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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0화

Author: 레몬과 향수
오후, 덕비는 영슬기를 친정 조카와 맺어준다는 사혼 교지를 내렸다. 혼례일은 내년 초봄으로 정해졌다.

교지를 받은 영씨 가문은 속수무책이었다. 영슬기는 숨이 넘어갈 듯 오열했고, 두 눈은 붉게 부어올랐다.

"덕비 마마의 처사는 도를 넘었습니다. 그 유창이라는 자는 스물둘이나 먹도록 혼인을 못 했으니 분명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는 죽어도 시집가지 않겠습니다."

영슬기는 어머니 서소현의 품에 얼굴을 묻고 목놓아 울었다.

"어머니, 수왕 전하께서 분명 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 하셨습니다."

서소현은 애지중지 키운 딸을 끌어안으며 애가 탔다.

"어머니, 제발 방도를 찾아주십시오."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에 서소현은 미간을 구기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따 서씨 가문에 다녀오마. 어쩌면 상황을 뒤집을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말에 영슬기는 뚝 울음을 그쳤다.

"맞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나서서 태후 마마께 부탁만 하시면 그저 말 한마디면 끝날 일입니다."

딸은 그리 쉽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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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안을 거슬러   제660화

    서신을 펼치자, 안에는 참으로 애틋한 연서가 적혀 있었다. 회북을 멀리 떠나 강남 일대로 가서 함께하자는 약조와 미래의 아름다운 삶을 그리는 내용이었다.황제는 종이를 빼곡하게 채운 글자들을 끈기 있게 끝까지 읽어 내렸다."그날 마마 곁에 있던 시녀가 은밀히 움직이는 것을 제가 붙잡았습니다. 시녀는 태후 마마께서 여 공자와 오래전부터 내통해 왔으며…… 심지어 회임까지 할 뻔했다고 실토했습니다. 이 사실이 영씨 가문의 귀에 들어가 파혼을 당할 처지에 놓였고, 영씨 가문 측에서 서씨 가문의 체면을 보아 혼처를 바꾸자고 제안한 것입니다."서소현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바깥에서는 제가 마마의 혼처를 가로챘다며 십수 년 동안 억울한 오명을 씌웠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말을 마친 서소현이 영정을 쳐다보았다.영정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틀림없는 사실입니다."황제의 시선이 며느리인 서 부인 진씨에게 닿았다.서 부인 진씨는 망설였다. 지아비와 시어머니가 태후를 헐뜯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내심 께름칙했다.하지만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만약 이번 기회에 태후를 무너뜨린다면, 서씨 가문은 이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진씨는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당시 춘분이라는 시녀에게서 이 서신을 찾아낸 것은 사실입니다. 춘분은 오랫동안 태후 마마를 모시던 자였으니, 조사해 보시면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황제가 물었다."그 춘분이라는 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진씨가 대답했다."자백을 받아낸 직후 장살에 처했습니다.""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매질하여 억지 자백을 받아냈을 수도 있겠군."황제의 일침에 진씨는 아연실색했다."그 서생은 어찌 되었느냐?"황제가 다시 물었다.서소현이 재빨리 나섰다."죗값을 치를까 두려워 강에 몸을 던져 자진했습니다."제 목숨을 바쳐 결백을 증명했거늘, 서소현의 입을 거치니 죗값이 두려워 자진한 것으로 둔갑해버렸다.기가 막힌 황제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에 들린 서

  • 피안을 거슬러   제659화

    대신들은 바닥에 엎드린 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서씨 노부인은 자신이 서 태후의 약점을 제대로 찔러 그들의 입을 막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서씨 가문을 벼랑 끝으로 몰지만 않았어도, 저 역시 이런 추문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편전.소 상궁은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기세로 눈을 부릅떴다."어찌 저런 식으로 마마를 헐뜯을 수 있단 말입니까?"서 태후의 얼굴에 차가운 비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다만 호흡이 조금 가빠졌을 뿐이었다.십여 년을 모신 소 상궁은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서 태후가 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서씨 가문의 처사는 도를 지나쳤다. 서소현 하나를 감싸자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꾸며내고 있었다."서생이라?"한참 만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음색 속에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황제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씨 노부인을 쳐다보았다."십칠 년 전 회북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수재를 다스리는 방도에 관한 문장으로 칭송이 자자했던 여 공자를 말하는 것인가?""그러합니다, 폐하!"서씨 노부인이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그자는 재주는 조금 있었으나 인품이 몹시 비열했습니다. 권세에 빌붙고자 서완을 부추기고 환심을 샀으니, 그자가 아니었다면 서완 역시 풍기를 문란케 하는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황제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다. 검은 눈동자 속에 은은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십여 년을 조정에 몸담아 온 세 대신은 고개를 들어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서씨 노부인을 쳐다보았다.멍청이를 보는 눈빛이었다.황제가 태후에게 극진히 효도하며 단 한 번도 뜻을 거스른 적이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게다가 태후는 이번 전쟁에서도 황제의 큰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었다. 그런 황제가 십칠 년 전의 시비로 태후를 벌할 리가 없었다.참으로 생각 없는

  • 피안을 거슬러   제658화

    다른 대신의 의견도 유 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세 대신이 연달아 서 태후를 두둔하고 나서자, 서씨 노부인은 목을 꼿꼿이 세우며 반박했다."그건 대인들께서 태후 마마의 감춰진 이면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오!"황제는 유 대인을 힐끗 쳐다보았다.유 대인이 즉시 나서서 호통을 쳤다."헛소리 마시오! 태후 마마께서는 약자를 가엾이 여기시고 장군가의 후손을 친히 거두셨소. 공과 사가 명확하여 조금의 치우침도 없으신 분이거늘! 오히려 십칠 년 전 서씨 가문이 저지른 짓이야말로 도를 넘지 않았소. 마마께서 당신들께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고 이리 헐뜯으려 들다니, 참으로 비열한 행태요!"정곡을 찔린 서씨 노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유 대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회북에서 서씨 가문의 평판은 본디 바닥을 기었소. 특히 노부인께서 적장녀만 편애하여 온갖 패악을 눈감아준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오. 정혼자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동생의 혼처를 가로챘으니, 애당초 선량한 인품과는 거리가 멀지 않소! 오늘날 이 꼴을 당한 것도 다 자업자득이오!""그간 서씨 가문은 태후 마마의 명성을 등에 업고 회북에서 얼마나 많은 잇속을 챙겼소? 보다 못한 태후 마마께서 서씨 가문을 경성으로 불러들여 경고하신 것이오. 거기서 몰수한 재물마저 전부 국고로 환수하셨으니, 핏줄에 얽매이지 않고 얼마나 공명정대하신지 알 수 있지 않소!"조정 대신들은 본디 말주변이 뛰어난 자들이었다.단 몇 마디로 가문의 치부를 까발리며 서씨 노부인을 톡톡히 망신 주었다."서씨 가문의 적장녀는 수치심도 없이 사내의 품에 안겼고, 그 딸인 영씨 가문의 적장녀도 어미를 쏙 빼닮아 몹쓸 짓을 벌이다 영씨 집안에서 맞아 죽었소. 윗물이 더러우니 아랫물이 맑을 수가 있나!""태후 마마께서는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끊어내셨으니, 참으로 양나라 여인들의 귀감입니다!""마마의 공명정대함에 감복할 따름입니다!"세 대신은 서씨 노부인이 입을 뻥긋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화가 난 서씨 노부

  • 피안을 거슬러   제657화

    서씨 노부인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내막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절로 동정심이 일 만한 모습이었다.오늘 서씨 노부인과 함께 입궁한 이는 서유천과 서씨 가문의 어르신 한 명이었다.서씨 노부인이 울며 하소연할 때마다, 서유천은 곁에서 그녀를 부축했다."폐하, 서씨 가문이 태후에게 빚을 진 것은 맞습니다. 허나 그 시절 혼처를 바꾼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태후 역시 동의했던 일입니다.""그런데 서씨 가문이 경성으로 올라온 후부터, 태후께서는 사사건건 저희를 과녁 삼아 괴롭히고 있습니다.""이 늙은 것이 입궁하여 용서를 구하며 온갖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래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열 달을 품어 낳은 제 딸이니까요. 어릴 적에는 그저 순하고 사랑스러웠는데, 어쩌다 성정이 저리 뒤틀려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양나라의 체면까지 깎아내리려 듭니다.""이 늙은이는 더 이상 방도가 없어, 대의를 위해 혈육을 끊어내는 심정으로 나섰습니다. 부디 폐하께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그 목소리는 벽을 넘어 고스란히 편전으로 흘러들었다.서 태후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손끝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만 톡톡 울렸다.곁에 선 소 상궁은 미간을 찌푸렸다.편전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어전의 서씨 노부인은 코를 훌쩍이며 계속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태후는 마음속에 원한만 가득 차, 친조카마저 첩으로 들이라며 체면을 짓밟고 있습니다…… 참으로 도가 지나친 처사입니다!"모친이 서 태후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을 들으며, 서유천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오늘 서 태후를 무너뜨리든지 서씨 가문이 엄벌을 받든지 둘 중 하나였다. 이왕 피할 수 없는 화라면 차라리 덜 다치는 쪽을 택해야 했다.서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나온 것도 벼랑 끝에 몰렸기 때문이었다.서유천은 힐끗 용상에 앉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황제의 얼굴은 음침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은은한 노기마저 서려 있었다. 무표정하게 굳은 그 서

  • 피안을 거슬러   제656화

    대청 안에서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일족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누구 하나 감히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오랜 적막 끝에 족장이 무겁게 입을 뗐다. "어쩌면 이 방법뿐일지도 모른다. 폐하께서는 인자하시고 효심이 깊으시나 대의를 먼저 살피실 것이다. 기껏해야 우리 서씨 가문 사람 몇몇을 벌하실 뿐, 무고한 이들까지 엮지는 않으실 테지. 최악의 경우, 이 늙은이가 나서서 죄를 청하면 될 일 아니겠느냐!"가문의 후대들에게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라면, 매를 맞든 목이 날아나든 기꺼이 감수할 참이었다."태후는 서씨 가문의 핏줄이면서 가문을 일으켜 세우지는 못할망정, 묵은 옛일로 사사건건 본가를 옥죄고 있지 않소. 내가 체면을 버리고 폐하께 찾아가 고자질한다 한들 이는 다 태후가 자초한 일이지!""이 세상천지에 그 패악질을 막을 수 있는 분이 딱 한 분 계시지 않소!""천자의 위엄은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법이오!"서씨 노부인이 자진해서 나서자, 다른 어르신들도 앞다투어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서씨 노부인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입궁을 청하는 서신을 올렸다.허나 궁문 밖에서 장장 두 시진이나 기다려도 부름은 없었다.참다못한 서씨 노부인은 아예 신문고를 울려버렸다. 북소리가 둥둥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녀는 기어코 황제를 뵙겠다며 고집을 부렸다.*자녕궁.소 상궁은 서씨 노부인이 신문고를 쳤다는 소식을 고하며, 틈틈이 서 태후의 안색을 살폈다.허나 서 태후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덤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그 모습에 소 상궁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태후를 도와 자수 도안을 정리했다. 진 도련님에게 지어줄 옷가지들을 준비하는 중이었다.서 태후는 서너 가지 도안을 골라 소 상궁에게 건넸다. "수방에 일러 가장 부드러운 천을 고르라 하거라. 바느질도 실수하지 말고 꼼꼼하게 서둘러 지어 올리라 이르고."소 상궁은 공손히 명을 받들었다.어느덧 두 시진이 흐른 뒤, 궁인이 들어와 황제가 서씨 노부인을

  • 피안을 거슬러   제655화

    서씨 노부인은 서유천을 바라보며 불만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 늦은 밤에 일족을 다 불러 모아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대청 안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지만, 분위기는 숨이 막힐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서유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십칠 년 전의 과거를 입에 올렸다."그리 까마득한 옛날 일을 이제 와서 꺼낼 필요가 뭐가 있다고." 서씨 노부인은 불편한 얼굴로 말을 싹둑 잘르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방 안의 화로가 너무 뜨겁게 타오르는 탓에 등줄기에 끈적한 땀이 배어 불쾌하기 그지 없었다.서유천이 입을 뗐다. "십칠 년 전 우리 서씨 가문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여 저는 가주로서 과거의 죄를 낱낱이 고하고, 여 공자를 위한 사당을 지어 우리 가문이 삼 대에 걸쳐 모시도록 할 생각입니다."쨍그랑!서씨 노부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서유천을 쳐다보았다.다른 어르신들 역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주목했다."제 결심은 이미 확고합니다!" 서유천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서씨 노부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다가 서 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오늘 입궁하여 태후 마마를 뵈었습니다. 이것은 태후 마마의 뜻입니다!" 서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히 설명했다. "태후 마마께서는 우리 가문의 죄를 만천하에 까발리라 명하셨습니다."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들고일어났다."자신을 낳고 길러준 본가가 아닌가!""태후께서 정녕 노망이라도 나신 게냐?"일족들이 격분하여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가운데, 방금 전까지 가장 펄쩍 뛰던 서씨 노부인만이 오히려 차갑게 이성을 되찾았다.그녀는 서 부인을 쏘아보았다. "정녕 그것이 태후의 뜻이란 말이냐. 그리하면 어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고작 서생 하나 때문에 가문 전체를 위험에 빠뜨려야 했다는 게야?"서씨 노부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 피안을 거슬러   제1화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털썩!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읍….”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

  • 피안을 거슬러   제10화

    동금은 원래 표사의 딸이었으나 부모를 잃은 뒤 전당포에 팔려간 데다가, 전생에서는 실족사로 죽기까지 했다.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생에 유지영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매일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송씨에게서 문서를 기어코 받아낸 것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 수완도 있는 듯했다.나머지는 아직 관찰 대상이었다.“오늘부터 종령각을 배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유지영은 근엄한 표정으로 엄명을 내렸다.나머지 사람들은 주향 일당이 내쳐지는 것을 보았기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방으로

  • 피안을 거슬러   제9화

    “선주는 참 복도 많아요. 이 집안의 복덩이라니까요.”이내 셋째 부인이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송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지영아, 그동안 경왕 세자의 평판이 어떤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뒤에는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네가 잘 붙들어야 한다. 어차피 훗날 경왕부 작위를 잇게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제발 사고를 쳐서 우리 집안에 피해가 가는 일만은 없게 하거라.”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침소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다행히도 노부인이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 피안을 거슬러   제8화

    “지영아,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느냐?”송씨는 못 말리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날은 오해가 좀 있었단다. 선주는 내가 따끔히 혼내 두었어.”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어찌 작은어머니와 선주에게 화를 내겠어요. 운부 비단은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들었어요. 일부 무늬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던데, 구하시느라 참 힘드셨겠어요. 감동이에요, 작은어머니.”그 말을 들은 송씨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역시 그 멍청함은 어디 안 가는구나!’유지영은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집안의 맏언니로서 당연히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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