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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스트리트의 유령 (The Ghost of Wall Street)
2035년 9월, 뉴욕 맨해튼.
마천루의 왕관처럼 도시의 야경을 발아래 둔 한 펜트하우스. 통유리창 너머로 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이 은하수처럼 펼쳐져 있었지만, 그 공간을 채운 것은 감탄이 아닌 얼음장 같은 긴장감이었다.
"…대표님, 최종 결정입니다. 3분 남았습니다."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와 함께 백금발의 비서, 사라가 태블릿 PC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 있었다. 모니터 숲에 둘러싸인 거대한 데스크 앞에 앉은 남자의 뒷모습은 미동조차 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다니엘 킴. 한국명 김진우.
하지만 월스트리트에서 그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렸다.
'유령(The Ghost).'
혜성처럼 나타나 시장을 유령처럼 떠돌며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 미스터리의 투자자. 그의 국적, 나이, 얼굴조차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가 움직이는 곳엔 언제나 돈의 비명이 따랐고, 거대 기업의 흥망이 갈렸다.
"옴니-바이오(Omni-Bio) 주가, 271.54달러. 여전히 상승세입니다. 월가의 모든 기관이 매수를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87억 달러 규모의 숏 포지션을 유지하면… 3분 뒤, 저희 '에이펙스 캐피탈'은 파산입니다."
사라의 말은 단순한 보고가 아닌, 애원에 가까웠다.
87억 달러. 한화 약 11조 원.
한 작은 국가의 예산과 맞먹는 돈이 공매도 포지션에 묶여 있었다. 옴니-바이오가 개발한 혁신적 알츠하이머 치료제가 FDA 최종 승인을 앞두고 있다는 속보가 터진 이후, 주가는 미친 듯이 폭등했다.
모두가 환호하며 돈다발을 쓸어 담을 때, 유령은 정반대의 흐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시장의 흐름을 역행하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베팅이었다.
진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스물아홉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깊고 차가운 눈. 그 속에는 숫자를 꿰뚫고 시장의 본질을 읽어내는 기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사라. 내 눈에는 숫자가 보이지 않아."
"…네?"
"탐욕과 공포의 흐름이 보일 뿐. 지금 시장은 흥분한 어린애처럼 탐욕에 취해 날뛰고 있지. 하지만 저 거대한 탐욕의 파도 밑바닥에는… 아주 작은 균열이 있어. 공포라는 이름의 균열."
진우의 시선은 다시 모니터로 향했다. 그의 눈에 비친 차트는 단순한 꺾은선 그래프가 아니었다. 수십억 투자자들의 탐욕이 뭉쳐 만들어낸 붉은 용, 그리고 그 용의 심장을 향해 파고드는 아주 미세하고 차가운 푸른빛의 균열. 그것은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시장의 감정'이었다.
18살의 어느 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에게 생긴 이능(異能). 세상의 모든 자본과 투자의 흐름이 가진 '감정'을 색과 형태로 읽어내는 '마켓의 눈(Market's Eye)'.
"FDA 최종 승인 발표 예정 시각, 오후 4시 정각. 앞으로 1분."
사라가 거의 울먹이며 시간을 고했다. 직원들은 이미 패닉 상태였다. 몇몇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해 있었다.
진우는 위스키 잔을 들어 가볍게 입을 축였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10초 전… 9, 8…"
사라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속보: 옴니-바이오, 임상 데이터 조작 혐의로 FDA 긴급 조사 착수. 최종 승인 무기한 연기]
모니터 한구석에, 세상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단 한 줄의 헤드라인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시장에 내려진 사형 선고였다.
"말도… 안 돼…"
사라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폭등하던 옴니-바이오의 주가 그래프가 마치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수직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5%, -15%, -40%…
패닉 셀링(Panic Selling). 공포에 질린 투자자들이 미친 듯이 주식을 내던졌다. 1분 전까지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하던 이들의 비명이 지구 반대편까지 들리는 듯했다.
진우의 눈에 보이던 거대한 붉은 용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푸른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베팅했던 11조 원의 공매도 포지션은 이제 천문학적인 수익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수익률… +250% 돌파! 30억… 아니, 50억 달러 이상의 수익입니다! 대표님!"
사라의 목소리는 흥분과 경외로 가득 차 있었다. 파산 직전에서, 단 1분 만에 월스트리트 역사에 남을 신화를 써낸 것이다.
하지만 진우의 표정은 담담했다. 당연한 결과를 확인한 사람처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뉴욕의 화려한 야경이 그의 발아래 있었다.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이건 성공이 아니야, 사라. 복수를 위한 자금을 모으는 과정일 뿐."
싸늘한 그의 말에 사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3년간 진우를 보좌했지만, 단 한 번도 그의 과거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그가 왜 이토록 처절하게 돈을 모으는지, 그 깊은 눈 속에 어떤 상처가 도사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진우는 뉴욕의 야경 너머, 아득한 동쪽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가 돌아가야 할 땅, 그리고 지옥을 선물해준 악마들이 있었다.
눈을 감자, 십 년 전 그날의 풍경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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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대한민국 서울.
"푸하하! 야, 김진우. 개처럼 짖어보라니까? 월! 월! 해봐, 이 새끼야!"
비에 젖은 흙탕물 위, 값비싼 명품 구두가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교복은 이미 흙과 피로 더러워져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었다. 온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진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곱 개의 그림자. 그들은 열여덟 동급생의 얼굴을 한 악마였다.
중심에는 대한민국 재계 서열 5위, 태산그룹의 황태자 강태민이 있었다. 비열한 미소를 입에 건 채, 그는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아, 재미없네. 이번엔 다른 거 해볼까?"
강태민의 말에 나머지 여섯 명이 경쟁하듯 나섰다.
그는 말없이,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게임은 바카라였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잔인하게 운과 배짱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임.딜러가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김진우의 눈은, 카드가 아닌,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마켓의 아이’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지만, 지난 10년간 수많은 인간들의 탐욕과 공포를 읽어온 그의 감각은,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초월해 있었다.상대방의 미세한 눈썹 떨림, 숨 막히는 순간에 마른침을 삼키는 목울대의 움직임, 승리를 확신할 때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숫자로 변환된 데이터처럼 읽히고 있었다.“레이즈.” 이반이 거친 목소리로, 자신의 앞에 놓인 ‘정보 칩’을 밀어 넣었다. 그가 건 칩은, ‘아프리카 분쟁 지역의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 비리 정보’였다.“콜.” 이사벨라는 요염하게 웃으며, 자신의 칩을 걸었다. 그녀의 칩은 ‘미국 마약단속국의 차기 비밀 작전 계획’이었다.이제 김진우의 차례였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일본 정계의 비자금 리스트’ 칩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패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이 판이 자신이 이길 수 있는 판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는 과감하게 카드를 던졌다.“폴드.”
* 가면들의 춤사전 만찬회가 열리는 연회장으로 향하기 전, 김진우가 머무는 독채 숙소는 조용한 전쟁터로 변했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에서 ‘김진우’의 마지막 흔적을 지워내고 있었다. ‘다나카 겐지’라는 새로운 가면을 완벽하게 쓰기 위한 마지막 의식이었다.“목표 인물들에 대한 최종 보고입니다.”최영진이 태블릿 화면을 띄우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방 안의 모든 요원들이 숨죽여 경청했다.“첫 번째, 이반 스미르노프.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출신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무기 밀매 조직 중 하나인 ‘붉은 전갈’의 수장입니다. 성격이 불같고 다혈질이지만, 자신보다 강하다고 판단한 상대에게는 의외의 존중을 표하는 맹수와도 같은 자입니다.”화면에는 거대한 체구에 험악한 인상을 한 백인 남자의 사진이 떠올랐다.“두 번째, 이사벨라 로드리게스.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자금 세탁 총책임자. 미인계를 주 무기로 사용하며, 상대방의 가장 깊은 비밀을 파고드는 데 능한 독거미 같은 여자입니다. 그녀의 유혹에 넘어간 자는, 모든 것을 빼앗기거나 죽음으로 끝을 맺었습니다.”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라틴계 여성의 사진이 뒤를 이었다.“세 번째….”최영진은 연회장에 나타날 모든 괴물들의 특성과 약점,
차량은 화려한 카지노 단지를 지나,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마카오 남쪽의 한 섬으로 향했다. 섬 전체가, 거대한 요새와도 같은 하나의 거대한 리조트였다. 이곳이 바로, 경매가 열리기 전까지 전 세계의 ‘그림자’들이 머무는 그들만의 성역이었다.리조트 내부는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화려했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숨 막히는 감시의 기운이 감돌았다. 친절하게 웃고 있는 직원들의 옷깃에는 초소형 통신 장치가 숨겨져 있었고, 아름다운 그림 액자 뒤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렌즈가 번뜩이고 있었다.김진우와 그의 팀은, 섬의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독채 숙소로 안내되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서로 다른 ‘참가자’들의 모습을 스치듯 볼 수 있었다.러시아 마피아의 무기상으로 보이는 거구의 남자와, 그의 뒤를 따르는 전직 스페츠나츠 출신 경호원들.남미 카르텔의 자금 세탁을 담당하는, 모델처럼 아름답지만 손에 굳은살이 박인 여자.아프리카의 작은 독재 국가에서 모든 것을 착취하여 부를 쌓은, 늙고 병든 독재자.이곳은,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들이 모이는 만찬장이었다. 그리고 김진우는, 그 악마들을 사냥하기 위해 악마의 가면을 쓴 늑대였다.숙소의 문이 닫히자마자, 최영진은 말없이 가방에서 최첨단 장비들을 꺼내기 시작했다.“지금부터, 이 방에 대한 정밀 수색을 시작한다.”그가 가장 먼저 꺼내 든 것은, 모든 종류의 전파를 탐지하는 소형 탐지기였다. 그가 탐지기를 켜고 방을 훑자,
* 폭풍 전야, 마카오인천 국제공항의 별도 격납고, 어둠 속에서 거대한 자가용 비행기가 조용히 이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김진우’와 그의 팀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나카 겐지’라는 이름의 일본인 거물과 그의 수행원들이 대신하는 순간이었다.비행기가 안정 고도에 접어들자, 김진우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대한민국의 불빛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는 더 이상 김진우가 아니었다. 걸음걸이, 말투, 심지어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의 각도까지, 그는 야쿠자 조직의 비밀 고문이자 냉혹한 자산가인 ‘다나카 겐지’가 되어 있었다.“대표님, 아니, 회장님.”최영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완벽한 일본어 경어로 보고했다. 그림자 팀의 다른 요원들은 과묵한 경호원 역할에 몰입한 채, 기내 곳곳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한국의 지휘 본부와 마지막 통신입니다.”김진우가 귀에 꽂힌 초소형 통신 장치를 통해 음성을 확인하자, 서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마카오 현지 통신망은 ‘거미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복잡하고 위험해. 신디케이트가 직접 관리하는 영역일 가능성이 높아. 마카오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제한적인 지원밖에 할 수 없을 거야. 모든 것은 현장의 판단에 맡겨야 해. 조심해, 대표님.]“알겠다.”김진우는 짧게 대답하고는 통신을 끊었다. 이제부터는 완벽하게 고립된 적진
그녀는 화면에 자료 몇 개를 띄웠다.“이건…?”[경매가 열리기 약 한 달 전. 민도준이 언급했던 주요 참석자들에게, 스위스 제네바의 한 고미술상으로부터 똑같은 크기의 소포가 발송된 기록이야. 품목은 ‘18세기 스위스제 시계’로 되어 있어. 물론 가짜 품목이지. 저 시계가 바로, 암호화된 통신 기능과 초대장 정보를 담고 있는 물리적인 ‘열쇠’였던 거야!]그녀는 올해 발송된 소포의 수신자 명단까지 확보했다. 전 세계의 무기상, 마약왕, 부패한 독재자의 자금 관리인, 그리고… 일본 야쿠자의 한 거물급 총책임자.“이들 중 한 명의 초대장을 빼앗아야 한다는 겁니까?” 최영진이 물었다. “경호가 삼엄할 셔틀콕.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신디케이트 전체를 자극하게 될 겁니다.”“빼앗는 게 아니야.”김진우가 말했다.“우리는 그 자리를, ‘양도’받을 것이다.”그의 시선이, 명단에 있는 한 인물의 사진에 멎었다.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인 ‘이나가와 카이’의 고문, ‘스즈키 겐야’.그는 잔인하고 교활했지만, 동시에 지독할 정도로 편집증적인 의심과 몸을 사리는 성격으로 유명했다.“최 팀장님. 지금부터 ‘스즈키 겐야’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해 주십시오. 특히, 그와 적대 관계에 있는
김진우는 자신의 상황실에서, 조사실에 설치해 둔 초소형 도청 장치를 통해 민도준의 모든 자백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었다.그의 눈앞에 있는 화면에는, 최영진이 스위스에서 막 보내온, 클라우스 베버의 다음 도박 베팅 정보가 떠 있었다. 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완벽한 미끼였다.하지만 이제, 그 미끼는 필요 없어졌다.더 크고, 더 확실한 사냥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그는 최영진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클라우스 베버 건은 잠시 보류한다. 지금 즉시, 마카오로 갈 준비를 해.]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황실 화면 중앙에, 거대한 도시의 야경 사진을 띄웠다.동양의 라스베이거스, 욕망과 기회가 뒤섞인 도시, 마카오.그의 입가에, 아주 오랜만에 진정한 사냥꾼의 미소가 떠올랐다.“경매라….”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오랜만에, 쇼핑을 좀 해볼까.”* 악마의 초대장‘마카오에서의 비밀 경매.’민도준이 토해낸 마지막 정보는, 김진우의 상황실을 새로운 종류의 긴장감으로 채웠다. 이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싸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태산그룹과의 전쟁이 한 국가의 운명을 건 장기였다면, 이 경매는 전 세계의 그림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벌이는, 단 한 번의 포커 게임과도 같았다.상황실의 대형 화면에는, 현란한 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