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
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
9:12
9:18
9:37
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
‘조용했다.’
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
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
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건우는 문득 물었다.
“그날… 진동 느꼈다고 했죠.”
하나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응.”
“9시 18분.”
“그래.”
“현관 앞이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이었던 것 같아.”
‘그때쯤.’
건우는 그 단어에 걸렸다.
“집 앞 복도였어요? 아니면 엘리베이터 안이었어요?”
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자세히 묻는 거야?”
“그냥 확인하려고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걸어가던 중이었어.”
어제는 ‘현관 앞’이라고 했다.
오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걸어가던 중’이다.
아주 작은 차이였다.
그런데 기억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는… 현관 앞이라고 했어요.”
하나는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
물소리가 계속 흘렀다.
“그랬어?”
“네.”
그녀는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복도였던 것 같아.”
‘정확히는.’
기억은 점점 수정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하나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이 잠깐 켜졌다 꺼졌다.
건우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통화 기록… 한 번만 봐도 될까요.”
하나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왜.”
“시간이… 정확히 궁금해서요.”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건넸다.
건우는 화면을 켰다.
9:12 - 서유림 (1분 4초)
9:18 - 신우 씨 (부재중)
9:37 - 112
그는 스크롤을 내렸다.
9:05 - 부장검사
8:47 - 사건 참고인
하나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확인했어?”
“네.”
그는 휴대폰을 돌려주려다 멈췄다.
“진동… 몇 번 울렸어요.”
하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 번 정도.”
“확실해요?”
“응.”
“어제는… 한 번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공기가 멈췄다.
하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어?”
“네.”
그녀는 휴대폰을 받아 들며 말했다.
“그날은… 모든 게 겹쳐 있었어. 정신도 없었고..”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조심한 말투였다.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해?”
건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요.”
그 말은 차갑지 않았다.
그냥 사실이었다.
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지금, 나를 취조라도 하는 거야?”
질문은 공격적이지 않았지만, 낮았다.
건우는 대답을 늦췄다.
“취조가 아니라… 맞추는 거예요.”
“뭘.”
“시간을.”
하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맞추고 싶어.”
그녀의 말은 처음으로 조금 흔들렸다.
“내가 틀리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게 더 무서워.”
건우는 그 말을 듣고 멈췄다.
그녀의 눈에는 분명 두려움이 있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으로, 아주 잠깐,
자신이 너무 빨리 몰아붙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기억은 바뀐다.
그날 밤, 건우는 혼자 형의 통화 기록을 확인할 방법을 떠올렸다.
유림. 투자자. 그리고 9시 18분.
만약 형의 휴대폰에서도 같은 시간이 찍혀 있다면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9시 18분.
형은 왜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위험해서?
아니면…확인하려고?
그는 눈을 감았다.
진동이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복도였는지, 현관 앞이었는지.
아주 작은 차이였다.
그런데 그 차이가 사람을 갈라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우는 이제, 그 차이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침 공기가 묘하게 차가웠다.
밤새 뒤척인 탓인지, 건우는 눈을 떴을 때부터 피곤했다.
거실로 나오자, 식탁 위에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잠 못 잤지.”
그녀가 말했다.
건우는 대답 대신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형이… 왜 전화했을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하나는 잠시 멈췄다.
“9시 18분.”
그는 컵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그 시간에.”
하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위험해서겠지.”
“위험했다면… 112에 먼저 걸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날카롭지 않았지만, 정확했다.
하나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들이켰다.
“당황하면… 가까운 사람부터 찾게 돼.”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신우는 늘 계산적이었다.
위험하면 구조를 찾는 사람이지,
감정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형의 목소리, 조용했다고 했어요.”
건우는 이어 말했다.
“유림 씨 말로는.”
하나는 미묘하게 눈을 좁혔다.
“그 사람을 왜 그렇게 신뢰해.”
“신뢰가 아니라… 참고예요.”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배경에 소리가 없었다고 했고.”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험했다면… 숨 가쁜 소리라도 있었을 텐데.”
“그럼 네 말은.”
하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신우 씨가 위험하지 않았다는 거야?”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죠.”
“모른다는 거네.”
“네.”
짧은 대답.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길어졌다.
오후, 건우는 회사 IT팀을 찾았다.
형의 휴대폰은 이미 경찰에 제출된 상태였다.
하지만 통신 기록은 남는다.
“법적 요청 없이 제공은 어렵습니다.”
IT팀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사에 요청하면…
수신 위치 정보는 나옵니까.”
“기지국 접속 기록은 나옵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위치.
그날 9시 18분, 형의 휴대폰이 어느 기지국에 잡혀 있었는지.
그게 집 안이었는지, 아니면 집 근처 도로였는지. 그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건우는 처음으로 형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당연했다.
번호는 이미 정지되었을 것이다.
그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줬다.
-형은 왜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그는 떠올렸다.
9시 12분 - 유림과 통화 종료.
그 직후, 6분 뒤 - 하나에게 전화.
그 6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군가가 도착했다면, 그 도착은 9시 12분 이후여야 한다.
형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 기다림은 9시 이전부터였을 수도 있다.
건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나의 진동 횟수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형이 전화한 이유다.
저녁 시간, 하나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회사 갔다 왔어?”
“네.”
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통신 기록… 요청해 보려고요.”
하나의 눈이 천천히 올라왔다.
“위치?”
“네.”
“왜.”
“형이 집 안에 있었는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려던 건지… 확인하려고요.”
하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우야.”
그녀가 낮게 말했다.
“그걸 확인하면… 뭐가 달라질까.”
“적어도… 상상은 줄어들겠죠.”
그는 차분하게 답했다.
“지금은 너무 많아요.”
하나는 시선을 떨구었다.
“나를 포함해서?”
건우는 잠시 멈췄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인해.”
공터를 빠져나오는 순간, 공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건우는 바로 뒤를 붙지 않았다. 한 템포 늦춘 채 골목 끝에서 방향을 맞추고, 자연스럽게 도로의 흐름에 섞였다. 앞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시야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거리. 그 미묘한 간격이 지금 필요한 전부였다.김도현의 차량은 속도를 조금 올렸다.아까와는 달랐다. 확인하듯 멈추던 움직임이 사라지고, 목적지를 향해 곧게 뻗는 선처럼 달렸다. 망설임이 사라진 대신, 서두름이 남아 있었다.하나는 창밖을 보며 낮게 말했다.“아까보다 빠르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정리 끝났으니까.”그의 시선은 앞차의 테일램프에 고정되어 있었다.가방.작은 크기였다. 손에 쥐고 나올 수 있을 만큼 가벼워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가볍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종이 몇 장일 수도 있고, 저장 장치일 수도 있었다. 어떤 형태든, 그 안에는 옮겨야 할 이유가 있었고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서하는 뒷좌석에서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버리는 건 아니겠지.”건우는 고개를 저었다.“아직 아니다.”잠시 후 덧붙였다.“가치가 있으니까 들고 나온 거다.”차량은 큰 도로로 합류했다.차선이 늘어나면서 차량 흐름이 복잡해졌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기가 조금 더 까다로워졌다. 건우는 속도를 무리하게 맞추지 않았다. 대신 차선을 한 번 바꿔, 시야를 확보하는 쪽을 택했다.김도현의 차량이 한 차선 앞으로 빠져나갔다.건우는 그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한 박자 늦춰 같은 방향으로 진입했다. 급하게 따라붙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뒤를 잇는 것이 더 중요했다.하나는 그 흐름을 읽고 있었다.“눈치 보고 있네.”건우는 짧게 말했다.“계속 본다.”그의 시선이 백미러와 앞차 사이를 오갔다.김도현의 차량은 간헐적으로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올렸다. 뒤차를 확인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일정하게 달리면 보이지 않던 패턴이 속도의 흔들림 속에서 드러난다.서하는 창문에 턱을 괴고 중
공터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막 들어간 사람의 흔적만 남겨 둔 채, 바람은 건물 벽을 스치며 천천히 흘렀다. 오래된 간판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아래 바닥에는 얇은 먼지가 깔려 있었다.건우는 차 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문 하나였지만,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이제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김도현이 스스로 들어간 공간.그리고. 그가 지키려는 것들이 모여 있을 장소.하나는 조용히 말했다.“바로 들어갈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선택을 묻고 있었다.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시선은 여전히 건물 입구에 머물러 있었다.잠시 후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저었다.“아직 아니다.”짧은 말이었다.하지만 이유는 분명했다.지금 들어가는 건, 확인이 아니라 충돌이 된다.그리고 그 충돌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안에서 뭐 하는지부터 봐야겠네.”건우는 천천히 말했다.“응.”그의 시선이 공터 전체를 한 번 훑었다.차량 위치.건물 구조.주변 출입로.모든 것이 머릿속에 정리되고 있었다.“나갈 때 잡는다.”그 말은 계획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방향이었다.서하는 뒷좌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그럼.”그녀가 말했다.“안에서 뭘 하든 상관없다는 거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아니.”잠시 후 덧붙였다.“그게 중요하다.”차 안 공기가 다시 조용해졌다.건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안에서.”그의 말이 이어졌다.“자료 옮기거나.”잠시 후 덧붙였다.“숨기거나.”그의 시선이 문에 고정됐다.“그 과정이 필요하다.”하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지금 당장 들어가면, 단순히 ‘의심’ 단계에서 끝날 수 있다.하지만, 김도현이 안에서 실제로 무언가를 움직인 뒤라면. 그건 증거가 된다.하나는 조용히 물었다.“얼마나 기다려야 해.”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길지 않을 거다.”그의 대답은 단순했다.“급한 상태니까.”그 말이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 도로의 소음이 한 겹 꺼졌다.차가 드문 구간이었다. 양쪽으로 낮은 건물들이 붙어 있었고, 간판이 오래된 상가 몇 곳이 띄엄띄엄 보였다. 햇빛은 건물 사이로 잘게 쪼개져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위로 먼지가 얇게 떠 있었다.건우는 속도를 더 낮췄다.엔진 소리가 골목 안에서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앞쪽에서 검은 세단이 멈춰 있는 모습이 보였다.김도현의 차량이었다.건우의 눈이 미묘하게 좁아졌다.“멈췄다.”그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여기서?”그녀의 말에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이곳은 특별히 눈에 띄는 장소가 아니었다.사무실도, 창고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건물들이 이어진 골목 한가운데, 굳이 차를 세울 이유가 없어 보이는 자리였다.건우는 차를 바로 붙이지 않았다.골목 입구 쪽에 가까운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차를 세웠다.엔진을 끄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여기서 내리진 않을 거다.”그가 말했다.하나는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왜.”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확인 중이다.”그의 시선이 앞차에 머물렀다.“누가 따라왔는지.”그 말이 떨어지자 차 안이 더 조용해졌다.서하는 뒷좌석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맞네.”그녀가 말했다.“한 번에 안 들어가네.”김도현의 차량은 시동이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브레이크등이 약하게 켜져 있었고, 운전석에 앉은 실루엣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건우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이 상황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도착이 아니라, 확인이었다.하나는 낮게 말했다.“눈치챘을까.”건우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완전히는 아니야.”잠시 후 덧붙였다.“근데 감은 잡았을 거다.”그 말은 지금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김도현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하지
복도를 빠져나오자, 아까와 같은 사무실인데도 온도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누군가는 여전히 보고서를 정리하고, 누군가는 전화를 받으며 웃고 있었지만, 건우의 감각은 그 평온함의 표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마주한 짧은 대화가, 이제부터 이어질 시간의 방향을 분명하게 틀어 놓았기 때문이다.건우는 곧장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복도를 끝까지 걸어가 비상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공간으로 들어서자, 발걸음 소리가 더 또렷하게 울렸다.문을 밀고 들어간 계단실은 조용했다.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와, 위층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문 여닫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하나는 뒤에서 문을 닫으며 물었다.“왜 여기로 왔어.”건우는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시간 벌려고.”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정되어 있었다.하나는 한 발짝 다가섰다.“뭘.”건우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지금쯤.”잠시 후 덧붙였다.“움직이고 있을 거다.”그 말은 추측이 아니라, 이미 계산된 흐름에 가까웠다.김도현은 방금 건우를 만났다.메일의 내용도 확인했고, 건우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대략 짐작했을 것이다.그 상태에서 가만히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하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증거.”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지우거나.”그의 말이 이어졌다.“옮기거나.”서하는 계단 중간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사람은.”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숨길 게 생기면 손이 먼저 움직여.”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중요한 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건우는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짧게 번호 하나를 눌렀다.전화는 한 번에 연결됐다.“네, 검사님.”낯익은 목소리였다.건우는 낮게 말했다.“지금 회사 내부.”잠시 후 덧붙였다.“서버 로그 확인 가능합니까.”전화
메일이 발송된 뒤, 사무실의 시간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흘러갔다.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낮은 대화가 이어졌고, 복도를 오가는 발걸음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평온함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건우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노트북 화면을 켜 둔 채, 아무 작업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선은 사무실 안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조금 전. 김도현이 사무실을 나왔다.그리고 그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하나는 건우 옆에 서 있었다.“봤지.”그녀가 낮게 말했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응.”그의 시선은 복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평소보다 빠르다.”그 말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었다.김도현은 원래 움직임이 느린 사람이었다. 서두르지 않았고, 항상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방금은 달랐다. 걸음이 짧았고,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하나는 조용히 말했다.“메일 봤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하다.”잠시 후 덧붙였다.“내용도 이해했고.”그 말이 떨어지자,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이제 상황은 분명해졌다.정보는 전달됐다.그리고, 상대는 반응했다.서하는 창가에 기대 선 채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생각보다 빠르네.”그녀가 말했다.건우의 시선이 백미러 대신 창가 쪽으로 향했다.서하는 가볍게 웃었다.“급한 사람일수록.”잠시 후 덧붙였다.“첫 반응이 티 나거든.”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은 사실이었다.완전히 준비된 사람은 움직임을 숨긴다.하지만, 갑작스럽게 흔들린 사람은 움직임이 먼저 나온다.건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하나는 그를 바라봤다.“어디 가.”건우는 짧게 말했다.“확인.”그는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하나도 뒤따라 움직였다.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건우의 시선은 주변을 훑고 있었다. 직원 몇 명이 서류를 들고 지나갔고, 멀리서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지만,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낮 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들의 발걸음과 대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건우에게는 그 모든 것이 얇은 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그 안에 숨어 있는 균열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층수가 올라갈수록 숫자가 하나씩 바뀌었고, 그 단순한 변화가 오히려 긴장감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문이 열리자 복도가 나타났다.형이 매일 걸어 다니던 길이었다.건우는 잠시 그 복도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하나는 그의 옆을 따라 걸었고, 서하는 조금 뒤에서 느리게 발걸음을 맞췄다.사무실 문을 열자 직원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오셨습니까.”짧은 인사가 오갔다.건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향했다.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출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자리에 앉은 건우는 노트북을 켰다.화면이 켜지는 동안, 그는 잠시 사무실 안을 훑어봤다.이곳 어딘가에서. 김도현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하나는 건우 옆에 서서 낮게 말했다.“어디서부터 시작할 거야.”건우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작게.”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확실하게.”하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모든 정보를 한 번에 드러내는 게 아니라, 상대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단서만 흘린다.그 정도면 충분했다.건우는 메일 프로그램을 열었다.수신자 목록을 잠시 훑다가 몇 명을 선택했다.재무팀, 감사팀, 그리고 몇몇 임원들.김도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하나는 그 화면을 보며 물었다.“내용은.”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문장은 길지 않았다.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최근 일부 계좌에서 반복적인 자금 이동 패턴이 확인되었습니다.특정 개인 계좌와 연결된 흐름이 있으며,
시신을 실은 차량이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건우는 비를 맞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경광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졌다가 사라졌다.형은 그렇게 떠났다.설명도, 변명도 없이.경찰은 현장을 통제했고, 필요한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참고인 조사 일정이 잡힐 거라고 했다.말은 또렷했지만, 건우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남은 건 한 문장뿐이었다.저녁 8시 전후.그 시간에 그는 집에 있었다.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하나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현관을 나왔다.비는 여전히 세게 내리고 있었고,그녀의 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