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호텔 연회장.
다다미 위에 스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모두 유카타 차림이었다. 평소 료칸에서 입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색감도 화려했고, 저마다 고른 무늬도 제각각이었다.
수려는 자신의 앞에 놓인 가이세키 요리를 바라봤다.
작은 상 위에 회, 구이, 조림, 식사와 국, 디저트까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료칸에서 손님들에게 내어드리던 가이세키를, 내가 손님 입장에서 먹게 되네.’
수려가 피식 웃었다.
‘이런 서비스는 H호텔에서도 한번 접목해볼 만한데…….’
옆에서 모토무라가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내가 이걸 먹어본다!”
“너 가이세키 처음이야?”
“응. 매번 대접만 했지, 먹어볼 기회는 없었거든.”
모토무라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바라봤다.
“손님들은 나 모르게 이런 행복을 즐기고 있었구나.”
“뭐야, 그게.”
수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코즈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오늘은 달빛 료칸의 최고 인기 가수, 코즈키의 특별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또 시작이네.”
누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곧이어 오키나와 전통 음악이 흘러나왔다.
조리팀 후배들이 뒤에서 손을 흔들며 분위기를 띄웠다.
“히야사사! 아이야!”
코즈키가 흥겹게 노래를 시작하자 연회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빠른 리듬 위로 삼선(三線)의 경쾌한 소리가 얹혔다.
코즈키가 어깨를 들썩이며 발을 구르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히야사사!”
후렴이 나올 때마다 연회장 절반이 함께 소리쳤다.
코즈키는 즉석에서 가사까지 바꿔 불렀다.
“코즈키가 우마레따~!”
억지로 끼워 넣은 가사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역시 코즈키 선배!”
코즈키는 노래를 이어가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던졌다.
“나 결혼은 세 번이나 한 남자야. 인생 경험이 많다는 거지.”
“그걸 왜 지금 자랑해!”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마지막 소절에서 코즈키가 마이크를 하늘로 치켜들자, 근처에 있던 몇몇이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짧은 무대였지만 여운은 꽤 오래갔다.
모두가 웃고 있었다.
코즈키가 자리로 돌아오자 신스케가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잡았다.
“저도…… 한 곡만.”
“좋아!”
박수와 함께 기대에 찬 시선이 신스케에게 모였다.
음악이 시작됐다.
그런데 분위기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전주부터 심상치 않았다.
낮게 깔리는 피아노 선율에 방금까지 손뼉을 치던 사람들의 손이 하나둘 무릎 위로 내려앉았다.
신스케는 감정을 가득 담아 노래했다.
“아이노우타…… 히비키…….”
젓가락을 든 채 얼어붙은 사람.
회를 집으려다 멈춘 사람.
술잔을 입에 대다 그대로 굳어버린 사람.
다들 말없이 신스케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눈시울을 붉혔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말없이 눈빛만 교환했다.
방금 전까지 축제였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장례식장 같은 분위기로 변했다.
모토무라가 소곤거렸다.
“……왜 갑자기 장례식장이 됐냐?”
“나 지금 소름 돋았어…….”
“얘 원래 이런 애였어?”
몇몇은 아예 표정 관리조차 포기한 채 입을 벌리고 신스케를 바라봤다.
노래가 절정으로 향하자 유코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스케! 실례인 줄 알지만 너 노래가 더 실례인 것 같아! 내려와! 놀러 왔는데 왜 사람을 울려!”
“맞아!”
누군가 소리쳤다.
“누가 신스케한테 마이크 줬어!”
여기저기서 원망 섞인 웃음이 터졌다.
스텝들이 웃으며 신스케를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연회장이 다시 웃음으로 가득 찼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유코가 노래방 기계 앞으로 달려갔다.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익스트림의 〈Sweet Life〉.
타쿠야의 표정이 굳었다.
“……유코. 왜 이 노래야?”
“왜긴 왜야.”
유코가 마이크를 건넸다.
“나 이 노래 다시 듣고 싶어.”
타쿠야는 마이크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타쿠야가 유코를 바라봤다.
유코는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었다.
그저 기다려주는 얼굴이었다.
타쿠야가 마이크를 천천히 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곡 해보자.”
“와아아아!!!”
“타쿠야!”
“진짜 부르는 거야?”
료칸 식구들의 함성이 터졌다.
타쿠야가 무대로 걸어갔다.
무대까지 채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리가 무거웠다.
한 걸음마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졌다.
무대 중앙에 선 타쿠야의 얼굴 위로 연회장의 흐릿한 불빛이 떨어졌다.
타쿠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작게 숨을 골랐다.
그때였다.
연회장 입구 쪽이 술렁였다.
“……타쿠야?”
“진짜 타쿠야잖아.”
오키나와 호텔 소속 직원 몇 명이 걸음을 멈추고 연회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익스트림을 열렬히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
데뷔 시절부터 콘서트를 챙겨 보던 직원도 있었다.
“쟤 진짜 오랜만에 노래하는 거 아니야?”
“1년 넘었지, 아마.”
누군가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다가왔다.
그 뒤로 또 한 사람이 따라왔다.
카트를 밀던 메이드도, 프런트를 지키던 직원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문가에 섰다.
큰 소란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저마다의 방식으로 타쿠야를 지켜봐 주러 온 것이었다.
타쿠야는 그 시선을 느꼈다.
목이 살짝 메었다.
‘……다들, 아직 기억하고 있었구나.’
첫 음이 시작됐다.
타쿠야가 움직였다.
베이스 라인이 바닥을 타고 울렸다.
다다미방 스피커치고는 제법 묵직한 진동이었다.
한 발을 축으로 몸을 틀자 유카타 자락이 따라 돌았다.
팔이 허공을 가르고, 어깨가 박자보다 반 박자 먼저 반응했다.
정확한 박자.
부드러운 춤선.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은 움직임.
“오오오!”
누군가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곧 여기저기서 손뼉 소리가 따라붙었다.
짝, 짝, 짝.
마치 무대 위에 서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수려는 타쿠야를 바라봤다.
‘이 사람은 역시 무대에 있을 때가 제일 빛나는구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조명 대신 흐릿한 연회장 불빛이었지만, 그 땀방울은 선명하게 반짝였다.
턴을 도는 순간 몇몇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 불빛이 여기저기서 반딧불처럼 켜졌다.
“찍어, 찍어!”
타쿠야의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다.
하지만 수려는 알 수 있었다.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그리움을.
무대가 그리웠던 것이다.
마지막 동작에서 타쿠야가 무릎을 낮췄다가 팔을 위로 뻗었다.
순간, 숨이 턱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꺄아아아!!!”
“아이시테루!”
정적을 깨고 함성이 터졌다.
손뼉과 휘파람, 발을 구르는 소리까지 뒤섞였다.
다다미방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타쿠야가 마지막 동작을 끝내고 내려오려는 순간이었다.
유코가 타쿠야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아직 하나 남았어.”
“뭐?”
유코가 노래방 기계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KKB의 〈Bitter Life〉.
수려 자신이 직접 작사하고 작곡했던 노래였다.
“…….”
타쿠야가 수려를 바라보며 웃었다.
“수려. 같이 하자.”
연회장 전체가 술렁였다.
“한수려!”
“한수려!”
“잠깐만.”
“설마…….”
“진짜 한수려?”
수려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하지만 타쿠야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수려는 그 손을 바라봤다.
잠시 망설였다.
처음 아이돌 무대에 올랐던 기억이 스쳤다.
환호성.
조명.
팬들의 함성.
그리고 그 뒤에 찾아왔던 상처.
수려의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타쿠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수려가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그래.”
수려가 작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한바탕 놀아보자.”
카메라도 없었다.
조명 감독도 없었다.
짜인 동선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이 무대를 기획하지 않았다.
한때 팬들 사이에서조차 쉽게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이었다.
KKB의 한수려와 익스트림의 타쿠야.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소속사.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활동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
작은 다다미 연회장에서 같은 무대에 서려 하고 있었다.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던 무대였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전주가 시작됐다.
기타 리프가 먼저 깔리고, 그 위로 낮은 드럼 비트가 얹혔다.
다다미 바닥까지 미세하게 울렸다.
수려가 마이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얼마 만이지.’
무대 조명 대신 다다미방의 형광등.
백만 관중 대신 료칸 동료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첫 소절이 흘러나오는 순간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수려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며 공간을 채웠다.
한 음, 한 음이 마이크를 타고 벽까지 닿았다.
타쿠야가 움직였다.
수려가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서로의 동작을 알고 있었다.
한 걸음.
턴.
손동작.
그리고 동시에 방향을 바꾸는 두 사람.
발끝이 다다미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유카타 자락이 스치는 소리까지 노래 사이사이에 섞여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연습해 온 팀처럼 정확했다.
수려는 노래를 부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노래, 이런 무대를 만들려고 쓴 게 아니었는데.’
〈Bitter Life〉는 원래 혼자 부르던 노래였다.
배신.
상처.
무너진 자리.
그 모든 것을 담아낸 노래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가사 위로 타쿠야의 춤이 겹쳐지자 노래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후렴으로 넘어가자 타쿠야가 수려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형광등 불빛 아래 하나로 겹쳐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눈빛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서로 알고 있었다.
‘고맙다.’
‘나도.’
KKB의 리더 한수려.
익스트림의 리더 타쿠야.
한때 각자의 나라에서, 각자의 무대에서 정점을 찍었던 두 사람이었다.
전혀 다른 그룹.
전혀 다른 언어.
전혀 다른 삶.
그런 두 사람이 지금 하나의 박자 위에 서 있었다.
콘서트 무대도 아니었다.
시상식 무대도 아니었다.
어떤 화려한 협업 기획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순간이 그 어떤 무대보다 특별했다.
아무런 준비도, 각본도 없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조합이 사람들의 눈앞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너무 잘 어울렸다.
“와…….”
문가에 서 있던 몇몇 직원들이 감탄사를 흘렸다.
아직은 조용히 지켜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연회장 문이 벌컥 열렸다.
“저기, 진짜예요?”
프런트 유니폼을 입은 직원 두 명이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누가 그러던데, 지금 한수려랑 익스트림 타쿠야가 같이 노래한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선이 무대로 향했다.
“……진짜잖아.”
한 직원이 옆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야, 빨리 다른 애들도 불러!”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문이 퍼졌다.
주방에서.
로비에서.
야간 근무를 준비하던 다른 층에서까지.
“타쿠야가 노래한대!”
“KKB 리더 아이돌이랑 같이!”
“빨리 와봐!”
문이 몇 번이고 열렸다.
사람들이 하나둘 밀려들었다.
유니폼을 미처 갈아입지 못한 직원.
휴대폰을 든 채 뛰어온 벨보이.
앞치마를 두른 채 달려온 주방 직원.
몇 분 전만 해도 스텝들만의 조촐한 연회였던 공간이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수려도 그 기세를 느꼈다.
‘……뭐야, 이거.’
하지만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들이 두 사람을 더 밀어붙이고 있었다.
간주가 흐르는 사이 누군가 소리쳤다.
“다시! 다시 한번 후렴!”
그 외침에 여기저기서 웃음과 박수가 터졌다.
마지막 소절이 다가왔다.
타쿠야가 수려에게 손을 뻗었다.
수려도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맞닿는 순간—
가득 찬 연회장 곳곳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졌다.
수려와 타쿠야가 등을 맞댔다.
그리고 마지막 후렴을 함께 마쳤다.
음악이 끝났다.
잠시 정적.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아!!!!”
연회장이 폭발했다.
박수와 환호성, 휘파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마이크도 없이 앙코르를 외쳤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얼싸안았다.
방금 전까지 이 무대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까지 하나가 되어 소리치고 있었다.
“이거 완전 미쳤다…….”
누군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걸 어디서 다시 봐.”
“이거 다시는 못 보는 무대일지도 몰라.”
그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타쿠야가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 기분.”
수려도 마이크를 내리며 웃었다.
“그러게.”
말은 짧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방금 그 몇 분이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다시 찾아준 시간이었다는 것을.
아베는 아무 말 없이 수려를 바라봤다.
처음이었다.
료칸에서 봤던 수려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무대 위의 수려는 눈부셨다.
아베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잠시 생각하던 아베가 혼자 피식 웃었다.
‘오늘 밤에는…… 키스해달라고 해야겠다.’
한편 지수는 아무 말 없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려가 웃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바로 그 표정.
무대 위에서 가장 행복해하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옆자리에는—
수려가 아닌 석준이 앉아 있었다.
지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수려의 인생에서 자신이 차지했던 자리가 이미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호텔 사장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사실 아이돌을 잘 모릅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하지만 오늘 이 무대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는 알겠습니다.”
사장은 잠시 수려와 타쿠야를 바라봤다.
“한국과 일본의 두 사람이 한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오늘 이 무대를 만들어주신 타쿠야상과 수려상.”
사장이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우리 달빛 료칸을 위해 열심히 일해주시는 여러분.”
사장이 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마음껏 즐깁시다!”
모두가 잔을 높이 들었다.
“간빠이!!!”
다음 날 아침, 수려가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시끌벅적하던 대화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가 이내 하나둘 피하는 것을 보며 수려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평소라면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던 동료들도 슬쩍 자리를 옮겼고,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거나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잠시 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한수려, 쟤 소문 진짜예요?”“모르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은 어떻게 알아.”“여기 앉기 전에 가자.”당황한 수려가 소리쳤다.“다들 왜 이래? 그런 황당한 소문을 다들 믿는 거야?”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업무가 시작된 뒤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결국 수려는 유코상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직도 그 소문 때문이에요?”유코상은 잠시 수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나도 수려상을 믿고 싶어.”“저 정말 그런 일 안 했어요.”“알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하지만 유코상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점심시간이 되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수려가 식당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웠고, 결국 수려는 혼자 남아 조용히 식사를 해야 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준은 속으로 통쾌해했다.‘그래. 한수려는 일본에서도 이래야지.’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소문을 믿었다.수려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의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이번에도 내가 이겼어.’그날 저녁, 업무가 끝난 뒤에도 수려는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다.료칸 뒤편의 작은 정원에 혼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재준은 우연히 그 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수려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나는 잘 살면 안 되는 존재인가.”“누군가 그렇다고 하면 그게 사실이 되는 건가.”한국에서 느꼈던 절망을 일본에 와서 다시 느끼고 있었다.그 순간, 재준은 수려를 보며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과 마주했다.동정이었다.
“사실…… 나 수려 아버지를 알아.”아베의 말에 수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우리 아버지를……?”“응.”아베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수려 아버지는 네가 여기서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정말?”연락조차 되지 않는 아버지였다.그런 아버지의 소식을 아베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수려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그것만 일단 알아둬.”아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지금은 내가 전부 말할 수 없는 입장이야. 그건 이해해줬으면 좋겠어.”“나도 연락이 안 되는 아버지를…… 아베가 알고 있다고?”수려는 한동안 아베를 바라봤다.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알겠어.”수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오키나와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료칸으로 돌아온 수려에게 재준이 말을 걸었다.“오키나와는 잘 다녀왔어?”수려가 재준을 바라봤다.“왜?”“그냥. 갔다 왔으니까 물어본 거야.”“잘 다녀왔어.”“그래?”재준이 가볍게 웃었다.“재밌었나 보네.”수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무슨 뜻이야?”“아무 뜻 없어.”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섰다.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그래…… 실컷 즐겼겠지.’재준은 더 이상 수려에게 직접 손을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수려가 믿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흔드는 것.그리고 결국 수려 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만드는 것.며칠이 지나자 수려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료칸 사람들의 시선이 전과 달랐다.눈이 마주치면 슬쩍 피했고, 자신이 지나가면 나누던 대화를 멈췄다.처음에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자 확신할 수 있었다.무언가 있었다.‘……뭐지?’수려는 결국 유코를 붙잡았다.“유코상.”“응?”“혹시…… 무슨 일 있어요?”유코가 잠시 수려의 표정을 살폈다.“왜 그렇게 생각해?”“사람들이 자꾸 저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서요.”
오키나와의 밤무대가 끝난 밤 10시.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다.수려와 타쿠야는 로비 한쪽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조금 떨어진 곳에는 유코와 아베가 마주 앉아 있었다.유코가 한참 동안 아베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아베상은 사람들과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제가 원래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혹시…… 저도 불편해요?”“아니요.”아베가 고개를 저었다.“유코상은 편해요. 겉모습보다 그 사람 자체를 먼저 보는 것 같아서.”“그런가?”“그리고…… 부러워요.”아베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유코가 고개를 갸웃했다.“뭐가요?”“자신을 숨기지 않는 거.”아베는 순간 말을 멈췄다.“……그냥 부럽다는 뜻이에요.”괜히 속내를 들킨 것 같았다.아베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타쿠야상은 유코상한테 잘해주죠?”유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수려상도 아베상한테 잘해주잖아요.”아베가 수려 쪽을 바라봤다.수려는 타쿠야와 이야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베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네. 수려는…… 제가 어떤 사람이든 편하게 대해줘요.”유코가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수려상한테는 아직 말 안 했죠.”아베의 어깨가 움찔했다.“……알고 있었어요?”“그냥…… 어느 순간 알겠더라고요.”유코가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더 늦기 전에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잠시 말을 멈춘 유코가 아베를 바라봤다.“수려상이 더 깊이 빠지기 전에.”아베가 씁쓸하게 웃었다.“알아요. 저도.”“그런데……?”아베의 시선이 다시 수려에게 향했다.“조금만 더…….”목소리가 낮아졌다.“조금만 더 이 행복을 누리고 싶어요.”아베가 잔을 내려다봤다.“모두가 이기적이라고 해도.”짧은 침묵이 흘렀다.“처음이거든요.”아베가 힘없이 웃었다.“이런 마음도…… 이런 시간도.”유코는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대신 아베의 손을 가만히 감쌌다.
오키나와 호텔 연회장 / 오후 6시호텔 연회장.다다미 위에 스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모두 유카타 차림이었다. 평소 료칸에서 입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색감도 화려했고, 저마다 고른 무늬도 제각각이었다.수려는 자신의 앞에 놓인 가이세키 요리를 바라봤다.작은 상 위에 회, 구이, 조림, 식사와 국, 디저트까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료칸에서 손님들에게 내어드리던 가이세키를, 내가 손님 입장에서 먹게 되네.’수려가 피식 웃었다.‘이런 서비스는 H호텔에서도 한번 접목해볼 만한데…….’옆에서 모토무라가 눈을 반짝였다.“드디어 내가 이걸 먹어본다!”“너 가이세키 처음이야?”“응. 매번 대접만 했지, 먹어볼 기회는 없었거든.”모토무라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바라봤다.“손님들은 나 모르게 이런 행복을 즐기고 있었구나.”“뭐야, 그게.”수려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때였다.코즈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자!!! 오늘은 달빛 료칸의 최고 인기 가수, 코즈키의 특별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또 시작이네.”누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곧이어 오키나와 전통 음악이 흘러나왔다.조리팀 후배들이 뒤에서 손을 흔들며 분위기를 띄웠다.“히야사사! 아이야!”코즈키가 흥겹게 노래를 시작하자 연회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빠른 리듬 위로 삼선(三線)의 경쾌한 소리가 얹혔다.코즈키가 어깨를 들썩이며 발을 구르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히야사사!”후렴이 나올 때마다 연회장 절반이 함께 소리쳤다.코즈키는 즉석에서 가사까지 바꿔 불렀다.“코즈키가 우마레따~!”억지로 끼워 넣은 가사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역시 코즈키 선배!”코즈키는 노래를 이어가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던졌다.“나 결혼은 세 번이나 한 남자야. 인생 경험이 많다는 거지.”“그걸 왜 지금 자랑해!”또다시 웃음이 터졌다.마지막 소절에서 코즈키가 마이크를 하늘로 치켜들자, 근처에 있던 몇몇이 젓가락으
### 료칸 휴관일아침 8시.료칸 정문 앞에 스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캐리어를 끌고 오는 사람, 여행 가방을 들고 오는 사람, 벌써부터 사진을 찍는 사람까지.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들뜬 분위기였다.오카미상이 마지막으로 인원을 확인했다.“자, 다들 모였나요?”“네!”“오늘은 제가 료칸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그동안 고생한 만큼 마음껏 즐기고 오세요.”오카미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번 여행 인솔자는 타쿠야상과 수려상이 맡아주세요.”“오카미상은 같이 안 가요?”“저는 나중에 사장님이랑 둘이서만 여행할 예정이니까요. 여러분들은 먼저 잘 즐기다 오세요.”“네!”수려도 캐리어 손잡이를 잡으며 웃었다.‘오키나와라······.’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였다.‘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지.’버스에 올라타기 직전이었다.신스케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료칸 담장 너머, 도로에 잠시 서 있던 검은 세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신스케가 눈을 가늘게 떴다.하지만 세단은 곧 방향을 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신스케, 안 타?”수려가 부르는 소리에 신스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간다.”기분 탓이겠지.신스케는 그렇게 생각하며 버스에 올랐다.---간사이공항공항에 도착하자 모두가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우리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 있어?”“나!”신스케가 손을 번쩍 들었다.수려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진짜?”“응. 나 비행기 처음 타.”“처음 비행기를 타다니.”스텝들이 하나둘 놀란 표정을 지었다.---비행기 안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베가 창밖을 바라봤다.구름 아래로 펼쳐진 바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수려.”“응?”“나 한국도 꼭 가보고 싶어.”“한국?”“응. 그······ 닭갈비.”수려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다음에 나랑 같이 가자. 남이섬 쪽에 드라마 촬영지도 있고, 닭갈비 맛있는 곳도 알아.”아베가 환하게 웃었다.“약속!”“
여름밤의 불꽃봄이 지나가고, 어느새 여름이 다가왔다.그날 료칸 로비에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스태프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수려도 이제 료칸 일에 많이 적응한 것 같아.”유코가 수려를 바라보며 웃었다.“처음 왔을 때랑 완전 달라졌어.”“그래?”“응.”유코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손님들한테도 자연스럽게 대하고, 일본어도 처음보다 훨씬 늘었고.”그러더니 수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무엇보다 잘생겼잖아.”“칭찬에 약한데.”수려가 웃었다.“그래서?”“고마워.”유코가 웃음을 터뜨렸다.“근데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 다들 들떠 있잖아.”수려가 주변을 둘러봤다.확실히 평소와 달랐다.스태프들도, 손님들도 평소보다 밝아 보였다.“오늘 고베타워에서 불꽃축제 하는 날이야. 1년에 딱 한 번 하는 축제래.”“그래서 다들 저렇게 들떠 있는 거야?”“응.”유코가 수려의 팔을 잡았다.“우리도 이따 가기로 했어. 스태프들끼리. 수려도 같이 가자.”수려가 잠시 고민했다.“그래?”“응.”유코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아베도 간대.”“……아베도?”수려의 눈빛이 달라졌다.“나도 갈래.”“푸하하!”유코가 웃음을 터뜨렸다.“너 아베 좋아하지? 얼굴 빨개졌는데?”“아니거든!”“알았어~. 일 끝나고 기차역에서 만나.”“응.”수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그날 밤.료칸 일을 마친 스태프들이 하나둘 사복으로 갈아입고 기차역에 모였다.모두 열 명 정도였다. 타쿠야도 함께였다.“자!”유코가 손뼉을 쳤다.“다 모였지?”“응!”“그럼 출발해볼까?”“출발!”고베, 여름밤.축제 장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유카타를 입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손에 작은 부채를 든 사람들.노점에서 야키토리와 빙수를 사 먹으며 웃는 가족들.손을 맞잡은 연인들.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그리고 그 너머로 멀리 보이는 고베타워.바다에 비친 불빛이 밤하늘과 뒤섞여 아름답게 흔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