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 하교 시간.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에서 기어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교무실 창문 너머로, 발바닥의 끔찍한 통증 탓에 빗속을 미세하게 절뚝거리며 걷는 시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얇은 어깨. 그때, 하필이면 질이 안 좋기로 소문난 3학년 남학생 하나가 껄렁거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우산을 불쑥 들이미는 것이 보였다. "어이, 전학생. 비 오는데 오빠가 씌워줄까?" "됐어요. 비키시죠." "에이, 비 다 맞잖아. 나랑 밥이나 먹으러 가자니까?" 시은이가 짜증 섞인 얼굴로 밀어내려 했지만, 녀석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나는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교무실에 있던 장우산을 빼 들고 미친 듯이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어이, 거기."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진 내 묵직한 목소리에 3학년 녀석이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시은이의 젖은 어깨 위로 내 커다란 검은색 우산을 씌워주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전학생. 오늘 너희 학부모님 뵙기로 한 날인 걸 방금 깨달았지 뭐냐." 나의 매서운 눈빛과 '학부모 면담'이라는 말에, 3학년 녀석은 "아, 넵! 안녕히 계십시오!" 하며 허둥지둥 도망쳐버렸다.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나는 우산 손잡이를 고쳐 쥐고 시은이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순간, 골목 코너를 돌던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물웅덩이를 밟으며 우리 쪽으로 바짝 붙어 지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우산을 쥔 반대쪽 팔을 뻗어, 시은이의 얇은 허리를 확 낚아채 내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철썩-! 흙탕물이 내 바짓단을 적셨지만, 내 신경은 오직 내 품 안에 갇혀버린 시은이에게 쏠려 있었다. "……!"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 비에 젖은 그녀의 샴푸 향과 내 스킨 향이 좁은 우산 아래서 아찔하게 엉켜 들었다. 얇은 교복 셔츠 너머로 그녀의 뜨거운 체온이 내 단단한 팔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가슴팍에 빈틈없이 안긴 꼴이 된 시은이의 커다란 두 눈동자가 당황으로 잘게 흔들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빗소리마저 먹어 치운 듯한 고요 속에서, 그녀의 옅고 가빠진 숨결이 내 턱끝을 아슬아슬하게 간지럽혔다. "…야, 이거 놔. 애들 본다." 시은이는 귀끝이 붉게 달아오른 채, 황급히 내 가슴팍을 밀어내며 후다닥 우산 밖으로 떨어졌다. 나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따라와. 차에 타." 주차장 구석에 세워둔 말리부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웅크리고 앉은 시은이는 어색한 듯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에 젖은 한기를 덜어주려 히터를 틀기 위해 내가 센터페시아 쪽으로 손을 뻗은 순간, 무릎에 얹혀 있던 시은이의 손등과 내 손끝이 살짝 스쳤다. 순간 우리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좁은 차 안을 가득 채운 빗소리 사이로, 무겁게 가라앉은 서로의 숨소리만이 짙게 얽혀들었다. "…바보같이, 다 젖었네." 침묵을 깨고, 시은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오른쪽 어깨를 툭 가리켰다. 우산을 그녀 쪽으로 완전히 기울여준 탓에, 내 오른쪽 셔츠 소매가 빗물에 흠뻑 젖어 살갗에 들러붙어 있었다. "어깨가 옛날보단 좀 넓어져서 그런가, 우산이 작더라." 나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시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미친놈." 시은이는 욕을 내뱉으며 황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보다시피. 경찰 배지 달고 흉악범들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일만 하면서 살았어." 신호 대기에 걸려 차가 멈췄을 때, 시은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근데 윤태경. 너 진짜… 왜 이렇게 키가 컸냐." 그녀의 입가에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주 옅고도 부드러운 진짜 미소가 번져갔다. . 어느새 차가 시은이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나는 우산을 펴고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고마워. 갈게." 시은이가 짧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내 손에 쥐어진 우산 손잡이와 빗속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발끝만 꼼지락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들어올래?" . . 좁고 깔끔한 시은이의 자취방. "마셔." 시은이가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캔 음료를 내밀며 테이블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김민재, 그 자식 교내 조폭들한테 약 유통받는 끄나풀이야. 오늘 일부러 눈에 띄려고 판 짠 건데, 네가 눈치채고 날 잘 끌어냈어." 수사 상황을 브리핑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발바닥의 욱신거림 때문인지 미간이 자꾸만 찌푸려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구급상자를 가져와,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뭐 해." "약 바르자." 내가 그녀의 다리를 살짝 끌어당기자, 시은이는 흠칫 놀라면서도 10년 전 그날처럼 순순히 몸을 돌려 엎드렸다. 시뻘겋게 핏줄이 터지고 부어오른 그녀의 두 발바닥이 허공으로 들렸다. 나는 차가운 연고를 듬뿍 짜내어, 상처 위를 조심스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읏…." 내 큰 손이 발바닥을 어루만질 때마다 시은이의 발가락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거칠고 투박한 내 손가락이, 상처로 한껏 예민해져 있는 그녀의 얇고 매끄러운 발아치 위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상처를 확인하느라 내가 한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발목을 단단하게 틀어쥐자, 시은이의 엎드린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단순한 통증 때문만은 아닌, 묘한 긴장감이 방 안의 공기를 조여왔다. 나는 붉게 부어오른 상처를 내려다보며,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하다, 시은아. 내가 때려놓고 약을 바른다는 게 미친놈 같지만... 아까 네가 덜덜 떨 때 나도 미치는 줄 알았어." 나의 짙은 자책에, 엎드려 있던 시은이는 픽 웃음을 흘리며 작게 대꾸했다. "누가 보면 네가 맞은 줄 알겠다. 수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니까 자책하지 마. 근데 진짜 맵긴 하더라." 연고가 스며들 무렵, 시은이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물었다. "넌 어떻게 선생님이 된 거야? 그것도 호랑이 쌤이라니." "...방황하는 아이들이 엇나가지 않게, 곁에서 제대로 지도해주고 싶었어. 10년 전의 너처럼 혼자서 아파하는 애들이 없도록." 나의 덤덤한 대답에 시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동안… 만난 사람은 없었어?" 시은이의 발을 어루만지던 손을 멈추고,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나의 맹목적인 눈빛에 시은이의 숨결이 찰나의 순간 멎었다. "한 명도 없었어. 찾을 사람이 있어서 바빴거든." 방 안의 공기가 일순간 끈적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망갈 곳 없는 좁은 방 안, 침묵 속에서 우리의 시선만이 끈질기게 얽혀들고 있었다.좁은 자취방에서 서로의 온기를 확인했던 그 뜨거웠던 밤 이후, 학교에서의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무자비한 '호랑이 담임'과 '구제 불능 전학생'이었지만, 교차하는 시선 속에는 오직 둘만이 아는 은밀한 열기가 맴돌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복도 순찰을 돌던 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시은이의 모습 때문이었다. 나는 멈칫하며, 그녀의 짙은 립스틱과 지나치게 짧은 치마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복장 불량. 학생부 문서보관실로 따라와." 나는 차갑게 명령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시은이는 아이들이 보는 앞이라 작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이내 묵묵히 내 뒤를 따랐다. 창문 하나 없이 캐비닛만 빼곡하게 들어찬 좁고 어두운 문서보관실. 시은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철컥, 소리가 나도록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뒷걸음질 치던 시은이의 등이 차가운 캐비닛에 닿았다. 나는 양팔을 뻗어 캐비닛을 짚고, 그녀를 내 넓은 어깨와 가슴팍 사이의 그림자 안에 완벽하게 가두어버렸다. 시은이가 얼굴을 들려던 찰나,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에 발린 짙은 립스틱을 스윽, 거칠게 문질러 닦아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런 진한 화장에 치마를 줄여." 나의 짙고 억눌린 목소리가 좁은 방 안을 울렸다. "아무리 수사 때문이라도, 내 눈 돌아가는 꼴 보고 싶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시은이가 어이없다는 듯 따져 물었다. "아니, 왜 10년 전하고 비밀번호가 똑같아? 1204. 설마 하고 눌러봤는데 덜컥 열려서 소름돋았네. 어쩌려고 비번도 안 바꾸고 살아, 위험하게." 그녀의 타박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 언제든 들어오라고 안 바꾼 건데." 내 무심한 대답에 시은이의 잔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붉어진 귀끝을 숨기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피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 씻고 와. 밥 해줄게." 도마 위에서 양파와 소고기를 써는 동안, 시은이는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내 뒷모습을 빤히 구경했다. "야, 고기 냄새 장난 아니다. 근데 우리 이 좋은 안주에 술은 없어?" 시은이가 짓궂은 눈웃음을 지으며 묻자, 나는 프라이팬의 불을 줄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우리 진짜 알코올 중독인 거 아니냐. 만날 때마다 술이네." "뭐 어때. 형사가 흉악범들 상대하려면 알코올 소독은 필수야." 뻔뻔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주방 구석의 작은 와인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눕혀두었던 레드와인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왔다. "그래, 뭐 내일 주말이니까."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묵직한 와인병을 보며 시은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오, 뭔가 좀 비싸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두는 사이,시은이는 익숙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좁은 주방의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매콤하고 익숙한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좁은 도마 위에서 고기를 썰고 찌개를 끓이는 뒷모습. 10년 전, 내 18세 생일날,좁은 방에 찾아와 묵묵히 찌개를 끓여주던 그날의 어깨가 눈앞의 실루엣에 고스란히 겹쳐졌다. "앉아. 다 됐어." 작은 밥상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와 하얀 쌀밥, 그리고 노릇하게 구워진 소고기가 올려졌다. 시은이는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소주 한 병과 유리잔 두 개를 꺼내 왔다. 자리에 마주 앉은 그녀가 내 잔에 투명한 액체를 채워주며, 픽 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둘이 마주 앉아서 소주 마시는 건 처음이네." "그러게. 10년 전엔 기껏해야 캔맥주 몰래 마시는 게 다였는데." 유리잔이 짧은 마찰음을 내며 부딪혔다. 알싸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꼿꼿하게 서 있던 시은이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첫 잔이 비워지고 두 잔, 세 잔. 말없이 비워지는 술잔의 속도가 꽤 빨랐다. "천천히 마셔. 빈속이잖아." 내가 만류하려 했지만,시은이는 대답 대신 마지막 남은 소주를 내 잔에 마저 털어 넣었다. 바닥을 드러낸 초록색 빈 병을 가볍게 흔들어 보던 그녀가,문득 생각난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잠깐만 기다려 봐. 오늘 같은 날 마시려고 아껴둔 진짜 좋은 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시은이가 구석에서 묵직한 나무 케이스 하나를 꺼내 왔다. 찰칵,걸쇠를 풀고 그녀가 밥상 한가운데에 내려놓은 것
숨 막힐 듯 팽팽했던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시은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텐션을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황급히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어… 너 경찰학교 수료식 사진 같은 거 없어?" 내가 어색한 공기를 환기하려 묻자,시은이는 기다렸다는 듯 폰을 꺼내 늠름한 정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와, 너 정복 입은 거 보니까 진짜 딴 사람 같네. 엄청 멋있다.""당연하지. 내가 원래 제복 핏이 좀 살아." 나 역시 사범대 졸업식 때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푸하핫, 윤태경. 너 머리 짧게 자른 거 진짜 어색하다. 10년 전 그 덥수룩한 빵셔틀 머리가 더 어울리는데?" "놀리지 마라. 나름 우리 과 에이스였거든." 서로의 지난 사진들을 넘기며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10년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몽글몽글했던 텐션도 잠시. 대화가 끊어지자,시은이는 말없이 내 손에 쥐여 있던 자신의 발을 천천히 빼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고는 제 무릎만 만지작거렸고,꾹 다문 입술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그 묘한 정적을 읽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다. 나 먼저 가볼게. 피곤할 텐데 푹 쉬어." "어? 벌써 가…?" 내가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신는 동안,시은이는 대답 없이 현관까지 따라 나와 섰다.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그녀는 문고리를 쥔 채 발끝만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있었다. "내일 또 보자. 잘 자, 시은아." 내가 빙긋 웃으며 돌아서자,등 뒤로 철컥, 하고 도어록이 잠기는
그날 하교 시간.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에서 기어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교무실 창문 너머로,발바닥의 끔찍한 통증 탓에 빗속을 미세하게 절뚝거리며 걷는 시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얇은 어깨. 그때, 하필이면 질이 안 좋기로 소문난 3학년 남학생 하나가 껄렁거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우산을 불쑥 들이미는 것이 보였다. "어이, 전학생. 비 오는데 오빠가 씌워줄까?" "됐어요. 비키시죠." "에이, 비 다 맞잖아. 나랑 밥이나 먹으러 가자니까?" 시은이가 짜증 섞인 얼굴로 밀어내려 했지만, 녀석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나는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교무실에 있던 장우산을 빼 들고 미친 듯이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어이, 거기."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진 내 묵직한 목소리에 3학년 녀석이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시은이의 젖은 어깨 위로 내 커다란 검은색 우산을 씌워주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전학생. 오늘 너희 학부모님 뵙기로 한 날인 걸 방금 깨달았지 뭐냐." 나의 매서운 눈빛과 '학부모 면담'이라는 말에,3학년 녀석은 "아, 넵! 안녕히 계십시오!" 하며 허둥지둥 도망쳐버렸다.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나는 우산 손잡이를 고쳐 쥐고 시은이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순간, 골목 코너를 돌던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물웅덩이를 밟으며 우리 쪽으로 바짝 붙어 지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우산을 쥔 반대쪽 팔을 뻗어,시은이의 얇은 허리를 확 낚아채 내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나의 손을 단칼에 쳐낸 시은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놈들 눈에 띄려면, 난 이 학교에서 가장 통제 안 되는 최악의 불량학생이 되어야 해.""…….""소문 쫙 퍼졌더라. 네가 애들 잡는 '호랑이 쌤'이라고."시은이가 내 넥타이를 거칠게 훅 당기며 눈을 똑바로 맞춰왔다.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은은하게 퍼지는 낯선 샴푸 향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그 별명답게 굴어. 내가 학교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얄짤없이 똑같이 체벌하고 밟아 놔. 나한테 10년 전의 알량한 죄책감이나 동정심 갖는 순간, 내 잠입은 들통나고 수사는 끝이야."시은이는 쥐고 있던 내 넥타이를 툭 놓고는,책상 위에 메모지 한 장을 던졌다."내 폰 번호야. 수사와 관련된 비상 상황 아니면 절대 연락하지 마."당당하게 돌아서서 교무실을 나가는 시은이.나는 멀어지는 그 좁은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그래. 10년 전에는 내가 약해서 널 놓쳤지만, 이번엔 절대 떠나가도록 두지 않아.'..그날 이후,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하지만 이성적인 통제와는 별개로,내 시선은 하루 종일 시은이의 주변을 집요하게 맴돌고 있었다.쉬는 시간, 소란스러운 복도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때면 어김없이 멀리서 걸어오는 시은이의 모습이 꽂혔다.무심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가오는 시은이와, 굳은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걸어가는 나.어깨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짧은 찰나.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스쳐 지나간 직후 내 등줄기에 꽂히는 묵직한 감각만으로도,시은이 역시 나를 끈질기게 의식하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