는 듯 라리엘을 내려다보며 마치 사랑스러운 보물을 보듯 미소 지었다. “그렇지, 부인?” “……네. 공작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이제 제 몫이겠죠.” 라리엘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이게 네가 원한 연극이야, 아르덴?’ 라리엘은 품 안 깊숙이 숨겨둔 아버지의 서신을 떠올렸다. 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웃고 있는 이 남자와, 어두운 서고에 가문의 금기를 숨겨둔 남자는 과연 같은 사람인가. 시간이 흐르고, 아르덴이 잠시 의회 의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라리엘은 홀 가장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천천히 연회장을 둘러보는 그녀의 귀에 귀족들의 은밀한 조롱이 들려왔다. “보라고, 저 꼿꼿한 고개. 가문은 망했어도 백작 영애 자존심은 남았나 보지?” “말이 좋아 결혼이지, 사실상 빚 대신 넘겨진 인질이잖아요. 공작께서도 그냥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어머, 그래도 아까 허리를 감싸 쥐는 손길 보셨어요? 공작님이 의외로 저런 ‘가련한 타입’을 취향으로 두셨을 줄이야.” 라리엘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이번에는 화려한 부채를 든 여인이 다가왔다. 사교계의 자선가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타인의 불행을 전시하기 좋아하는 벨몬트 후작부인이었다. “오, 가여운 라리엘.” 후작부인이 슬픈 연극을 하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백작님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그렇게 명예롭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게다가 이런 식으로 공작님께 의탁하게 되다니.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치욕이겠지요? 공작께서 무섭게 굴지는 않으시던가요? 저 노골적인 손길을 견뎌야 하는 부인의 처지가 참으로 안쓰럽네요.” 동정의 탈을 쓴 명백한 공격이었다. 주변의 귀족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리엘은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수치심에 손끝이 차갑게 식었지만, 이내 눈동자에 단단한 빛을 띄우며 후작부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부인. 하지만 ‘의탁’이라니요. 저는 제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공작님과 대등한 계약을 맺은 알브릭의 안주인입니다.” 잡힌 손을 부드럽게 빼내며 라리엘이 말을 이었다. “공작님 손길이 노골적으로 보이셨다면, 그것은 그만큼 저에 대한 그분의 애정이 깊다는 증거겠지요. 제국의 불꽃이 저토록 뜨겁게 저를 비추어주시니, 저는 그저 그 빛을 누릴 뿐이랍니다.” 말을 맺으며 후작부인을 바라보는 라리엘의 표정은 우아하고 여유로운 공작부인 그 자체였다. “그런가요? 부인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만…” 후작부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후작부인의 교활한 공격은 잘 받아냈지만 라리엘의 심장에 '의탁', '치욕', '가여운 처지'라는 단어들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박혀버렸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잡고 있던 샴페인 잔 위로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아르덴은 잔을 든 채 원로 의원들의 지루한 담소를 듣고 있었으나, 그의 모든 감각은 단 한 곳, 연회장 구석에 홀로 선 라리엘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짐짓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 라리엘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꽃 같았다. 무례한 귀족들의 속삭임이 그녀의 귀를 괴롭힐 때마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아르덴은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당장이라도 걸어가 그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아 이 위선적인 공간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다는 간절한 충동이 그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그 투명한 수치심을 자신의 손으로 닦아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그 충동을 억눌렀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놔둬야 했다. 알브릭 공작이 공작부인을 아끼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문의 장식품 정도로만 여긴다고 믿는 편이 라리엘의 안전에 가장 좋았다. 그래야만 그녀를 노리는 보이지 않는 적들의 시선은 무뎌질 것이었다. 그는 더욱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선 귀족의 농담에 맞장구를 쳤다. 눈동자에는 얼음 같은 냉기를 가득 채웠다. 다시 한번 라리엘을 응시하던 그는 시선이 마주칠 뻔한 찰나, 가차 없이 눈길을 거두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심장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내야만 하는 모순이었다.그녀를 향한 애틋함이 커질수록, 그는 더욱 견고한 얼음 가면을 쓰기로 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어지럽게 시야를 방해할 때쯤, 라리엘은 타는 듯한 목을 축이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더는 이곳에 1분도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인파를 헤쳐 나갔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등 뒤에서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라리엘은 오직 저 멀리 보이는 어두운 테라스 문만을 향해 걸었다. 차가운 유리문을 밀고 나가자, 서늘한 밤공기가 뺨을 때렸다. “하아…….” 라리엘은 난간을 움켜쥐며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수정 빛 드레스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빛났지만, 그녀의 속은 조롱과 수치심으로 까맣게 타버린 재 같았다. 연회장의 소음은 테라스의 두꺼운 유리문을 넘어서자마자 아득한 수면 아래의 일처럼 멀어졌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수백 개의 시선에 난도질당하는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유리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냉기가 감돌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차갑고도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 남자였다. 아르덴은 난간에 기대어 선 라리엘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은백색 달빛이 그녀의 가냘픈 어깨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옆 난간을 짚었다. “공작부인이 안주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고 이곳에서 한가롭게 달구경이나 하고 있군.”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하고 낮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라리엘의 창백한 옆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혹시라도 어디 상처받은 곳은 없는지, 그 모진 말들에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듯이.“다만요?”베르너가 무거운 음성으로 덧붙였다.“재판을 함께 받으시게 되면 사교계의 평판이나 의회에서의 영향력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공작님처럼 높은 자리에 계신 분에게는 더욱더요.”라리엘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바닥에서 차가운 한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들이킨 숨을 아주 천천히 내뱉으며 물었다.“역시 그렇군요. 영향력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일까요?”“최악의 경우에는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황실에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님을 압박하려 들겠지요.”베르너의 목소리는 형집행관의 선고처럼 무겁게 라리엘의 어깨를 눌렀다. 라리엘은 시선을 아래로 툭 떨어뜨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녀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자 베르너는 그제야 괜한 말을 했다 싶어 급히 말을 보탰다.“하지만 공작님께서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부인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공작님께 그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베르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원망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현재로서는… 두 분이 갈라서지 않는 이상, 방법은 없을 겁니다. 알브릭의 이름을 지키려면 플로렌스를 잘라내야 하니까요.”갈라선다. 그 말이 라리엘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려왔다.아르덴을 위해서라면 그렇게라도 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그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베르너가 자백서 초안을 완성할 때까지도 라리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알브릭 공작저의 정문 앞. 클로디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거대한 석조 저택을 올려
제국 수도의 화려한 번화가 아래, 오물이 흐르는 하수도관 옆에는 버려진 지하 창고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감도는 이곳은 조직원들 사이에서 ‘피난처’라고 불리는, ‘녹스’의 심장부였다.미로 같은 복도 끝, 두꺼운 철문 너머 중앙 방에서 낮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쥐새끼들같이 교묘하게도 움직이는군. 그래, 탈레스 그 녀석이 전해달라는 이야기의 요지가 정확히 뭐야?”방 안은 촛불 몇 개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장의 책상 너머에서 연락책이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를 이어갔다.“요약하자면, 알브릭 공작의 성미상 플로렌스 백작의 죽음을 캐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이미 수사망이 좁혀오고 있으니 본부 차원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흠…”수장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수천 명의 암살자와 정보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의 수장이라기엔, 그의 외형은 의외로 평범하다 못해 왜소하기까지 했다.창백한 안색과 단정한 옷차림은 오히려 하급 관청에서 서류를 만지는 문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플로렌스 수도원까지 직접 발걸음을 했다면 이미 꽤 많은 것을 알아낸 상태겠군. 탈레스 녀석은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지?”그의 말투는 지독히 사무적이었다.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무미건조함에도 앞에 선 연락책은 마치 자신이 질책을 받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마, 말씀하신 대로 워낙 쥐새끼처럼 움직이는지라… 공작이 수도원에 나타나기 전까지 탈레스는 그가 이미 포기한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l
평소의 우아함은 간데없이 삐걱거리는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아르덴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그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라리엘의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뭘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 있어? 긴장한 거야?”“기, 긴장이라니? 하, 하나도 긴장 안했는데?”라리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아르덴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우, 우리는 부부잖아. 부부라면 당연히 한 침대에서… 그러니까…그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말을 이어갈수록 얼굴이 점점 붉어진 라리엘은 결국 말을 맺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버렸다.낮게 웃음을 터뜨린 아르덴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입을 맞춘 뒤 나직하게 속삭였다.“사실 난 조금 긴장돼.”“... 정말?”그의 뜻밖의 고백에, 굳어 있던 라리엘의 어깨가 조금 풀어졌다.그러고 보니 그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는 곧 라리엘의 눈가, 콧망울, 부드러운 볼을 따라 자잘하게 입을 맞추며 그녀를 천천히 침대 위로 눕혔다.“치, 거짓말쟁이.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잖아. 또 나 놀리는 거지?’“그런 속마음을 얼굴에 다 티 낼 수는 없잖아. 공작의 체면이 있는데.”아르덴은 흐트러진 라리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신년회에서의 화려한 모습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라리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
아르덴은 입을 열기 전에 잠깐동안 고민했다. 클로디아가 떠벌리던 수많은 말들… 그것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모두 잘라버리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응. 조만간 그쪽 사람을 직접 대면할 수 있을 것 같아.”소문이라는 불편한 변수를 감수하는 대신,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었다.이것도 수확으로 친다면,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아르덴은 비릿한 미소로 창밖을 보았다. 곧 라리엘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건 위험하지 않을까?”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르덴은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라리엘을 보았다.“그 계약서를 들고 법정으로 가기 전에 그들을 한번은 만나야 해. 이럴 땐 지체하지 않는게 가장 덜 위험한 방법이고.”계약서, 법정… 라리엘은 로베르 후작 부인의 말을 가만히 떠올렸다.위험한 건 그것만이 아닐 텐데. 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곳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아르덴은 일부러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짐짓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그건 그렇고, 황궁을 처음 방문한 소감은? 아까 보니까 입을 못 다물던데.”아르덴의 얼굴을 마주한 라리엘은 그에게 들킬새라, 얼른 눈빛에서 근심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괜히 턱을 살짝 치켜들며 새침하게 말했다.“흠, 처음엔 그랬지만, 조금 지나니까 별로 대단한 것도 없던걸?”“오오, 그래?”아르덴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샹들리에도, 화려한 연회장도, 다 알브릭 저택에 있는거잖아. 규모가 커서 조금 놀란것 뿐이야.”“으응, 그렇군.”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사교계의 낯익은 얼굴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로베르 후작 부인 아니신가요? 무슨 일이시죠?”후작 부인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른 사람들의 귀를 피하듯 라리엘의 팔꿈치를 살짝 감싸 쥐고 커다란 화분 옆으로 그녀를 이끌었다.그녀가 들고 있던 깃털 부채를 반쯤 넓게 펼쳐 자신의 입가를 교묘하게 가리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부인, 요즘 공공연하게 떠도는 그 끔찍한 소문이 정말로 사실인가요? 어휴, 제 귀로 듣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에요.”“무슨… 이야기를 들으신건가요?”“그게 그러니까, 돌아가신 플로렌스 백작님 말이에요. 사고로 돌아가신게 아니라 그 댁을 모시던 집사에게 살해당하셨다는게 사실이에요?순간, 라리엘은 머리를 거대한 둔기로 얻어맞은 듯 사고가 완전히 정지되며 멍해졌다.차가운 얼음물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 후작 부인은 충격으로 창백하게 질려가는 라리엘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실례가 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이런 흉흉한 소문은 당사자에게 확실히 확인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밀려드는 당혹감 너머로 라리엘의 머릿속에 제이드가 나루터 앞에서 했던 말이 번뜩이며 스쳤다.‘그들은 뼛속까지 잔인한 자들입니다. 일이 잘못되어 수사망이 좁혀올 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자를 편리한 카드 한 장이 필요했던 거지요.’그들, ‘녹스’가 퍼뜨린 이야기가 분명했다. 살며시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리엘은 다급히 표정을 정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후
아르덴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스름한 테라스로 들어섰고, 뒤따라온 클로디아가 유리문을 닫았다.문이 닫히자 화려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잦아들었다.차가운 겨울밤의 공기가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클로디아는 숄을 한 번 여미고는 고개를 숙였다.“은밀히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연회장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게 되어 송구합니다, 공작님.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공작님께서 난처해지실 테니, 서둘러 말씀드릴게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이 대화가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닌,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은밀한’ 대화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뻔히 보이는 그녀의 속내가 자못 불쾌했지만, 아르덴은 기꺼이 그 연극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괜찮아. 지켜보는 눈은 없으니 편하게 말해봐.”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클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섰다.바닥에 스치는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저에게 접근한 그 수상한 남자가 부인에 대해 귀띔해주더군요. 플로렌스의 집사가 생전에 돌아가신 백작님과 심각한 마찰이 있었다고 해요. 정확한 내막은 베일에 싸여 있지만, 아마도 지저분한 금전 문제였던 모양이에요.”그녀는 ‘지저분한’이라는 단어에 미묘하게 힘을 주었다.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상대의 혐오를 자극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녀의 눈동자가 은근히 빛났다.“탐욕에 눈이 먼 집사는 결국 백작님을 살해하고 도망쳤고, 저에게 접근한 그 남자는 집사에게 받아낼 돈이 있어 그를 추적하던 중이었대요.”말을 이어가며 클로디아는 손끝으로 자신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이야기가 점점 자극적으로 흐르자,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고조되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