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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백의 길이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8 14:05:43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

방은 익숙했다.

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

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

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하나가 부엌에 있었다.

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어났네.”

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

“네.”

하나는 커피를 내리다 말고 잠깐 그의 얼굴을 봤다.

“괜찮아?”

“괜찮…은 것 같아요.”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 경찰서 다시 가야 해.”

건우의 손이 잠깐 멈췄다.

“왜요.”

“기록 열람 신청해놨어. 유족이면 일부 볼 수 있대.”

‘유족’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입 안에서 굴렀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그들은 가족이었고, 지금은 ‘유족’이 되었다.

“같이 갈 거지?”

하나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끝이 조금 단단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이 가요.”

하나는 커피잔을 하나 더 꺼내려다 멈췄다.

그리고 그 잔을 다시 찬장에 넣었다.

그 행동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녀가 자신을 배려하는 건지,

자신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경찰서는 여전히 건조했다.

형광등 아래서 종이 냄새가 났고,

복도 벽에는 누군가 급히 붙여놓은 안내문들이 삐뚤게 흔들렸다.

담당 형사는 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말투는 매뉴얼처럼 일정했다.

“현장 출입은 아직 통제 중입니다.”

그는 파일을 넘기며 말했다.

“침입 흔적은 명확합니다. 후면 창 파손, 외부 신발 자국 일부 확보.

지문은 채취했고, 분석 결과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해 도구는요.”

“부엌 쪽에서 발견된 칼입니다. 집에서 쓰던 물건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건우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형의 집 부엌이 떠올랐다.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서랍, 칼꽂이의 각도.

집에서 쓰던 칼이 살해 도구라면,

그건 ‘강도’라는 단어를 조금 다른 모양으로 만든다.

“마지막 통화 기록은 확인됐나요?”

하나가 물었다.

형사는 파일을 넘겼다.

“밤 9시 12분. 회사 직원 서유림 차장.”

그 이름이 공기 중에 다시 걸렸다.

“통화는 짧습니다. 1분 남짓.

그리고 9시 37분에 부인께서 신고하셨습니다.”

9시 12분. 9시 37분.

건우는 머릿속에서 두 시간을 나란히 세웠다.

그 사이의 공백이 숫자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 25분 동안… 집 안에서 움직임은 확인됐어요?”

말이 너무 차갑게 들렸는지, 그는 뒤늦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추가 침입 흔적 같은 거요.”

형사는 잠시 건우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CCTV가 결정적으로 비어 있습니다. 폭우 때문에 인근 장비가 다 죽었고요.”

하나는 손끝으로 파일 모서리를 한번 눌렀다.

“현장 사진… 제가 볼 수 있나요?”

형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람만 가능합니다. 복사나 촬영은 안 됩니다.”

서류가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하나는 사진을 오래 보지 않았다.

한 장, 두 장, 세 장. 필요한 것만 본다는 듯 빠르게 넘겼다.

그런데 네 번째 사진에서 손이 멈췄다.

아주 잠깐. 형사의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형사가 묻자, 하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목소리가 너무 빠르게 나왔다.

건우는 그 짧은 속도를 놓치지 못했다.

경찰서를 나오자, 바람이 차가웠다.

하나는 차 문을 닫고 안전벨트를 맸다.

그리고 한참 말이 없었다.

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채, 신호를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 사진 보고 왜 멈췄어요?.”

하나가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그냥.”

“그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나의 눈이 아주 잠깐 건우 쪽으로 왔다.

“건우야.”

그녀가 낮게 불렀다.

“지금은… 나도 정확히 말 못 해.”

건우는 더 묻지 못했다.

‘지금은’이라는 말이, 어제 새벽부터 계속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림… 만나볼 거예요?”

건우가 물었다.

하나는 대답 대신 숨을 한번 내쉬었다.

“만나야지.”

“무슨 말을 하려고요.”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보려고.”

하나답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 그녀의 직업을 떠올리게 했다.

검사.

그녀가 감정을 감추는 방식은, 상대의 눈을 보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오후였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건우는 집이 다시 ‘둘의 공간’이 되어 있다는 걸 느꼈다.

신발이 두 켤레. 식탁 위 컵도 두 개.

싱크대 옆에는 그가 쓰지 않는 손세정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코트를 벗어 걸어두고,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화면이 잠깐 켜졌다가 꺼졌다.

건우는 그 빛을 무심코 봤다.

‘부재중 1’

발신자 이름이 보이지 않은 번호였다.

하나는 핸드폰을 바로 뒤집어 엎었다.

별 뜻 없는 행동처럼. 그런데 그 ‘별 뜻 없음’이 이상할 만큼 서둘렀다.

건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묻지 않았다.

지금은 묻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는데도.

저녁이 되기 전, 하나는 검은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경찰서에서 받은 열람 안내문과 메모지였다.

그녀는 메모지에 숫자 몇 개를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뭐 적는 거예요?”

건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는 펜끝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시간.”

“시간이요?”

“9시 12분, 9시 37분.”

건우는 잠시 숨을 멈췄다.

하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처음으로, 아주 조용히 말했다.

“형사가 말한 시간… 이상하지 않아?”

건우는 눈을 들어 그녀를 봤다.

“어떤 게요.”

하나는 메모지 위 숫자들을 손끝으로 한번 눌렀다.

“내가 신고한 시간이 9시 37분이래.”

“네.”

“근데.”

그녀가 말을 멈췄다가, 아주 낮게 이어갔다.

“내 통화기록엔…

 9시 18분에 신우 씨가 나한테 전화한 걸로 떠.”

공기가 바뀌었다.

건우는 무심코 물컵을 쥔 손에 힘을 줬다.

“형이… 전화했었어요?”

“받지는 못했어.”

하나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평평했다.

“집에 들어가는 중이었거든. 현관 앞에서… 진동만 느꼈어.”

건우는 천천히 물었다.

“그런데 왜… 경찰에 말 안 했어요.”

하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말하려고 했어.”

그녀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근데 내가 그 번호를 확인한 게… 오늘이야.”

“오늘요?”

“어제는 정신이 없었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건우는 그 문장에 걸렸다.

정신이 없어서, 확인을 못 했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도.

“형이… 왜 9시 18분에 전화를 했을까요.”

건우의 질문은 스스로에게도 향해 있었다.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우 씨는.”

그리고 잠시 멈췄다가,

“죽기 전에…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거 아닐까.”

건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뭘요.”

하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단어를 고르듯 말했다.

“누군가.”

그 한 단어가 방 안에 남았다.

그날 밤, 하나는 유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짧았다.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대표님 사건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요.”

보내고 나서야 그녀는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손을 무릎 위에 감췄다.

건우는 그 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이 집 안의 균형이 조금이라도 깨질 것 같아서였다.

밤이 깊어지고, 거실 불이 꺼졌을 때도 건우의 머릿속에서는 숫자만 남았다.

9시 12분.

9시 18분.

9시 37분.

공백이 줄어드는 대신, 공백의 모양이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이 사건은 ‘강도’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건 시작부터 누군가의 시간표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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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 형수의 밤   1. 형이 죽었다.

    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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