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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화] 무해한 곰과 풋사과(1)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3 00:02:56

늦가을의 정취가 한양 도성을 붉고 노랗게 물들인 날이었다.

선선하고 청명한 바람이 부는 운종가 저잣거리는 아침부터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과 평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활기차게 북적이고 있었다.

“…….”

그 시끌벅적하고 생동감 넘치는 인파 한가운데.

조선의 모든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섭정, 이헌과 그의 유일한 정실부인 서연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수백 명의 호위 무사나 화려한 가마를 모두 뒤로한 채, 철저하게 신분을 숨긴 미복잠행(微服潛行) 중이었다.

이헌은 평소 입던 금실로 용이 수놓아진 흑색 예복 대신, 질 좋은 명주로 지어진 수수한 군청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서연 역시 무겁고 화려한 가채나 적의 대신, 참하고 소박한 옥색 치마에 머리를 단정히 땋아 올린 평범한 사대부 여인의 행색이었다.

하지만 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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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초…… 입니까.”“예. 맞습니다. 삐뚤빼뚤하지만 난초를 수놓았습니다.”서연이 이헌의 거친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다정하고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난초가 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영원한 안식’이라는 뜻입니다.”이헌의 거대한 어깨가 벼락을 맞은 듯 크게 튀어 올랐다.그의 요동치는 동공이 서연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를 향했다.“영원한…… 안식.”“예. 영원한 안식.”서연의 목소리는 서늘한 밤공기보다 차분하고, 활활 타오르는 화로의 불꽃보다 따스했다.“며칠 전 밤, 당신이 그 끔찍한 악몽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발작했을 때. 제가 당신의 과거를 모두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평생을 얼마나 지독한 죗값과 후회 속에서 피 흘리며 살아왔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부인…….”“매일 밤 눈을 감는 것조차 두려워, 지옥불에 타들어 가는 고통을 홀로 참아내던 당신에게. 이제는 그만 편안한 밤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서연은 이헌의 손에 쥐여진 푸른 향낭을 그의 넓은 가슴, 심장이 쿵쿵 뛰는 왼쪽 가슴 부근으로 천천히 끌어당겨 주었다.“이제 밤마다 그 끔찍한 과거의 망령에 쫓겨 악몽에 시달리지 마십시오.”“…….”“그 죄를 제가 끝내거나 덮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밤마다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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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터에서의 달콤하고 소란스러웠던 미복잠행을 마치고 대군저로 무사히 돌아온 밤.낮 동안 백성들의 활기로 가득했던 도성의 시끄러운 소음은 잦아들고, 안채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고요하고 아스라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외출복을 벗고 편안한 하얀 침의로 갈아입은 이헌은, 방 한가운데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그의 입가에는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바보 같은 미소가 깊게, 그리고 실없이 걸려 있었다.‘참으로 꿈만 같은 하루였다.’자신의 팔짱을 스스럼없이 끼고 엿을 달콤하게 베어 물던 서연.초라한 평상에서 국밥을 허겁지겁 퍼먹는 자신을 보며 풋사과처럼 청아하고 맑게 웃어주던 그 눈부신 얼굴.차태경으로 살던 현대와 이헌으로 살아온 현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너무도 평범하고 완벽한 부부로서의 소박한 일상이었다.“무엇을 그리 허공을 보며 실실 웃고 계십니까.”그때, 방 한편에서 옥빗으로 머리를 단정히 빗고 있던 서연이 나지막이 물었다.“아, 부인. 그저…… 오늘 장터에서의 시간이 참으로 꿈결 같아, 자꾸만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그리도 좋으셨습니까.”“예. 제 평생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부인과 함께 손을 꽉 잡고 인파 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황홀했습니다. 궐의 어좌 따위는 억만금을 주어도 이 기억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이헌이 서연을 향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려 큰 몸을 일으켰다.“서방님. 잠시 이리 와 제 앞에 앉아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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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십니까. 입에 좀 맞으십니까.”“……맛이, 썩 나쁘지 않습니다.”이헌은 사실 음식의 맛 따위는 혀끝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하지만 눈앞에서 국밥을 오물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먹는 서연의 행복한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도 그의 입안에 덩달아 군침이 돌며 맹렬한 식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후루룩, 쩝쩝.조선의 절대 권력자, 편전에서 눈빛 하나로 대신들의 목을 날리며 피바람을 일으키던 그 무자비한 폭군이.지금 낡고 더러운 시장바닥 평상에 쭈그려 앉아, 소매를 거칠게 걷어붙인 채 넓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뚝배기 국밥을 허겁지겁 퍼먹고 있었다.그 덩치 큰 사내가 뜨거운 국물에 혀를 데일까 입을 삐죽 내밀어 후후 불어가며 열중하는 그 모습.“…….”그 소탈하고도 필사적으로 먹어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서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그리고 마침내.“푸흡…… 하하핫.”서연의 입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맑고 청아한 웃음이 툭 터져 나왔다.“……?”이헌이 국밥을 푹푹 퍼먹다 말고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고개를 홱 들었다.그의 뺨에는 밥알 한 톨이 우스꽝스럽게 척 붙어 있었다.“부, 부인? 어찌 그러십니까. 국물이 너무 짜신 겝니까?”“하하, 아, 아닙니다. 그저…… 너무 재밌어서.”서연은 배를 부여잡고 풋사과처럼 풋풋하고 티 없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터뜨렸다.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ldquo

  • 회귀한 대군의 후회   [231화] 무해한 곰과 풋사과(2)

    그 노골적이고 맹목적인 시선에 서연의 뺨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어딜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십니까.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저잣거리의 장신구도 마저 구경하고 싶습니다.”서연이 서둘러 화제를 돌리며 앞장서 걸었다.그녀가 당도한 곳은 나무로 조각한 소박한 장신구와 머리꽂이, 옥가락지 등을 파는 작은 매대였다.“부인. 장신구가 필요하시면 궐의 일류 장인들을 시켜 최고급 옥이나 금으로 된 것을 수백 개라도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이런 투박하고 거친 물건들은 부인의 고결한 자태에 어울리지 않습니다.”이헌이 매대 위의 조잡한 물건들을 몹시 못마땅한 듯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그의 눈에는 오직 최고급의,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것만이 자신의 아내에게 어울린다고 확신했다.“서방님 눈에는 이 장신구들이 그리 보잘것없어 보이십니까?”서연이 옅게 미소 지으며, 매대 한편에 놓인 나뭇결이 곱게 살아있는 매화꽃 모양의 낡은 나무 비녀를 집어 들었다.금박도 옥도 없는,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비녀였다.“저는 이 소박하고 단아한 비녀가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서연이 나무 비녀를 자신의 까만 머리칼에 살짝 대어보며 이헌을 올려다보았다.“서방님께서 제게 장터에서 직접 골라 사주시면, 제게는 그 어떤 화려한 옥비녀나 금비녀보다 훨씬 귀하고 소중한 보물이 될 텐데 말입니다.”“……!!”이헌의 동공이 미친 듯이 팽창했다. 가슴 속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며 터질 것 같았다.‘내가 사주면 귀한 보물이 될 텐데.’그 다정하고 맹목적인 한마디에, 조선의 냉혹한 섭정은 완벽하게 이성을 잃어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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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의 정취가 한양 도성을 붉고 노랗게 물들인 날이었다.선선하고 청명한 바람이 부는 운종가 저잣거리는 아침부터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과 평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활기차게 북적이고 있었다.“…….”그 시끌벅적하고 생동감 넘치는 인파 한가운데.조선의 모든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섭정, 이헌과 그의 유일한 정실부인 서연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두 사람은 수백 명의 호위 무사나 화려한 가마를 모두 뒤로한 채, 철저하게 신분을 숨긴 미복잠행(微服潛行) 중이었다.이헌은 평소 입던 금실로 용이 수놓아진 흑색 예복 대신, 질 좋은 명주로 지어진 수수한 군청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서연 역시 무겁고 화려한 가채나 적의 대신, 참하고 소박한 옥색 치마에 머리를 단정히 땋아 올린 평범한 사대부 여인의 행색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타고난 기품과 수려한 외모는 수수한 옷차림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아,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은근히 끌어당기고 있었다.“부인. 너무 길의 끝으로 걷지 마십시오. 거친 수레바퀴와 부딪히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이헌은 한시도 서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그는 덩치 큰 몸을 잔뜩 수그린 채, 행여나 지나가는 거친 장돌뱅이들의 옷깃이 서연에게 1푼이라도 스칠세라 넓은 어깨로 그녀의 주변을 철통같이, 거의 병적으로 방어하며 걷고 있었다.“이리, 제 등 뒤로 바짝 붙으십시오. 앞장서겠습니다.”“대군. 아니, 서방님.”서연이 이헌의 넓은 소맷자락을 살짝 잡아끌며 작고 다정하게 핀잔을 주었다.“이리 사람을 다 밀치고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다니시면 오히려 더 눈에 띕니다. 저는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잘 걷고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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