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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한 곡도 못 버티고

Author: 이스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0 15:15:12

해경은 세린의 드레스에 꽂아둔 핀부터 뺐다.

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니었다. 놀란 채 손을 움직이다 찌를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런 얘기 안 할게요.”

세린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제가 먼저 시장 얘기 꺼내놓고 이상하죠.”

“아뇨.”

해경은 핀 통을 닫았다.

“저도 오늘 좋았어요. 그건 그대로면 좋겠어요.”

세린은 거울 속 해경을 봤다.

“내일 제가 좀 뚱해도 가방 때문은 아니에요.”

“다섯 개 못 사셔서 그런 줄 알 뻔했네요.”

짧게 웃음이 났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편해진 건 아니었다.

세린이 갈아입으러 들어간 뒤 해경은 드레스 길이를 수첩에 적었다.

숫자 옆에 펜 끝만 오래 대고 있었다.

'나는 무슨 얼굴로 들은 거지.'

미안하다고 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며 웃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경은 번진 점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수첩을 덮었다.

다음 날, 테라스 촬영은 예정대로 끝났다.

오후 연회장에는 둥근 탁자와 꽃 장식이 놓였다. 해경은 배우들이 이동하는 길에 드레스가 걸리지 않는지 확인했다.

한별이 옆으로 왔다.

“오늘은 나 안 봐요?”

“봤어요. 단추도 다 잠기셨고요.”

“단추 말고.”

해경은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괜히 세린이 있는 쪽부터 확인하려던 자신을 알아차렸다.

'왜 눈치를 봐. 일하는 건데.'

그녀는 나비넥타이를 바로잡았다. 평소보다 빨리 손을 뗐다.

한별은 거울 대신 해경을 봤다.

“어제랑 다르네.”

“어제보다 잘 묶으셨어요.”

“내 얘기 아니에요.”

대답하기 전에 조감독이 배우들을 불렀다. 해경은 한 발 물러났다.

피한 것처럼 보였을까.

한별은 더 묻지 않고 촬영 위치로 갔다.

파티 장면에는 짧은 춤이 있었다.

한별과 세린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세 걸음씩 움직이고, 마지막에 손을 놓는 동선이었다.

음악 없이 맞출 때는 별문제가 없었다.

음악이 나오자 세린이 자꾸 반 박자 먼저 출발했다.

한별은 제자리에 남았고, 두 사람의 팔만 길어졌다.

“오빠가 늦는 거 아니야?”

“나 들어오라는 데 들어왔는데.”

“나는 나가라는 데 나갔어.”

둘을 보던 안무 담당자가 박수를 쳤다.

“같이 들어오시고 같이 나가실게요.”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세린도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해경은 웃다가 그녀의 구두를 봤다. 뒤꿈치가 자꾸 들렸다.

“잠시만요. 패드 좀 붙일게요.”

세린을 의자로 데려가 구두를 벗겼다. 발뒤꿈치가 빨갰다.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하시지.”

“춤 못 추는데 신발까지 탓하는 것 같아서요.”

“신발은 탓하셔도 돼요. 제가 고른 거니까.”

해경이 새 패드를 꺼내자 세린이 피식 웃었다.

“실장님 탓은 안 할게요.”

평소의 호칭이었다. 해경도 평소처럼 답했다.

“그럼 신발만 혼내주세요.”

세린이 쉬는 동안 카메라 동선부터 맞추기로 했다.

조감독이 근처에 있던 해경에게 위치를 잠깐 잡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패드를 보조에게 건네고 표시된 곳으로 갔다.

춤까지 출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한별이 손을 내밀었다.

“세 걸음만 움직이면 돼요.”

“저 못 춰요.”

“나도 잘 못해요.”

“자신 있게 말씀하시네요.”

“미리 말했으니까 밟아도 화내지 말라고.”

해경은 그의 손을 잡았다. 다른 손은 어깨 끝에 올렸다.

아무렇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발밑의 표시만 봤다.

첫걸음에 한별의 구두를 밟았다.

두 번째에는 제 발끼리 꼬였다.

“제가 화내도 돼요?”

그가 물었다.

해경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미리 말씀 안 드렸어요?”

“못 춘다면서요. 나를 못 걷게 한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의 엄지가 해경의 손등에서 조금 움직였다. 놓치지 않게 고쳐 잡은 것뿐이었다.

해경은 그 작은 움직임이 더 신경 쓰였다.

“발 보지 말고 나 봐요.”

고개를 들자 생각보다 가까웠다.

한별은 장난을 멈추고 짧게 박자를 세었다.

“하나. 둘.”

이번에는 발이 엉키지 않았다. 해경은 잡은 손에 주던 힘을 조금 풀었다.

'이렇게 가면 되는구나.'

세 번째 걸음에서 멈췄다.

끝이었다. 해경은 바로 손을 뗐다.

한별의 팔이 뒤늦게 내려왔다.

“감사합니다. 배우님들 다시 모실게요.”

해경은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왔다. 세린이 고쳐 신은 구두로 몇 걸음 걸어보이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확인하려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세린이 부탁한 건 대신 포기해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괜히 사람 마음 짐작하지 말자.'

그런데 제 마음부터 짐작이 안 됐다.

촬영은 시장 문이 닫힐 무렵 끝났다.

해경은 준비실에서 옷을 정리했다. 한별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의자에 앉았다.

“시장 못 가겠네요.”

“네. 늦었어요.”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한별이 다리를 꼬려다 구두 자국이 남은 신발 앞코를 봤다.

“오늘 이것도 닦아줘요?”

“그건 제 잘못이니까요.”

해경은 부드러운 천을 가져왔다. 그가 신발을 벗어 건넸다.

한 짝을 닦는 동안 한별이 물었다.

“내가 뭐 했어요?”

해경은 천을 접었다.

“발은 제가 밟았는데요.”

“그래서 묻는 거 아니잖아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별은 더 가까이 오지도, 웃지도 않았다.

“아침부터 나랑 말 끝낼 기회만 찾는 것 같아서.”

부정하려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해경은 닦은 신발을 내려놨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내가 잘못 짚었네요.”

그가 신발을 신었다. 바로 받아들이는 목소리가 오히려 걸렸다.

문밖에서 철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별도 저쪽으로 나가면 오늘은 끝이었다. 내일 다시 보면 될 일이었다.

해경은 천의 깨끗한 면을 찾았다. 이미 펼쳐져 있는데도 한 번 더 뒤집었다.

'잠깐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나.'

해경은 다른 쪽 신발을 가리켰다.

“그쪽도 주세요.”

“그쪽은 안 밟았어요.”

알고 있었다.

해경의 손이 그대로 남았다.

한별이 그 손을 봤다.

“지금은 안 가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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