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엘로디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완성된 혼인잔. 끊어지지 않는 감각 공유. 그리고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기록. 여기에 라시엘의 말까지. 내 신부 후보에서 빠지는 것부터 상당히 어려워진 것 같군. “……잠깐만요.” 엘로디아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리 좀 할게요.” 라시엘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우선.” 엘로디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이 잔은 제가 만든 게 맞죠.” “우리 둘이 만들었지.” “그 부분은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전하는 조용히 계세요.” 테오란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황태자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엘로디아는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그리고 이 잔은 원래 초벌 상태였는데 스스로 완성됐어요.” “그래.” “그 결과로 전하와 제가 접촉하지 않아도 서로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게 됐고.” “그것도 맞아.” 엘로디아는 세 번째 손가락을 접으려다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테오란을 바라봤다. “마지막.” 테오란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죽는다.” “……기록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엘로디아의 표정이 굳었다. “기록이 틀렸을 가능성은요?”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엘로디아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요?” “이백 년 전 기록이니까요. 현재 확인된 사실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죠?” 엘로디아가 라시엘을 바라봤다. “그렇다잖아요.” “그래서?” “그러니까 우리가 죽고 사는 사이까지 됐다고 바로 결론 내릴 필요는 없죠.” 라시엘은 잠시 그녀를 보더니 아주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확인해볼까?” 엘로디아가 굳었다. “뭘요?” “죽어보면 확실하겠지.” “전하!” 라시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농담이야.”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세요?” “당신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당연히 심각하죠!” 엘로디아가 목소리를 낮추기는커녕 한층 더 높였다. “제 인생이 갑자기 황태자 전하의 생명하고 묶였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안 심각해요?” “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전하는 황태자잖아요.” “그래서?” “위험한 일이 저보다 훨씬 많잖아요!” 정적. 라시엘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엘로디아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말이 쏟아지고 있었다. “암살 시도도 있을 거고, 전쟁이 나면 직접 나가실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노리는 사람도 많을 거고. 저는 그냥 가마 앞에서 그릇 굽다가 늙어 죽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전하 때문에 목숨까지 같이 걸게 생겼잖아요.” 테오란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웃음을 참는 건지 기가 막힌 건지 알 수 없었다. 라시엘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그냥 가마 앞에서 늙어 죽을 생각이었나?” “예.” “구체적이군.” “아주 구체적이에요.” “결혼은?” 엘로디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그 얘기가 나와요?” “인생 계획을 듣고 있으니까.” “없었어요.” “전혀?” “예.” 라시엘의 시선이 묘하게 깊어졌다. “그렇군.” 엘로디아는 그 눈빛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아무튼 이 잔부터 다시 조사해야 해요.” “동의해.” 라시엘이 테오란을 바라봤다. “기록고를 전부 뒤져.” “예, 전하.” “혼인잔 관련 기록은 빠짐없이.”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뭐지?” “이백 년 전 사건 직후 관련 문서 대부분이 폐기됐습니다.” 라시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누구 명령으로?” “당시 황제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직접 명령했는지 확인할 수 있나?” “현재로서는 어렵습니다.” 라시엘이 잠시 생각했다. “황실 도요원 쪽 기록은?” “별도로 보관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엘로디아가 바로 끼어들었다. “제3도요원이요.” 테오란이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 잔이 거기서 반응했잖아요.” 엘로디아는 완성된 혼인잔을 가리켰다. “그 공방은 단순히 오래된 작업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게다가 어젯밤 제가 처음 들어갔을 때도 이상했어요.” 라시엘이 물었다. “뭐가?” “버려진 곳치고 도구들이 너무 잘 남아 있었어요.” “먼지가 쌓여 있었는데.” “그건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지 폐기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엘로디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정말 버릴 생각이었다면 물레도, 가마도, 유약 재료도 다 옮겼을 거예요. 그런데 그대로 있었어요. 특히 가마는 상태가 너무 좋았고.” “백 년 넘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더 이상하죠.” 라시엘이 테오란을 바라봤다. “도요원 도면을 가져와.” “지금 말씀이십니까?” “지금.” 테오란은 짧게 한숨을 쉬었지만 곧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공방을 나가자 엘로디아와 라시엘만 남았다. 그리고. 쿵. 다시 느껴졌다. 라시엘의 심장. 조금 전에는 상황이 급해서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선명했다. 엘로디아는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봤다. “계속 들리네요.” “나도.” “불편하지 않으세요?” “조금.” “저는 많이 불편한데.” “왜?” 엘로디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봤다. “다른 사람 심장 소리가 계속 느껴지는 게 안 불편해요?” “익숙해질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안 익숙해지고 싶은데요.” “내 심장이 마음에 안 드나?” “심장에 마음에 들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박동은 꽤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하.” “왜.” “진짜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그제야 라시엘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아무렇지 않을 리 없지.” 엘로디아가 말을 멈췄다. 라시엘은 잔을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 당장 없앨 방법을 모르는 걸 붙잡고 당황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 “그러니까 알아내면 돼.” 낮고 차분한 말이었다. 엘로디아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런 사람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먼저 해결 방법부터 찾는 사람. 장난스럽고 능글맞은 모습만 봤지만, 아마 그래서 황태자인 걸지도 몰랐다. “전하.” “응?” “방금은 좀 황태자 같았어요.” 라시엘이 눈썹을 들었다. “평소에는 아닌가?” “장작 나르던 모습이 강렬해서.” 그가 결국 웃었다. “평생 기억하겠군.” “아마도요.” “그럼 나쁘지 않네.” 엘로디아가 무슨 뜻이냐는 듯 그를 쳐다봤지만 라시엘은 더 말하지 않았다. ⸻ 한 시간 뒤. 테오란이 황실 건축 기록과 오래된 도면 몇 장을 들고 돌아왔다. 세 사람은 작업대 위에 도면을 펼쳤다. 엘로디아는 처음에는 아무 말 없이 살펴봤다. 제3도요원.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공방. 작업실. 가마. 재료 창고. 작은 휴게실. 그런데 이상했다. “여기.” 엘로디아가 손가락으로 도면 아래쪽을 짚었다. “뭐지?” 라시엘이 몸을 숙였다. “현재 구조하고 안 맞아요.” “어디가?” “가마 뒤쪽.” 엘로디아가 도면을 따라 선을 그었다. “지금은 벽이 바로 끝나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여기에는 공간이 하나 더 있어요.” 테오란이 도면을 자세히 봤다. “지하실?” “아니요.” 엘로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가마 뒤에 숨겨진 방.”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가마 쪽으로 향했다. 거대한 벽돌 가마. 그 뒤에는 분명 돌벽뿐이었다. 라시엘이 먼저 걸어갔다. “부숴볼까.” 엘로디아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안 돼요.” “왜?” “벽이 가마하고 연결돼 있잖아요.” “그래서?” “괜히 건드렸다가 가마 무너지면 어떡해요?” 라시엘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나보다 가마가 중요하지?” “지금은요.” “솔직하군.” 엘로디아는 벽 가까이 다가갔다. 손끝으로 표면을 쓸었다. 차가운 돌. 겉보기에는 평범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한쪽에 아주 얕은 선이 있었다. “여기.” 테오란이 눈을 좁혔다. “문인가?” “아마도요.” 엘로디아가 돌벽을 두드렸다. 톡. 톡. 툭. 세 번째 지점에서 소리가 달랐다. 속이 비어 있었다. “이쪽.” 그녀가 벽 아래를 더듬었다. 그러다 손끝에 작은 홈이 걸렸다. 먼지를 털어내자 동그란 자국 하나가 나타났다. 엘로디아의 표정이 굳었다. “이 문양.” 서로 맞물린 두 개의 원. 혼인잔의 표식과 같았다. 라시엘의 표정도 달라졌다. “잔을 가져와.” “잠깐만요.” “왜?” “이번에도 뭔가 연결될 수 있어요.” “이미 충분히 연결돼 있지 않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로디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렇지만.” 라시엘은 완성된 잔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만지지 않았다. 그가 잔을 벽의 문양 가까이 가져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 엘로디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둘이 같이 해야 하나 봐요.” 라시엘이 그녀를 바라봤다. “손.” “이제 자연스럽게 요구하시네요.” “어제 당신이 먼저 가르쳐줬지.” 엘로디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라시엘의 손이 그 위에 겹쳐졌다. 쿵. 이미 연결되어 있는 심장 박동과 별개로 손끝에서 뜨거운 감각이 번졌다. 엘로디아는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잔 잡으세요.” 두 사람의 손이 잔에 닿았다. 금빛 문양이 밝아졌다. 그리고. 쿠구궁— 낮은 진동이 벽 전체를 흔들었다. 엘로디아가 눈을 크게 떴다. 벽의 문양에서 금빛 선이 퍼졌다. 돌 사이에 숨어 있던 경계가 드러나며 세로로 긴 문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테오란이 즉시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하지만 라시엘은 엘로디아보다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등 뒤로 가렸다. 엘로디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 행동은 너무 익숙해서 마치 늘 해오던 것 같았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익—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안쪽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테오란이 마법등을 켰다. 빛이 안으로 번졌다. 작은 방이었다. 그리고 벽 전체가 선반으로 채워져 있었다. 선반 위에는 수십 개의 도자기가 놓여 있었다. 잔. 접시. 항아리. 대부분 깨져 있었다. 엘로디아는 숨을 삼켰다. “이건…….” 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깨진 그릇들마다 마력의 결이 남아 있었다. 금색. 은색. 푸른색. 서로 다른 빛. 오래되어 거의 사라진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 작은 받침대 위에 검은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금이 간 잔. 엘로디아가 멈췄다. 2화에서 환상으로 보았던 잔과 너무 비슷했다. “전하.” 라시엘도 발견했다. “저거.” 세 사람이 가까이 다가갔다. 잔 옆에는 작은 금속판이 있었다. 오래된 제국어가 새겨져 있었다. 테오란이 읽었다. “아르젠력 412년.” 엘로디아는 숨을 멈췄다. 이백 년 전. 바로 황후가 죽은 해였다. 그리고 아래. 황후 세실리아 아르젠의 혼인잔. 라시엘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그럼 이게.” “마지막 혼인잔이겠군요.” 엘로디아가 낮게 말했다. 그녀는 잔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검은 균열. 표면의 금빛 문양은 절반쯤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잠깐.” 엘로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라시엘이 물었다. “이 잔.” 그녀는 손을 대지 않고 아주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금 간 게 밖에서 충격받아서가 아니에요.” 테오란이 물었다. “그럼?” “안쪽에서 터졌어요.” 엘로디아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마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누가 일부러?” “아마도요.” 그녀는 균열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또 뭐가 있지?” “피.” 라시엘의 표정이 바뀌었다. “피?” 엘로디아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돼서 거의 남지 않았지만 있어요.” 테오란이 바로 마도구를 꺼냈다. “확인하겠습니다.” 작은 수정판을 잔 가까이에 가져가자 희미한 붉은빛이 떠올랐다. “혈흔 반응이 있습니다.” 라시엘이 물었다. “황후의 피인가?” “보관된 황실 혈통 자료와 비교해야 합니다.” “지금 해.” 테오란이 고개를 숙였다. “예.” 엘로디아는 여전히 잔을 보고 있었다. 기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쿵. 라시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엘로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전하?” 라시엘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왜 이러지.” 다시. 쿵. 이번에는 엘로디아의 심장도 같이 뛰었다. 너무 세게. 아팠다. “윽.” 엘로디아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라시엘이 즉시 그녀를 붙잡았다. “엘로디아.” “괜찮…….” 말이 끝나지 않았다. 검은 잔이 빛났다. 금빛이 아니었다. 검은빛. 정확히는 빛이라기보다 그림자에 가까웠다. 벽 전체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엘로디아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르메르. 엘로디아가 굳었다. “들으셨어요?” 라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메르의 피가 돌아왔다. 목소리는 방 안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직접 머릿속에 울리는 것 같았다. 엘로디아가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검은 잔에서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뻗어나왔다. 라시엘이 즉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림자가 허공을 스쳤다. 콰직! 뒤쪽 선반 하나가 그대로 갈라졌다. 엘로디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거.” 라시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살아 있는 건가?” “그럴 리는…….” 없다고 말하려던 순간. 검은 잔의 균열 사이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여자였다. 아주 희미했다. 깨뜨리지 마. 엘로디아가 숨을 멈췄다. 2화의 환상에서는 분명 말했다. 혼인잔을 깨뜨려. 그런데 지금은. 깨뜨리지 말라고 했다. “전하.” “들었어.” “말이 달라요.” 라시엘도 굳은 얼굴로 잔을 바라봤다. 그때 테오란이 갑자기 외쳤다. “전하!” 두 사람이 돌아봤다. 테오란의 손에 든 수정판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혈흔 대조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침착함이 없었다. “말해.” 라시엘이 짧게 명령했다. 테오란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엘로디아가 불안하게 물었다. “황후의 피가 아니에요?” 테오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럼 누구의 피지?” 테오란은 손에 든 수정판을 내려다봤다. “황실 혈통 기록과 일치합니다.” “누구?” “당시 황제도 아닙니다.” “그럼.” 테오란이 숨을 삼켰다. “현재 황가 직계와 가장 가까운 반응입니다.” 라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을 돌리지 마.” 테오란이 결국 입을 열었다. “전하와 동일한 계통입니다.” 엘로디아가 멈칫했다. “무슨 뜻이에요?” 테오란이 그녀를 바라봤다. “쉽게 말하면.” 그가 천천히 말했다. “이백 년 전 이 잔에 묻은 피의 주인은 황후도 황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구죠?” “당시 공식 기록에서 존재하지 않는.” 테오란의 표정이 굳었다. “또 다른 황족입니다.” 정적. 라시엘의 얼굴이 완전히 차가워졌다. 엘로디아는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엉켰다. 공식 기록에 없는 황족. 혼인잔. 황실 계승을 조작했다는 르메르 가문의 반역죄. 그리고 잔에 나타났던 문장. 르메르의 피로 빚은 잔은 황실의 주인을 바꾼다. 엘로디아의 입술이 굳었다. “설마.” 라시엘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이지?” “이백 년 전 사건.” 엘로디아가 천천히 말했다. “르메르 가문이 황실의 계승을 조작하려 했던 게 아니라.” 그녀의 시선이 깨진 검은 잔으로 향했다. “누군가 이미 조작한 황실 계승을.” 라시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되돌리려 했던 거라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검은 잔의 균열 사이에서 검은빛이 다시 한번 번졌다. 마치. 정답을 들었다는 것처럼. ⸻ 그날 새벽. 비밀방은 황태자 직속 기사단에 의해 봉쇄되었다. 검은 혼인잔 역시 그대로 두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엘로디아와 라시엘은 다시 공방으로 돌아왔다. 테오란은 자료를 확인하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둘 사이에는 이전보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엘로디아가 의자에 앉았다. “머리가 아파요.” “동감이야.” “저는 그냥 그릇만 굽고 싶었는데.” “그 말 오늘 세 번째 듣는 것 같은데.” “앞으로 더 들으실 거예요.” 라시엘이 맞은편에 앉았다. “후회하나?” “뭘요?” “황궁에 온 것.” 엘로디아는 잠시 생각했다. 황태자비 선발전. 혼인잔. 죽으면 같이 죽을 수도 있는 연결. 이백 년 전 반역 사건. 그리고 정체불명의 황족.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후회해야 했다. 그런데. “조금요.” 라시엘이 눈썹을 들었다. “조금?” 엘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궁금해요.” “역시.” “뭐가요?” “당신은 무서운 것보다 궁금한 게 먼저인 사람이군.” 엘로디아는 피식 웃었다. “도예가가 그렇죠.” “다 그런가?” “적어도 저는 그래요.”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가마를 열기 전에는 안에서 뭐가 나올지 아무도 모르거든요.” “실패할 수도 있는데.” “그렇죠.” “그런데도 연다.” “안 열면 평생 모르잖아요.” 라시엘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엘로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또 특정 사람에게만 관심이 많다는 말 하시려고요?” “기억하고 있었군.” “그런 말은 기억에 남으니까요.” 라시엘의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생겼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쿵. 엘로디아는 자신의 심장과 함께 라시엘의 심장도 한 번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전하.” “왜.” “방금.” “뭐가?” “심장 빨라졌어요.” 라시엘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 엘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죠?” “글쎄.” “거짓말.” “생각은 안 읽힌다며.” “그래도 심장은 읽히잖아요.” 라시엘이 느릿하게 웃었다. “곤란하군.” “뭐가요?” “이제 거짓말하기 어려워졌어.” “좋은 거 아닌가요?” “내 입장에서는 아닐 수도 있고.” 엘로디아는 이유를 물으려 했다. 그 순간. 쾅! 공방 문이 열렸다. 테오란이었다. 이번에도 노크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얼굴이 더 심각했다. “전하.” 라시엘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뭐지?” 테오란은 손에 오래된 문서를 들고 있었다. “당시 황실 족보의 원본을 찾았습니다.” 라시엘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공식 족보에는 한 명이 삭제되어 있었습니다.” 엘로디아가 숨을 멈췄다. 테오란이 문서를 펼쳤다. 이백 년 전 황제와 황후. 그리고 그 아래. 두 명의 황자. 공식 기록에는 장남 하나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원본에는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제2황자, 레오넬 아르젠. 라시엘이 이름을 읽었다. “레오넬.” “예.” “어떻게 됐지?” 테오란이 다음 기록을 넘겼다. “공식 기록상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므로 사망 기록도 없습니다.” “그럼?” “다만.” 테오란이 한 줄을 가리켰다. 레오넬 아르젠. 혼인도공 르메르가의 보호 아래 이동. 엘로디아의 얼굴이 굳었다. “르메르가?” “예.” 그리고 바로 아래. 짧은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황실의 진짜 계승자를 숨긴다. 엘로디아와 라시엘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테오란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하.” “말해.”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가 낮게 말했다. “이백 년 전 황위를 이은 사람은.” 잠시 정적. “정통 계승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라시엘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엘로디아 역시 숨을 삼켰다. 그 말은 곧. 현재 황실의 정통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공방 바깥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뎅— 뎅— 뎅— 새벽을 알리는 종. 하지만 세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라시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문서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금빛 눈이 엘로디아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심장은 그렇지 않았다. 쿵. 쿵. 쿵. 엘로디아는 선명하게 느꼈다. 라시엘의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만든 건 단순한 혼인잔이 아닌 것 같군.” 엘로디아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럼 뭔데요?” 라시엘의 시선이 그녀에게 깊게 머물렀다. “이 제국의 황제가.” 짧은 침묵. “누구여야 하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물건.” 엘로디아는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황태자비 선발전에 참가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황태자와 연결된 것도. 생명이 묶였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자신의 손이. 황실의 왕좌까지 건드려버렸다는 것.편지를 다 읽고도 엘로디아는 한동안 손을 내리지 못했다.낡은 종이 위에 남은 마지막 두 줄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네가 사랑한 것이 그 사람인지.아니면 그 사람에게 묶인 감각이었는지.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상화 속 에델리아를 보며 억울하다고 생각했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했고, 황실의 음모에 휘말려 반역자가 되었으며, 이름마저 역사에서 지워진 여자.그런데 정작 에델리아가 이백 년 뒤의 자신에게 남긴 것은 복수하라는 말도, 르메르가의 명예를 되찾으라는 부탁도 아니었다.혼인잔을 믿지 말라는 경고였다.더 정확히는.그 잔 때문에 생긴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엘로디아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쿵.심장이 뛰었다.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쿵.조금 더 느리고 묵직한 박동 하나가 겹쳤다.라시엘의 심장.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구분할 수 있었다.문제는.언제부터 이 박동이 익숙해졌는지였다.처음에는 불편했다.남의 심장이 제 몸 안에서 뛰는 것 같았다.잠을 자다가도 라시엘의 심장이 빨라지면 눈을 떴고, 그가 다치면 자신도 아팠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체온이 겹쳤고, 손이 닿으면 어느 쪽의 감각인지 순간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워졌다.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느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해졌다.라시엘이 멀리 있어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확인하면 안심했다.그가 다치면 화가 났다.심장이 빨라지면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그리고 그가 자신을 볼 때마다 박동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는.그것을 모른 척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엘로디아의 손가락이 편지 끝을 조금 세게 눌렀다.‘그러면.’이 감정은.어디까지 자신의 것일까.“엘로디아.”라시엘의 목소리가 들렸다.엘로디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응답해.”“……듣고 있어요.”“그럼 나를 봐.”그제야 엘로디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라시엘은 바로 앞에 있었다.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똑같은 금빛 눈.그런데 이상
엘로디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분명 들었다.착각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엘로디아.이백 년 전의 누군가가.자신의 이름을 불렀다.그것도 우연히 비슷한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이 아니라, 마치 언젠가 자신이 이 자리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전하.”엘로디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방금.”“들었어.”라시엘의 대답은 짧았다.그도 평소와 달랐다.금빛 눈이 가마 안의 반쪽 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은빛과 금빛을 뿜어내던 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져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심장은 그렇지 않았다.쿵.쿵.엘로디아 자신의 박동.그리고 라시엘의 것.그 사이.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세 번째 박동까지.쿵.엘로디아는 본능적으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언니.”마리엘이 불안한 얼굴로 다가왔다.“괜찮아?”“응.”“안 괜찮아 보이는데.”“그냥…….”엘로디아는 말을 멈췄다.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이백 년 전의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의 초상화가 발견됐고, 그 그림의 주인이 지금 자신을 불렀다고?말로 꺼내는 순간 오히려 더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라시엘이 상자 안에 있던 반쪽 잔을 천으로 감쌌다.“초상화부터 보자.”엘로디아가 그를 바라봤다.“지금요?”“지금 아니면 잠들 수 있을 것 같나?”엘로디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아마 못 잘 것이다.분명 밤새 저 목소리만 떠올릴 테니까.“……가요.”그녀가 먼저 창고 밖으로 향했다.라시엘이 뒤를 따랐다.마리엘도 쪼르르 따라오려다 엘로디아가 뒤를 돌아봤다.“마리엘.”“응?”“이 이야기는 아직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나도 알아.”“친구한테도.”“언니.”“너 사교계 친구 많잖아.”마리엘이 억울한 얼굴이 됐다.“아무리 그래도 황실 비밀 같은 걸 말하고 다니지는 않거든?”엘로디아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정말?”“정말!”그때 라시엘이 옆에
출발 당일 아침.엘로디아는 황궁 서쪽 정문 앞에 늘어선 행렬을 보자마자 한동안 말을 잃었다.말 열두 필.마차 세 대.황태자 직속 기사단.수행 시종.사냥 장비.황실 깃발.거기에 의무관과 마도사까지.누가 봐도 황태자가 가을 사냥을 떠나는 행렬이었다.문제는.“이게 조용히 르메르 영지에 가는 사람들 맞아요?”엘로디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곁에 서 있던 테오란이 아주 차분하게 대답했다.“공식적으로는 서부 황실 사냥터로 가는 행렬입니다.”“그러니까요.”엘로디아가 앞을 가리켰다.“너무 화려하잖아요.”“황태자께서 조용히 움직이시면 오히려 더 수상합니다.”“그건 또 그렇네요.”납득하고 싶지 않았지만 맞는 말이었다.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불만이 많군.”엘로디아가 돌아봤다.라시엘이 말을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검은 승마복 위에 짙은 남색 외투를 걸친 모습이었다. 평소 황궁 안에서 보던 정복보다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오히려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문제는 그의 옆구리였다.엘로디아의 시선이 즉시 그쪽으로 내려갔다.라시엘이 알아차렸다.“또?”“왜요?”“아침부터 몇 번째로 상처 보는 거지?”“안 벌어졌나 확인하는 거예요.”“옷 위로?”“걷는 모양 보면 대충 알아요.”라시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내가 지금 불편하게 걸었나?”엘로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그의 걸음걸이를 다시 살폈다.아주 미세하게.정말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른쪽보다 왼쪽 보폭이 짧았다.“아직 당기잖아요.”라시엘의 웃음이 멈췄다.테오란이 옆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제가 같은 말씀을 세 번 드렸을 때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나는 괜찮으니까.”엘로디아가 바로 반박했다.“안 괜찮아요.”“당신한테 통증이 느껴지나?”“아주 조금요.”사실이었다.평소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라시엘이 몸을 크게 움직이거나 옆구리에 힘이 들어가면 엘로디아에게도 희미하게 당기는 감각이 넘어왔다
엘로디아는 그날 밤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이상한 일이었다.황후궁 별채의 침대는 르메르 영지에 있는 제 침대보다 훨씬 넓었고, 매트리스는 몸이 파묻힐 만큼 푹신했다. 두꺼운 커튼을 닫자 달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고, 방 안에는 은은한 라벤더 향까지 퍼져 있었다.잠들기 좋은 조건만 놓고 본다면 완벽했다.그런데 눈을 감을 때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불타는 가마.깨진 검은 혼인잔.이백 년 전 황후 세실리아.그리고.이번 생에는 늦었어요.그럼 다음에는 내가 먼저 찾겠습니다.마지막으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라시엘이었다.난 당신이 나를 선택했으면 좋겠지.운명도 아니고.황태자라는 자리 때문도 아니고.그냥 나라서.“…….”엘로디아는 눈을 번쩍 떴다.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왜 하필 지금 생각나.”혼잣말을 해봤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대신.쿵.다른 심장 하나가 느껴졌다.엘로디아는 그대로 굳었다.아까까지 비교적 느리고 일정했던 라시엘의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져 있었다.쿵.쿵.엘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설마.’그도 깨어 있나?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걸 느껴서?아니다.생각은 공유되지 않는다.아직은.문제는 그 아직은이라는 단어였다.심장 박동.통증.체온.촉각.감정이 몸에 만드는 반응.처음에는 잔을 함께 만졌을 때만 가능했던 것들이 잔이 완성된 뒤에는 접촉하지 않아도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이대로라면 다음은 뭘까.감정 자체?기억?설마 생각까지?엘로디아는 베개를 끌어안았다.“안 돼.”절대로 안 된다.특히 지금은 더더욱.조금 전부터 라시엘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그 순간.쿵쿵.다른 심장이 다시 빨라졌다.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전하?”물론 멀리 떨어져 있으니 대답이 들릴 리 없었다.그런데 기묘하게도 정말 라시엘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주 희미하게.가슴 안쪽 어딘가가 잡아당겨지는 감각.엘로디아는 상체를 일으켰다.‘이건 또 뭐야?’침대 옆
엘로디아는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금 떨어져 계시면 안 될까요?문제는 그 말을 하고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라시엘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왜?”“그냥요.”“그냥은 이유가 아니지.”“지금은 이유로 쳐주세요.”“싫은데.”엘로디아는 정말 저 남자의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했다.물론 폭군처럼 함부로 굴지도 않았고, 권력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문제는 상대가 곤란해한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는 점이었다.특히 그 상대가 자신일 때.엘로디아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라시엘의 눈이 그 움직임을 따라왔다.“봐.”“뭘요?”“피하고 있잖아.”“전하께서 너무 가까우니까요.”“평소에도 이 정도는 가까웠는데.”“평소랑 지금은 다르잖아요.”“뭐가?”엘로디아는 입을 다물었다.차마 말할 수 없었다.조금 전 황후에게 들은 말.감정이 몸에 만드는 반응.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단계.정확히 어디까지 공유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지금처럼 가까이 서 있기만 해도 어느 쪽의 것인지 모를 열기가 자꾸 목덜미와 귀 끝을 타고 올라오는 상황이라면 거리를 두는 게 당연했다.그런데 라시엘은 기다리고 있었다.정말 끝까지 대답을 들으려는 얼굴이었다.“전하.”“응.”“사람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는 게 더 좋은 일도 있어요.”“그건 알아.”“정말요?”“그래.”“그럼 지금이 그런 때예요.”“그런데 당신이 숨기려고 하는 걸 알면 궁금해져.”엘로디아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그건 전하 성격 문제 아닌가요?”“아마도.”너무 쉽게 인정해서 더 할 말이 없었다.그때 황후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봤다.베아트리스 황후는 소파에 기댄 채 꽤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엘로디아는 그제야 깨달았다.‘폐하 계셨지.’라시엘 때문에 잠시 잊어버렸다.그 사실이 더 부끄러웠
엘로디아는 라시엘의 말을 듣고도 몇 초 동안 반응하지 못했다.내가 누구를 고르고 있는지.분명 그렇게 말했다.그것도 셀레스트와 황의, 테오란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농담이라고 넘기기엔 목소리가 너무 낮고 진지했다. 더 난감한 건 그 말을 들은 순간 제 심장이 먼저 배신했다는 사실이었다.쿵.라시엘의 것.쿵.자신의 것.서로 다른 두 심장이 비슷한 속도로 뛰었다.엘로디아는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전하.”“왜.”“그런 말씀은 아무 데서나 하시면 안 돼요.”“여기가 아무 데인가?”“사람이 이렇게 많은데요.”라시엘은 아주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봤다.침대에 누워 있는 셀레스트.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테오란.아무것도 못 들은 척 시선을 내린 황의.문가를 지키는 기사 둘.“많군.”“그걸 이제 아셨어요?”“그래도 다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야.”“그게 문제가 아니라…….”엘로디아는 말끝을 흐렸다.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웠다.황태자가 자신을 신부로 고를 수도 있다고 말한 것?아니면 그 말을 들은 순간 자신도 싫지만은 않았다는 걸 심장이 들켜버린 것?후자가 더 심각했다.‘아니야.’엘로디아는 곧바로 생각을 잘라냈다.놀란 것뿐이다.황태자가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데 심장이 안 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반드시 그런 이유였다.그녀는 괜히 셀레스트의 이불 끝을 정리했다.“아르망 영애께서는 좀 어떠세요?”셀레스트가 입꼬리를 올렸다.“갑자기 제게 관심을 돌리시는 걸 보니 대답하기 곤란하셨나 봐요.”“……몸은 괜찮으신 것 같네요.”“덕분에요.”셀레스트의 얼굴에는 아직 핏기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눈빛은 제법 또렷했다.엘로디아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오늘은 아무것도 함부로 드시면 안 될 것 같아요. 황의가 확인한 것만 드세요.”“네.”“잔도 황실에서 새로 가져오는 건 쓰지 마시고요.”“그럼 뭘로 마시죠?”“제가 하나 만들어드릴게요.”말은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