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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숨이 닿는 거리

Autor: 데이지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5-28 09:42:02

그날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비도 오지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집 안 공기가 어딘가 묵직했다.

건우는 소파에 앉아 사고 기록을 펼쳐두고 있었지만,

눈은 글자를 따라가지 못하고 같은 줄을 몇 번이나 되짚고 있었다.

열흘 전, 서하가 처음 이름을 말했던 밤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몇 번 더 찾아왔다.

노크 없이. 설명 없이. 마치 이 집의 또 다른 주인처럼.

처음엔 경계했다.

그다음엔 질문했고, 이제는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게 문제였다.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망설임이 없었다.

숨기지도 않았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하나의 얼굴. 하지만 눈빛은 하나가 아니었다.

서하였다.

긴 머리를 풀어 내린 채, 얇은 니트 차림이었다.

화장은 거의 없었지만, 이상하게 더 또렷해 보였다.

“또 보고 있어?”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건우는 서류를 덮지 않았다.

“형의 죽음은 아직 끝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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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의 밤   52. 남겨진 자리

    감찰 통보는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형식상 ‘사전 검토’ 단계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수사 참여 범위를 제한하는 조치였다. 사건과 관련된 자료 접근 권한은 일시 정지되었고, 내부 보고 라인에서 그녀의 이름은 빠졌다.그 조치는 공식 문서 한 장으로 끝났지만,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조직은 직접적인 비난 없이도 사람을 고립시킬 수 있었다.하나는 그 문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빠진 자리에 다른 팀이 배정되었고, 그 팀장은 기업 수사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인물이었다. 회사 측이 원하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결국 이런 방식이네.”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직접 막는 대신, 위치를 바꿔버린다.안에 있던 사람을 바깥으로 밀어내고, 구조를 조용히 재정렬한다.건우는 그 사실을 저녁이 되어서야 들었다.하나는 설명을 담담하게 했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자료 접근은 막혔어. 공식적으로는 이해충돌 방지 차원이래.”건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럼 사건은.”“다른 팀이 맡겠지.”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속도는… 느려질 거야.”그 말은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멈출 수도 있다’는 뜻에 가까웠다.건우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이 밖에서 던진 파장이, 결국 하나를 안에서 밀어낸 셈이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에 걸렸다.“내가 안 움직였으면.”그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럼 신우 씨는 그냥 사고로 남겠지.”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난 그게 더 싫어.”그 문장은 분명했다. 그녀는 밀려났지만, 후회는 없다는 뜻이었다.밤이 깊어질수록, 집 안의 공기는 묘하게 팽팽해졌다.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건우는 시험 준비 자료를 펼쳐 놓았지만, 글자가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법 조문과 판례 사이로 형의 얼굴과 하나의 표정이 번갈아 떠올랐다.“너 진짜 들어갈 생각이야.”하나가 조용히 물었다.건우는

  • 형수의 밤   51. 고립시키는 방식

    기사 일부가 공개된 지 사흘째 되는 날, 검찰 내부망에 짧은 공문이 올라왔다. 특정 기업의 보험 구조 변경과 관련해 외부 유출 정황이 있다는 취지였고, 해당 사건과 연관된 검사들은 이해충돌 여부를 검토하라는 내용이었다.문장 자체는 건조했지만,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누가 대상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강하나.하나는 그 공문을 두 번 읽었다. 감정적으로 동요하기에는 문장이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더 노골적이었다. 직접적인 비난은 없고, 의혹만 남긴 채 구조적으로 밀어내는 방식.차장 검사는 오후에 그녀를 불렀다. 개인적인 대화라기보다는 절차에 가까웠다.“회사 쪽에서 문제를 제기했어.”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기사와 관련해 네가 정보를 흘렸다는 주장까지는 아니지만, 이해관계 충돌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이야.”하나는 고개를 들었다.“증거는요.”“없지. 그래서 감찰 요청이라는 형식을 쓴 거야.”그 말은 곧, 당장은 처벌이 아니지만 수사 라인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넌 이 사건에서 빠지는 게 좋겠다.”차장 검사의 어조는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조직의 언어였다.하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빠지는 순간, 사건은 완전히 기업 쪽의 논리로 재정렬될 가능성이 컸다. 동시에 계속 남아 있으면 ‘사적인 감정 개입’이라는 프레임에 갇힐 위험도 있었다.“시간 주세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건우는 그 소식을 저녁이 되어서야 들었다.하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얼굴에는 피로가 쌓여 있었지만, 눈은 또렷했다.“회사 쪽에서 감찰 요청 넣었어.”건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너를?”“응. 이해충돌 문제.”그녀는 담담하게 설명했지만, 그 속에는 계산이 있었다.“내가 빠지면 사건은 다른 팀으로 넘어가. 그리고 그 팀은…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커.”건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미안하다고 해야 하나.”그는 조용히 말

  • 형수의 밤   50. 선택의 대가

    건우는 기자로부터 연락을 받은 날, 처음으로 이 싸움이 개인적인 수준을 넘어섰다는 걸 실감했다. 김태윤은 더 이상 우회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다. 보험 구조 변경 문서와 사고 시점 데이터가 기사화 준비 단계에 들어갔으며, 확인 절차가 끝나면 일부는 공개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익명으로 나가도 파장은 큽니다. 다만, 실명 증언이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그 문장은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자료를 넘긴 사람으로 남을지, 이름을 걸고 서 있을지.건우는 전화를 끊은 뒤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형이 마지막으로 보내려던 메일을 떠올렸다. 공개라는 단어는 늘 위험을 동반한다. 하지만 침묵은 더 큰 공모일 수도 있다.그날 저녁, 그는 하나에게 숨기지 않았다.“기사 준비 중이래.”하나는 소파에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표정이었다.“얼마나 크게.”“보험 구조, 사고 시점, 내부 서버 초기화까지 묶어서.”그녀의 손이 천천히 무릎 위에서 겹쳐졌다. 단정하게 모은 손이, 오히려 더 불안해 보였다.“네 이름도 나가?”건우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원하면.”하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원해?”그 질문은 단순하지 않았다. 기사에 이름을 올리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이 싸움에 어디까지 나설 건지에 대한 확인이었다.건우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도망치고 싶진 않아.”그 말이 떨어지자, 하나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게 용기인지, 고집인지 모르겠어.”그녀의 말은 비난이 아니었다. 걱정이 오래 쌓이면 말투가 그렇게 변한다.“넌 지금 계속 앞으로만 가.”“뒤로 가면.”건우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형은 그냥 사고로 남아.”하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잠시 눈을 감았다. 윤신우라는 이름은 이 집에서 아직도 무게를 갖고 있었다. 과거의 연인이자, 남편이었고, 그리고 죽은 사람이었다.“형이 원한 게 네 목숨이었을까.”그녀가 낮게 물었다.건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형이

  • 형수의 밤   49.지키려는 사람과 선택받고 싶은 사람

    다음 날 아침, 집 안의 공기는 평소보다 더 무거웠다.사건이 터진 뒤의 조용함은 늘 이상하다. 소리는 줄어들었는데, 긴장은 사라지지 않고 천장 가까이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건우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옆구리 통증이 몸을 비틀 때마다 전날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누군가의 손이 밀어붙이던 힘, 계산된 주먹, 그리고 “그만둬”라고 말하던 낮은 목소리.그건 살해 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더 불쾌했다. 죽일 생각은 없지만, 멈추게 할 생각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거실로 나왔을 때, 하나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출근 준비를 끝낸 모습이었지만 가방은 들지 않고 서 있었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병원 가자.”그녀가 먼저 말했다.건우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크게 다친 건 아니야.”“괜찮지 않아.”말끝이 낮았지만, 안에 깔린 건 화가 아니었다. 불안이 단단히 굳은 상태였다.그녀는 한 발 다가왔다. 손이 그의 팔을 스쳤다가 멈췄다. 닿지 못한 채 공기만 흔들었다.“넌 지금 네 몸을 네 것처럼 안 써.”그 말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다. 책임을 묻는 말이었다.건우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멈추면 형은 그냥 사고로 남아.”하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형이 네 목숨이랑 바꿀 만큼 중요한 진실이야?”그 질문은 차갑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실은 절박함에 가까웠다. 그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너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건우는 잠시 대답을 고르다가 천천히 말했다.“형만이 아니야.”“그럼.”“내 사고도.”공기가 순간 멈췄다.하나는 그 말을 처음 듣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무슨 뜻이야.”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보험 변경 시점이 너무 맞아떨어져. 형이 재조사 얘기한 직후였고, 내가 깨어나기 직전이었어. 우연이라고 보기엔… 겹치는 게 많아.”하나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그럼.”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넌 표적이었을 수도 있다는

  • 형수의 밤   48. 무너질 마음

    위협은 예고 없이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천히 다가온다.건우는 그걸 알고 있었다. 차를 건드린 흔적 이후, 뒤를 밟히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고, 기자와의 접촉이 누군가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문제는 그 위험이 언제 실체를 드러내느냐였다.그날은 평소보다 늦게 집을 나섰다. 하나는 출근한 뒤였고, 집 안에는 남은 공기만 어색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건우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을 택했다. 괜한 불안이 아니라, 감각이 예민해진 결과였다.계단을 내려가던 중, 위에서 발소리가 겹쳤다. 일정한 간격으로, 너무 일정하게. 그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이어갔다. 1층 문을 밀고 나가자마자 옆에서 강한 힘이 들어왔다. 어깨를 밀어붙이며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이었다.건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상대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말은 하지 않았다. 밀치고, 넘어뜨리고, 확인하려는 의도가 명확했다. 우발적 시비가 아니었다.주먹이 날아왔다. 건우는 겨우 팔로 막았지만 충격이 컸다. 숨이 잠시 멎었고, 그 틈에 두 번째 충격이 들어왔다. 이번엔 옆구리였다. 고의적으로, 계산된 위치였다.“그만둬.”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공격자가 아니라,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인물의 목소리였다. 그 말은 경고라기보다 ‘확인 끝’에 가까웠다.건우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겁주기였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 멈추게 하려는.그들이 물러난 건 순식간이었다. 차 한 대가 골목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고, 건우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았다. 손등에 피가 묻어 있었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의도는 충분히 전달됐다.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거울을 오래 바라봤다. 입술 옆이 터졌고, 멍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위험은 이제 추측이 아니었다.하나에게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숨기는 건 더 큰 거짓이 될 것 같았다.그녀는 저녁 무렵 돌아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손이 멈췄다.“누가 그랬어.

  • 형수의 밤   47. 위험은 항상 사람의 이름을 먼저 부른다

    기자와 만난 뒤부터, 건우는 자신의 움직임이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단서 하나를 밖으로 꺼냈다는 사실이 이렇게 빨리 파장을 만들 줄은 몰랐지만, 놀랍지는 않았다.형이 죽기 직전 선택하려 했던 길이 바로 이것이었고, 그 길이 안전할 리 없다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문제는 그 위험이 생각보다 가까이 다가왔다는 점이었다.며칠 뒤, 건우는 주차장으로 내려가던 중 누군가가 자신의 차 근처에서 서성이는 걸 발견했다. 낯선 남자였다. 담배를 피우는 척하며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지만, 시선은 노골적으로 건우를 향하고 있었다. 건우가 발걸음을 멈추자, 남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돌아섰다.그건 경고였다.‘우리가 보고 있다’는 식의, 굳이 숨기지 않는 경고.건우는 차 문을 열기 전에 한 번 더 주변을 훑었다.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차 문 손잡이에 미세한 흠집이 나 있었다.누군가 도구를 댔다가 실패한 흔적처럼 보였다. 잠금 장치를 건드린 흔적이 분명했다.그는 한동안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지 못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 공포 때문이라기보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이건 단순한 감시가 아니라 ‘접근’이었다. 한 발 더 들어온 것이다.그날 저녁, 집에 들어왔을 때 하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듯 보였다. 노트북이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지만, 화면은 오래 전부터 멈춰 있었던 것처럼 어둡게 식어 있었다.“무슨 일 있어?”하나가 먼저 물었다. 질문은 조심스러웠지만, 그 속에는 이미 불안이 깔려 있었다.건우는 잠시 망설였다가 차 열쇠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차 건드린 흔적이 있었어.”하나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고장?”“아니. 누가 열어보려다 만 것 같아.”그녀의 손이 천천히 노트북을 덮었다. 그 움직임이 평소보다 느렸다. 감정을 숨기려는 사람의 동작이었다.“그만두면 안 돼?”말은 낮게 나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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