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
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
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
9시 12분.
9시 18분.
6분.
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
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
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
“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
그녀가 먼저 물었다.
건우는 잠시 생각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근데 전부는 아닌 것 같지.”
하나의 말이 겹쳐왔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나는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투자자 얘기, 처음 듣는 거였어.”
“형이 따로 말 안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회사 일은 대부분 공유했어.”
그 문장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왔다.
\건우는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걸렸다.
“그날…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는 시선을 들었다.
“형수가 본 건… 거실이었죠?”
“응.”
“부엌 쪽은 어땠어요?”
하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서랍이 열려 있었어.”
“칼꽂이는요.”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기억 안 나.”
짧은 대답.
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은 부엌에서 나온 걸로 추정된다고 했다.
칼꽂이가 비어 있었는지,
흩어져 있었는지,
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충격 속에서는 많은 것이 흐릿해진다.
그런데 9시 18분의 부재중 통화는 오늘 확인했다면서,
부엌 서랍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은 선택적으로 선명해진다.
건우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깊었다.
하나는 식탁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통화 기록 화면이 잠깐 비쳤다.
건우는 괜히 눈을 돌렸다.
“9시 18분.”
그가 낮게 말했다.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응.”
“그때… 어디쯤에 있었어요?.”
“집 앞”
“현관 앞이요?”
“응.”
건우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물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이면…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시간은 기억나요?”
하나는 잠시 멈췄다.
“왜.”
“그냥.”
그는 말을 흐렸다.
“통화 기록이 9시 18분이면…9시 12분 통화 끝나고 6분 뒤 잖아요.”
하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이에 형이… 집 밖으로 나갔다 들어온 건 아닐까요?”
그 질문이 공기를 바꿨다.
하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비는 많이 오고 있었어.”
“그래도.”
건우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집 안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면.”
하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건우야.”
그녀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넌 지금 뭘 말하려는 거야.”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말로 꺼내면 모양이 생긴다.
그는 아직 그 모양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짧은 후퇴. 하나는 그를 오래 바라봤다.
“의심하는 거면… 말해도 돼.”
그녀의 눈에는 방어도, 분노도 없었다.
대신 피로가 있었다.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의심이 아니라… 확인이에요.”
“뭘.”
“시간이요.”
그는 천천히 말했다.
“9시 12분, 9시 18분, 9시 37분.”
하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시간은 거짓말 안 해.”
그녀가 낮게 말했다.
“사람이 거짓말하지.”
그 문장이 지나갔다.
그날 밤, 건우는 혼자 거실에 앉아 있었다.
하나는 방으로 들어갔고, 문은 닫혀 있었다.
9시 12분 - 유림과 통화.
9시 18분 - 하나에게 부재중 전화.
9시 37분 - 신고.
25분.
그 사이에 형은 누군가를 만났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이미 집 안에 있었을까.
건우는 형의 성격을 떠올렸다.
신우는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림은 말했다.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 단어가 자꾸 남았다.
서두른다는 건, 이미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건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게스트룸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묻지 않는다.
묻는 순간, 관계가 먼저 깨질 것 같았다.
아직은 확인이 더 필요했다.
9시 12분.
9시 18분.
그리고 그 사이의 6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공기는 눅눅했다.
밤새 창문을 닫아두었는데도, 집 안에는 묘하게 젖은 냄새가 남아 있었다.
건우는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어 눈을 떴다.
잠든 기억이 거의 없었다.
거실로 나가 물을 마시다가 멈췄다.
식탁 위에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9:12
9:18
9:37
하나의 필체였다.
숫자 옆에 동그라미가 여러 번 그려져 있었다.
그는 메모지를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침이 밝았을 때, 하나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눈 밑이 조금 어두웠다.
잠을 거의 못 잔 얼굴처럼.
“안 잤지?”
그녀가 먼저 말했다.
건우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고, 하나는 메모지를 접어 서류철 안에 넣었다.
“시간이 계속 걸려.”
“9시 18분이요?”
건우가 물었다.
“응.”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때 진동을 느꼈다고 기억하는데… 정확히 어디였는지가 흐려.”
“현관 앞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는 잠시 멈췄다.
“그렇게 말했지.”
“기억이 달라요?”
그녀의 시선이 건우에게 향했다.
“건우야.”
그녀가 낮게 말했다.
“충격받은 기억은… 항상 선명한 부분이랑 흐릿한 부분이 같이 있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건우는 묘하게 걸렸다.
“그럼… 집 안에 들어간 뒤에 본 건 확실해요?”
하나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골랐다.
“거실은 확실해.”
“부엌은요.”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랍이 열려 있었어.”
“칼은?”
하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피가… 바닥에 있었어.”
질문과 대답이 어긋났고, 건우는 그 어긋남을 느꼈다.
오후, 건우는 혼자 회사로 향했다.
하나는 검찰청에 들렀다 온다고 했다.
회사 건물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직원 몇 명이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대표의 동생.
그 시선이 무겁게 느껴졌다.
유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다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건우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유림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날… 형이 서두르고 있었다고 했죠.”
“네.”
“어디를 가려는 사람 같았나요?”
유림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집 안에서요?”
“아니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전화를 끊으면서… ‘나가야겠다’는 뉘앙스였습니다.”
건우의 손이 멈췄다.
“나간다고 했습니까.”
“정확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유림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분명히 자리를 뜨려는 목소리였어요.”
건우는 숫자를 다시 떠올렸다.
9:12 통화 종료.
9:18 하나에게 부재중.
그 6분 사이에.
“혹시… 약속이 있었던건 아니었나요?”
유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외부 투자자와 만남을 조율 중이었습니다.”
“그날이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건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형이…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까.”
이번에는 유림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두려움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계산이었습니다.”
그 한 단어가 남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해가 기울어 있었다.
하나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회사 갔어?”
“네.”
그는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유림 씨가… 나가려는 목소리였다고 하더라고요.”
하나의 손이 멈췄다.
“나가려고?”
“네.”
“그럼… 집 안에 누군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녀의 말끝이 흐려졌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이… 문을 열어줬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하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어요?”
건우의 질문은 조용했지만, 선을 넘고 있었다.
하나는 그를 오래 바라봤다.
“건우야.”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넌 지금… 뭘 생각하고 있어.”
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강도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요.”
“그럼?”
“형이… 누군가를 만나려고 나갔다가, 그 사람이 따라 들어왔을 수도 있고요.”
말을 끝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구체화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날… 현관 문은 잠겨 있었어.”
“안쪽에서요?”
“응.”
그녀의 말이 너무 빠르게 나왔다.
건우는 그 속도를 느꼈다.
“확실해요?”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그 확신이 오히려 이상했다.
밤이 깊었다.
건우는 혼자 거실에 앉아 있었다.
형은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
그런데 유림은 말했다.
‘자리를 뜨려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말했다.
‘현관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어.’
두 문장이 충돌했다.
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려 있었어야 한다.
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건우는 처음으로, 그 생각을 완성했다.
형은 누군가를 집 안으로 들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비밀번호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스트룸 문 앞에서 멈췄다.
문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건우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묻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는 스스로 인정했다.
자신은 지금, 형의 죽음보다도 그날 밤 하나의 기억을 더 의심하고 있다는 걸.
형사는 그 답을 기록하지 않고, 먼저 건우를 바라봤다. 거짓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조심스럽고,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넓은 답이었다. 건우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좁히지 않고, 열어두기 위해서.형사는 잠깐 침묵한 뒤, 캡처 사진을 한 장 더 앞으로 밀었다.“그럼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사진 속에는 더 가까운 각도로 잡힌 실루엣이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작고 어두운 물체. 우산은 아니었다.건우는 그 물체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가슴 안쪽에서 차가운 감각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칼.그 단어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형사는 그의 반응을 보고 있었다.놓치지 않고.“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건우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아직은 없습니다.”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직은, 이라고 붙인 순간부터 그것은 완전한 부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녹음기 옆에 손을 얹은 채, 아주 낮게 말했다.“그럼 지금부터 같이 찾아보죠. 윤신우 씨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집 안에 들였는지.”그 말이 끝났을 때, 건우는 처음으로 이 사건이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바깥에서 들어온 그림자, 하나가 스친 기억, 서하가 끝까지 알고 있는 밤, 그리고 자신이 외면했던 선택이 이제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표 위에 놓이려 하고 있었다.그 시간표가 완성되면, 누가 가장 먼저 무너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척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진술실 안의 공기는 현장보다 훨씬 건조했지만, 건우는 오히려 그 건조함이 더 숨 막히게 느껴졌다. 신우의 집에서는 비 냄새와 피 냄새, 젖은 바닥의 감각이 모든 것을 덮고 있어서 생각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는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사진
하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이해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잠시 뒤 형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있었고, 수첩은 품 안에 넣어 젖지 않게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조금 내려앉아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두 분 모두 경찰서로 이동해주셔야겠습니다. 현장에서는 더 확인하기 어렵고, 시간대 정리가 필요합니다.”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하나를 한 번 보았다. 하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건우가 대신 말했다.형사는 그 반응을 확인한 뒤, 하나에게도 시선을 옮겼다.“괜찮으시겠습니까.”하나는 “네.” 하고 대답하려다 잠깐 멈췄고, 곧 더 작고 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지는 않은데, 갈 수는 있어요.”그 대답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꾸민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사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차로 향하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 동안, 건우는 여러 번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우의 집은 여전히 불빛을 품고 있었고, 그 불빛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조금 전까지 자기 안에서 열렸던 그 밤의 장면은 다시 조용히 닫히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경찰서로 향하는 현실의 시간이 더 강하게 앞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차 안은 좁고 차가웠다. 하나는 뒷좌석 한쪽에 앉았고, 건우는 그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손 하나 정도의 간격이 있었지만, 그 간격은 지금까지의 어떤 거리보다 멀게 느껴졌다. 경찰차가 출발하자 창밖의 빗줄기가 길게 번졌고, 골목의 불빛들이 뒤로 밀려났다.하나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건우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젖은 머리카락, 창백한 입술, 그리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눈. 그 눈을 보면서 건우는 한 가지를 분명히 느꼈다. 하나는 전부를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관리실을 나왔을 때,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다. 처음보다 조금 약해진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빗줄기 자체가 줄어서라기보다 눈이 그 리듬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건우는 현관 처마 아래에서 잠깐 멈춰 섰고, 방금 모니터 안에서 지나갔던 흐릿한 실루엣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렸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성별도 단정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존재 하나만으로 사건의 방향은 바뀌었다.형사는 그 실루엣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관리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다른 형사에게 영상 확보를 지시했고, 입구와 엘리베이터, 건물 뒤편까지 연결되는 모든 화면을 따로 빼두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보다 분명한 집중이 들어 있었다. 그건 건우가 원하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실루엣이 생긴다는 건 외부 용의자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표가 더 촘촘해진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하나는 현관 옆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잠시 안쪽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는지, 젖은 어깨 위에 얇은 담요 같은 것이 걸쳐져 있었지만, 그 담요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워 보였고, 얼굴은 비와 눈물의 경계가 섞인 채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건우는 그녀 쪽으로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관리실에서 확인한 장면을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혹은 짐작하고 있는지를 먼저 읽어야 했다.하나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봤어?”그녀가 물었다.목소리는 작았지만, 일부러 낮춘 건 아니었다. 힘이 빠져 그런 것에 가까웠다.건우는 그녀 앞까지 걸어가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노란 테이프와 빗물, 그리고 조금 전 모니터 속에서 생긴 새로운 시간이 함께 놓여 있었다.“누가 있었어.”그가 말했다.“네가 오기 전에, 건물 주변에 들어온 사람이 하나 더 잡혔어.”하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반응하지
관리실 안 공기가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젊은 형사가 모니터를 가까이 들여다보듯 몸을 숙였고, 경비원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건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안쪽에서는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었다. 사건이 이제부터 더 복잡해질 수 있다는 예감, 그리고 그 복잡함이 자기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아주 냉정하고 불편한 계산이 동시에 올라오고 있었다.“이 사람은 누굽니까.”형사가 경비원에게 물었다.경비원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입주민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안 됩니다.”형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능성이 하나 더 생긴 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건우는 그 순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했다. 지금 이 인물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오히려 이상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 사이의 균형이 중요했다.“형이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네요.”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선을 모니터에 둔 채로, 생각이 입으로 흘러나온 것처럼 들리게.“문을 강제로 연 흔적이 없다는 쪽이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낯익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형사는 그 말을 듣고 건우를 한 번 보았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그 가능성도 포함해서 보겠습니다.”동의였다. 적어도 지금은.건우는 더 보태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 지금 필요한 건 ‘가설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스스로 그 방향으로 걸어가도록 길만 열어두는 것이었다.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하나가 들어가고, 나가고,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건우와 하나가 함께 다시 현장으로 향하는 장면까지 화면에 잡혔다. 그 모든 장면이 순서대로 놓이자,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형사는 그 둘 사이의 짧은 교환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종류의 침묵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건우는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는 길은 좁고 어두웠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고, 배수구 쪽에서는 물이 넘칠 듯한 소리를 내며 고여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은 군데군데 들떠 있었고, 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불규칙하게 튀었다. 현관 앞의 밝은 불빛과는 다른 종류의 공간이었다. 그 음습한 통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건우는 자기 발걸음이 너무 일정하다는 걸 문득 느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더 서두르거나, 반대로 더 조심스럽게 걸을 텐데, 지금 자신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마치 이미 여러 번 지나온 길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걷고 있었다.관리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는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젊은 경비원이 이미 상황을 전해 들은 듯 문을 열어주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경찰들을 보자마자 비켜섰다.“CCTV 저장되는 건 다 있습니다.”그가 먼저 말했다.목소리가 작았지만, 정확하게 필요한 말만 꺼내는 방식이었다.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실은 좁았다. 모니터가 여러 대 붙어 있었고, 그 앞에 낡은 책상과 회전의자 두 개, 벽 한쪽에 걸린 달력과 쓰다 남은 볼펜들이 뒤섞여 있었다. 전형적인 공간이었지만, 지금 이 좁은 곳에서 결정될 수 있는 정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건우는 안쪽으로 한 발짝 들어선 뒤, 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벽 쪽에 몸을 붙이듯 서서 모니터를 볼 수 있는 각도만 확보했다. 그 위치가 중요했다. 너무 가까우면 조급해 보일 수 있고, 너무 멀면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몇 시부터 보죠?”젊은 형사가 물었다.중년 형사는 수첩을 열어 시간대를 한 번 확인한 뒤, 경비원에게 말했다.
형사의 질문이 하나에게 향한 채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동안, 빗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골목 바닥에 고인 물을 세게 두드리며 더 또렷하게 들렸고, 그 일정한 리듬이 지금 이 장면을 덮고 있는 침묵을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형사를 향했는데, 그 짧은 망설임이 단순한 감정의 동요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머릿속에서 어떤 순서를 붙잡으려는 데서 생긴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했다.건우는 옆에 서서 그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하나가 골목 아래까지 내려왔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밤의 바깥쪽 동선이 어디에서 갈라졌는지를 결정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섣불리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조금 전까지는 하나의 흔들림이 길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쪽이 더 안전했지만, 이번에는 같은 방식으로 끼어드는 순간 오히려 더 큰 어긋남을 만들 수도 있었다.하나는 한 번 더 숨을 고른 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짧은 동작을 했다. 손끝이 젖어 있어 그 동작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고, 젖은 머리카락이 다시 뺨에 달라붙었다. 그 사소한 불편함이 지금은 이상하게도 현실감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을 한 번 내려다봤다가, 고개를 들고 형사를 봤다.“집 앞까지만 왔던 것 같아요.”하나의 목소리는 낮았고, 억지로 떨림을 누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떨림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았던 건, 지금 그녀가 무언가를 꾸며내고 있다기보다, 이미 한 번 흐트러진 기억을 다시 정렬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형사는 그 말을 바로 받아 적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얼굴을 잠깐 더 보다가, 시선을 다시 바닥의 자국으로 내렸다. 그는 누군가를 몰아붙이는 식으로 질문을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애매한 지점에서는 더 말을 줄이고, 상대가 스스로 내놓는 정보와 현장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