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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말하지 않는 사람

作者: 데이지
last update 公開日: 2026-07-21 15:56:06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희미하게 번지는 동안,

건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USB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고작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덩어리인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단순한 파일 몇 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 형의 죽음 이후 자신이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준석은 건우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할 말을 다 정해두고도,

그걸 어디까지 내놓아야 할지 마지막까지 계산하고 있는 얼굴에 가까웠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는 차분해 보였지만,

그 차분함이 편안함에서 오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건우도 알 수 있었다.

무너지는 걸 겨우 버티는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움직임이 적어진다.

한참의 침묵 끝에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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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의 밤   149. 흐름을 유지하는 사람들

    최준석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체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숨이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창문을 때리던 빗소리가 한층 더 거세졌다.건우는 손안의 USB를 내려다보며, 그제야 아주 또렷하게 하나의 생각을 했다.형은 정말 피해자였을까.그건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머릿속으로조차 끝까지 밀어붙여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죽은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남겨진 사람들 안에서 너무 쉽게 피해자가 된다. 특히 그 죽음이 피로 얼룩져 있을수록,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의 얼굴보다 마지막 순간의 얼굴을 더 오래 붙잡게 된다.하지만 지금 건우는 처음으로, 형의 죽음을 슬픔이 아니라 구조로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었다.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건우는 USB를 손에 쥔 채 창밖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번지는 도시의 불빛이 빗물 사이로 일그러져 보였다. 마치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어떤 풍경이, 이제야 비로소 형태를 드러내려는 것처럼.그날 밤, 건우는 아주 늦게서야 알았다.끝난 줄 알았던 일은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최준석과 헤어진 뒤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건우는 몇 번이나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특별한 이유가있어서라기보다, 자꾸 뭔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시각이든, 날짜든,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위치든. 방금 전까지 최준석과 마주 앉아 있었던 시간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걸, 눈에 보이는 숫자 같은 것으로라도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았다.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화면 위 시간은 차갑게 흘러가고 있었고, 바깥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건우 손 안에 쥔 USB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그는 시동을 걸지 않은 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앞유리 위로 빗물이 쉴 새 없이 번져내렸고, 그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은 전부 윤곽이 흐려져 있었다. 세상이 흐려진

  • 형수의 밤   148. 지키기 위한 손이 아니었다면

    그 말은 곧,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고, 결과도 아니고, 그저 흔적이 남지 않는 것. 누군가 다치든, 누군가 사라지든, 누군가 망가지든 겉으로만 조용하면 되는 방식.건우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어긋나는 걸 느꼈다.“아니죠.”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최준석을 향한 말인지, 자신을 향한 말인지 건우도 분간하지 못했다.“형이 그런 식으로까지 했을 리는…”끝까지 문장을 잇지 못했다.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부터가 이미 그럴 리 없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형의 사고도, 형의 죽음도, 하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밤도,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지금 이 남자 앞에서 형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최준석은 그 미완성 문장을 굳이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건우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말을 이어갔다.“직접 손대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건우의 눈이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최준석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그런 일은 본인이 안 했어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늘 다른 사람 손을 썼습니다.”“…….”“근데 누가 움직일지, 어디까지 가야 할지는 정했죠.”그 순간 건우는,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감각을 느꼈다. 형에 대한 기억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끔찍한 건, 지금까지는 보호처럼 보였던 몇몇 장면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어릴 적, 형은 늘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먼저 움직이던 사람이었다.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 빨리 개입했고, 건우가 보기엔 늘 정리하는 쪽이었다. 그땐 그게 든든함으로 보였다. 형은 늘 한발 앞서 있었고, 집 안에서 무언가 흔들리려 하면 가장 먼저 손을 대는 사람이었다.그런데 만약 그 손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통제하기 위한 손이었다면. 그 순간부터 건우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장면을 다시 봐야 했다.“그 사

  • 형수의 밤   147. 말하지 않는 사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희미하게 번지는 동안, 건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USB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고작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덩어리인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단순한 파일 몇 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건 아마, 형의 죽음 이후 자신이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준석은 건우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할 말을 다 정해두고도, 그걸 어디까지 내놓아야 할지 마지막까지 계산하고 있는 얼굴에 가까웠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는 차분해 보였지만, 그 차분함이 편안함에서 오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건우도 알 수 있었다. 무너지는 걸 겨우 버티는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움직임이 적어진다.한참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최준석 쪽이었다.“그거, 전부 아닙니다.”건우는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방 안에 오래 남는 종류의 말이었다. 건우는 대답 대신 USB 쪽으로 눈을 한 번 내렸다가 다시 최준석을 바라봤다.“전부 아니면.”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뭐가 더 남아 있는데요.”최준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빗소리가 잠깐 더 선명해진 사이, 그는 마른 입술을 한 번 눌렀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지금까지 보신 건… 겉입니다.”그 말은 이상하게도 건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겉이라니. 그 안에 들어 있던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지저분했다. 자금 흐름은 말할 것도 없고, 외주 계약서와 누락된 정산 내역, 서로 다른 이름으로 돌려 막은 계좌들,사고 전후 시점과 묘하게 맞물려 있는 몇 개의 승인 기록까지. 그 파일을 처음 열었을 때 건우는 솔직히 그 정도면 이미 바닥에 닿은 줄 알았다.그런데 저 남자는 지금 그게 바닥이 아니라 표면이라고 말하고 있었

  • 형수의 밤   146. 도망칠 방향이 사라졌을 때

    차에서 내리는 순간,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도심에서 벗어난 곳의 밤은 소리가 얇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차량 소리도 희미했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건우는 문을 닫으며 시선을 곧장 주차장 쪽으로 옮겼다.검은 SUV.번호는 이미 확인했다.그 차량이 이곳에 있다는 건, 최준석이 아직 이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하나는 건우의 옆에 섰다.“어디지.”건우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봤다.리조트 본관.전체 불이 켜져 있지는 않았다.일부 층, 일부 구간만 밝게 드러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방향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저쪽.”그가 낮게 말했다.하나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2층.복도 끝 쪽.창문 하나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다른 방들은 어둡거나, 희미하게만 켜져 있었다.서하는 뒤에서 말했다.“혼자 쓰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그럴 거다.”짧은 판단.사람이 적은 곳을 고른 이유는 명확하다.마주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다.세 사람은 동시에 움직였다.리조트 입구 쪽으로 향했다.유리문이 열리자, 안쪽 공기가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로비에는 직원 한 명이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깊게 머물지 않았다. 늦은 시간, 손님이 드문 시간대였다.건우는 멈추지 않고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하나는 그 선택을 이해했다.소리.정지 시간.불필요한 변수.계단이 더 빠르고, 더 조용했다.발걸음이 한 계단씩 올라갔다.소리는 최소한으로 줄였다.건우의 시선은 위쪽에 고정되어 있었다.2층.복도.빛이 새어나오는 방.그 위치까지의 거리.모든 것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2층에 도착했다.복도는 조용했다.카펫이 깔려 있어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벽에 걸린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고, 그 사이로 길게 뻗은 복도가 끝까지 이어지고 있었다.건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빛이 있는 방향으로 하나는 옆을 따라붙었다.서하는 뒤쪽을

  • 형수의 밤   145. 아직 끊기지 않은 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안쪽의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층수를 표시하는 숫자가 내려갈수록,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생각이 더 또렷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건우는 벽에 기대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음 동선이 그려지고 있었다.최준석.이름 하나가 방향을 바꿨다.김도현이 만든 흐름이 드러났다면,최준석은 그 흐름을 유지시키는 역할에 가까웠다.그 말은 곧. 지금 이 구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지하 주차장의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바닥에 길게 번지고 있었다.건우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하나는 옆을 따라붙었다.“위치 찍혔어?”건우는 짧게 대답했다.“대략.”그의 시선이 차량 사이를 훑었다.“도시 외곽.”잠시 후.“리조트 쪽.”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사람 많지 않은 곳.”서하는 뒤에서 말했다.“숨기 좋네.”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알고 있었다.사람이 적은 곳은 시선이 적다.시선이 적으면. 움직임이 자유로워진다.그래서. 그곳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차는 곧장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지상으로 올라오자, 저녁이 내려앉기 시작하고 있었다.빛이 낮아졌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도로 위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건우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지금 필요한 건 빠름이 아니라 정확함이었다.하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마지막 위치.”잠시 후.“두 시간 전이야.”건우는 짧게 물었다.“이동 속도.”하나는 화면을 확인했다.“차량 기준이면.”잠시 생각했다.“지금쯤 도착했을 수도 있고.”서하는 덧붙였다.“아직 있을 수도 있고.”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둘 다 가능했다.그래서, 놓칠 수 없다.차는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다.건물들이 줄어들고, 도로가 길게

  • 형수의 밤   144. 피한 거다, 라는 짧은 결론

    모니터를 닫자, 방 안의 공기가 다시 평소의 밀도로 돌아왔다.숫자와 기록 속에 잠겨 있던 시간이 빠져나가자, 주변의 소리가 조금씩 또렷해졌다. 누군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통화 음성, 키보드를 두드리는 리듬. 일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건우는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았다.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방금 정리한 흐름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훑었다.김도현.그리고, 최준석.이름 두 개가 같은 선 위에 놓여 있었다.하나는 조용히 말했다.“연락할 거야?”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짧은 대답이었다.하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 대답에는 이미 방향이 담겨 있었다.건우는 말했다.“지금 연락하면.”잠시 후.“숨는다.”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아직 모른다.”짧은 설명.최준석은 지금 상황을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김도현이 흔들렸다는 것.흐름이 드러났다는 것.그 모든 것이 아직 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그 틈이 필요했다.서하는 벽에 기대며 말했다.“그럼 먼저 보러 가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위치부터.”그의 말이 이어졌다.“확인한다.”하나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자료에 있지.”건우는 짧게 말했다.“있다.”그는 USB 안에서 열어둔 파일을 다시 불러왔다.연결된 이름 목록.그 중 하나, 최준석.이름을 클릭했다.관련 정보가 펼쳐졌다.소속.직함.연락처.그리고, 최근 동선.하나는 화면을 따라가며 말했다.“외부 감사팀.”잠시 후.“본사는 따로 있고.”건우는 이어서 말했다.“지금은.”그의 시선이 한 줄에 멈췄다.“출장 중.”짧은 정적.하나는 눈을 좁혔다.“출장?”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제부터.”그의 말이 이어졌다.“지방.”서하는 작게 웃었다.“타이밍 좋네.”그녀의 말에는 가벼움이 있었지만, 상황은 가볍지 않았다.하나는 조용히 물었다.“우연일까.”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시선을 내려

  • 형수의 밤   6. 6분의 공백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 형수의 밤   5. 공백의 길이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 형수의 밤   4. 문장 사이의 공백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 형수의 밤   3. 마지막 통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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