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왜요?”
해경은 과자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별 뜻 없이 묻는 척했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지퍼도 잠그지 못했다.
한별이 말했다.
“나도 살 게 있어서.”
“직접 사 드시라니까 정말 가시게요?”
“실장님 말 잘 듣잖아요.”
“언제부터요?”
그가 웃었다. 해경은 따라 웃지 않으려고 가방 안을 봤다.
“내일은 아침부터 촬영이에요.”
“끝나고요.”
“몇 시에 끝날 줄 알고요.”
“끝나는 거 보고 정하면 되죠.”
같이 가자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경이 거절할 이유를 찾는 모양이 됐다.
'혼자 가면 되지, 왜 내 일정부터 물어.'
해경은 지퍼를 닫았다.
“생각해볼게요.”
“과자 하나 사는 데 생각까지 해야 돼요?”
“배우님이랑 가는 건 해야죠.”
한별은 이번엔 바로 받아치지 않았다.
그 잠깐이 해경을 더 당황하게 했다.
“가시면 제 것만 사주세요.”
그녀가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뒤에서 한별이 뭐라고 했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묻혔다.
돌아가서 물어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올라가는 내내 무슨 말이었는지 궁금했다.
오후 의상 점검은 호텔 연회장 옆 준비실에서 진행됐다.
다음 날은 테라스에서 시작해 실내 파티 장면으로 이어졌다. 해경은 배우별로 구두를 꺼내놓고 옷을 맞췄다.
한별이 제 차례에 맞춰 들어왔다.
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대보니 얼굴이 더 선명해 보였다.
'이러니 사람들이 속지.'
해경은 매듭 아래를 정리했다.
“턱 조금만 들어주세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 같으면 한마디쯤 했을 텐데 얌전했다.
해경은 그 편이 오히려 불편했다. 숨 쉬는 소리까지 들렸다.
“너무 들진 마시고요.”
“실장님이 들라면서요.”
“천장 보시라는 건 아니고.”
한별이 시선을 내렸다. 해경의 손이 아직 목깃에 있었다.
“이 정도?”
“네.”
대답이 조금 작게 나왔다.
그때 문이 열렸다.
소품팀 직원이 긴 상자를 들고 들어오다 해경을 불렀다.
“실장님, 이것도 한번 봐주실래요?”
파티 장면에서 쓸 가면이었다. 한별은 금빛 장식이 붙은 것을 집었다.
“내 거예요?”
“아뇨. 그건 배경 출연자용이고 배우님 건 이쪽이요.”
이미 얼굴에 대본 뒤였다. 깃털 세 개가 눈썹 위에서 흔들렸다.
해경은 입술을 꾹 눌렀다.
한별이 거울을 봤다.
“웃어도 돼요.”
“안 웃었어요.”
“어깨 움직이는데.”
결국 웃음이 터졌다. 한별은 가면을 떼고 해경 쪽으로 돌렸다.
“실장님도 해봐요.”
“저는 배경 출연자 아니에요.”
“나도 아니었는데.”
그가 가까이 오자 해경은 가면부터 받아냈다.
“알았어요. 제가 할게요.”
얼굴에 대고 거울을 보니 깃털이 이마보다 높이 솟았다.
'이건 누가 써도 웃기네.'
그런데 거울 속 한별은 웃지 않았다.
해경이 먼저 가면을 내렸다.
“왜요. 배우님보다 잘 어울려요?”
“네.”
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 준비했던 농담이 갈 곳을 잃었다.
해경은 상자에 가면을 넣었다. 아까 웃은 것까지 괜히 들킨 기분이었다.
실제 촬영용 가면은 얼굴 반쪽을 가리는 검은색이었다.
한별이 뒤로 끈을 묶다가 매듭을 놓쳤다.
“이거 좀 해줘요.”
해경은 그의 뒤로 갔다.
“조금 숙이세요.”
그가 무릎을 굽혔다. 높이가 맞자 매듭도 쉽게 잡혔다.
해경은 머리카락이 끼지 않게 끈을 벌렸다. 손끝에 짧은 머리카락이 닿았다.
문득 세탁실에서 그가 자신의 머리를 풀어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가까웠다.
“머리 당겨요?”
“아뇨.”
“조이면 말씀하세요.”
“지금 괜찮아요.”
매듭을 한 번 더 묶었다. 끝난 줄 안 한별이 일어나려 하자 해경은 그의 어깨를 눌렀다.
“잠깐. 머리 끼었어요.”
그가 다시 낮아졌다.
손끝으로 한 가닥씩 빼는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해경은 괜히 빨리 끝내려다가 오히려 한 번 더 확인했다.
“됐어요.”
한별이 돌아섰다.
검은 가면 아래로 익숙한 입매만 보였다. 눈이 가려졌는데도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 말을 들으니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잠깐 잊었다.
해경은 빈 상자를 들었다.
“배우님도 해주셨잖아요.”
“뭘요?”
“옷걸이요.”
말하지 말걸. 이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알려줄 필요는 없었는데.
한별이 가면을 조금 들어 올렸다.
“그거 갚은 거예요?”
“그냥 생각나서요.”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돌아왔다.
“그럼 나도 실장님 생각해도 되겠네.”
해경은 상자 뚜껑을 거꾸로 덮었다.
맞지 않았다. 돌려놓으면서 대꾸했다.
“옷걸이 생각을 하세요.”
“같이 생각나는데 어떡해요.”
'진짜, 말만 못하면.'
해경은 상자를 그의 품에 안겼다.
“이것 좀 밖에 갖다주세요.”
한별이 웃으며 받아갔다. 문이 닫힌 뒤에도 해경의 귀는 뜨거웠다.
세린은 바로 다음 순서였다.
해경은 준비해둔 드레스를 건네고 지퍼를 올려줬다. 거울 앞에서 치맛단을 확인하는 동안 세린이 물었다.
“내일 시장 가요?”
“아직 안 정했어요.”
“오빠가 아까 영업시간 물어보더라고요.”
해경은 핀 통을 열었다.
혼자 갈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데 못 들은 말이 혹시 그 이야기였을까 싶었다.
“저기, 해경 씨.”
세린이 거울에서 시선을 뗐다.
“오빠 얘기는 저한테 안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요.”
해경의 손이 멎었다.
세린은 치맛자락을 살짝 들었다 놓았다.
“오늘 같이 다닌 건 좋았어요. 다음에도 가고 싶고.”
말끝에 잠깐 웃음이 걸렸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제가 두 분 사이에서 뭘 알려주는 사람은 못 하겠어요.”
해경은 핀을 통에 내려놓았다.
아침에 거울을 건네주던 손이 떠올랐다. 그 친절에 다른 뜻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린도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무엇부터 답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너무 편하게 굴었나.'
“저희 그런 사이…….”
“알아요. 아직 아닌 거.”
세린이 먼저 말을 받았다.
“저도 아직 정리가 안 됐거든요.”
“윤서진 실장님이요?”해경이 가방을 다시 열었다. 휴대폰에는 서진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근처 리조트 화보 때문에 들어왔다고 했다. 제작팀에 협찬 샘플을 전달할 일이 생겨, 해경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저 먼저 정리하고 갈게요.”해경이 보조에게 가방을 넘겼다. 옆에 있던 한별이 물었다.“방금까지 정리한 건 뭐예요?”“다 했는지 확인하는 거죠.”“확인도 다 했는데.”“배우님은 대본 확인 한 번만 하세요?”한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요. 누가 못 가게 했나.”말투가 이상했다. 해경은 그를 봤다가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지금은 왜 저러는지 따질 시간이 없었다.호텔 작업실에 돌아왔을 때 서진은 세린과 이야기하고 있었다.“언니, 여기까지 와서도 일해?”“오늘은 짐만 전해주고 쉴 거야. 너도 끝났다며.”해경이 들어서자 서진이 먼저 일어났다.“류해경 실장님?”사진으로만 봤던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렀다.해경은 악수를 하다가 손바닥에 핀이 없는지 괜히 확인했다.'아니, 손에 꽂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보내주신 사진 잘 봤어요.”“감사합니다. 원본은 정리해서…….”“사진부터 다시 볼까요? 이쪽 앉아요.”서진이 태블릿을 돌렸다. 해경이 보낸 세 장이 떠 있었다.어떤 옷이 예쁘다는 말보다, 왜 그 옷을
“그 질문은 이따 대답해요.”한별이 해경의 뒤에서 말했다.해경은 감독이 기다리는 테이블로 걸음을 빨리했다.'연기 잘해서 싫냐니.'그게 싫은 거라면 이렇게 답을 피할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그가 세린을 바라보는 얼굴을 본 뒤, 아침에 자신에게 웃던 얼굴까지 의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말로 꺼내면 우스워질 생각이었다.테이블 위에는 방금 찍은 장면의 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제작팀 직원이 한 장을 골라 들었다. 한별과 세린의 얼굴이 가까운 컷이었다.“숙소 건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잖아요. 오늘 밤 티저를 하나 올리면 관심이 작품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요.”세린이 사진을 봤다.“키스 장면을 벌써요?”“짧은 스틸 한 장입니다. 두 분 의견 듣고 결정하려고요.”한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세린이 먼저 사진을 내려놓았다.“저는 다른 사진이면 좋겠어요.”“노출이 부담스러우세요?”“노출보다 순서요. 아직 첫 티저도 안 나왔는데 키스신부터 보여주면 인물 관계를 다 아는 것 같잖아요.”해경은 세린을 봤다.정확한 말이었다. 그 사진을 보고 불편했던 건 자기 기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경은 의상팀으로서 덧붙였다.“이 장면 옷은 앞 장면의 사건을 겪고 나서 바뀐 스타일이에요. 먼저 공개되면 이야기 흐름도 보일 거예요.”제작팀 직원이 사진을 다시 봤다.“그럼 대체 컷을 오늘 찍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네요.”재하가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앞 테라스 빛 아직 살아 있어요. 두 분 각각 한 컷씩 찍
“여기서 손 잡고, 대사 끝나면 가까이 오는 거지?”세린이 대본을 짚었다. 한별은 그녀가 표시한 부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해경은 두 사람 옆에서 의상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평소 같으면 소매가 어떻게 접히는지 봤을 것이다. 오늘은 가방 안에 뭐가 빠졌는지만 자꾸 확인했다.“실장님.”한별이 불렀다.“네?”“그거 두고 가요?”탁자에 빵 봉투가 남아 있었다.“나중에 먹으려고요.”“나중에 개미가 먼저 먹겠는데.”해경은 봉투를 챙겼다.'그래. 개미랑 먹으면 되겠네.'엉뚱한 데 심술이 났다. 한별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해안 카페는 촬영팀이 빌린 오전 동안만 영업을 쉬었다.난간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흰 차양 아래로 햇빛이 잘게 들었다. 어디에 카메라를 놓아도 두 사람은 그림처럼 어울렸다.해경은 세린의 원피스 허리를 정리했다.“많이 붙어요?”세린이 물었다.“네?”“옷이요. 앉으면 배 쪽이 뜨는 것 같아서.”“아. 잠깐만요.”해경은 안쪽 고정을 풀어 조금 여유를 줬다.'정신 차려. 뭐가 붙는 줄 알았는데.'세린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며 확인했다.“이제 괜찮아요.”한별이 옆으로 다가왔다. 해경은 그의 셔츠도 확인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다 됐어요.”“난 되게 빨리 끝나네요.”
“누가 그렇게 전달했어요?”한별의 물음에 직원이 휴대폰을 확인했다.“차량 명단에 두 분이 같이 적혀 있어서요. 제가 잘못 알았네요.”해경은 카드키를 받으며 정정했다.“의상팀 공용 작업실이에요. 다른 배우들도 드나들 겁니다.”“네. 안내 다시 하겠습니다.”연결된 방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 당장 옮길 곳도 없었다.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한별이 말했다.“내 전담은 싫고, 내 옆방은 괜찮아요?”“옆방은 말을 안 하니까요.”“벽 얇다던데.”“그럼 배우님이 조용히 해주세요.”해경이 먼저 내렸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따라왔다.아까보다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잘됐네. 내일 또 까칠하게 굴면 피곤하니까.'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돌아볼 뻔했다.다음 날, 해경은 작업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보조가 아침을 가져오는 동안 어제 접어둔 의상을 꺼냈다. 벽 가운데 있는 연결문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한별의 첫 촬영은 아홉 시였다.지금은 일곱 시 사십 분.'아직 안 왔겠지.'해경은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다시 묶었다. 목덜미의 잔머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어차피 습해서 다시 흐트러질 텐데.그때 옆방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해경은 거울에서 한 발 떨어졌다.노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문은 잠잠했다.'뭐, 꼭 인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그녀는 스팀다리미를 켰다.전원은 들어오는데 김이 나오지 않았다. 물통을 다
“아뇨. 못 들었어요.”한별이 답했다.해경은 준비실 문을 닫았다. 세린은 안쪽에서 자기 옷을 챙기고 있었다.“그럼 이제 들으셨으니까 배우님도 조심해주세요.”“승재한테 내가 얘기할게요.”“저한테 잘해주라고 하시라는 뜻 아니에요.”전화 너머에서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나 때문에 실장님한테 그런 말 한 거잖아요.”“같이 나갔는데 저만 말 들은 게 싫어요. 배우님이 먼저 나가자고 하셨고요.”말하고 나니 꼭 따라가기 싫었는데 끌려간 사람 같았다.해경은 잠깐 말을 멈췄다.“물론 저도 가고 싶어서 갔어요.”그 대목에서 목소리가 작아진 게 더 짜증 났다.한별이 물었다.“나랑요?”“지금 그게 중요해요?”“그것도 중요하죠.”해경은 휴대폰을 귀에서 잠깐 뗐다가 다시 댔다.'끝까지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지.'“다시 말씀드릴게요. 주의사항 있으면 두 사람한테 똑같이 알려주세요.”“알았어요.”“그리고 제 차는 제가 정해요.”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그건 내 마음대로 한 거 맞아요.”예상하지 못한 인정이었다. 해경은 다음 말을 준비하다 멈췄다.“짐 챙겨요. 내가 승재랑 얘기할게요.”통화가 끝났다.세린은 휴대폰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물었다.“저 이
“괜찮으니까 나왔죠.”한별의 대답은 빨랐다.해경은 그의 뒤로 멀어지는 관광객들을 봤다.“저분들이 사진 올리면요?”“내 사진인데요.”“같이 다닌 사람 얘기도 하실 수 있잖아요.”“그럼 같이 다녔다고 하면 되죠.”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설명하기 어려웠다.한별에게는 평소처럼 사진 한 장 찍어준 일이었다. 해경은 방금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허둥댔다.“배우님은 익숙하시겠지만 저는 처음이라서요.”그제야 한별이 걸음을 멈췄다.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승재였다.“어. 아직 근처야.”몇 마디 듣던 한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디까지 들어왔는데?”해경도 휴대폰을 꺼냈다. 촬영팀 단체 대화방에 공지가 올라오고 있었다.〈숙소 로비에 외부 방문객이 몰리고 있습니다. 복귀 시 정문 이용을 피해주시고, 제작팀 연락을 기다려주세요.〉'벌써?'조금 전 만난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한별이 통화를 끝냈다.“승재가 데리러 온대요.”“저희 때문에 호텔까지 온 거예요?”“아직 몰라요. 여기서 기다려요.”그는 해변 안쪽을 가리켰다. 해경은 따라 움직이면서도 단체 대화방을 놓지 못했다.승재는 차를 세우자마자 뒷문을 열었다.승재는 한별이 타는 걸 확인하고 주변을 살폈다.“두 분 다 타세요. 숙소 바로 못 들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