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204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28 09:37:23
하지만 초희의 그 오만한 망상은 곧장 들려온 하륜의 서늘한 음성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폐하. 거두시옵소서.”

옥좌의 한 계단 아래, 완벽한 충신의 얼굴을 한 하륜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형님을 아끼시는 폐하의 성심(聖心)이 지극하시나, 남원의 저하께서는 그 눈부신 성덕을 감당하기엔 심성이 지나치게 유약하신 듯하옵니다.”

하륜은 바닥에 엎드린 선호를 가련하다는 듯, 그러나 아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랜 유배 생활에 기력이 쇠하여, 폐하의 용안을 뵙는 것만으로도 넋을 잃으신 모양입니다. 이토록 낙엽처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환관의 비   300 화

    다음 날 아침. 눈부신 햇살이 스며드는 전각 안.미옥은 나른한 손길로 정무를 앞둔 연호의 허리띠를 매어주고 있었다. 연호는 말없이 턱을 괸 채, 제 앞의 미옥을 내려다보았다.어젯밤 초희가 쏟아낸 그 끔찍한 병증.포궁악창이라 했던가.연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완벽한 타이밍이었다.‘네가 부린 수작이겠지. 그러니 셋이 함께하자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냈겠지.’연호는 제 옷깃을 여미는 미옥의 턱을 느릿하게 쥐어 올렸다.‘궁에 나가 있던 그 시간 동안 무엇이 너를 이리 변하게 만든 거지? 아무래

  • 환관의 비   299 화

    안락당(安樂堂).평안을 누리라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이곳은 황궁에서 가장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웅크린 무덤이었다.굳게 닫힌 창살 너머로 훅 끼쳐오는 공기는 멀쩡한 사람의 폐부마저 단숨에 병들게 할 만큼 무겁고 탁했다.독하게 달여낸 탕약 냄새, 시체를 닦아낼 때 피우는 값싼 향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도 덮지 못한 채 허공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는 썩은 피고름의 비린내.낡은 병풍 너머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은 생명이 꺼져가는 자들의 가래 끓는 숨소리와 건조한 신음뿐이었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생기(生氣)라고는 단 한 줌

  • 환관의 비   298 화

    "아읏……!"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래를 파헤쳐지는 수치심에 초희가 신음을 뱉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초희의 안쪽 깊은 곳을 짚어보던 의녀의 두 눈이 공포로 크게 확장되었다. 부드러워야 할 살점 너머로, 기괴할 정도로 크고 단단한 덩어리가 만져진 탓이었다.의녀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으며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폐하! 이, 이건 단순한 염증이 아니옵니다!""무슨 소리야! 네년이 내게 분명 며칠 쉬면 낫는 병이라 하지 않았느냐!"초희가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으나, 의녀는 사시나무 떨듯 고개를

  • 환관의 비   297 화

    끔찍한 악취의 근원이 다름 아닌 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초희의 입술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초희는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며 허겁지겁 침상 위에 깔린 붉은 비단 이불자락을 끌어당겨 제 흉한 아래를 가렸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손끝에 피가 섞인 끈적하고 탁한 갈색 고름이 미끈하게 묻어나오자,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로 뒤덮혔다."당장 치워라."머리 위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저 더러운 것을 당장 연화당 밖으로 내던져."연호는 초희를 여인은커녕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듯, 혐오가 담긴 얼굴로 굳게 닫힌 문 너

  • 환관의 비   296 화

    그 순간, 초희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처박혔다.위는 입은 채 아랫도리만 벗으라니. 그것은 여인으로서의 최소한의 교감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노골적이고 수치스러운 명령이었다.하지만 굴욕감에 굳었던 것도 아주 찰나였다. 초희는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번들거리는 눈빛을 빛냈다.'수치심? 그깟 게 대수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사내의 혼을 쏙 빼놓고 옭아매는 건 아랫도리뿐이야. 세상천지에 그보다 확실하고 중요한 게 어디 있어.'애초에 고고한 귀족 영애들처럼 고상한 교감을 나눌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단 한 번, 저 오만하고

  • 환관의 비   295 화

    끼기긱-.무거운 연화당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독한 향유를 머리끝까지 들이붓고, 치맛자락 아래로는 아직도 매캐한 쑥 훈증 냄새를 품은 초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문턱을 넘어서던 찰나였다."……!"초희의 걸음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녀의 시선은 반쯤 걷힌 붉은 휘장 너머, 너른 침상 위로 벼락처럼 내리꽂혔다.그곳에는 숨 막히도록 농밀하고도 노골적인 정사(情事)의 한복판이 펼쳐져 있었다.붉은 곤룡포를 반쯤 벗어 던진 연호가, 제 무릎 위에 미옥을 온전히 올려앉힌 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

  • 환관의 비   24 화

    아래에서 부터 지독한 수치심이 파고 들었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여인들에게 그는 존재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었다. 감히 누가 그에게 '만족'을 논한단 말인가.연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랫배 부근에서 비릿한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성적인 충동이라기보다, 제 오만함을 짓밟은 이 비천한 계집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싶다는 잔인한 오기였다.“노비들의 삶은 거칠고 비천합니다. 그만큼 몸의 갈증도 깊지요. 아기씨 같은 분들이야 대인께서 손끝만 대도 좋아라 하시겠지만, 저는 글쎄요. 겉만 번지르르한 종이 인

  • 환관의 비   23 화

    “사흘, 알겠습니다.”자리에서 일어난 유희는 연호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저는 그동안 고모님을 뫼시고 대인을 다시 뵐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고모님?’미옥은 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유희를 바라보았다. 장군의 여식인 저 아기씨가 '고모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시는 분이라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귀부인이란 말인가. 아마도 저 아기씨처럼 번쩍이는 비단을 휘감고, 서슬 퍼런 위세를 떨치는 무서운 분이겠지.미옥은 제 비천한 신세가 새삼스레 쓰라렸다. 어제 그와 나누었던 국화

  • 환관의 비   22 화

    “들어오너라.”미옥은 제 얼굴이 화로에 들어간 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유희에게 내뱉었던 그 난잡하고 노골적인 말들을 연호가 다 들었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땅을 파고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저는……차, 차를 내오겠습니다.”미옥이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려 하자, 연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밥도 먹기 전에 무슨 차냐. 너도 들어와라.”결국 세 사람이 좁은 방 안에 마주 섰다. 연호는 태연하게 탁자 상석의 교의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미옥을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앉아

  • 환관의 비   21 화

    대문 앞에서는 하륜이 서슬 퍼런 기세로 여인을 가로막고 있었다.“이곳은 아기씨께서 함부로 발을 들이실 곳이 아닙니다.”“다 알고 왔네, 하 상시. 그분께서 이 안채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계시다는 것을.”유희, 천 장군의 여식은 하륜의 위압감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하륜의 어깨너머를 훑으며 도도하게 입술을 올렸다.“알고 왔다 하여 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아버님의 명일세. 직접 이곳에 오시면 세간의 이목이 쏠릴 터이니, 대신 나를 보내 그분의 안위를 살피라 하셨지. 만약 내가 그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