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
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
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
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
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
하나는 마주 인사했다.
“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
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세 사람은 마주 앉았다.
잠시 메뉴판을 보는 척하며 공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주문이 끝난 뒤, 하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표님이랑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유림 씨라고 들었어요.”
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9시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무슨 얘기였죠?”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지만, 톤은 부드러웠다.
유림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회사 구조조정 건이었습니다.”
“구조조정이요?”
건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유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정리해야 할 인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안 된다고도 하셨고요.”
‘지금은 안 된다.’
그 말이 다시 공기 위로 떠올랐다.
하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누굴 정리하려고 했는지… 들으셨나요?”
“아니요.”
유림은 바로 대답했다.
“이름은 말씀 안 하셨습니다.”
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건우는 컵을 잡았지만, 마시지 않았다.
“통화는 누가 먼저 끊었습니까.”
이번에는 건우가 물었다.
유림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대표님이요.”
“왜요.”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급한 일이라면… ?”
유림은 그 질문에 아주 잠깐 멈췄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나는 유림의 표정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통화 중에…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이상한 점이요?”
“목소리라든지.”
유림은 고개를 저었다.
“평소와 같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말을 멈췄다.
“다만 뭐죠?”
건우의 질문은 조용했지만, 조금 더 빨랐다.
유림은 손끝으로 컵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대표님이 먼저 전화를 거셨습니다.”
“그게 이상한 건가요?”
“대표님은 밤에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는 그 문장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그 통화가 계획된 연락은 아니었다는 거네요.”
“네. 제 쪽에서 먼저 드릴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페 스피커에서 낮은 재즈가 흘러나왔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 형을 찾았습니까.”
유림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회사로는 없었습니다.”
“회사 말고는요.”
유림의 눈이 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대표님 개인 일정까지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그 대답은 틀리지 않았지만, 완전히 비어 있지도 않았다.
하나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대표님이… 요즘 누군가를 의심한다는 얘기, 들은 적 없어요?”
유림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의심이요?”
“회사 내부든, 외부든.”
“대표님은 늘 조심스러운 분이었습니다.”
답은 정답처럼 들렸다.
그런데 정답은 때때로 진실을 숨긴다.
건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9시 12분에 통화했고, 9시 18분에 대표님이… 다른 전화를 걸었습니다.”
유림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했다.
“다른 전화요?”
“네.”
그는 일부러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하나는 건우를 한 번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지금 말해도 되냐’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건우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대표님이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카페 안의 소리가 잠시 멀어진 것 같았다.
유림의 손이 멈췄다.
“받으셨습니까.”
그녀가 묻는 대상은 하나였다.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못 받았어요.”
유림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통화는 9시 12분 이후에도 있었다는 거네요.”
그녀의 말은 정리하는 듯 차분했다.
“대표님이 저와 통화를 마친 뒤, 바로 다른 전화를 걸었다면”
그녀가 말을 흐렸다.
건우는 끝을 이어주지 않았다.
하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 6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도 알고 싶어요.”
유림은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회사 건물이 보였다.
“대표님이 그날 밤…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건우의 눈이 움직였다.
“누굽니까.”
“확실하진 않습니다.”
유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최근, 대표님이 외부 투자자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투자자요?”
“네. 계약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대표님이 직접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 만남이… 그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요.”
“확신은 없습니다.”
유림은 말을 아꼈다.
“다만, 그날 통화가 평소와 달랐던 건 맞습니다.”
“어떻게요.”
건우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유림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대표님이…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 한 문장이 남았다.
카페를 나올 때, 하늘은 흐려 있었다.
건우는 말이 없었다.
하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건우는 몇 걸음 뒤에서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근데 다 말한 것도 아닌 것 같지.”
하나는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감정이 아니라 판단에 가까웠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9시 12분.
9시 18분.
그리고 ‘서두르고 있었다’는 말.
그 시간은 점점 숫자가 아니라 움직임으로 바뀌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의 걸음처럼.
그리고 그 누군가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야기 바깥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건우는 처음으로 느꼈다.
이 사건은, 우발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이번엔 서하도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그 한 문장이 둘 사이 공기를 조금 다르게 만들었다. 지금 이 밤의 대화와 이동과 추적은 전부 하나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 위에서 성립하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말로 꺼내는 순간, 갑자기 너무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일이 되어버렸다. 건우는 자기가 지금 누구와 손잡고 누구를 구하려는 건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 건지 선명하게 자각하게 됐다.서하는 한참 뒤에야 아주 조용히 말했다.“그건 네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 아니야?”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맞았다.’하나를 지키겠다고 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선택은 늘 하나가 모르는 시간대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윤신우도 어쩌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나가 감당 못 할까 봐, 하나가 다칠까 봐, 하나가 알면 더 무너질까 봐. 그래서 혼자 알아보고, 혼자 확인하고, 혼자 결정하다가 결국 너무 늦어버렸을지도 모른다.그 생각이 스치자, 건우는 갑자기 몸 안쪽이 서늘해졌다.자기가 지금 형이 걸었던 길 위에 똑같이 발을 올리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었다.건우는 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아주 천천히 말했다.“그래도 오늘은 확인해야 해.”서하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대신 그를 오래 보다가, 아주 낮게 덧붙였다.“형이 처음 간 곳은 병원이 아니었어.”건우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멈췄다.“뭐?”서하는 창가에서 몸을 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이제 그녀의 얼굴은 다시 조금 달라져 있었다. 방금 전처럼 경계가 흐린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선명한 서하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얼굴. 마치 밤이 깊어질수록 둘 사이 경계가 아니라 둘 다 피로해지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병원 가기 전에.”그녀가 말했다.“형은 먼저 누군가를 만나러 갔어.”건우는 미간을 좁혔다.“누구.”서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기억이 정확하진 않은데… 이름은 아니고, 직함 같은 걸 말했어.”그녀는 눈을 감고 그날의 조각을 더듬듯 천천
병원이라는 말을 먼저 꺼낸 건 건우였지만,정작 그 말을 입 밖으로 뱉고 나자마자 그는 그게 얼마나 늦은 문장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병원 가자.’너무 정상적이고, 너무 상식적이고, 그래서 더 무력한 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균열 앞에 서면 결국 가장 평범한 구조를 먼저 떠올린다. 진단, 치료, 상담, 입원. 이름을 붙이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고, 병명으로 바꾸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방금 전 눈앞에서 본 건우는, 그것들이 과연 지금 이 상태를 따라잡을 수 있는 언어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서하는 창가 쪽에 선 채 더 이상 웃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건우의 손이 닿아 있던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마치 자기 몸이 자기 것인지 아닌지 잠깐 확인하는 사람처럼 손끝을 아주 천천히 접었다 폈다. 그 사소한 움직임 하나가 이상하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사람이 무너지는 장면은 늘 극적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이런 식이다. 말보다 먼저 손끝이 망설이고, 시선이 한 박자 늦고, 자기 몸을 자기 것처럼 쓰지 못하는 순간들이 조용히 쌓이면서.건우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아주 낮게 물었다.“형이 병원 알아봤어?”서하는 그 질문을 듣고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인 채 건우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는 자신 안의 균열을 버티는 쪽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긴장이 눈빛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 질문이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윤신우가 마지막에 어디까지 갔는지를 묻는 질문이라는 걸 알아들은 사람의 표정.“알아봤지.”그녀가 마침내 말했다.“그 사람, 생각보다 오래 버텼어.”건우는 그 문장에서 먼저 숨이 걸렸다.생각보다 오래 버텼다.그 말은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너무 잔인했다.윤신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발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마지막 며칠 동안은 이 이상한 상태를 붙들고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던 사람이었다는 뜻이니까.건
그 문장은 건우를 완전히 멈추게 만들었다.서하는 늘 하나보다 더 단단하고, 더 선명하고, 더 자각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래서 건우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서하 쪽이 더 안정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자기 자신조차 자기 경계를 확신하지 못한다고.그건 지금까지 건우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였다.건우는 어느새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 있었다.서하는 그걸 피하지 않았다.둘 사이 거리가 숨이 닿을 만큼 좁아졌을 때, 건우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날도 이랬어?”서하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질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둘 다 알고 있었다.윤신우의 마지막 밤.엘리베이터 앞.삭제된 19분.서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건우는 오히려 답을 먼저 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은 지금보다 더 심했어.”건우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얼마나.”“하나도 불안했고, 나도 흔들렸고… 중간이 더 자주 열렸어.”그녀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건우를 봤다.“형은 그걸 본 거야.”그 문장은 너무 정확해서, 건우는 더 이상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윤신우는 단순히 낯선 얼굴을 본 게 아니었다.하나와 서하가 번갈아 드러나는 그 불안정한 경계 자체를 봤던 것이다.그리고 그걸 본 사람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건우는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윤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곤했을 형, 처음엔 그냥 하나라고 생각했을 형, 두 번째엔 설명되지 않는 공포 앞에서 잠깐 멈췄을 형. 그리고 결국 그 밤을 끝까지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한 형.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그런데 지금 더 견디기 힘든 건, 눈앞의 사람도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건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의 팔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서하는 놀라
먼저 말을 건넨 쪽은 그녀였다.목소리는 하나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 섞인 결은 단순하지 않았다. 건우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사람은 완전히 하나도, 완전히 서하도 아니었다. 그 둘 사이 경계가 얇아진 채, 아직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은 상태.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건우는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너 뭐 하고 있었어.”그녀는 잠깐 창문 쪽을 돌아봤다가, 다시 건우를 봤다.“그냥.”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잘 기억 안 나.”그 말은 지금까지 여러 번 들었던 문장이었지만, 오늘은 전혀 다르게 들렸다. 전에는 그저 불안과 공백의 언어였다면, 지금은 마치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눈치채고 있는 사람의 언어처럼 들렸다.건우는 그제야 한 발 더 다가갔다.“언제부터 여기 있었어.”그녀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모르겠어.”“방금 깬 거야?”이번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 짧은 틈 안에서, 그녀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금까지 자신이 어떤 얼굴로 서 있었는지, 누구의 의식으로 이 방 안에 있었는지, 그걸 자기 자신도 붙잡지 못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시선이 건우 어깨 너머를 향했다.복도.서하가 서 있을 자리.그 눈빛이 변하는 걸 건우는 분명히 봤다.불안에서 경계로.경계에서 차가운 자각으로.그 변화는 극적이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더 섬뜩했다.그녀는 건우를 보지 않은 채, 아주 낮게 말했다.“들어왔네.”그 말은 건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건우의 등 뒤 어딘가를 향한 말.건우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 멈췄다. 그러는 사이, 눈앞의 그녀가 아주 천천히 다시 건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는 분명히 달랐다. 같은 얼굴인데, 사람을 보는 온도가 바뀌어 있었다. 그 미세한 차이가 너무 선명해서, 건우는 오히려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서하였다.아니, 정확히는 방금까지 하나였던 얼굴 안
이번엔 질문이라기보다 요구에 가까웠다.서하는 그걸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건우는 그 짧은 망설임에서, 이 뒤의 이야기가 단순한 설명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쪽에 있다는 걸 먼저 알아차렸다.“여기까지야?”건우가 낮게 물었다.서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여기까지라서가 아니라…”그녀는 말을 잇다가, 잠깐 복도 쪽을 봤다.“이건 내가 끊는 게 아니야.”건우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복도는 여전히 어두웠고, 방 문은 닫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 안 공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서하는 다시 건우를 보며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끊기는 거야.”그 말이 끝나자마자, 집 안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소리가 났다.문이 나무틀에 스치는 소리 같은 것.건우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고개가 복도 쪽으로 돌아갔다. 복도 끝,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조금 전과는 달랐다. 방금까지 아무도 그 문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서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대신 건우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말했다.“이제 네가 직접 봐야 돼.”그 말은 이전처럼 의미심장한 경고가 아니었다. 도망칠 수 없는 자리에 사람을 세우는 말에 가까웠다. 건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천천히 식탁을 돌아 복도로 걸어갔다.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고, 발바닥 아래 마룻바닥의 감각만 유난히 또렷했다.한 걸음, 또 한 걸음.문 앞에 섰을 때,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다는 건 때로 안심이 아니라 더 큰 불안을 만든다. 건우는 문고리를 잡지 않고, 손바닥으로 문을 천천히 밀었다.그리고 그 순간 건우는 처음으로, 그 경계가 실제로 무너지는 장면 앞에 서게 됐다.문이 열리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건우는 손바닥으로 문을 천천히 밀면서도, 이상하게 숨을 더 크게 쉬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
서하는 식탁 가장자리에 손끝을 가볍게 올려놓은 채,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그날 형이 본 건 한 번이 아니었어.”건우는 그대로 굳었다.“무슨 뜻이야.”“두 번 봤어.”서하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건우는 잠깐 숨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봤다.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단순히 한 번 마주쳤다, 혹은 우연히 이상한 낌새를 봤다 수준이 아니었다.같은 밤,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마주쳤다는 건 그 안에 시간의 틈과 설명되지 않는 변화가 존재했다는 뜻이니까.건우는 손등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다시 물었다.“처음이 하나였고, 두 번째가 너였다는 거야?”서하는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엔 그냥 하나라고 생각했겠지.”그녀는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늦은 밤에 집 앞에서 마주친 아내였으니까. 피곤했고, 이상한 분위기를 느껴도 그냥 컨디션 탓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을 거야.”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늦게 귀가한 남자가 집 앞에서 아내를 만난다. 그건 분명 이상할 수 있지만, 아직은 설명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 그런데“두 번째는.”건우가 낮게 물었다.서하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었다.“두 번째는 그냥 넘길 수가 없었어.”“왜.”“같은 얼굴인데, 사람이 다르니까.”그 문장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더 잔인했다.서하는 더 설명하려는 듯하다가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마치 그날의 공기를 더듬는 사람처럼 아주 느리게 말을 골랐다.“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같은 얼굴이었고, 같은 자리였어. 그런데 말투가 다르고, 반응이 다르고, 자기를 보는 눈이 다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아.”그녀의 시선이 건우를 향했다.“뭔가 잘못됐다는 걸.”건우는 그 말이 몸 안으로 바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사랑하는 얼굴이 낯선 각도로 서 있을 때, 사람은 처음엔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엔 착각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