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건우는 대답 대신 그녀를 봤다.하나의 얼굴은 너무 평범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방금 전 약국 안에서 십여 초 넘게 멈춰 있었던 사람이, 지금은 그냥 머리가 조금 아픈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응.”하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아무 생각도 안 났는데.”그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진짜 아무것도 없었어. 멍해진 것도 아니고, 내가 멈췄다는 느낌도 없었고… 그냥, 이어져 있었어. 근데 네 말대로면 중간이 비어 있는 거잖아.”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자기 문장이 이상한 걸 아는 얼굴이었다. 설명하려고 할수록 더 설명이 안 되는 상태. 건우는 그걸 듣고, 이게 더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이건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짧지만 분명한 시간의 단절. 목격자가 있고, 당사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공백.건우는 낮게 말했다.“오늘은 그냥 들어가자.”하나는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비어 있는 길바닥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물었다.“너 무섭지.”건우는 잠깐 숨을 멈췄다.하나는 웃으려다가 실패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솔직히 말해도 돼.”건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이 무서움만은 아니라는 걸, 오히려 그래서 더 설명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섭다기보다 아팠고, 아프다기보다 화가 났고, 화가 난다고 말하기엔 또 너무 무력했다.그는 결국 천천히 말했다.“무서운 건 아닌데.”“그럼.”“열 받아.”하나는 처음으로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건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네가 자꾸 이렇게 비어 가는 게.”그 문장은 매끄럽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진짜 같았다. 하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생수병 겉면을 엄지로 천천히 문지르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아주 늦게 중얼거렸다.“나도 그래.”그 대답은 너무 작아서, 편의점 자동문 소리에 묻힐 뻔했다.건우는 그
하나는 오늘도 별다른 말 없이 그 길을 걸었다. 중간에 한 번 신호등 앞에 멈췄을 때만,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건우는 그 짧은 움직임을 보며 낮게 물었다.“지금도 아파?”하나는 눈을 뜨고 작게 웃었다.“조금.”“그럼 그냥 가까운 데 가지.”“거긴 약사가 너무 시끄러워.”건우는 피식 웃었다.“그 이유였어?”“응. 자꾸 괜찮냐고 너무 많이 물어.”그 말은 장난처럼 들렸지만, 건우는 그 안에 진심이 섞여 있다는 걸 느꼈다.요즘의 하나는 누군가가 자기 상태를 오래 들여다보는 걸 유난히 힘들어했다. 건우조차 그걸 느낄 정도였으니, 낯선 약사의 다정한 질문은 더 버거웠을지도 몰랐다.약국에 도착했을 때 안에는 손님이 두 사람밖에 없었다. 카운터 앞 의자에는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고, 안쪽에서는 약사가 처방전 봉투를 정리하고 있었다. 약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인 공기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하나는 두통약 진열대 앞에서 잠깐 멈췄다.건우는 그녀보다 반 걸음 뒤에 서서 어떤 약을 집는지 조용히 지켜봤다. 하나는 상자를 하나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다른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유통기한 쪽을 한 번 문질렀다. 별것 아닌 동작이었는데, 그 움직임이 갑자기 아주 느려졌다.건우는 처음엔 단순히 라벨을 읽는 줄 알았다.그런데 시간이 조금 이상했다.하나는 상자를 손에 든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고개는 약간 숙여져 있었고, 시선은 분명 상자 어딘가에 닿아 있는데 초점이 맞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약국 천장등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다.“하나야.”건우가 낮게 불렀다.반응이 없었다.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하나.”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약국 안쪽에서 약사가 잠깐 이쪽을 봤다. 건우는 괜히 “괜찮아요”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 전에 먼저 하나의 팔꿈치를 아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그제야 하나가 눈을 깜빡였다.정말로, 깊은 물속에서 늦게 떠오른 사람처럼.“어?”그 한마
건우는 숨을 멈췄다.하나는 물컵을 손에 쥔 채, 유리컵 표면에 맺힌 물기를 엄지로 천천히 문질렀다.“내가 진짜 괜찮은 건지, 아니면 괜찮은 척을 너무 오래 해서 이제 구분이 안 되는 건지.”그 말은 식당 안의 소음과 너무 어울리지 않게 조용했다.주변 테이블에서는 여전히 누군가 웃고 있었고,주방에서는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릴 때마다 저녁 바람이 잠깐씩 안으로 스며들었다.그런데 그 모든 일상적인 소리들 한가운데서, 하나의 목소리만 이상하게 선명하게 들렸다.건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나는 자기가 너무 무거운 말을 꺼냈다는 걸 깨달은 사람처럼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미안. 괜히 분위기 이상하게 했네.”그 웃음은 예뻤지만, 건우는 그게 더 아팠다.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올려둔 하나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아주 조심스럽게.’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하나는 그 손길에 잠깐 눈을 멈췄다.건우는 짧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나한텐 말해도 돼.”그 말은 생각보다 더 많은 걸 담고 있었다.위로처럼 들릴 수도 있었고, 약속처럼 들릴 수도 있었으며,어쩌면 아주 늦은 사과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하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손을 빼지도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더 오래 남았다.식당을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많이 내려와 있었다.골목에는 저녁 장사를 마무리하는 가게 불빛들이 줄지어 켜져 있었고, 맞은편 편의점에서는 환한 형광등 불빛이 인도까지 번지고 있었다. 둘은 굳이 택시를 잡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집까지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누구도 먼저 “그만 들어가자”고 말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다.하나는 건우보다 반 발쯤 앞서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우리 예전에.”건우는 걸음을 맞추며 그녀를 봤다.“응?”하나는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이 근처에서 겨울에 붕어빵 사 먹은 적 있지 않았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말들이야말로 둘 사이에 가장 부족했던 것이었다.사건 얘기 말고, 의심 말고, 불안 말고, 설명되지 않는 밤 말고.그냥 하루를 살다가배고파서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나누는 말들. 하나는 물컵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우리 예전엔 진짜 아무 데나 잘 들어갔었지.”건우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시선을 멈췄다.“응.”“돈 없어서 맨날 메뉴판 제일 아래부터 봤잖아.”건우는 바로 반박했다.“그건 너였어.”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래. 네가 더 심했거든.”“아닌데.”“아니긴. 맨날 ‘이 집은 제육이 제일 가성비가 낫다’ 이러고.”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하나는 그 웃음을 보며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멈췄다.건우는 그 정지를 바로 알아챘다.마치 그 웃는 얼굴을 오랜만에 확인한 사람처럼.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는 다시 시선을 내리며 물컵을 만졌다.음식이 나오자 둘은 잠깐 대화를 멈추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수저 부딪히는 소리,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웃음, 주방 쪽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스며드는 바깥 공기. 전부 너무 생활적인 소리라서, 오히려 둘 사이의 침묵을 덜 부담스럽게 만들었다.건우는 밥을 한 숟갈 뜨다가 문득 맞은편의 하나를 봤다.하나는 국그릇 위에 숟가락을 든 채 잠깐 멈춰 있었다.처음엔 그냥 뜨거워서 식히는 줄 알았다.그런데 아니었다.그녀의 시선은 자기 앞의 음식 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초점은 그 너머 어딘가에 가 있었다.정말 짧은 순간이었다.몇 초도 안 됐을 것이다.하지만 건우는 이제 그런 종류의 공백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하나야.”그가 낮게 부르자, 하나는 아주 살짝 늦게 눈을 깜빡였다.“응?”“괜찮아?”하나는 숟가락을 다시 움직이며 작게 웃었다.“응. 왜?”“방금 멍하니 있었어.”그 말에 하나는 손을 멈췄다.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정말 미세하게 표정이 굳었다.그 변화는 순식간이라, 모르는 사
저녁 여섯 시가 조금 넘었을 때, 건우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낮 동안 잠깐 들렀던 카페에서 하나와 헤어진 뒤, 그는 집에 돌아와 한동안 소파에 앉아만 있었다. 특별히 뭘 한 것도 없는데 몸은 이상하게 더 무거웠고, 머릿속은 오히려 더 조용해져 있었다. 사람은 가끔 아주 결정적인 말을 들은 날보다, 그 말을 들은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이어가야 하는 날 더 지친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하나는 카페를 나서기 전에 저녁 약속 시간을 굳이 정확히 정하지 않았다.그저 “이따 연락할게”라고 했고, 정말로 한 시간쯤 뒤에 짧은 메시지가 왔다.‘집 근처에서 볼래? 멀리는 말고.’건우는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짧게 ‘응’이라고 답했다.그 한 글자가 유난히 오래 걸렸다.아마 그건 오늘 저녁이 단순히 밥 한 끼가 아니라는 걸 그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약속 장소는 집 근처 골목 입구였다.번화가까지 나가지 않아도 작은 식당들이 모여 있는 동네라, 저녁 시간이 되면 직장인이나 동네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다녔다. 노란 간판 아래로 김이 오르고, 고깃집 환풍기 냄새와 국물 냄새가 저녁 공기 속에 뒤섞여 떠다녔다. 길가 편의점 앞에는 맥주 박스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있었고, 맞은편 빵집 쇼윈도 안에는 막 구운 식빵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이상할 만큼 평범한 풍경이었다.그리고 바로 그래서,건우는 그 골목 입구에 서 있는 하나를 보는 순간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하나는 낮보다 조금 더 편한 차림이었다.검은색 얇은 니트에 긴 스커트, 대충 묶은 머리, 거의 화장기 없는 얼굴. 누가 봐도 특별한 약속을 위해 꾸민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익숙했다. 예전의 하나는 원래 이런 식이었다. 일부러 꾸미지 않은 얼굴로 툭 나타나서, 별것 아닌 저녁을 먹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건우를 오래 보게 만드는 사람.하나는 먼저 그를 보고 손을 아주 작게 흔들
하나는 시선을 내려 노트 가장자리를 잠깐 봤다.그녀는 제목까지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짧은 정지 안에, 이게 자기와 무관한 시간이 아니라는 감각이 스친 듯했다.하나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혼자 있었어?”“응.”“나도.”그 대답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하나는 아메리카노를 하나 주문한 뒤, 컵이 나오기 전까지 테이블 가장자리만 손끝으로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평소 같으면 별 의미 없이 지나쳤을 작은 움직임인데, 오늘의 건우는 자꾸만 그런 사소한 습관들에 시선이 걸렸다.잠깐 뒤, 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요즘 이상한 게 있어.”건우는 고개를 들었다.하나는 시선을 창밖에 둔 채 아주 낮게 말했다.“시간이 중간중간 끊기는 느낌이 들어.”그 말은 건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었다.그는 대답하지 못했다.하나는 그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냥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닌 것 같아.”카페 안은 조용했다.에스프레소 머신 돌아가는 소리와 컵 부딪히는 소리만 멀리서 얇게 들렸다. 그 일상적인 소음들 사이에서, 하나의 목소리만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렸다.“어떤 날은 아침에 일어났는데, 전날 내가 뭘 했는지 흐릿하고… 어떤 날은 누가 한 말을 분명히 들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면 그게 진짜였는지 잘 모르겠어.”건우는 손에 쥔 컵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하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근데 제일 무서운 건…”그녀는 거기서 잠깐 말을 멈췄다.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전혀 밝지 않았다.“내가 뭘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거야.”그 문장은 예상했는데도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건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나는 자기 말이 너무 무거워졌다고 느낀 사람처럼 곧바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컵을 들었지만,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건우는 그걸 보고 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었다.그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컵을 쥔 하나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