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저녁 여섯 시가 조금 넘었을 때, 건우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낮 동안 잠깐 들렀던 카페에서 하나와 헤어진 뒤, 그는 집에 돌아와 한동안 소파에 앉아만 있었다. 특별히 뭘 한 것도 없는데 몸은 이상하게 더 무거웠고, 머릿속은 오히려 더 조용해져 있었다. 사람은 가끔 아주 결정적인 말을 들은 날보다, 그 말을 들은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이어가야 하는 날 더 지친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하나는 카페를 나서기 전에 저녁 약속 시간을 굳이 정확히 정하지 않았다.그저 “이따 연락할게”라고 했고, 정말로 한 시간쯤 뒤에 짧은 메시지가 왔다.‘집 근처에서 볼래? 멀리는 말고.’건우는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짧게 ‘응’이라고 답했다.그 한 글자가 유난히 오래 걸렸다.아마 그건 오늘 저녁이 단순히 밥 한 끼가 아니라는 걸 그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약속 장소는 집 근처 골목 입구였다.번화가까지 나가지 않아도 작은 식당들이 모여 있는 동네라, 저녁 시간이 되면 직장인이나 동네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다녔다. 노란 간판 아래로 김이 오르고, 고깃집 환풍기 냄새와 국물 냄새가 저녁 공기 속에 뒤섞여 떠다녔다. 길가 편의점 앞에는 맥주 박스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있었고, 맞은편 빵집 쇼윈도 안에는 막 구운 식빵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이상할 만큼 평범한 풍경이었다.그리고 바로 그래서,건우는 그 골목 입구에 서 있는 하나를 보는 순간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하나는 낮보다 조금 더 편한 차림이었다.검은색 얇은 니트에 긴 스커트, 대충 묶은 머리, 거의 화장기 없는 얼굴. 누가 봐도 특별한 약속을 위해 꾸민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익숙했다. 예전의 하나는 원래 이런 식이었다. 일부러 꾸미지 않은 얼굴로 툭 나타나서, 별것 아닌 저녁을 먹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건우를 오래 보게 만드는 사람.하나는 먼저 그를 보고 손을 아주 작게 흔들
하나는 시선을 내려 노트 가장자리를 잠깐 봤다.그녀는 제목까지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짧은 정지 안에, 이게 자기와 무관한 시간이 아니라는 감각이 스친 듯했다.하나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혼자 있었어?”“응.”“나도.”그 대답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하나는 아메리카노를 하나 주문한 뒤, 컵이 나오기 전까지 테이블 가장자리만 손끝으로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평소 같으면 별 의미 없이 지나쳤을 작은 움직임인데, 오늘의 건우는 자꾸만 그런 사소한 습관들에 시선이 걸렸다.잠깐 뒤, 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요즘 이상한 게 있어.”건우는 고개를 들었다.하나는 시선을 창밖에 둔 채 아주 낮게 말했다.“시간이 중간중간 끊기는 느낌이 들어.”그 말은 건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었다.그는 대답하지 못했다.하나는 그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냥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닌 것 같아.”카페 안은 조용했다.에스프레소 머신 돌아가는 소리와 컵 부딪히는 소리만 멀리서 얇게 들렸다. 그 일상적인 소음들 사이에서, 하나의 목소리만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렸다.“어떤 날은 아침에 일어났는데, 전날 내가 뭘 했는지 흐릿하고… 어떤 날은 누가 한 말을 분명히 들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면 그게 진짜였는지 잘 모르겠어.”건우는 손에 쥔 컵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하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근데 제일 무서운 건…”그녀는 거기서 잠깐 말을 멈췄다.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전혀 밝지 않았다.“내가 뭘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거야.”그 문장은 예상했는데도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건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나는 자기 말이 너무 무거워졌다고 느낀 사람처럼 곧바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컵을 들었지만,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건우는 그걸 보고 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었다.그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컵을 쥔 하나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다음 날 아침, 비는 그쳐 있었다.밤새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사라진 자리는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하늘은 흐렸지만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고, 젖은 도로 위로 번지는 아침빛은 어딘가 씻겨나간 것처럼 창백했다. 사람은 종종 비가 그치면 모든 게 조금은 정리될 거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정리되는 건 바깥 풍경뿐이다. 건우는 세면대 앞에 서서 얼굴에 물을 끼얹는 동안, 어젯밤 서하가 남기고 간 문장이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그날, 죽은 건 한 사람만이 아니야.’처음에는 그 말을 단순히 무겁고 이상한 문장 정도로만 받아들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불편하게 가라앉았다.사람을 죽이는 건 칼일 수도 있고, 우연일 수도 있고, 계획일 수도 있다.하지만 누군가 안에서 무언가가 죽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그건 현장 사진에도 남지 않고, 경찰 기록에도 적히지 않으며, 타인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오래 간다. 건우는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닦으며, 자신이 지금까지 사건을 너무 단순한 방식으로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그는 거실로 나왔다.식탁 위에는 전날 밤 대충 덮어둔 윤신우 사건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인쇄해둔 통화 내역, 경찰 진술서 복사본, 자택 구조를 손으로 다시 그려놓은 메모, 사고 당일의 시간대를 정리한 노트, 병원 기록 일부, 그리고 그 옆에는 며칠 전부터 다시 펼쳐보기 시작한 형법 총론 책과 판례집까지 뒤섞여 있었다.한때 거의 손에 닿았던 자리였다.그리고 지금은, 너무 늦게 다시 쳐다보게 된 자리이기도 했다.건우는 식탁 앞에 앉아 한 장씩 종이를 넘겼다.지금까지 그는 늘 같은 방식으로 사건을 봐왔다.누가 거짓말을 했는지,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누가 윤신우를 죽였는지.그래서 자료를 볼 때도 늘 사람보다 증거를 먼저 봤다.진술의 틈,동선의 어긋남,시간의 공백,알리바이의 균열.그런 것들만 집요하게 붙들고 있었다.그런데
건우는 그걸 바로 캐묻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밤의 서하는 예전보다 더 쉽게 부서질 것처럼 보여서 입이 바로 열리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멈춰 서자, 유리창에 부딪힌 빗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더 진하게 만들었다.건우는 창문에 맺힌 빗방울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하루 종일 이상하네.”서하는 묻지 않았다.그래도 건우는 말을 이었다.“하나를 봐도 네가 떠오르고, 너를 보고 있으면 또 하나 생각이 나.”그 말은 생각보다 더 쉽게 나왔다.아마 더는 숨길 이유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서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고, 실제로도 대부분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와서 애써 부정하는 건 오히려 더 우스운 일이었다.건우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이게 뭔지 모르겠어.”서하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그녀는 창밖을 바라본 채 서 있었고, 조명 아래 비친 얼굴 옆선은 차분했지만 어딘가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건우는 그 침묵이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하는 지금 말을 고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보다,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를 재고 있는 사람의 침묵.한참 뒤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그게 정상인 거야.”건우는 바로 그녀를 봤다.서하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뭐가.”건우가 묻자, 서하는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네가 헷갈리는 거.”그녀의 목소리는 낮았고, 이상할 만큼 담담했다.“같은 얼굴인데 다른 사람이고, 다른 사람인데 또 완전히 남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겹쳐 있으니까.”그 문장은 건우를 잠깐 숨 막히게 만들었다.서하는 지금 처음으로,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현재의 상황을 언어로 짚어주고 있었다. 설명이라기보다는 진단에 가까웠다. 건우가 그동안 자기 안에서 이름 붙이지 못하고 있던 혼란을, 서하는 마치 오래전
비는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가늘고 조용한 빗줄기였는데,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굵어졌다. 유리창 바깥으로 번지는 불빛은 젖은 도로 위에서 흐릿하게 퍼졌고,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거실 벽에 잠깐씩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비 오는 밤 특유의 적막은 늘 그렇듯 사람의 생각을 더 깊은 데로 끌고 들어간다. 소음이 많아지는 것 같지만, 정작 사람 안쪽은 더 조용해지는 밤. 건우는 그런 밤이 원래부터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잊고 싶은 장면들이 이상할 만큼 또렷해지는 밤을 싫어했다.그는 거실 창가에 서서 한참 동안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봤다.어제 서하와 나눴던 대화는 아직도 머릿속 어딘가에서 제대로 닫히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얼굴로 나를 보지 마.” 그 말은 밤새 몇 번이나 떠올랐고, 아침이 와도, 낮이 지나도, 저녁이 되어도 전혀 희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졌다. 누군가의 경고가 이렇게 오래 남는 건,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건우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하루 내내 자기 안에서 어떤 시선이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하나는 저녁을 먹고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평소보다 더 말이 적었고, 웃을 때도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건우는 몇 번이고 말을 걸까 망설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요즘의 하나는 무너지는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아주 작은 순간에는 다시 평소처럼 굴었다. 그래서 더 건드리기 어려웠다. 사람은 완전히 무너져 있으면 차라리 붙잡기 쉽다. 그런데 이렇게 겨우 제 발로 서 있는 상태일수록,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더 깊게 부서진다.서하가 남긴 말이 자꾸 떠올랐다.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고치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네가 먼저 무너지지 마.건우는 그 말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쪽으로 기울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진실을 밝
서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탠드 빛에 반쯤 걸친 채, 건우의 얼굴을 한 번 훑듯이 바라봤다. 그 시선은 노골적이지 않았지만 이상할 만큼 정확했다. 대충 분위기를 읽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작은 표정 변화까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네가 뭘 부정하고 있는지 너무 잘 보이는 얼굴.”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건우는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는 걸 느꼈다.너무 정확했다.그는 곧바로 비웃듯 웃으려 했지만, 이상하게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서하가 괜히 찔러본 게 아니라는 걸, 자기 안쪽을 이미 보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사람은 대꾸하는 속도부터 늦어진다.건우는 결국 낮게 말했다.“너는 맨날 사람 속을 너무 쉽게 봐.”“쉬운 적 없었어.”서하가 담담하게 답했다.“네가 숨기는 게 너무 서툰 거지.”건우는 짧게 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반박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무슨 말을 해도 결국은 같은 자리로 돌아올 것 같았다. 서하는 지금 자기 표정이나 태도를 두고 장난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패턴을 다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결국 시선을 조금 비켜가며 말했다.“그럼 넌 뭘 봤는데.”서하는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하나를 보는데, 자꾸 딴 데로 가는 눈.”그 말은 생각보다 더 깊게 박혔다.건우는 천천히 눈을 들어 그녀를 봤다. 서하는 여전히 평소처럼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조금 더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움은 질투에 가까운 것도, 분노에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더 피곤한 쪽이었다. 이미 올 걸 알고 있었던 장면을 실제로 보게 된 사람의 피로.건우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뭘 봤다고 그렇게 단정해?”서하는 아주 짧게 웃었다.“단정 아니야.”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더 낮은 목소리로 이었다.“네가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으니까.”거실 안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건우는 그 말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