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피안화: 나의 위태롭고 붉은 첫사랑 / [2부] 제15화: 뒤바뀐 타깃, 그리고 거울 너머의 독사

Share

[2부] 제15화: 뒤바뀐 타깃, 그리고 거울 너머의 독사

Author: 오필리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5 22:00:29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 입을 영원히 막아버리려 했던 끔찍한 계획.

그 소름 끼치는 진실을 깨달은 취조실 안에는, 유나의 억눌린 울음소리만이 낮게 맴돌고 있었다.

시은이는 철제 탁자 위에 올려진 유나의 마른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10년.

그 긴 시간 동안 시은이는 유나를 증오하며 살아왔다.

자신을 짓밟고 올라간 배신자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진실은,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던 유나 역시 죄책감 속에 갇혀 매일 약으로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시은이는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10년 동안 널 오해했어."

시은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네가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거, 제일 잘 아는 게 나였는데.

그냥 널 믿었어야 했는데…

그때는 화가 너무 나서, 눈이 뒤집혀서 네 전화도 다 무시했어.

미안해, 유나야."

시은이의 사과에 유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수갑이 부딪히며 차가운 쇳소리가 났다.

"아니야, 아니야… 혜림 언니가 무서워서 모른 척 방관했던 나도 똑같은 공범이야.

내가 미안해, 시은아. 진짜 미안해…."

두 사람은 철제 탁자를 사이에 두고 한참 동안 말없이 눈물을 삼켰다.

잠시 후, 시은이는 탁자 위에 놓인 조서 파일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젖은 눈매를 소매로 닦아낸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서려 있었다.

10년 전 자신의 꿈을 짓밟고, 10년 후 친구의 삶마저 망치려 한 진짜 배후.

시은이가 마주해야 할 다음 타깃은 명확했다.

.

.

시은이는 곧장 취조실을 옮겨 지하실에서 잡아 온 녀석들을 마주했다.

그녀는 철제 탁자 위로, 녀석들의 주머니에서 털어낸 대포폰과 통장 거래 내역서를 거칠게 내던졌다.

"네놈들 대포 통장으로 들어온 삼천만 원.

꼬리 자르려고 현금 세탁한 정황까지 이미 다 파악했어.

끝까지 입 다물고 마약 유통 독박 쓸래, 아니면 배후 불고 감형받을래?"

시은이의 서늘한 추궁과 들이밀어진 자금 추적 내역 앞에, 거들먹거리던 녀석들은 결국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복원된 대포폰의 메시지 기록에는 VIP 고객 '강혜림'의 구체적인 지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유나의 대기실에 침입해 약통을 바꿔치기한, 혜림 측 매니저의 동선이 찍힌 방송국 CCTV 화면을 확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다음 날, 청람고등학교 특별 상담실.

간밤에 시은이에게 10년의 지독한 전말과 수사 정황을 모두 전해 들은 나는, 굳은 얼굴로 두 아이 앞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내 맞은편에는 사색이 된 민재와 수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덜덜 떨고 있었고, 시은이는 팔짱을 끼고 묵묵히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너희들이 그동안 심부름이랍시고 배달했던 쇼핑백, 전부 마약이었다."

내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두 아이의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다.

수아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금 사실대로 말하고 증거를 넘기면, 단순 가담자로 참작받을 수 있게 저기 있는 지안이…

아니, 이시은 형사님이 도와줄 거다. 너희들 인생 망가지지 않게 선생님이 끝까지 책임지고 막아줄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다 털어놔."

나의 단단하고 진심 어린 눈빛에, 결국 수아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저희도 중간부터 이상한 거 눈치챘는데…

그 형들이 학교랑 집 주소까지 다 알아내서, 도망치면 묻어버린다고 협박했어요…."

민재 역시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그동안 지시를 받았던 메신저 내역과 접선 장소가 적힌 수첩을 내밀었다.

조직의 말단 꼬리인 미성년자 운반책부터, 윗선인 지하실 공급책, 그리고 배후의 강혜림까지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완벽하게 확보되는 순간이었다.

.

.

그날 오후, 청담동의 최고급 프라이빗 숍.

화려한 조명 아래서 메이크업을 받던 강혜림이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화장대 위로 던졌다.

"아, 진짜 박유나 얘는 어디 가서 안 오는 거야?

내일모레가 콘서트인데 혼자 잠적하면 어쩌자는 건데?"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았지만, 혜림의 입가에는 묘하게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눈엣가시 같던 유나가 마약 스캔들로 완전히 매장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자의 여유였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VIP 룸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울을 통해 들어온 불청객을 확인한 혜림의 두 눈이 당혹감으로 커졌다.

하지만 혜림은 이내 특유의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반가운 척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시은아! 네가 여기 웬일이야? 너 혹시 기자라도 된 거야? 아니면 매니저?"

혜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뱀처럼 간교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긴, 너도 10년 전에 유나 그 기집애 때문에 맘고생 많았지?

나도 어쩔 수 없이 걔랑 같은 그룹으로 활동하느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이건 비밀인데, 걔 요새 마약까지 손댔잖아."

그 뻔뻔하고 소름 끼치는 연기에, 시은이는 헛웃음을 흘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년의 그 가증스러운 혀놀림에 속아 넘어가서, 10년 동안 진짜 친구를 의심했던 내가 병신이었지."

서늘하게 뱉어낸 시은이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가죽 케이스를 꺼내 화장대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번쩍이는 경찰 신분증을 확인한 혜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가짜 미소가 증발하고 핏기가 가셨다.

"박유나 공황장애 약에 신종 마약 섞어 넣은 혐의.

그리고 폐당구장 마약 공급책들에게 뒷돈 댄 혐의.

너 꼬리 자르려고 썼던 그 대포폰, 지하실 놈들 털어서 이미 다 확보했어."

시은이가 한 걸음 다가서자, 궁지에 몰린 혜림이 하이힐을 신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룸 안쪽의 굳게 닫혀 있던 파우더룸 문이 열리며 묵직한 구두 발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일 처리 똑바로 안 하냐."

거칠고 쇳소리 섞인 목소리.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혀를 차며 걸어 나왔다.

그를 발견한 강혜림이 패악을 부리듯 악을 쓰며 소리쳤다.

"10년 전에 저 년 확실히 조져놨다며! 근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야!!"

혜림의 앙칼진 비명에, 남자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려 거울 너머의 시은이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얽힌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

남자의 굵은 목덜미를 흉측하게 휘감고 있는 뱀 문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0년 전 낡은 폐공장에서 나를 인질로 잡고 시은이를 시멘트 바닥에 짓밟았던 태성공고 패거리의 우두머리.

독사였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피안화: 나의 위태롭고 붉은 첫사랑   [2부] 제15화: 뒤바뀐 타깃, 그리고 거울 너머의 독사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 입을 영원히 막아버리려 했던 끔찍한 계획. 그 소름 끼치는 진실을 깨달은 취조실 안에는, 유나의 억눌린 울음소리만이 낮게 맴돌고 있었다. 시은이는 철제 탁자 위에 올려진 유나의 마른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10년. 그 긴 시간 동안 시은이는 유나를 증오하며 살아왔다. 자신을 짓밟고 올라간 배신자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진실은,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던 유나 역시 죄책감 속에 갇혀 매일 약으로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시은이는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10년 동안 널 오해했어." 시은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네가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거, 제일 잘 아는 게 나였는데.그냥 널 믿었어야 했는데…그때는 화가 너무 나서, 눈이 뒤집혀서 네 전화도 다 무시했어.미안해, 유나야." 시은이의 사과에 유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수갑이 부딪히며 차가운 쇳소리가 났다. "아니야, 아니야… 혜림 언니가 무서워서 모른 척 방관했던 나도 똑같은 공범이야.내가 미안해, 시은아. 진짜 미안해…." 두 사람은 철제 탁자를 사이에 두고 한참 동안 말없이 눈물을 삼켰다. 잠시 후, 시은이는 탁자 위에 놓인 조서 파일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젖은 눈매를 소매로 닦아낸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서려 있었다. 10년 전 자신의 꿈을 짓밟고, 10년 후 친구의 삶마저 망치려 한 진짜 배후. 시은이가 마주해야 할 다음 타깃은 명확했다. .. 시은이는 곧장 취조실을 옮겨 지하실에서 잡아 온 녀석들을 마주했다.

  • 피안화: 나의 위태롭고 붉은 첫사랑   [2부] 제14화: 맞춰진 10년의 퍼즐, 그리고 뱀 문신의 기억

    "너 진짜 경찰 된 거야? 와… 어제 싸우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응?" 끔찍한 마약 사범으로 체포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기괴할 정도로 해맑고 뜬금없는 인사. 조서 파일을 철제 탁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시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헛웃음을 쳤다. "그래. 10년 전에 네가 내 꿈 박살 내준 덕분에 아주 잘 지냈다. 잡소리 그만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시은이의 차갑고 날 선 목소리에, 유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증발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어깨를 크게 움츠리며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저었다. "모, 몰라! 나 진짜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냥 어제 대기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 떠보니까 거기 지하실이었어! 진짜야, 나 믿어줘 시은아!" 벌벌 떠는 유나의 모습에 시은이는 혀를 찼다. 마약 사범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흔히 내뱉는 뻔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고 자료가 쌓일수록, 서류를 넘기는 시은이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졌다. 증거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너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작정하고 박유나 한 명을 옭아매기 위해 치밀하게 짜 맞춘 시나리오처럼 말이다. 압수된 마약 봉투에는 유나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봉투를 건넸을 공급책의 지문은 화학 약품으로 꼼꼼하게 문질러 지운 흔적이 감식 결과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나의 지문만 의도적으로 남겨둔 형태였다. 게다가 조사를 통해 드러난 유나의 현실은 처참했다. 화려한 연예계 생활은 껍데기일 뿐, 그녀는 오래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소속사 팀 내에서도 철저하게 고립되어 스케줄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

  • 피안화: 나의 위태롭고 붉은 첫사랑   [2부] 제13화: 피 묻은 유리 조각, 그리고 수갑을 찬 요정

    "읏…."마지막 유리 조각이 살갗을 빠져나오자, 시은이가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꽉 깨물었다.나는 피 묻은 파편을 은색 트레이에 내려놓고, 소독약을 적신 거즈로 시은이의 발바닥을 꾹 눌렀다. 하얀 거즈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상처가 깊어. 며칠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야."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붕대를 감기 시작했지만, 시은이는 대답이 없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소파에 기대앉은 시은이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멍하게 흩어져 있었다.10년 전,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던 박유나를 그 눅눅한 지하실에서 마주한 충격이 여전히 시은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박유나."시은이의 입술이 달싹이며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 기집애, 뼈만 남아서 덜덜 떨고 있더라. 초점도 다 풀려서 나를 보면서 실실 웃기나 하고."시은이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가 잘게 경련했다."내 10년을 망친 년인데… 막상 약에 쩔어서 바닥을 기는 꼴을 보니까, 속이 후련하기는커녕 피가 거꾸로 솟아."시은이의 눈동자에 서늘한 불꽃이 일었다.그녀는 갑자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붕대가 감긴 발을 억지로 바닥에 디디며 겉옷을 집어 들었다."나 지금 다시 가봐야겠어.""뭐? 어딜 가. 지금 걷지도 못하잖아!""그 지하실 놈들 대가리, 오늘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대체 누구한테 약을 받은 건지, 왜 유나가 저기서 저 꼴로 있는지 다 토해내게 만들 거야!"시은이가 절뚝거리며 현관 쪽으로 걸음을 뗐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은이의 앞을 가로막고, 겉옷을 쥔 그녀의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비켜, 윤태경.""못 비켜.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 피안화: 나의 위태롭고 붉은 첫사랑   [2부] 제12화: 눅눅한 지하실, 그리고 끝나지 않은 악연

    찌는 듯한 한여름의 늦은 밤. 낡은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던 자취방 창밖으로,거친 오토바이 배기음이 다가와 멎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띠리릭- 도어록이 열리고, 땀과 흙먼지, 그리고 옅은 피비린내를 달고 들어온 시은이가 현관 벽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은아! 너 꼴이 왜 그래. 다친 데는? 일은 어떻게 됐어?""아… 물 좀 줘. 갈 길이 한참 멀다." 내가 다급히 건넨 차가운 생수를 단숨에 반 병이나 비워낸 시은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터진 입술이 열리고, 오늘 밤 벌어진 위장 수사의 전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미끼를 완전히 물었어." 시은이가 툭 던진 첫마디였다. 그동안 학교에서 3학년 MZ조폭 끄나풀 녀석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둔 결실이었다. 오늘 하교 시간, 3학년 무리의 우두머리가 민재를 은밀히 불러냈다. '오늘 밤 변두리 폐당구장 쪽으로 물건 하나 배달 갈 건데, 그 깡다구 좋은 전학생 년도 데려와라. 입 무거워 보이니까 잔심부름이나 좀 시키게.' 통을 좁게 줄인 낡은 교복 바지에, 맨발로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끄는 폼새. 시은이는 완벽한 불량학생의 모습으로 민재와 함께 폐당구장으로 향했다. 당구장 안쪽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덩치 큰 양아치들은 시은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충 걸친 교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예쁘장한 외모를 확인한 녀석들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야, 넌 꼴랑 쇼핑백이나 나를 와꾸가 아닌데?" 녀석 중 하나가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 피안화: 나의 위태롭고 붉은 첫사랑   [2부] 제11화: 멈춰 있던 계절을 건너온 붉은 비키니, 그리고 얽혀든 밤

    5월의 끝자락. 초여름의 끈적한 열기가 교정에 내려앉은 오후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구관 복도를 순찰하던 내 곁으로, 아이들과 매점을 다녀오던 시은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그녀는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뾰족한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기대감이 잔뜩 서린 까만 눈동자. 하지만 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오늘? 목요일이잖아. 분리수거 하는 날." 내 건조한 대답에 시은이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집어삼키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셔츠 소매를 꼬집듯 틀어쥐었다. "그래, 분리수거나 실컷 해라, 윤태경. 재활용도 안 되는 인간아." 시은이는 뾰루퉁한 얼굴로 휙 돌아서서 교실을 향해 쿵쿵거리며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 [시은아, 나 오늘 교무실에 급한 업무가 좀 남아서. 도어록 비밀번호 치고 먼저 들어가 있어.] 시은이에게 거짓말 문자를 남겨둔 나는, 지금 내 자취방 한가운데서 앞치마를 두른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광등은 끄고 구석의 노란 스탠드 조명들만 켜두어 방 안을 제법 그럴싸한 무드로 꾸며놓은 참이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아침부터 푹 끓인 미역국과 갈비찜 냄새가 달큰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단맛이 적고 묵직한 바디감이 일품인 레드 와인의 코르크를 따서 열어두고, 얇고 유려한 곡선의 크리스털 와인잔 두 개를 나란히 세팅했다. 평소 같으면 늘어난 반바지에 티셔츠 차

  • 피안화: 나의 위태롭고 붉은 첫사랑   [2부] 제10화: 어둠 속의 입맞춤, 그리고 10년 전의 도주극

    창고 밖에서는 김 선생의 구두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속,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시은이의 까만 눈동자와 끈질기게 시선이 얽혀들었다.시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아안으며 그대로 입술을 덮었다."읏…."시은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던 놀란 숨을 내가 깊게 삼켰다.그녀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내 목을 감아왔다.문밖에서 김 선생이 창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덜그럭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심스럽던 입맞춤은 그 위태로운 긴장감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짙고 거칠어졌다.서로의 숨이 얽히는 소리만이 좁은 창고 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밖으로 갔나…."김 선생의 중얼거림과 함께 구두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둠 속에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시은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물었다."어쩌자고 애들하고 술을 마셨어. 들키면 어쩌려고."내 물음에 시은이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스윽 닦아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수아가 가방에 몰래 챙겨왔더라고. 안 마시려고 했는데… 옛날 생각도 좀 나고, 오늘 기분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반 병이나 마셔버렸네."시은이의 대답에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10년 전, 우리의 수학여행 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10년 전 그날 밤도 그랬다.방에서 비밀리에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미친개' 학생주임의 서슬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