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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진동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8 14:17:17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

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

9:12

9:18

9:37

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

‘조용했다.’

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

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

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건우는 문득 물었다.

“그날… 진동 느꼈다고 했죠.”

하나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응.”

“9시 18분.”

“그래.”

“현관 앞이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이었던 것 같아.”

‘그때쯤.’

건우는 그 단어에 걸렸다.

“집 앞 복도였어요?  아니면 엘리베이터 안이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자세히 묻는 거야?”

“그냥 확인하려고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걸어가던 중이었어.”

어제는 ‘현관 앞’이라고 했다.

오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걸어가던 중’이다.

아주 작은 차이였다.

그런데 기억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는… 현관 앞이라고 했어요.”

하나는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

물소리가 계속 흘렀다.

“그랬어?”

“네.”

그녀는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복도였던 것 같아.”

‘정확히는.’

기억은 점점 수정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하나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이 잠깐 켜졌다 꺼졌다.

건우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통화 기록… 한 번만 봐도 될까요.”

하나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왜.”

“시간이… 정확히 궁금해서요.”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건넸다.

건우는 화면을 켰다.

9:12 - 서유림 (1분 4초)

9:18 - 신우 씨 (부재중)

9:37 - 112

그는 스크롤을 내렸다.

9:05 - 부장검사

8:47 - 사건 참고인

하나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확인했어?”

“네.”

그는 휴대폰을 돌려주려다 멈췄다.

“진동… 몇 번 울렸어요.”

하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 번 정도.”

“확실해요?”

“응.”

“어제는… 한 번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공기가 멈췄다.

하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어?”

“네.”

그녀는 휴대폰을 받아 들며 말했다.

“그날은… 모든 게 겹쳐 있었어. 정신도 없었고..”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조심한 말투였다.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해?”

건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요.”

그 말은 차갑지 않았다.

그냥 사실이었다.

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지금, 나를 취조라도 하는 거야?”

질문은 공격적이지 않았지만, 낮았다.

건우는 대답을 늦췄다.

“취조가 아니라… 맞추는 거예요.”

“뭘.”

“시간을.”

하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맞추고 싶어.”

그녀의 말은 처음으로 조금 흔들렸다.

“내가 틀리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게 더 무서워.”

건우는 그 말을 듣고 멈췄다.

그녀의 눈에는 분명 두려움이 있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으로, 아주 잠깐,

자신이 너무 빨리 몰아붙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기억은 바뀐다.

그날 밤, 건우는 혼자 형의 통화 기록을 확인할 방법을 떠올렸다.

유림. 투자자. 그리고 9시 18분.

만약 형의 휴대폰에서도 같은 시간이 찍혀 있다면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9시 18분.

형은 왜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위험해서?

아니면…확인하려고?

그는 눈을 감았다.

진동이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복도였는지, 현관 앞이었는지.

아주 작은 차이였다.

그런데 그 차이가 사람을 갈라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우는 이제, 그 차이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침 공기가 묘하게 차가웠다.

밤새 뒤척인 탓인지, 건우는 눈을 떴을 때부터 피곤했다.

거실로 나오자, 식탁 위에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잠 못 잤지.”

그녀가 말했다.

건우는 대답 대신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형이… 왜 전화했을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하나는 잠시 멈췄다.

“9시 18분.”

그는 컵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그 시간에.”

하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위험해서겠지.”

“위험했다면… 112에 먼저 걸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날카롭지 않았지만, 정확했다.

하나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들이켰다.

“당황하면… 가까운 사람부터 찾게 돼.”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신우는 늘 계산적이었다.

위험하면 구조를 찾는 사람이지, 

감정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형의 목소리, 조용했다고 했어요.”

건우는 이어 말했다.

“유림 씨 말로는.”

하나는 미묘하게 눈을 좁혔다.

“그 사람을 왜 그렇게 신뢰해.”

“신뢰가 아니라… 참고예요.”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배경에 소리가 없었다고 했고.”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험했다면… 숨 가쁜 소리라도 있었을 텐데.”

“그럼 네 말은.”

하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신우 씨가 위험하지 않았다는 거야?”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죠.”

“모른다는 거네.”

“네.”

짧은 대답.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길어졌다.

오후, 건우는 회사 IT팀을 찾았다.

형의 휴대폰은 이미 경찰에 제출된 상태였다.

하지만 통신 기록은 남는다.

“법적 요청 없이 제공은 어렵습니다.”

IT팀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사에 요청하면… 

수신 위치 정보는 나옵니까.”

“기지국 접속 기록은 나옵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위치.

그날 9시 18분, 형의 휴대폰이 어느 기지국에 잡혀 있었는지.

그게 집 안이었는지, 아니면 집 근처 도로였는지. 그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건우는 처음으로 형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당연했다.

번호는 이미 정지되었을 것이다.

그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줬다.

-형은 왜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그는 떠올렸다.

9시 12분 - 유림과 통화 종료.

그 직후, 6분 뒤 - 하나에게 전화.

그 6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군가가 도착했다면, 그 도착은 9시 12분 이후여야 한다.

형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 기다림은 9시 이전부터였을 수도 있다.

건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나의 진동 횟수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형이 전화한 이유다.

저녁 시간, 하나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회사 갔다 왔어?”

“네.”

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통신 기록… 요청해 보려고요.”

하나의 눈이 천천히 올라왔다.

“위치?”

“네.”

“왜.”

“형이 집 안에 있었는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려던 건지… 확인하려고요.”

하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우야.”

그녀가 낮게 말했다.

“그걸 확인하면… 뭐가 달라질까.”

“적어도… 상상은 줄어들겠죠.”

그는 차분하게 답했다.

“지금은 너무 많아요.”

하나는 시선을 떨구었다.

“나를 포함해서?”

건우는 잠시 멈췄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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