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허씨 가문이 사죄하면서 기씨 가문도 겉으로는 잠잠해졌다.두 가문은 저마다 대문 앞에 흰 등을 내걸고 장례를 치렀다.연씨는 시녀를 보내 유영을 처소로 불렀다.연씨는 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일도 다 마무리되었고 분가까지 했으니 본가 일은 더 이상 마음에 두지 말고 몸조리나 잘하거라. 장훈이는 네 시아버지가 직접 가르쳐 키운 아이다. 예전에는 철없이 굴었을지 몰라도 천성은 효심이 깊은 아이란다."유영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씨는 최근 진맥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유영은 시선을 아래에 두고 답했다."진맥을 받았는데 의원 말로는 아직 몸조리를 더 해야 한다고 합니다."연씨의 눈빛에 순간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쳤으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급해할 것 없다. 너는 아직 젊지 않느냐."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연씨는 피곤한 기색으로 손을 내저어 유영에게 돌아가 쉬라고 했다.자리에서 일어나던 유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머니, 할아버님께서 장천 도련님의 사인을 따로 조사하고 계신다는 게 사실입니까?"연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네가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느냐?"유영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할아버님께서 노여움이 크셨는지 꽤나 거침없이 움직이고 계십니다. 아버님께서 효심이 깊으신 것은 알지만, 제때 손을 떼지 않으시면 아버님까지 그 일에 휘말리실 것입니다."연씨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요즘따라 기정혁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유영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할아버님께서 배후의 진범을 찾아내면 원씨 가문은 물론이고 노부인까지 연루될 것입니다. 앞으로 길어야 일 년 안에 호부상서 자리가 비게 될 텐데 걱정입니다."연씨는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기정혁은 호부상서 자리에 오르기 위해 십수 년을 기다리며 온갖 공을 들여왔고, 이제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만일 기씨 어르신이나 노부인에게 변고가 생기면 기정혁은 삼 년 상을 치르느라 승진에서 물러나야 했다.그렇게 되면 그동안 공들인 모든
성씨는 원씨가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분명 누군가 셋째 동서를 협박하여 손을 쓰게 만들었을 것입니다."기정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성씨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서두를 것 없소. 언젠가는 꼬리가 잡힐 것이오."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형수님도 이 일에 관여하셨소?"오늘 사당에서 기정혁이 끝내 맹세하지 않고 머뭇거리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성씨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것은 저도 모릅니다."성씨는 연씨와 이 일을 상의한 적은 없었고, 오히려 유영과 뜻을 맞추어 움직였다.그러나 기정태가 묻지 않았으므로 굳이 유영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다.같은 시각, 집으로 돌아온 기정혁은 연씨에게 낮에 사당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연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경조판사가 이미 사건을 종결했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연씨는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정말로 무언가 밝혀지기라도 하면 허씨 가문에는 뭐라고 해명할 셈입니까? 우리 가문에서 직접 장천이를 죽여 허씨 가문에 누명을 씌웠다고 자백할 겁니까? 그것은 허씨 가문에 약점을 갖다 바치는 꼴이나 다름없습니다."연씨가 보기에 기씨 어르신은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었다.진작 파혼했더라면 오늘 같은 사단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기정혁은 연씨를 힐끗 바라보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장천이의 죽음이 부인과도 관련이 있소?"뜻밖의 질문에 연씨는 순간 멍해졌다.그녀는 시선을 내려 실망감을 감추고는 싸늘하게 웃으며 물었다."제가 손을 쓸 생각이었더라면 장천이는 어릴 때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당신 눈에는 제가 그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입니까?"기정혁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부인도 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그런 뜻이 아니었소."연씨는 더 따질 마음도 들지 않아 다른 질문을 했다."오늘 서방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기정혁은 연씨가 무엇을 물으려는지 눈치채고 얼버무리며 넘겼다.그는 창밖을 한 번
기정태는 본가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성씨를 찾았다.그러나 시녀는 성씨가 외출하고 없다고 답했다.기정태는 시녀에게 명했다."어서 가서 부인을 찾아오거라!"시녀는 대답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약 반시진 후, 성씨가 다급한 걸음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부군의 굳은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기정태는 조금 전 사당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성씨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정말 제가 손을 썼을까 봐 걱정되진 않으셨습니까?"기정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이번 일에 부인이 관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장천이의 죽음은 부인과 무관할 것이라 믿었소."성씨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기정태는 차분하게 답다."부인은 현명한 사람이니, 중상을 입은 채 정신도 못차리는 아이를 굳이 죽일 만큼 어리석지 않소."기장천을 죽일 생각이었더라면 처음부터 연못에서 익사하게 두는 편이 훨씬 간단했을 것이다.기정태는 그 점을 알았기에 기씨 어르신 앞에서 기장천을 죽인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당당히 맹세할 수 있었다.오랜 세월 부부로 살아오며 쌓인 믿음이었다.성씨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전에 큰집에서 살림을 맡았을 때는 형님께서는 안팎으로 대접받으셨고, 셋째네는 어르신들의 편애를 독차지했습니다. 저만 가운데에 끼어 속앓이를 하느라 화가 났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 보는 눈만큼은 형님이나 동서나 저를 따라오지 못하는군요. 오늘 서방님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기정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씨를 부축해 앉히며 다정하게 말했다."무슨 섭섭한 말을 하시오. 우리는 백년해로할 것이오. 이제 분가도 했으니 앞으로 좋은 날만 남았소."부부는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성씨는 그동안 조사하여 알아낸 단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장천이의 죽음은 아마 셋째 동서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기정태는 성
결연한 목소리가 사당 안에 울려 퍼졌다.기씨 어르신의 분노도 절반가량 가라앉았다.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위패들을 돌아보았다.기정혁은 분노를 삼키며 간곡히 말했다."아버지, 둘째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허씨 노부인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허씨 노부인이 남긴 한마디가 부자간의 사이를 갈라놓은 셈이었다.기씨 어르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장천이의 죽음은 확실히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강물에 빠져 구조된 뒤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던 아이가 침상에서 떨어져 숨이 막혀 죽었는데, 곁에 시중드는 사람 하나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차분히 되짚어 볼수록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기정태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고는 비통한 목소리로 물었다."아버지께서는 제가 허씨 가문의 모함에서 벗어나려고 장천이를 죽였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기씨 어르신은 부인하지 않았다.기정태는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아버지, 장천이는 제가 어릴 때부터 지켜보며 아낀 조카입니다. 그동안 제가 그 아이에게……."기정혁은 고개를 저으며 기정태의 말을 가로막았다."아우야, 그만하거라."기정태는 답답함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기씨 어르신은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너희 형제는 조상님들의 위패 앞에서 맹세하거라. 만일 장천이의 목숨을 해친 자가 밝혀진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이다!"기정혁은 미간을 찌푸렸고, 기정태는 표정이 굳어졌다.기씨 어르신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몰아세웠다."왜, 못 하겠느냐? 나는 지난 수십 년간 가문을 위해 온 힘을 다하며 너희 형제가 화목하기만을 바랐다. 사사로운 욕심으로 형제끼리 서로 해치는 꼴을 보려던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의절한다는 문서까지 써 주었건만, 끝내 그 아이의 목숨조차 살려 두지 않았다!"기장천의 죽음은 기씨 어르신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일이었다.남은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범인을 찾아내어 손자의 원한을 풀어 줄 생각이었다.기
기정혁은 성씨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아차리고 다급히 말했다."제수도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기씨 어르신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그 아이는 장천이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기정혁은 등줄기가 서늘해져 말문이 막혔다.최근 집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되짚어 보니 둘째네의 행보가 확실히 석연치 않았다.기씨 어르신은 거칠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셋째는 등뼈가 부러져 앞길이 막힌 채 매일 침상에 누워 한숨만 쉬고 있다. 오직 장천이가 잘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이제 장천이마저 죽었으니 셋째네는 무슨 희망으로 살겠느냐? 너희는 내가 셋째네만 편든다고 원망했겠지……."기정혁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아버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그러나 기씨 어르신의 차가운 눈빛에 기정혁은 입을 다물었다.입으로는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마음속에 서운함이 없을 리 없었다.분가한 뒤로 작위 문제는 기정혁의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고, 밖에 나가면 벗들도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집으로 돌아와 아내 연씨의 실망 어린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속이 편치 않았다.기씨 어르신은 기정혁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만약 장천이의 죽음에 집안사람이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아이를 이대로 억울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기정혁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기정태와 성씨는 평소 금슬이 각별했다.성씨를 건드렸다가는 기정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기장준까지 걸려 있었다.기씨 어르신은 낮게 소리쳤다."대답하거라!"기정혁은 굳은 표정으로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두 동생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였다.그때 눈치 빠른 시동이 달려가 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정태가 도착했다.기정태는 걸음을 재촉해 다가오며 물었다."아버지,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기씨 어르신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려 기정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기정태는 서늘한 눈빛에 화들짝 놀라며 불렀
허씨와 기씨 양가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경조판사가 판결을 내리기도 전에 허씨 가문의 둘째 부인은 수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허씨 가문에서는 시신을 거두어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다.허씨 노부인은 후한 예물을 챙겨 들고 기씨 저택 대문 앞까지 걸어와 사죄했다.기씨 어르신은 지팡이를 짚고 밖으로 나왔다.불과 보름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듯 양쪽 귀밑머리가 하얗게 샜고, 살이 빠져 옷이 헐렁해졌다.예전의 근엄한 눈빛은 탁하게 흐려진 채 허씨 노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허씨 노부인은 허리를 굽히며 무릎을 꿇으려는 시늉을 했다."어르신, 우리 허씨 가문이 기씨 가문에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곁에 있던 시녀가 서둘러 만류했다.허씨 노부인은 못 이기는 척 다시 몸을 일으켰다.기씨 어르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주변에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허씨 노부인은 한층 더 겸손하고 진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 서신은 우리 집안의 못된 둘째 며느리가 필적을 흉내 내어 쓴 것이었고, 그 때문에 기 공자가 변을 당했습니다. 기 공자는 정 깊은 사람이라 지은이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파혼하려 했던 것입니다. 저는 손녀를 잃은 슬픔에 눈이 멀어 헛소문을 믿고, 기씨 가문을 오해한 것입니다."허씨 노부인은 목이 메어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모두 우리 허씨 가문의 잘못입니다. 오늘 기씨 가문에서 저를 때리고 꾸짖으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기장천의 누명이 벗겨졌다.둘째 부인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으니 이제 진위를 따질 수도 없었다.경조판사까지 사건을 종결한 마당에 기씨 어르신이 계속 물고 늘어진다면 옹졸하다는 비난을 받을 판이었다.그 속내를 뻔히 아는 기씨 어르신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구경꾼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허씨 가문에서도 사람이 셋이나 죽었으니 이제 비긴 셈이지."그
“지영아,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느냐?”송씨는 못 말리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날은 오해가 좀 있었단다. 선주는 내가 따끔히 혼내 두었어.”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어찌 작은어머니와 선주에게 화를 내겠어요. 운부 비단은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들었어요. 일부 무늬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던데, 구하시느라 참 힘드셨겠어요. 감동이에요, 작은어머니.”그 말을 들은 송씨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역시 그 멍청함은 어디 안 가는구나!’유지영은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집안의 맏언니로서 당연히 동
“언니, 설마 이미 경왕 세자와 혼약을 정한 건 아니죠?”그때 갑자기 다가온 유선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어젯밤에 주향이 언니 침소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경왕 세자인가요?”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유선주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언니, 일부러 말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언니도 참 어리석네요. 어찌 홧김에 경왕 세자 같은 분과 그런….”짝!유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선주의 뺨을 때렸다.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이내
수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배준형도 말이다. 유지영은 담담히 붉은 수구를 한 손에 쥔 채로 무대 위에 섰다.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그저 구경만 할 생각으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본 외숙모 한씨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혼약이 있거나 신분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말을 마친 한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지영아,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
주향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나머지 셋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채 무릎을 꿇고 빌었다.“부관, 저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조리 끌어내세요!”유지영은 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장 부관은 하는 수 없이 하인들을 불러 넷을 모두 끌어내게 하고 중개 어멈을 부르라고 일렀다.유지영은 그것마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중개인은 필요 없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게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성년례가 끝난 뒤 차차 처리할 생각이었다.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