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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꺼진 불빛을 다시 켜려는 밤

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3 12:35:40

유산 뒤 한동안 햇살은 앨리에 나가지 않았다.

장미가 거의 매일 집으로 들이닥쳤다.

“보물, 이거 다 먹어.”

미역국이며 죽이며 과일까지 잔뜩 내려놓고는 햇살이 남기기라도 하면 바로 잔소리가 시작됐다.

“몸부터 챙겨. 돈은 나중이고.”

햇살은 투덜거리면서도 장미가 가져온 음식은 꼬박꼬박 먹었다.

진성도 달라졌다.

퇴근하면 가장 먼저 햇살 얼굴부터 보고, 약을 먹었는지, 밥은 먹었는지 확인했다. 한밤중에 깨면 잠든 햇살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가 말없이 거두는 날도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햇살의 얼굴에도 다시 혈색이 돌았다.

그러던 오후였다.

진성이 출근 준비를 하다 방문 앞에서 멈췄다.

햇살이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었다.

검은 원피스.

붉은 립.

몇 주 동안 손대지 않던 향수까지 화장대 위에 나와 있었다.

진성의 표정이 굳었다.

“뭐 해.”

햇살은 거울 속 진성을 봤다.

“출근 준비.”

“어디.”

“어디긴. 앨리지.”

진성이 한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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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10화. 오래 묻어둔 이름

    한동안 창밖만 바라보던 햇살이 고개를 들었다. 도진은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찰칵. 붉은 불빛이 잠깐 그의 얼굴을 비췄다. 햇살은 도진의 가슴에 손가락을 올렸다. “오빤 누구였어?” 도진의 시선이 내려왔다. “뭐가.” “아까 생각난다며.” 햇살은 손끝으로 그의 가슴 한가운데를 톡 건드렸다. “여기 깊숙이 박힌 사람.”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햇살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뒤 도진이 입을 열었다. “여자.” 햇살이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알아.” “평범한 여자였어.” “오빠랑 제일 안 어울리는 말인데.” “그러니까 좋아했겠지.” 햇살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도진은 창밖을 바라봤다. “꽃집 했어.” 햇살의 눈이 잠깐 움직였다. “꽃집?” “응.” “이름은?” 도진은 담배를 입에서 뗐다. “서연.” 짧은 이름 하나가 방 안에 떨어졌다. 햇살은 그 이름을 따라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고 만났어. 그냥 사업하는 사람인 줄 알았지.” “나중에는?” “알았어.” “도망갔어?” 도진이 피식 웃었다. “안 갔어.” “간 큰 언니네.” “미친년이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는 달랐다. 햇살은 조용히 그의 얼굴을 봤다. “결혼하려고 했어?” 도진의 손이 멈췄다. 그것만으로 답은 충분했다. 햇살이 작게 말했다. “했구나.” “반지도 샀어.” 도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주지는 못했고.” 햇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끝내 건네지 못한 반지. 내일이면 말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마음. 도진은 재떨이에 담배를 눌렀다. “나 때문에 죽었어.” 햇살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 “정확히는 내 옆에 있어서.” “누가 죽였는데.” “그때 붙어 있던 놈들.” 도진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담담했다. 오래전에 너무 많이 되씹어서 감정조차 닳아버린 사람처럼. “겁주려고 데려간 거였는데 일이 틀어졌어.” 햇살은 더 묻지 않았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9화. 불빛 사이로 머문 노래

    햇살이 들어온 뒤로 도진의 펜트하우스는 조금씩 달라졌다. 늘 반듯하게 정리돼 있던 거실 소파에는 햇살이 벗어놓은 카디건이 걸렸고, 테이블 위에는 학교에서 받아온 전공 책과 연필이 아무렇게나 쌓였다. 냉장고에는 도진이 입도 대지 않던 과일과 요거트가 채워졌고, 욕실에는 흰 머리 전용 샴푸가 한 줄을 차지했다. 도진은 처음엔 전부 못마땅한 얼굴로 봤다. 그런데 치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햇살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텅 빈 거실부터 한번 보고 담배를 물었다. 그날도 둘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침대 위에서 서로의 숨을 빼앗듯 엉켜 있던 두 사람은 한참이 지나서야 떨어졌다. 햇살은 가운을 대충 걸치고 창가에 앉았다. 도진도 맨몸 위에 검은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담배를 물었다. 햇살이 라이터를 켜줬다. 찰칵. 불이 붙자 도진이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씨발.” 햇살이 눈을 굴렸다. “왜.” 도진은 도시 불빛을 내려다보다 중얼거렸다. “욕심내면 안 되는데.” 햇살이 바로 웃었다. “응. 2년까지만 내 남자 해.” 도진이 어이없다는 듯 돌아봤다. “내 남자?” “왜. 싫어?” “미친년.” “까르륵.” 햇살은 소리 내 웃으며 도진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도진은 밀어내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머무는 흔적 하나 없던 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햇살의 웃음소리가 있었고, 싱크대에는 둘이 마신 컵이 있었고, 침실에는 아무렇게나 구겨진 이불이 있었다. 도진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어서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햇살은 창밖을 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다들 뭐 하고 지내나~.” “누구.” “있어~.” “누군데.” 햇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만 밤하늘로 올라갔다. 엄마. 그리고 진성.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 햇살이 아주 작게 노래를 시작했다. “그곳은 괜찮나요 당신이 두고 간 이곳엔 오늘도 같은 바람이 불고 나는 아직 여기 있어요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8화. 새벽 끝에 맺은 계약

    그날 밤, 햇살이 따라간 곳은 강도진의 펜트하우스였다. 도시 불빛이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높은 집이었다. 넓고 조용했고, 사람 사는 냄새보다 비싼 술과 담배 냄새가 먼저 났다. 햇살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구두를 벗어 던졌다. “와. 조직 두목은 집도 다르네.” 도진은 대꾸 없이 재킷을 벗었다. 햇살이 뒤를 돌아봤다. “왜. 벌써 후회해?” “네가 후회할까 봐.” “난 후회할 짓은 시작도 안 해.” 그 말에 도진이 낮게 웃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오래 잠들지 못했다. 닫힌 안방 안에서 도진의 거친 숨과 햇살의 흐트러진 숨소리가 몇 번이고 겹쳤다. 창밖이 검은색에서 짙은 푸른빛으로 바뀌고, 다시 희미한 아침빛이 번질 때까지 방 안의 기척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아침이 밝았을 때 햇살은 도진의 품에 반쯤 기대 누워 있었다. 헝클어진 흰 머리카락이 도진의 팔과 베개 위로 흩어졌다. 햇살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도진이 눈을 내리깔았다. 햇살은 입꼬리를 올렸다. “오빠, 첫날부터 너무 빡센 거 아니야?” “누가 먼저 덤볐는데.” “계약금 입금한 사람?” 도진이 피식 웃었다. 햇살은 침대 옆에 놓인 담배를 집어 하나 물었다가 생각을 바꿔 도진 입술 사이에 끼워줬다. 찰칵. 불이 붙었다. 햇살은 라이터를 닫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서비스 좋아서 연장 생각 들지?” 도진이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벌써 겁먹었냐.” “아니.” 햇살은 몸을 일으켜 이불을 끌어안았다. “조건 추가하려고.” 도진의 눈썹이 올라갔다. “또?” “학교.” “학교가 왜.” “오빠가 내줘.” 도진이 햇살을 바라봤다. 햇살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2년 애인 포함비.” “뭐?” “나 미대야.” 햇살이 아주 당당하게 덧붙였다. “돈 어마어마하게 깨져.” 도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사람 하나 처리해주고, 집도 주고, 학교까지 보내야 돼?” “집은 오빠가 여기 있으라며.” “언제.” “같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7화. 깨진 잔 위에 남은 두 해

    방 안에서 한동안 이어지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복도 끝에 서 있던 장미는 담배를 몇 개째 태웠는지 셀 수도 없었다. 문 앞을 지키던 가드들도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장미는 결국 담배를 비벼 끄고 문 앞으로 갔다. 똑똑. 두 번. 평소 같으면 노크 따위 하지 않았을 방이었다. 잠시 뒤 안에서 도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장미는 문을 열었다. 바닥에는 깨진 술병과 잔 조각이 널려 있었다. 테이블 위도 엉망이었다. 도진은 소파 옆에 서서 바지를 주섬주섬 여미고 있었고, 햇살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속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장미의 얼굴이 굳었다. “오햇살.” 햇살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게 더 속을 뒤집었다. “너 괜찮아?” “응.” “진짜?” “응.” 햇살은 흩어진 흰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정리하고 원피스를 집었다. 장미는 도진을 한 번 노려봤다. 도진은 태연하게 셔츠 단추를 잠갔다. “본인이 선택한 거야.” “당신한테 안 물었어.” 장미가 바로 잘라냈다. 햇살이 피식 웃었다. “언니, 싸우지 마.” “웃음이 나와?” “안 웃으면 울 것 같아서.” 그 말에 장미의 입이 다물렸다. 햇살은 원피스를 입고 지퍼를 올린 뒤 장미 앞에 섰다. “언니.” “왜.” “캐비닛에 있는 그거.” 장미는 바로 알아들었다. 진성이 남긴 은반지 두 개. “그거 2년만 보관해줘.” 장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네가 해.” “나 갖고 가면 자꾸 볼 것 같아.” 햇살이 작게 웃었다. “그러면 못 할 것 같아서.” “뭘.” 햇살은 대답 대신 도진을 힐끗 봤다. 장미의 얼굴이 더 굳었다. “설마 진짜로.” “응.” “오햇살.” “나 2년 여기 안 와.” 햇살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집도 잘 부탁해.” “집까지?” “응. 버리지는 말고.” 그 집에는 진성의 옷도, 이젤도, 스케치북도, 오래된 나무 들꽃도 그대로 있었다. 햇살은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6화. 깨진 잔 너머의 약속

    도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햇살이 내민 조건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가늠하듯 얼굴만 바라봤다. 햇살은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도진 앞으로 갔다. “왜요. 겁나?” “내가?” “표정이 그런데.” 햇살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았다. 도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햇살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맞췄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가 아니었다. 숨이 섞일 만큼 깊게 입술을 맞댄 뒤에야 천천히 얼굴을 뗐다. “오빠한테는 재수없었던 계진성.” 도진의 시선이 햇살 입술에 머물렀다. “나한테는 소중했거든.”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햇살은 도진의 셔츠 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누구.” “우리 엄마. 오빛나.” 도진은 가만히 들었다. “근데 모르더라.” 햇살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박진주도, 진태만도.” 아빠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소중한 걸 잃은 사람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손끝이 도진의 가슴께에서 멈췄다. “오빠도 있었을 거 아냐?” 도진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뭐가.” “잃기 싫었던 사람.”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햇살은 그 침묵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의 셔츠 단추 하나를 천천히 풀었다. 도진이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건데?” 햇살이 눈을 휘었다. “계약금 입금 중?” 도진이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진짜 미친년이네.” “아까 알았다며.” 햇살은 잡힌 손목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손으로 도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대신 약속 하나 할게.” “뭔데.” “2년.” 햇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껍데기만 옆에 있는 거 아니야.” 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심으로 다할 거야.” “진심?” “응.” 햇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딴 놈 안 쳐다보고.”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여기도 그만둬야지?” 도진이 이번에는 피식 웃었다. “내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다 정하네.” “계약은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5화. 붉은 연기 너머의 약속

    햇살은 진성의 이름이 나온 순간에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잔을 채우던 손을 멈추고 맞은편 남자를 천천히 바라봤다. “흐음~.”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표정 보니 꽤 우리 오빠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봐. 그쵸?”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햇살은 테이블 위 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찰칵. 불을 붙인 뒤 천천히 연기 한 모금을 뱉었다. 겁먹은 기색은 없었다. 담배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운 햇살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오빠.” 그리고 남자의 입술 사이에 담배를 가볍게 끼워줬다. “이름은 뭐예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곁에 있던 두 남자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햇살을 봤다. 가운데 남자가 갑자기 껄껄 웃었다. “나 안 무섭냐?” 햇살도 따라 웃었다. “몸 파는 년이 사람 무서워하면 돼요?” 남자의 웃음이 더 커졌다. 담배를 손가락으로 받아든 그가 햇살을 흥미롭다는 듯 훑었다. “강도진.” “도진.” 햇살은 일부러 한 번 굴려 부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도진 오빠.” 도진이 옆에 앉은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나가 있어.” “형님.” “나가.” 두 남자는 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 서 있던 장미는 그 둘이 나오는 순간 몸을 굳혔다. 안쪽 상황이 더 나빠진 건지, 오히려 나아진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방 안에서는 햇살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병을 들었다. 도진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오빠가 제일 세다며?” “누가 그러던데.” “보면 알죠.” “뭘.” “나머지 둘은 오빠 눈부터 보던데.” 도진이 피식 웃었다. “눈치는 빠르네.”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았거든.” 햇살은 자기 잔에도 술을 따랐다.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성의 반지는 지금 캐비닛 안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비어버린 자리까지 전부 거래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처럼. “오빠.” “왜.” “나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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