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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제4화: 좁은 차 안의 숨결, 그리고 두 번째 초대

Author: 오필리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5 22:00:49

숨 막힐 듯 팽팽했던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시은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텐션을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황급히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어… 너 경찰학교 수료식 사진 같은 거 없어?"

내가 어색한 공기를 환기하려 묻자,

시은이는 기다렸다는 듯 폰을 꺼내 늠름한 정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와, 너 정복 입은 거 보니까 진짜 딴 사람 같네. 엄청 멋있다."

"당연하지. 내가 원래 제복 핏이 좀 살아."

나 역시 사범대 졸업식 때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푸하핫, 윤태경. 너 머리 짧게 자른 거 진짜 어색하다. 10년 전 그 덥수룩한 빵셔틀 머리가 더 어울리는데?"

"놀리지 마라. 나름 우리 과 에이스였거든."

서로의 지난 사진들을 넘기며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10년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몽글몽글했던 텐션도 잠시.

대화가 끊어지자,

시은이는 말없이 내 손에 쥐여 있던 자신의 발을 천천히 빼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고는 제 무릎만 만지작거렸고,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그 묘한 정적을 읽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다. 나 먼저 가볼게. 피곤할 텐데 푹 쉬어."

"어? 벌써 가…?"

내가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신는 동안,

시은이는 대답 없이 현관까지 따라 나와 섰다.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그녀는 문고리를 쥔 채 발끝만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있었다.

"내일 또 보자. 잘 자, 시은아."

내가 빙긋 웃으며 돌아서자,

등 뒤로 철컥, 하고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비 내리는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길을 찾은 것처럼 가볍기만 했다.

.

.

드르륵-!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시끌벅적하던 교실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내 시선은 곧장 교실 뒤편으로 향했다.

시은이가 민재의 책상 앞에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민재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시은이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출석부로 교탁을 탁, 쳤다.

"이지안. 또 발바닥 맞고 싶냐? 빨리 자리에 앉아라."

나의 으름장에 시은이는 나를 홱 노려보더니,

"칫." 하고 짧게 혀를 찼다.

그녀는 민재의 책상을 발끝으로 툭 차고는 창가 쪽 자기 자리로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꾹 눌러 참았다.

.

점심시간,

복도를 순찰하던 중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시은이가 앞장서서 걷고 있었고,

그 뒤로 민재와 수아가 바짝 얼어붙은 채 질질 끌려가듯 따라가고 있었다.

옥상이나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는 줄 알았던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들의 뒤를 밟았다.

하지만 세 녀석의 걸음이 멈춘 곳은 으슥한 공터가 아니라,

아이들로 북적이는 매점 앞이었다.

나는 아주 우연히 마주친 척,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들 뒤로 다가갔다.

"뭐 하냐, 너희들."

내 목소리에 세 녀석의 어깨가 동시에 흠칫 뛰었다.

나는 지갑을 꺼내며 무심하게 툭 던졌다.

"맘에 드는 거 골라라. 쌤이 쏜다."

"됐거든요."

시은이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손을 뻗어, 찰랑이는 시은이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어제 쌤이 때려서 미안해서 그런다. 많이 먹어둬라."

"아, 진짜! 뭐 하시는 거예요!"

시은이가 기겁하며 두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감싸 쥐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앙탈을 부리는 그 낯선 모습에,

옆에 잔뜩 굳어있던 민재와 수아의 입에서 "푸흡," 하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시은이의 고개가 무섭게 돌아갔다.

"이것들이 미쳤어? 웃었냐?"

시은이의 살벌한 눈빛에 민재와 수아가 사색이 되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엄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지안. 친구들이랑 또 싸울 거냐?"

나의 단호한 제지에 시은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팩 돌아서서 진열대의 딸기 우유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들었다.

.

하굣길. 교문을 빠져나와 차를 몰고 가던 중,

인도 위를 걷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시은이었다.

어제 무자비하게 맞은 발바닥이 여전히 아픈지,

그녀는 구두 뒤축을 구겨 신은 채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나는 차의 속도를 줄여 그녀의 옆으로 바짝 붙인 뒤,

조수석 창문을 스르륵 내렸다.

"타."

시은이는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더니, 주변을 슬쩍 살폈다.

아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철컥.

안전벨트를 매는 그녀의 셔츠 소매 끝에서 은은한 비누 향이 훅 퍼졌다.

"학교에서 친한 척하지 말라니까."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시은이가 툴툴거렸다.

"아까 매점에선 왜 그랬어. 애들 눈치채면 어쩌려고."

"눈치 안 채. 선생이 어제 매 맞은 애 달래주려고 빵 사주는 게 뭐 어때서."

"머리는 왜 헝클어뜨리는데."

"그건 그냥, 좀 귀여워서."

"뭐?!"

내 뻔뻔한 대답에 시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차창 유리에 비친 그녀의 귀끝은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어느새 차가 시은이의 낡은 자취방 빌라 앞에 멈춰 섰다.

나는 기어를 'P'에 놓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좁은 차 안에 단둘이 남겨지자,

에어컨의 미세한 모터 소리조차 신경 쓰일 만큼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약 꼭 챙겨 바르고."

"어. 갈게."

시은이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녀의 한쪽 발이 아스팔트 바닥에 닿았다.

그런데, 차에서 완전히 내리려던 그녀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시은이는 문손잡이를 꽉 쥔 채, 바닥의 돌멩이만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몇 번 달싹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윤태경."

"어."

"…저녁, 먹고 갈래?"

나를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핸들을 쥐고 있던 내 열 손가락에 일순간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내가 안전벨트를 풀며 무심코 상체를 그녀 쪽으로 기울이자,

닿을 듯 말 듯 좁혀진 거리에서 그녀가 숨을 흡, 하고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그리고 잠시 후, 나는 홀린 사람처럼 다시 한번 그녀의 자취방 문턱을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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