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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아무 일 없는 사람들처럼 밥 먹는 거

مؤلف: 데이지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8-17 15:33:33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말들이야말로 둘 사이에 가장 부족했던 것이었다.

사건 얘기 말고, 의심 말고, 불안 말고, 설명되지 않는 밤 말고.

그냥 하루를 살다가

배고파서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나누는 말들. 하나는 물컵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우리 예전엔 진짜 아무 데나 잘 들어갔었지.”

건우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시선을 멈췄다.

“응.”

“돈 없어서 맨날 메뉴판 제일 아래부터 봤잖아.”

건우는 바로 반박했다.

“그건 너였어.”

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래. 네가 더 심했거든.”

“아닌데.”

“아니긴. 맨날 ‘이 집은 제육이 제일 가성비가 낫다’ 이러고.”

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하나는 그 웃음을 보며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멈췄다.

건우는 그 정지를 바로 알아챘다.

마치 그 웃는 얼굴을 오랜만에 확인한 사람처럼.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는 다시 시선을 내리며 물컵을 만졌다.

음식이 나오자 둘은 잠깐 대화를 멈추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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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의 밤   203. 오늘은 기억이 끊긴 시간은 없어?

    그 평범한 말이 오히려 이상하게 남았다.건우는 그 말을 들으며, 문득 어젯밤 서하가 했던 말과 지금 아침 하나가 하는 말 사이에 있는 간극을 생각했다. 하나는 늘 건우를 멈추게 하려 했고, 서하는 늘 건우를 끝까지 보게 만들었다. 같은 얼굴인데 방향은 정반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둘이 완전히 분리된 사람이라고는 더 이상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건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집을 나섰다.윤신우 관련 자료를 다시 보려면 결국 시작점은 하나였다.아니, 정확히는 윤신우가 죽기 전 마지막 며칠 동안 하나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시 봐야 했다.건우는 형이 죽은 뒤 거의 강박처럼 모아둔 자료 중 일부를 다시 꺼내기 위해, 예전에 잠깐 사용하던 오피스텔형 작업실로 향했다. 엄밀히 말하면 사무실은 아니었다. 검사 준비를 하던 시절부터 책과 자료를 쌓아두고 혼자 정리하던 작은 공간이었고, 윤신우 사건 이후에는 거의 창고처럼 변해버린 곳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좁은 책상 위에는 박스 파일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벽 쪽 철제 선반에는 판례집과 노트, 인쇄물, 녹취록, 사건 기사 스크랩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었다. 정상적인 생활이 멈춘 사람의 공간답게, 이곳에는 시간이 고여 있었다.건우는 가장 아래칸에 처박아 둔 파일 박스 하나를 끌어냈다.라벨에는 거칠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사망 전 2주 / 신우]그는 바닥에 박스를 펼쳐두고 한 장씩 자료를 꺼냈다.통화 내역, 카드 사용 내역, 차량 출입 기록, 메신저 캡처, 병원 일정표, 회사 회의록 일부. 이미 수십 번은 봤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시선의 방향이 달랐다. 누가 형을 죽였는지가 아니라, 형이 죽기 전에 무엇을 눈치챘는지를 보려고 하자, 같은 자료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건우는 먼저 윤신우의 통화 내역을 다시 훑었다.사망 전 일주일 동안 신우는 특정 번호와 유난히 자주 통화하고 있었다. 그 번호는 이미 확인한

  • 형수의 밤   202. 마지막으로 본 것

    다음 날 아침, 건우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얼굴로 부엌에 나왔다.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은 맑았지만, 집 안 공기는 이상하게 탁했다. 밤새 창문을 열어두지 않은 방처럼, 무언가가 오래 머물다 간 자리가 아직 남아 있는 느낌. 건우는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병을 꺼내 들고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머리는 무겁고 눈은 뻑뻑했는데, 이상하게 정신만은 너무 또렷했다.‘신우는 마지막에 알고 있었어.’서하가 남긴 그 문장은 밤이 끝나도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았다.사람은 정말 위험한 말을 들으면, 처음엔 의미보다 문장 자체가 더 오래 남는다. 그 짧은 말이 어떤 방향으로 사건을 뒤집는지, 어떤 사람의 얼굴을 다시 보게 만드는지, 머리가 다 따라잡기도 전에 문장만 먼저 몸 안에 박혀버린다. 건우는 생수병 뚜껑을 닫고 식탁에 기대 섰다. 윤신우는 마지막에 뭘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걸 알았다면, 왜 아무도 지금까지 그걸 입에 올리지 않았을까.그때 안방 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났다.건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하나가 나왔다.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채, 아직 완전히 잠에서 덜 깬 얼굴이었다. 회색 반팔 티셔츠에 얇은 가디건만 걸친 차림, 맨발, 손에는 머리끈이 들려 있었다. 너무 평범한 아침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 건우를 멈추게 만들었다.오늘의 하나는 어제 낮 약국에서 멈췄던 사람도, 밤에 방 안에서 무너질 듯 앉아 있던 사람도, 그 뒤에 서하로 바뀌었던 사람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아침을 맞은 사람처럼. 하나는 건우를 보자 아주 짧게 웃었다.“일찍 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응.”하나는 부엌 쪽으로 걸어오며 냉장고를 열었다. 그 짧은 동선조차 이상하게 낯설었다.어젯밤의 문장과 지금 눈앞의 평범한 풍경이 하나의 집 안에서 겹쳐 있다는 사실이, 건우를 계속 불편하게 만들었다.하나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며 물었다.“너 얼굴 왜 그래.”건우는 생수병을 내려놓았다.“어때.”

  • 형수의 밤   201. 신우는 마지막에 알고 있었어

    서하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건우를 한참 바라봤다. 그 시선은 묘하게 느리고 조용해서, 오히려 더 숨 막혔다. 이미 수없이 서로를 봐온 사람들끼리만 가능한 침묵이었다. 설명보다 생략이 많은, 그래도 다 알아듣는 종류의 침묵.그리고 서하는 마침내 아주 낮게 말했다.“같이 있어.”건우는 눈을 좁혔다.“그건 이미 하고 있잖아.”“아니.”서하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옆에 있는 거 말고.”그녀는 한 글자씩 눌러 말하듯 덧붙였다.“도망가지 말고, 끝까지 봐.”그 말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같이 있는 건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식탁에 앉고, 같은 복도를 지나고, 같은 밤을 견디는 것. 하지만 끝까지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누군가 무너지는 순간을, 누군가 잃어버린 시간을, 누군가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는 얼굴을, 모른 척하지 않고 끝까지 보는 것. 그건 사랑보다도 더 잔인한 종류의 책임일지 몰랐다.건우는 그 문장을 한동안 삼키지 못했다.그러다 아주 늦게, 거의 중얼거리듯 물었다.“너는 그걸 계속 혼자 했어?”서하는 그 질문을 듣고 잠깐 시선을 내렸다.아주 짧은 정적.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네 형도 끝까지 못 봤어.”그 말은 방금까지의 어떤 말보다도 더 날카롭게 꽂혔다.건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무슨 뜻이야.”서하는 이번엔 웃지 않았다.대신 아주 천천히 시선을 들어 건우를 봤다.그 눈빛은 처음으로 조금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기보다 오래 묻어둔 진실을 건드린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그 사람이 몰라서 죽은 줄 알아?”거실 안 공기가 순식간에 굳었다.건우는 숨을 멈췄다.서하는 건우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한 글자도 흐리지 않고 말했다.“신우는 마지막에 알고 있었어.”그 한 문장이 떨어진 순간,건우 안의 모든 감각이 동시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다 이해되지는 않았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지

  • 형수의 밤   200. 하나가 모르는 밤

    서하는 이번엔 대답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그녀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 천천히 소파 맞은편 식탁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굳이 더 가까이 오지 않은 거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정도 거리가 더 긴장됐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아서 오히려 서로를 더 정확히 보게 되는 거리.서하는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접어 올린 채 말했다.“처음엔 그냥 잠을 못 잤어.”건우는 가만히 들었다.“그러다 중간중간 기억이 흐릿해졌고.”그녀는 손끝으로 의자 팔걸이를 한 번 문질렀다.“나중엔 하나가 모르는 밤이 생겼어.”그 말은 아주 담담했지만, 건우는 그 안쪽이 얼마나 끔찍한지 바로 알 수 있었다.하나가 모르는 밤.그 말은 곧, 이 몸 안에서 누군가는 깨어 있었고누군가는 그 시간을 통째로 잃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건우는 낮게 물었다.“그 밤에 너는 뭐 했는데.”서하는 아주 잠깐 웃었다.그 웃음은 예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냥 조금 지친 사람의 웃음이었다.“버텼지.”“그게 다야?”“그럼 뭐.”서하는 고개를 기울였다.“네가 듣고 싶은 답이 따로 있어?”건우는 그 말에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사실 있었다.자기가 듣고 싶은 답, 듣고 싶지 않은 답, 들으면 안 되는 답이 전부 동시에 있었다. 서하가 그 밤마다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숨기고, 어디까지 자신과 연결돼 있는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그걸 정면으로 묻는 건, 사건의 핵심을 캐는 것과는 전혀 다른 위험처럼 느껴졌다.서하는 그런 건우를 한참 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너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거.”잠깐 말을 끊고, 아주 느리게 덧붙였다.“하나한테는 못 물어보는 거지.”그 문장은 잔인할 정도로 정확했다.건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하나한테 물으면 무서워하니까.”“아니.”서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핑계고.”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아주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하나가 망가졌다는 걸 확인하고

  • 형수의 밤   199. 불 꺼진 거실

    그날 밤, 건우는 일부러 잠들지 않았다.정확히는 잠이 올 수가 없었다.하나 방에서 불이 꺼진 건 열한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복도 끝 문 아래로 새어나오던 가느다란 불빛이 사라지자, 집 안은 순식간에 더 넓고 더 조용해졌다. 같은 집 안인데도, 불 하나 꺼졌다는 사실만으로 공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반쯤 기대앉은 채 TV도 켜지 않고 있었다.휴대폰 화면은 몇 번이나 켰다가 껐고, 물은 이미 두 컵째 비웠고, 식탁 위에 펼쳐둔 자료는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 오늘은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낮의 약국, 편의점 앞 벤치, 하나 방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하나의 얼굴만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엔 결국 같은 장면으로 돌아왔다.‘네가 본 것보다 더 오래.’서하가 그렇게 말했다.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남았다.건우는 소파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고, 생수병을 꺼냈다가 다시 넣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싱크대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자기도 안다. 지금 자신은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하나가 다시 무너지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서하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오늘 밤이 정말로 더 심해질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그 사실이 기분 나빴다.그래서 더 자리를 뜰 수 없었다.건우가 다시 거실로 돌아왔을 때, 복도 끝에서 아주 작은 문 여는 소리가 났다.그는 고개를 들었다.이번엔 놀라지 않았다.놀랄 만큼 낯선 장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서하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긴 티셔츠 위에 얇은 가디건만 걸친 차림이었다. 머리는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맨발이었다. 꾸민 것도, 긴장한 것도 아닌 얼굴. 마치 정말로 이 집에 오래 살아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어둠 속을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서하는 거실 한가운데까지 오더니, 소파에 앉은 건우를 보며 아주 작게 웃었다.“안 자고 있었네?”건우는 팔짱을 낀 채 그녀

  • 형수의 밤   198. 네가 본 것보다 더 오래

    건우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 멈췄다.그보다 먼저, 하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건우야.”그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와 달랐다.너무 다르지는 않았지만, 건우는 그 미세한 결의 차이를 바로 알아챘다.같은 목소리인데, 숨을 쉬는 방식이 달랐다.같은 얼굴인데, 사람을 바라보는 온도가 달랐다.건우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하나는 방금 전과 같은 자세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방금까지 그 안에 있던 불안과 피로와 두려움이 아주 매끈하게 가라앉은 자리. 대신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위험한 평온이 깔려 있었다.그건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가 아니라, 폭풍의 중심에 들어왔을 때의 고요함 같았다.서하였다.건우는 의자에 앉은 채 숨을 아주 조금 멈췄다.서하는 건우를 보다가, 시선을 그의 손 쪽으로 잠깐 내렸다. 조금 전까지 하나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자리였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계속 거기 앉아 있을 거야?”그 말은 농담도 아니고, 유혹도 아니고, 단순한 질문도 아니었다.오히려 더 익숙한 무언가였다.이미 수없이 같은 밤을 지나온 사람처럼,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우가 낯설지 않다는 듯한 말투.건우는 낮게 물었다.“언제 바뀌었어.”서하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방금.”“하나랑 얼마나 섞여 있었는데.”그 질문은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갔다.서하는 그걸 피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웃음기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네가 본 것보다 더 오래.”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경고에 가까웠다.건우는 턱 안쪽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오늘 낮 약국에서의 공백, 방금 방 안에서의 끊김, 그리고 지금 눈앞의 이 변화까지. 전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선 끝에는 자신이 아직 모르는 어떤 밤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는 것도.서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손끝으로 시트를 한 번 쓸었다.그 사소한 동작조차 하나와는 다르게 느껴

  • 형수의 밤   2. 문 안쪽의 사람

    시신을 실은 차량이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건우는 비를 맞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경광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졌다가 사라졌다.형은 그렇게 떠났다.설명도, 변명도 없이.경찰은 현장을 통제했고, 필요한 절차를 간단히 설명했다.참고인 조사 일정이 잡힐 거라고 했다.말은 또렷했지만, 건우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남은 건 한 문장뿐이었다.저녁 8시 전후.그 시간에 그는 집에 있었다.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하나는 경찰의 안내를 받아 현관을 나왔다.비는 여전히 세게 내리고 있었고,그녀의 코

  • 형수의 밤   1. 형이 죽었다.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 형수의 밤   10. 의심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 형수의 밤   9. 진동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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