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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8 07:30:56
그것이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마지막 방패였다.

하지만 연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바닥에 끌며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분노가 아니라, 덫에 걸린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사신의 섬뜩한 미소였다.

“결백을 증명하라. 그래, 그 명분이 필요하겠지. 짐이 오늘 이 자리에서 똑똑히 증명해 주마.”

연호가 턱짓을 하자 편전의 문이 열렸다.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쪽으로 향했다.

머리가 하얗게 샌 강 유모가 밧줄로 묶인 무언가를 짐승 끌듯 질질 끌며 들어오고 있었다.

한때 화려한 비단옷을 둘렀을 그것은,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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