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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속 끓는 마음

Autor: 유다화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9-01 14:02:56

검은색 슈트를 입은 그가 긴 다리를 조금 움직이자 작업실은 금방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정한이 중앙에 놓인 긴 나무 테이블 위에 줄지어 있는 손바닥만 한 유리병들을 하나씩 들어살폈다.

창가에서 스며든 빛이 정한의 손을 스쳤고, 그 안에 담긴 액체들이 각기 다른 색을 머금으며 흔들렸다.

그런 그를 살피는 혜서의 미간이 구겨졌다.

‘꼭 다시 만나자. 내가 널 찾으러 갈게.’

과거 정한의 음성이 여전히 생생해 여전히 가슴이 저렸다.

매년 같은 날, 같은 장소.

혜서는 둘만의 약속을 되새기며 매일을 그를 만날날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은 정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서는 매번 약속 장소에 나갔다. 또 매번 혼자 돌아왔다.

처음엔 아직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겠지, 회복중이라 못 오는 거겠지 생각하며 그가 본인과의 약속을 저버린것에 대해 부정했다.

6년째 되던 해에는 그가 모든 기억은 지운 채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혼자만의 추억과 그리운 감정으로 남아 그를 기억한 것이었다.

그 기억이 스치자, 또 다시 밀려오는 원망으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개를 숙였다 든 혜서가 픽 낮은 웃음을 흘렸다.

내내 그리워했고, 잊고 싶었으며 그러지 못했던 그가 제 발로 눈 앞에 다시 또 나타나더니 무례한 짓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직원 급여에, 월세에… 대출 빚도 많던데.”

혜서는 안중에도 없는 듯, 가볍게 읊조리던 그가 병을 내려놓았다.

“앞으로 계속 운영하려면 여운을 더 키우는 게 낫지 않겠어?”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정한은 여유롭게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앉았지만 혜서의 눈동자에는 혼란이 스쳤다.

“거래 제안.”

“뭐?”

“팝업 스토어 제안 때문에 왔어. 우리 한성이랑.”

혜서의 얼굴에 시선을 깊게 꽂은 그도 어느새 웃음기가 가셨다.

“여운이 두달 뒤에 있을 우리 백화점에서 팝업 스토어를 진행했으면 해.”

“다짜고짜 나타나서 한다는 이야기가 협업 제안이야?”

잠시나마 그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허탈함에 혜서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미리 연락했다면 바로 거절 할 게 뻔해서 찾아왔어.”

“잘 알고 왔네. 그래 네 말대로 거절 할….”

“여운의 대표 향인 퍼스트 메모리. 반응이 좋던데.”

혜서의 말을 가볍게 자른 그가 무심히 하고 싶은 말만 쏟아냈다.

“2주간 단기 운영 후에 성과가 좋으면 여운과 콜라보로 내년 상반기 향수도 출시 할 예정이야. 더 나아가서 브랜드 입점까지도. 물론 정식 심사는 거쳐야해. 지금의 여운에게 너무 좋은 거래 제안 아닌가?”

상반되게 침착함을 유지한 정한은 다리를 겹쳐 놓으며 혜서를 자극했다.

“그래, 10년 만에 나타나서 우리 공방 생각도 다해주고. 정말 고맙네.”

“…….”

“재벌 친구덕에 한성 백화점에서 직접 좋은 협업 제안도 해주고. 이거 너무 고마워서 어쩌지?”

“비꼬지마, 진혜서.”

“자극 하지마, 다정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지지 않고 두눈을 맞춰 바라봤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과 적막이 흘렀다.

“정식으로 제안하는 거니까 잘 생각해봐.”

“우리 여운이 한성과 거래하는 일은 없어.”

“…….”

“앞으로 너와 내가 이렇게 다시 볼 일도 없단 거야.”

결심한 듯 혜서가 단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질끈 높게 올려 묶은 머리 아래로 하얀 셔츠와 베이지색 롱스커트를 입은 혜서는 여리한 모습과 다르게 그를 향한 눈빛은 살벌했다.

“나한테 화가 났대도,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은 제쳐두고, 네 주변 사람들부터 생각해.”

정한이 이미 운영이 힘들어지고 있는 여운에 대해 상세히 알고 나타난 게 분명했다.

그걸 혜서는 직감하자 더욱 분노가 일었다.

이래서 날 보러 왔다고 한 거였구나.

“안 본 사이에 많이 무례해졌구나. 뒷조사부터 하고 온 것 같은데… 네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온 건진 모르겠지만 막무가내로 나타나서 이러는 거 불편하고, 불쾌해.”

혜서가 손을 불끈 말아쥐었다.

“하나만 물어 볼게.”

혜서가 천천히 말없이 서있는 정한의 앞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 은은한 우디향이 코 끝에 스몄다.

“정말 우리 향수가 필요해서 찾아온 거야, 아니면….”

질문의 시작을 내뱉던 혜서가 그만 입끝을 다물었다.

향수가 필요하든 본인이 그리웠든.

무슨 답을 전해듣던지 지금의 본인에게 좋을 답은 없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둘 다야.”

“……!”

혜서의 질문을 끝까지 듣지 않은 그가 무심히 답했다.

정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기분이 혜서는 싫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번에는 그가 답하지 않고 묵묵히 혜서의 눈을 마주했다.

“갑자기 10년만에 나타나서, 보고싶었다는 말… 안 믿어.”

어느샌가 눈가가 붉어진 혜서의 손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10년 만에 마주한 그리웠던 첫사랑은 본인의 속 끓는 마음도 모른 채 덥썩 보고싶었다는 말을 야속하게 막 내뱉었다.

“뭐, 뭐하는…!”

그때, 정한이 팔을 뻗어 혜서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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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로운 다정   60. 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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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가 꼬박 지났다. 밤새도록 혜서는 잠을 어떻게 잔건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오전에 출장을 미루겠다는 정한을 타이른 혜서는 공방에 출근해 새롬과 함께 경찰이 물러난 여운을 청소중이었다.“아마도 주변에서 우리 공방이 잘 되니까 샘나서 그런 걸 거야.”쓰레기 봉투를 꽉 묶어 든 새롬이 성난 듯 말했다.“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어.”“뭐? 무슨 이유든 누가 그랬든 이건 범죄야!”작게 고개를 끄덕인 혜서도 연신 주변을 정돈했다.조일관이 출소 후 일상생활을 지내며 신경쓰이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그가 자신을 잊고 그저 본인의 인생을 살기를 바랐지만 혹여라도 복수심을 품고 있다면 10년 전과 같은 비극이 또 일어날 수도 있었다.“하….”본인도 모르게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나온 혜서가 휘청거리자 새롬이 다가와 부축했다.“너 때문 아니야, 진혜서. 생각 그만해.”밤새 잠 한숨 못잔 혜서의 얼굴을 확인한 새롬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경찰 조사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어젯밤 확인 결과 CCTV도 누군가 고의로 훼손한 흔적이 발견됐다.즉 우발적인 범행은 결코 아니란 뜻이었다.“좋은 일이 생기려고 액땜 했다 생각하자.”“응. 나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어떻게 걱정을 안 해. 그러지말고 당분간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자. 어때?”새롬의 제안에 혜서가 잠시 고민했다. 그만큼 조일관의 출소와 공방의 침입 시기가 겹친 게 은연 중 불안했던 이유였다.“이럴 때 다정한은 어디 간 거야? 너만 두고.”“출장 갔어. 안 간다는 거 내가 다녀오라고 했어.”떠난 정한을 떠올린 혜서가 씁쓸한 미소를 띄었다.맘 같아선 그의 뜻대로 함께 있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그에게 작은 걸림돌이라도 되고 싶지 않았다.*“조일관의 소행이 아니란 말씀인가요.”출장길에 나선 정한은 운전을 하며 블루투스로 연결된 전화로 조일관에게 심어둔 남자와 통화중이었다.-네. 어젯밤 자택에서 나온적이 없습니다. 한 번 외출은 했으나 집앞 편의점에서 술을 산 것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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