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 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그는 그 떨림조차 즐기는 듯 라리엘을 내려다보며 마치 사랑스러운 보물을 보듯 미소 지었다. “그렇지, 부인?” “……네. 공작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이제 제 몫이겠죠.” 라리엘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이게 네가 원한 연극이야, 아르덴?’ 라리엘은 품 안 깊숙이 숨겨둔 아버지의 서신을 떠올렸다. 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웃고 있는 이 남자와, 어두운 서고에 가문의 금기를 숨겨둔 남자는 과연 같은 사람인가. 시간이 흐르고, 아르덴이 잠시 의회 의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라리엘은 홀 가장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천천히 연회장을 둘러보는 그녀의 귀에 귀족들의 은밀한 조롱이 들려왔다. “보라고, 저 꼿꼿한 고개. 가문은 망했어도 백작 영애 자존심은 남았나 보지?” “말이 좋아 결혼이지, 사실상 빚 대신 넘겨진 인질이잖아요. 공작께서도 그냥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어머, 그래도 아까 허리를 감싸 쥐는 손길 보셨어요? 공작님이 의외로 저런 ‘가련한 타입’을 취향으로 두셨을 줄이야.” 라리엘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이번에는 화려한 부채를 든 여인이 다가왔다. 사교계의 자선가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타인의 불행을 전시하기 좋아하는 벨몬트 후작부인이었다. “오, 가여운 라리엘.” 후작부인이 슬픈 연극을 하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백작님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그렇게 명예롭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게다가 이런 식으로 공작님께 의탁하게 되다니.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치욕이겠지요? 공작께서 무섭게 굴지는 않으시던가요? 저 노골적인 손길을 견뎌야 하는 부인의 처지가 참으로 안쓰럽네요.” 동정의 탈을 쓴 명백한 공격이었다. 주변의 귀족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리엘은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수치심에 손끝이 차갑게 식었지만, 이내 눈동자에 단단한 빛을 띄우며 후작부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부인. 하지만 ‘의탁’이라니요. 저는 제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공작님과 대등한 계약을 맺은 알브릭의 안주인입니다.” 잡힌 손을 부드럽게 빼내며 라리엘이 말을 이었다. “공작님 손길이 노골적으로 보이셨다면, 그것은 그만큼 저에 대한 그분의 애정이 깊다는 증거겠지요. 제국의 불꽃이 저토록 뜨겁게 저를 비추어주시니, 저는 그저 그 빛을 누릴 뿐이랍니다.” 말을 맺으며 후작부인을 바라보는 라리엘의 표정은 우아하고 여유로운 공작부인 그 자체였다. “그런가요? 부인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만…” 후작부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후작부인의 교활한 공격은 잘 받아냈지만 라리엘의 심장에 '의탁', '치욕', '가여운 처지'라는 단어들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박혀버렸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잡고 있던 샴페인 잔 위로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아르덴은 잔을 든 채 원로 의원들의 지루한 담소를 듣고 있었으나, 그의 모든 감각은 단 한 곳, 연회장 구석에 홀로 선 라리엘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짐짓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 라리엘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꽃 같았다. 무례한 귀족들의 속삭임이 그녀의 귀를 괴롭힐 때마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아르덴은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당장이라도 걸어가 그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아 이 위선적인 공간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다는 간절한 충동이 그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그 투명한 수치심을 자신의 손으로 닦아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그 충동을 억눌렀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놔둬야 했다. 알브릭 공작이 공작부인을 아끼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문의 장식품 정도로만 여긴다고 믿는 편이 라리엘의 안전에 가장 좋았다. 그래야만 그녀를 노리는 보이지 않는 적들의 시선은 무뎌질 것이었다. 그는 더욱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선 귀족의 농담에 맞장구를 쳤다. 눈동자에는 얼음 같은 냉기를 가득 채웠다. 다시 한번 라리엘을 응시하던 그는 시선이 마주칠 뻔한 찰나, 가차 없이 눈길을 거두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심장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내야만 하는 모순이었다.그녀를 향한 애틋함이 커질수록, 그는 더욱 견고한 얼음 가면을 쓰기로 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어지럽게 시야를 방해할 때쯤, 라리엘은 타는 듯한 목을 축이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더는 이곳에 1분도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인파를 헤쳐 나갔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등 뒤에서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라리엘은 오직 저 멀리 보이는 어두운 테라스 문만을 향해 걸었다. 차가운 유리문을 밀고 나가자, 서늘한 밤공기가 뺨을 때렸다. “하아…….” 라리엘은 난간을 움켜쥐며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수정 빛 드레스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빛났지만, 그녀의 속은 조롱과 수치심으로 까맣게 타버린 재 같았다. 연회장의 소음은 테라스의 두꺼운 유리문을 넘어서자마자 아득한 수면 아래의 일처럼 멀어졌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수백 개의 시선에 난도질당하는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유리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냉기가 감돌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차갑고도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 남자였다. 아르덴은 난간에 기대어 선 라리엘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은백색 달빛이 그녀의 가냘픈 어깨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옆 난간을 짚었다. “공작부인이 안주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고 이곳에서 한가롭게 달구경이나 하고 있군.”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하고 낮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라리엘의 창백한 옆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혹시라도 어디 상처받은 곳은 없는지, 그 모진 말들에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듯이.루시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트리샤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끝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보나마나 시골에서 올라온 티 팍팍 내셨겠구만. 그 아주머니가 장사 수완 발휘해서 아가씨를 살살 놀린 거예요. 그 광장은 일 년 내내 노점상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대리석 바닥 구경도 못 할뿐더러, 비둘기 똥이랑 온갖 고약한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라구요.”청천벽력 같은 폭로에 루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목소리를 높였다.“거짓말! 형부도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쳐 주셨는데? 형부가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요!”“공작님도 한통속인건 안봐도 뻔하네요. 수도 사람들이 그렇게 무섭다니까.”트리샤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잘 익은 딸기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고는 우물거렸다.루시는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울상을 지으며, 구원을 요청하듯 라리엘을 돌아보았다.“언니… 정말이야? 트리샤 언니 말이 다 사실이야?”“하하, 글쎄. 나도 그 광장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확답은 못 하겠네.”라리엘은 동생의 순진함이 귀여우면서도 차마 트리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쐐기를 박을 수는 없어 애매하게 웃어넘겼다.잔뜩 일그러진 루시의 미간과 떨리는 눈망울에 자작 부인과 엘리시아, 심지어 입안 가득 딸기를 문 트리샤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평화로운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응접실 창밖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붉은 노을이 플로렌스 영지의 부드러운 능선을 가득 채웠다.온 가족이 모여 정성스럽게 차려진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저택은 각자의 휴식 시간으로 접어들었다.자작 부인은 거실 벽
3개월 후, 플로렌스 영지는 완연한 봄의 숨결을 머금고 있었다.이제는 ‘플로렌스 자작령’으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저택을 감싸는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활기찼다.플로렌스 저택의 집무실 안, 창틈으로 스며드는 포근한 봄 햇살이 책상 위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과거 아버지가 앉아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던 책상 앞에 앉은 라리엘은, 이제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툼한 가죽 장부를 펼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깃펜으로 꼼꼼히 숫자를 기입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장부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그 곁에는 초점이 흐릿한 눈을 가만히 감은 제이드가 지팡이를 짚은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부인, 서쪽 계곡 쪽 농지의 이번 달 세금 수입 현황을 다시 한번 불러주시겠습니까?”라리엘은 장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서쪽 농지는 지난달보다 조금 늘었어요, 제이드. 하지만 동쪽 평야 지대는 여전히 회복이 더딘 모양이네요.”제이드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마치 영지의 지도를 그리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쪽 농지는 지력이 좋아 봄이 되면 소출이 늘어날 테니 세금을 예년 수준으로 조금 더 거두셔도 무방할 겁니다. 하지만 동쪽 농지는 작년 수해의 여파가 남아있으니, 이번 봄에는 세금을 조금 감면하여 농민들이 씨앗을 살 여유를 주시는 게 좋겠군요.”봄을 맞아 영지 살림을 살펴보러 플로렌스를 방문한 라리엘은 며칠 째 이렇게 제이드와 함께 장부를 들고 씨름하는 중이었다.“아, 그리고 북쪽 과수원 농가에는 ‘객토(客土)’ 작업을 꼭 확인하라고 전하십시오. 봄에 다른 곳의 좋은 흙을 가져다 섞어주지
“…그렇구나.”짧게 내뱉은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한때 자신을 매섭게 몰아붙이던 이에 대한 연민인지, 이제 더는 방해받지 않을 거라는 안도인지, 아니면 그 둘이 기묘하게 뒤섞인 씁쓸함인지 그녀 스스로도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잠시 후,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라리엘이 다시 가벼운 톤으로 물었다.“레이먼 백작님은 병세가 좀 나아지셨을까?”“응. 다음달부터는 의회에도 출석하실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셨다고 들었어.”“정말 다행이네.”라리엘은 마음의 짐을 한결 덜어낸 듯 아르덴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위로 하얀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았다.“있지, 클로디아 양이 지난 번에 날 찾아왔을때 말이야. 네가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귀족들이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내게 해줬어.”처음 듣는 뜻밖의 사실에 아르덴의 턱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라리엘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여자가 그런 얘길 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해?”만약 그녀가 라리엘을 그런 식으로 압박했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조용히 물러나게 수표 따위를 쥐여주는 선처 따위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가문을 동원해 훨씬 더 혹독하고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라는 후회가 가슴 속을 사납게 스쳤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르덴. 조금만 더 내 말을 들어봐.”라리엘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사실 난 그때까지… 너나 알브릭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내가 먼저 너를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수없이 고민했어. 그래야만 한다고도
트리샤의 입에서 풋, 하는 짧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이건 그동안 수고한 값이다. 이제 더는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군.] …간단히 말하자면,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얘기지.”알브릭 가문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봉투가 클로디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든 클로디아가 인장을 확인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거짓말하지 마!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공작님을 직접 뵙고 확인하겠어!”“흠, 글쎄… 정 못 믿겠다면 당신이 직접 공작님을 찾아가봐. 알브릭 저택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욕을 당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네.”마침내 클로디아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녀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전언은 여기까지야. 그럼 난 이만.”트리샤는 넋이 나간 클로디아의 창백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 뒤, 마차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잠시 후, 숨쉬는 법 조차 잊은 듯이 굳어 있던 클로디아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오라비의 지긋지긋한 도박 빚을 단숨에 청산하고도 남을 만한 거액의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보상이 아니라 단절의 선언이었다.수치심과 패배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 마차 안에는 무너져 내리는 한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한참동안 흘러나왔다.*재판을 고작 몇 시간 앞둔 깊은 밤, 침대 위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던 라리엘은 결국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떴다.어둠 속에서도 천장의 화려한 문양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아무리 눈을 감고
마차 바퀴가 불규칙한 돌길을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차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이미 해질녘이 된 창밖에는 유흥가의 숨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라리엘은 그 생경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그곳엔 잔뜩 날이 선 표정의 트리샤가 앉아 있었다.“무슨 협상이 그래요?”트리샤가 참아왔던 말을 가시 돋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매서운 반응에 라리엘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트리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응? 내가 혹시 놓친 조건이라도 있었나요? 문서에 빠진 조항이라도…?”“조건이고 조항이고 간에, 얻어낸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이왕 녹스의 수장을 만났으면, 부인 아버지의 목숨값으로 돈이라도 잔뜩 요구했어야죠!”트리샤는 한 손을 펴서 반대편 손바닥을 탕탕 치며 분을 토해냈다. 라리엘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얻어낸 게 없다니요. 약탈금에 제이드, 그리고 트리샤 씨까지. 무려 세 가지나 얻어냈는걸요?”라리엘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트리샤는 그 맑은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도리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한층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구요. 보상은 커녕, 짐짝을 둘이나 떠안은 셈이잖아요.”“무슨 소리에요? 난 충분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짐짝이라니, 트리샤 씨는 내 친구 아니었어요?”친구라니.트리샤는 그 말에 또 한번 토를 달려고 숨을 한껏 들이켰다가, 라리엘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고는 그대로 말을 삼켜버렸다.라리엘은 그런 트리샤를 짐짓 모른체 하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미첼로가 굳이 제이드의 이름을 들먹인 것은 라리엘을 떠보려는 의도였다.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한 가문의 배신자를 구하려는 그녀의 본심이 순수하게 궁금했던 것이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미첼로는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의자에 등을 붙여 바르게 앉았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는 도박사처럼 가볍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좋습니다. 더는 제가 고집을 부릴 방도가 없군요. 부인의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정리해 보시지요.”그토록 원하던 미첼로의 항복 선언이었으나, 막상 그의 입에서 수락의 말이 떨어지자 라리엘은 찰나의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그녀는 눈앞에 앉은 미첼로의 미세한 근육 변화와 눈짓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아까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듯이, 레오폴트 약탈금의 반환은 녹스에서 전적으로 책임집니다. 그리고, 미첼로 씨가 강조하셨던 그 ‘기브 앤 테이크’를 적용해 드리죠. 우리가 법정에서 녹스의 존재와 이 계약서의 실체를 발설하지 않는 대신, 제이드 크로이츠를 즉각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세요. 당신들이 우리 아버지에게 저지른 그 끔찍한 죄악에 대한 대가는, 그의 딸인 트리샤 크로이츠의 완전한 자유로 받겠습니다.”미첼로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이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시죠. 거래 성립입니다.”미첼로는 녹스의 수장답게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서랍에서 고급 양피지를 꺼냈다.얼마간 깃펜이 종이 위를 달리는 사각거리는 방 안에 울려퍼졌다. 새로운 계약서 작성이 끝난 후, 그는 마지막으로 라리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수완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부인.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도 꼭 ‘거래&r
의회에서 돌아온 아르덴의 마차가 저택 정문에 들어선 것은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망토를 하인에게 넘겼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저택으로 들어온 그의 모습에는 금실이 수놓인 어깨 장식과 단정한 칼집, 그리고 하루 종일 그를 조여 왔을 격식과 피로가 한데 엉겨 있었다. 예복도 채 벗지 않은 채 그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라리엘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기보다는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그가 올 시간만을 헤아리며 경직되어 있었다. 촛불은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식당에 남겨진 것은 차갑게 식은 커피 향기와 라리엘의 떨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정돈했다. 이제부터는 슬픔이나 분노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알브릭 공작저라는 거대한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우선 이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했다. 식당 문을 열고 나가자, 어제 연회장에서 보았던 중년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연미복, 차가운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예리한 눈매. 알브릭 가문의 가신이자 대대로 공
“하아…… 하…….”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자극하지 말라고?’ 그녀는
“저기 연못에 무지개가 떴어!” 아르덴은 숨을 고르며 달리다가도 그 말을 듣자 속도를 조금 더 냈다. “천천히 가, 라리엘.” 그는 애써 침착한 척 말했지만, 심장은 그녀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무지개는 도망가지 않아.” “도망가면 어떡해! 비가 그친 지 얼마 안 됐단 말이야!” 라리엘은 결국 연못가에 먼저 도착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연못 위에는 햇빛이 굴절되어 일곱 빛깔의 띠가 흔들리고 있었다. 물결이 살짝 일 때마다 색은 부서지듯 흩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라리엘은 숨을 죽인 채 그것을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