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
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
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
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
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
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
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오늘 일정 있어요?”
건우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청사 들렀다가… 오후엔 시간 비워놨어.”
“왜요.”
“현장 다시 보고 싶어.”
건우의 손이 멈췄다.
“출입 통제 아직 안 풀렸어요.”
“형사한테 부탁했어. 잠깐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속이 보이지 않았다.
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도 같이 가요.”
하나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집 앞은 여전히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고,
비는 그쳤지만, 바닥은 아직 젖어 있었다.
현관문 앞에서 건우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여기서 모든 게 멈췄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소독약과 피 냄새가 섞인,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하나는 먼저 들어갔다.
거실은 그대로였다. 바닥은 정리됐지만, 가구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여기.”
하나가 낮게 말했다.
“내가 처음 본 자리.”
건우는 그 자리를 바라봤다.
형이 쓰러져 있었던 위치.
“그날… 현관 문은.”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겨 있었어.”
“안에서요.”
“응.”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갔어요?”
“응.”
“문 열렸고요?”
“열렸지.”
그녀의 답은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 확신은 있었다.
건우는 현관 안쪽 잠금 장치를 바라봤다.
자동 잠금. 문이 닫히면 자동으로 잠긴다.
“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려 있었어야 해요.”
그는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부엌 쪽으로 걸어가 서랍이 반쯤 열려 있는 걸 확인했다.
“여기.”
그녀가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 서랍.”
건우는 서랍 안을 들여다봤다.
칼꽂이는 정리되어 있었고, 한 칸이 비어 있었다.
“원래… 저 칸 비어 있었어요?”
그가 물었다.
하나는 잠시 멈췄다.
“…모르겠어.”
이번에는 대답이 느렸다.
“그날은 서랍이 열려 있는 것만 봤어.”
“칼이 빠져 있었는지는.”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 안 나.”
기억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고,
확실했던 것들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거실로 돌아왔을 때, 건우는 창문을 바라봤다.
후면 창.
강도가 침입했다는 경로.
창틀에는 여전히 파손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형이… 문을 열어줬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하나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면.”
그는 말을 이었다.
“굳이 창문을 깨고 들어올 필요는 없잖아요.”
하나는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그럼 네 생각은 뭐야.”
질문이 아니라, 직면이었다.
건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형을 밖으로 부르려고 했고, 형이 나가려다가”
그는 말을 멈췄고, 하나는 조용히 다시 물었다.
“누군가가 누구야.”
건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유림.
투자자.
아니면
그는 그 이름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집을 나오는 길, 하나가 말했다.
“건우야.”
“네.”
“너 지금… 혹시 나를 의심해?”
그 질문은 날카롭지 않았다.
그냥, 평평했을 뿐.
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의심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증거가 부족했다.
“그럼.”
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차 안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늦은 밤, 건우는 혼자 형의 집 구조를 머릿속에 그렸다.
현관- 거실 - 부엌 - 후면 창.
9시 12분 통화 종료.
9시 18분 하나에게 부재중.
9시 37분 신고.
만약 형이 9시 12분 이후 집 안에 있었다면,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어야 한다.
만약 형이 9시 12분 이후 밖으로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려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안쪽에서.’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안쪽에서 잠근 사람.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간이 아니라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직 이름은 붙이지 못한 채.
그날 밤, 건우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현관문이 떠올랐다.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는 말.
문은 말을 하지 않는다.
기억하는 건 사람이다.
그는 새벽 세 시쯤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불을 켜지 않은 채, 현관 앞에 섰다.
자기 집 문이었다.
같은 모델, 같은 자동 잠금 장치.
문을 닫았다.
철컥.
자동으로 잠겼다.
그는 안쪽에서 손잡이를 눌러보았다. 열렸다.
밖에서 손잡이를 눌러보았다. 잠겨 있었다.
안쪽에서 잠근 문은, 안쪽에서는 언제든 열린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
형의 집 문은, 그날 밤,
하나가 비밀번호를 눌러 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형은 이미 안쪽에 있었고, 문은 닫혀 있었고, 자동으로 잠겼다는 뜻이다.
그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건, ‘나가려던 사람’이라는 말이다.
아침이 밝았을 때, 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눈은 떠 있었지만, 밤을 지운 얼굴은 아니었다.
“잠 안 왔지.”
그녀가 먼저 말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문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나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
“문?”
“네.”
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날… 들어갔을 때, 문이 완전히 닫혀 있었어요?”
하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위로 올렸다.
“닫혀 있었지.”
“틈도 없이요?”
“응.”
대답은 빠르지 않았지만, 망설임도 없었다,
건우는 숨을 고르고 물었다.
“잠금 소리는요.”
“무슨 소리.”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면… 문 열릴 때 ‘삐’ 소리 나잖아요.”
하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랬겠지.”
“기억나요?”
이번에는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 건… 기억 안 나.”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었다는 건 또렷하게 기억한다.
잠금 소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오전, 건우는 혼자 형의 집 근처를 다시 찾았다.
출입은 허가되지 않았지만, 바깥에서 볼 수 있는 건 있었다.
후면 창.
깨진 유리 조각은 정리됐지만,
창틀에는 여전히 금이 남아 있었다.
그는 창문을 오래 바라봤다.
강도가 침입했다면, 왜 후면 창을 택했을까.
정문 비밀번호를 모르는 사람.
혹은 모른 척한 사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너무 빠르게 간다.
그는 다시 회사로 향했다.
유림은 그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또 오셨네요.”
건우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날 통화… 정확히 몇 초였죠.”
유림은 바로 대답했다.
“1분 4초.”
“형의 목소리… 뒤에 다른 소리는 없었습니까.”
“소리요?”
“발자국이라든지.”
유림은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조용했습니다.”
“정말요?”
이번에는 유림이 건우를 바라봤다.
“무슨 의미입니까.”
건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형이 나가려는 사람 같았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런데 배경은 조용했다고요.”
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은 서로를 찌르고 있었다.
나가려는 사람의 뒤에는 보통 소리가 있다.
발자국, 문 열리는 소리, 혹은 바람.
그런데 조용했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서두른다는 게…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유림은 컵을 내려놓았다.
“결정을 빨리 내리려는 사람의 말투였습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답은 분명했다.
건우는 그 말을 기억 속에 고정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하나는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회사 갔다 왔어?”
“네.”
그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림 씨가… 통화 배경은 조용했다고 해요.”
하나는 손을 멈췄다.
“그래?”
“네. 발자국 소리도, 문 소리도 없었다고.”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 안에 있었겠지.”
“그렇겠죠.”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형이 나가려던 게 아니라면.”
하나는 시선을 들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형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가능성요.”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고, 통화 배경은 조용했고.”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그 사람은… 이미 안에 있었을 수도 있어요.”
공기가 아주 느리게 식었다.
하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건우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넌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계산하고 있었다.
신우의 시간을, 행동을, 그리고 상황을
밤이 깊었다.
건우는 거실에 앉아 숫자를 다시 적었다.
9:12
9:18
9:37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조용했다.’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고,
통화는 조용했고, 하나는 부재중을 못 받았고.
어느 문장이 먼저 흔들릴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는 깨달았다.
이 사건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리고 기억은 때때로 가장 쉽게 바뀌는 증거라고.
형사는 그 답을 기록하지 않고, 먼저 건우를 바라봤다. 거짓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조심스럽고,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넓은 답이었다. 건우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좁히지 않고, 열어두기 위해서.형사는 잠깐 침묵한 뒤, 캡처 사진을 한 장 더 앞으로 밀었다.“그럼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사진 속에는 더 가까운 각도로 잡힌 실루엣이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작고 어두운 물체. 우산은 아니었다.건우는 그 물체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가슴 안쪽에서 차가운 감각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칼.그 단어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형사는 그의 반응을 보고 있었다.놓치지 않고.“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건우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아직은 없습니다.”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직은, 이라고 붙인 순간부터 그것은 완전한 부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녹음기 옆에 손을 얹은 채, 아주 낮게 말했다.“그럼 지금부터 같이 찾아보죠. 윤신우 씨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집 안에 들였는지.”그 말이 끝났을 때, 건우는 처음으로 이 사건이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바깥에서 들어온 그림자, 하나가 스친 기억, 서하가 끝까지 알고 있는 밤, 그리고 자신이 외면했던 선택이 이제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표 위에 놓이려 하고 있었다.그 시간표가 완성되면, 누가 가장 먼저 무너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척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진술실 안의 공기는 현장보다 훨씬 건조했지만, 건우는 오히려 그 건조함이 더 숨 막히게 느껴졌다. 신우의 집에서는 비 냄새와 피 냄새, 젖은 바닥의 감각이 모든 것을 덮고 있어서 생각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는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사진
하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이해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잠시 뒤 형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있었고, 수첩은 품 안에 넣어 젖지 않게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조금 내려앉아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두 분 모두 경찰서로 이동해주셔야겠습니다. 현장에서는 더 확인하기 어렵고, 시간대 정리가 필요합니다.”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하나를 한 번 보았다. 하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건우가 대신 말했다.형사는 그 반응을 확인한 뒤, 하나에게도 시선을 옮겼다.“괜찮으시겠습니까.”하나는 “네.” 하고 대답하려다 잠깐 멈췄고, 곧 더 작고 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지는 않은데, 갈 수는 있어요.”그 대답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꾸민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사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차로 향하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 동안, 건우는 여러 번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우의 집은 여전히 불빛을 품고 있었고, 그 불빛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조금 전까지 자기 안에서 열렸던 그 밤의 장면은 다시 조용히 닫히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경찰서로 향하는 현실의 시간이 더 강하게 앞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차 안은 좁고 차가웠다. 하나는 뒷좌석 한쪽에 앉았고, 건우는 그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손 하나 정도의 간격이 있었지만, 그 간격은 지금까지의 어떤 거리보다 멀게 느껴졌다. 경찰차가 출발하자 창밖의 빗줄기가 길게 번졌고, 골목의 불빛들이 뒤로 밀려났다.하나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건우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젖은 머리카락, 창백한 입술, 그리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눈. 그 눈을 보면서 건우는 한 가지를 분명히 느꼈다. 하나는 전부를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관리실을 나왔을 때,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다. 처음보다 조금 약해진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빗줄기 자체가 줄어서라기보다 눈이 그 리듬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건우는 현관 처마 아래에서 잠깐 멈춰 섰고, 방금 모니터 안에서 지나갔던 흐릿한 실루엣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렸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성별도 단정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존재 하나만으로 사건의 방향은 바뀌었다.형사는 그 실루엣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관리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다른 형사에게 영상 확보를 지시했고, 입구와 엘리베이터, 건물 뒤편까지 연결되는 모든 화면을 따로 빼두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보다 분명한 집중이 들어 있었다. 그건 건우가 원하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실루엣이 생긴다는 건 외부 용의자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표가 더 촘촘해진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하나는 현관 옆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잠시 안쪽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는지, 젖은 어깨 위에 얇은 담요 같은 것이 걸쳐져 있었지만, 그 담요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워 보였고, 얼굴은 비와 눈물의 경계가 섞인 채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건우는 그녀 쪽으로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관리실에서 확인한 장면을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혹은 짐작하고 있는지를 먼저 읽어야 했다.하나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봤어?”그녀가 물었다.목소리는 작았지만, 일부러 낮춘 건 아니었다. 힘이 빠져 그런 것에 가까웠다.건우는 그녀 앞까지 걸어가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노란 테이프와 빗물, 그리고 조금 전 모니터 속에서 생긴 새로운 시간이 함께 놓여 있었다.“누가 있었어.”그가 말했다.“네가 오기 전에, 건물 주변에 들어온 사람이 하나 더 잡혔어.”하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반응하지
관리실 안 공기가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젊은 형사가 모니터를 가까이 들여다보듯 몸을 숙였고, 경비원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건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안쪽에서는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었다. 사건이 이제부터 더 복잡해질 수 있다는 예감, 그리고 그 복잡함이 자기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아주 냉정하고 불편한 계산이 동시에 올라오고 있었다.“이 사람은 누굽니까.”형사가 경비원에게 물었다.경비원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입주민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안 됩니다.”형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능성이 하나 더 생긴 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건우는 그 순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했다. 지금 이 인물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오히려 이상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 사이의 균형이 중요했다.“형이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네요.”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선을 모니터에 둔 채로, 생각이 입으로 흘러나온 것처럼 들리게.“문을 강제로 연 흔적이 없다는 쪽이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낯익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형사는 그 말을 듣고 건우를 한 번 보았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그 가능성도 포함해서 보겠습니다.”동의였다. 적어도 지금은.건우는 더 보태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 지금 필요한 건 ‘가설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스스로 그 방향으로 걸어가도록 길만 열어두는 것이었다.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하나가 들어가고, 나가고,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건우와 하나가 함께 다시 현장으로 향하는 장면까지 화면에 잡혔다. 그 모든 장면이 순서대로 놓이자,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형사는 그 둘 사이의 짧은 교환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종류의 침묵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건우는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는 길은 좁고 어두웠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고, 배수구 쪽에서는 물이 넘칠 듯한 소리를 내며 고여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은 군데군데 들떠 있었고, 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불규칙하게 튀었다. 현관 앞의 밝은 불빛과는 다른 종류의 공간이었다. 그 음습한 통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건우는 자기 발걸음이 너무 일정하다는 걸 문득 느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더 서두르거나, 반대로 더 조심스럽게 걸을 텐데, 지금 자신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마치 이미 여러 번 지나온 길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걷고 있었다.관리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는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젊은 경비원이 이미 상황을 전해 들은 듯 문을 열어주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경찰들을 보자마자 비켜섰다.“CCTV 저장되는 건 다 있습니다.”그가 먼저 말했다.목소리가 작았지만, 정확하게 필요한 말만 꺼내는 방식이었다.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실은 좁았다. 모니터가 여러 대 붙어 있었고, 그 앞에 낡은 책상과 회전의자 두 개, 벽 한쪽에 걸린 달력과 쓰다 남은 볼펜들이 뒤섞여 있었다. 전형적인 공간이었지만, 지금 이 좁은 곳에서 결정될 수 있는 정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건우는 안쪽으로 한 발짝 들어선 뒤, 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벽 쪽에 몸을 붙이듯 서서 모니터를 볼 수 있는 각도만 확보했다. 그 위치가 중요했다. 너무 가까우면 조급해 보일 수 있고, 너무 멀면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몇 시부터 보죠?”젊은 형사가 물었다.중년 형사는 수첩을 열어 시간대를 한 번 확인한 뒤, 경비원에게 말했다.
형사의 질문이 하나에게 향한 채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동안, 빗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골목 바닥에 고인 물을 세게 두드리며 더 또렷하게 들렸고, 그 일정한 리듬이 지금 이 장면을 덮고 있는 침묵을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형사를 향했는데, 그 짧은 망설임이 단순한 감정의 동요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머릿속에서 어떤 순서를 붙잡으려는 데서 생긴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했다.건우는 옆에 서서 그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하나가 골목 아래까지 내려왔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밤의 바깥쪽 동선이 어디에서 갈라졌는지를 결정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섣불리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조금 전까지는 하나의 흔들림이 길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쪽이 더 안전했지만, 이번에는 같은 방식으로 끼어드는 순간 오히려 더 큰 어긋남을 만들 수도 있었다.하나는 한 번 더 숨을 고른 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짧은 동작을 했다. 손끝이 젖어 있어 그 동작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고, 젖은 머리카락이 다시 뺨에 달라붙었다. 그 사소한 불편함이 지금은 이상하게도 현실감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을 한 번 내려다봤다가, 고개를 들고 형사를 봤다.“집 앞까지만 왔던 것 같아요.”하나의 목소리는 낮았고, 억지로 떨림을 누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떨림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았던 건, 지금 그녀가 무언가를 꾸며내고 있다기보다, 이미 한 번 흐트러진 기억을 다시 정렬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형사는 그 말을 바로 받아 적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얼굴을 잠깐 더 보다가, 시선을 다시 바닥의 자국으로 내렸다. 그는 누군가를 몰아붙이는 식으로 질문을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애매한 지점에서는 더 말을 줄이고, 상대가 스스로 내놓는 정보와 현장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시신을 실은 차량이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건우는 비를 맞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경광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졌다가 사라졌다.형은 그렇게 떠났다.설명도, 변명도 없이.경찰은 현장을 통제했고, 필요한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참고인 조사 일정이 잡힐 거라고 했다.말은 또렷했지만, 건우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남은 건 한 문장뿐이었다.저녁 8시 전후.그 시간에 그는 집에 있었다.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하나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현관을 나왔다.비는 여전히 세게 내리고 있었고,그녀의 코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