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둠이 걷히고 희뿌연 새벽안개가 대군저의 앞마당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살을 에이는 듯한 한겨울의 냉기가 처소의 툇마루를 하얗게 얼려가고 있었다.그 차가운 마루 바닥에 납작 엎드린 거대한 그림자는, 간밤부터 단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이헌이었다.
그의 흑장색 철릭 위로 하얀 서리가 겹겹이 내려앉아 있었다.서연에게 뺨을 맞고 살해 위협을 들은 직후부터, 그는 짐승처럼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밤새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자신이 그녀의 피붙이를 데려온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끔찍한 폭력으로 다가갔는지 깨달은 순간.
이헌은 그 어떠한 변명도 입에 올릴 자격을 상실했다.그저 뼈가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그녀의 분노가 아주 조금이라도 가라앉기만을 애타게 기다릴 뿐이었다.드르륵.
안채의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우욱……! 커헉!”취선당의 굳게 닫힌 병풍 뒤로, 짐승의 멱을 따는 듯한 끔찍한 구토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요강 안으로 쏟아지는 시커먼 핏물과 약재 찌꺼기들.어의가 밀어 넣은 독한 해독제는 비상의 독 기운과 뒤엉켜, 이헌의 내장을 헤집어놓고 있었다.“자가……! 조금만 더 참으시옵소서!”수의가 사색이 된 얼굴로 이헌의 등에 침을 꽂아 넣었다.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이헌의 상반신이 발작하듯 튀어 올랐다가, 이내 침상 위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사흘 밤낮이 이어졌다.내의원의 어의들이 목숨을 걸고 매달린 끝에, 이헌은 간신히 숨이 끊어지는 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다.하지만 몸속 깊숙이 파고든 맹독의 흔적은 그를 무참히 망가뜨려 놓았다.시야는 수시로 뿌옇게 흐려졌고,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극심한 후유증이 그를 덮쳤다.“하아…… 하아…….”침상에 누운 이헌의 숨소리는 얇은 창호지처럼 위태로웠다.그의 핏기 없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힘겹게 열렸다.“흑위대장…….”“예! 자가! 신이 여기 있사옵니다!”문밖에서 밤을 지새우던 흑위대장이 단숨에 뛰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이헌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더듬거리며, 흑위대장의 옷깃을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서연이…… 복권 교서 초안은…….”“안전하옵니다! 자가께서 쓰러지실 때 손에 꼭 쥐고 계시던 문서를, 소인이 피가
그 냉혹하고 치밀한 법적 장치가, 지금 이 조선의 어전 한가운데서 핏빛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붓…….”이헌이 헐떡이며 흑위대장에게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붓을…… 대라.”흑위대장이 황급히 품에서 호신용 단검을 꺼내어, 이헌의 손끝에 묻은 피를 먹물 삼아 찢어진 소매 자락 위에 글자를 겹쳐 쓰도록 받쳐주었다.이헌의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핏물로 젖은 비단 위를 처절하게 긁어 나갔다.[본 섭정의 의식이 끊어지는 즉시, 조선의 병권과 모든 국정의 통제권은 흑위대장에게 임시 위임한다.]단 한 줄의 문장.하지만 그 아래에는, 이헌이 평소 섭정의 수결을 할 때 쓰던 고유의 인장 모양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장이 붉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그 피투성이의 혈서를 본 반대파 대신들의 턱이 기괴하게 벌어졌다.“저,저것이 무슨……!”“섭정의 권한을 호위 무사 따위에게 위임하다니! 저런 억지 문건이 어찌 국법으로 인정받는단 말이오!”좌의정이 핏대를 세우며 반발했다.하지만 이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핏발 선 눈으로 좌의정을 노려보았다.“경국대전…… 형전…….”이헌의 입술 사이로 검은 피가 꿀럭이며 흘러내렸지만, 그의 혓바닥은 멈추지 않았다.“조선의 국법에 명시된…… 병권의 이양은, 호부를 지닌 자의 명백한 수결이 담긴…… 교지나 서신으로 갈음할 수 있다.”
편전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대신들은 고개를 숙인 채 섭정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고, 이헌은 어상에 기대어 서상서 가문의 복권을 공식화하는 조칙을 낭독하려 하고 있었다.“……건원 12년의 역모는 무고였으며, 이에…… 서연의 신분을 회복하고…….”이헌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탁하고 억눌려 있었다.그의 뺨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이마에서는 비 오듯 땀이 쏟아져 내렸다.“섭정 대감? 안색이…….”눈치 빠른 좌의정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려던 찰나였다.“쿨럭……!”이헌의 어깨가 크게 흔들리며 입술 사이로 기침이 튀어나왔다.“……!”그의 손으로 틀어막은 입술 새로, 시커먼 피가 꿀럭거리며 쏟아져 내렸다.툭, 투둑.검붉은 핏방울이 어전의 대리석 바닥을 적시고, 이헌이 쥐고 있던 서상서의 토지 대장 위로 처참하게 번져갔다.“서, 섭정 대감!”“어의! 당장 어의를 들라 하라!”편전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이헌의 거대한 신형이 통나무처럼 기울어지더니,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그의 시야가 급격하게 암전되어 갔다.귀가 멀어지는 듯한 이명 속에서 대신들의 웅성거림과 비명이 아득하게 멀어졌다.‘안 돼…….’바닥에 쓰러진 채로, 이헌은 피 묻은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서연의 복권 교서 초안을 꽉 움켜쥐었다.
햇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좁고 음습한 방.도성 외곽에 자리 잡은 허름한 가옥의 주변에는 높고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겹겹이 쳐져 있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조정을 쥐고 흔들던 우의정 김윤합은, 이제 쥐새끼처럼 이 좁은 방안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쿨럭…… 쿨럭!”김윤합은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핏발 선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전하께서…… 기어이 병권마저 넘기셨다니.”그의 덜덜 떨리는 손에 쥐어진 것은, 궐내에 남아있는 마지막 첩자가 몰래 던져 넣고 간 구겨진 쪽지였다.자신이 평생을 바쳐 키워낸 훈구파의 수족들이 모조리 목이 잘리거나 노비로 끌려갔다.지방의 토호들은 씨가 말랐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국왕 이도마저 밀서가 발각되어 섭정의 발밑에 엎드렸다.“이헌…… 이 미친 악귀 같은 놈…….”우두둑. 김윤합의 이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율법. 논리. 증거.자신이 섭정을 이기기 위해 꺼내 들었던 모든 수는, 그 괴물 같은 대군의 압도적인 법리적 두뇌 앞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법으로는 절대 저놈을 이길 수 없다. 정면으로 맞붙는 순간 뼈도 추리지 못하고 찢어 발겨질 뿐이다.“그렇다면 법을 벗어나면 그만이지.”김윤합의 늙고 주름진 입술 사이로 소름 끼치는 살기가 새어 나왔다.그는 쪽지의 뒷면에 떨리는 손으로 은밀한 지령을 휘갈기기 시작했다.[율법이 네놈을 지켜줄지언정, 독(毒) 앞에서는 그 알량한 혓바닥도 썩어문드러지겠지.]권력을 잃고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의 마지막, 그리고 가장 비열한 발악.김
대궐문을 지키던 수백 명의 금군과 병사들이, 압도적인 권력을 쥐고 나타난 섭정의 거대한 실루엣 앞에 일제히 창을 내리고 무릎을 꿇었다.하지만 조선의 진정한 지배자는 그들의 충성 맹세조차 안중에도 없이, 오직 대군저를 향해 짐승처럼 말채찍을 내리칠 뿐이었다.깊은 밤, 대군저의 안채.수십 명의 흑위대 무사들이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는 비밀 정원의 가장 깊숙한 곳.서연이 머무는 처소 앞에는 겨울의 찬바람만이 쓸쓸하게 불어오고 있었다.저벅, 저벅.거친 숨소리와 함께 이헌의 거대한 신형이 안채의 뜰 안으로 들어섰다.“대군 자가, 납시었사옵…….”“쉿.”호위 무사가 큰 소리로 외치려 하자, 이헌이 황급히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매섭게 노려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맹수가 포효하기 전의 그것처럼 흉흉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기괴할 정도로 처절한 두려움이었다.‘소리를 내지 마라. 아가씨가 놀라실라.’이헌은 무사들을 손짓으로 물린 뒤, 홀로 서연의 처소를 향해 다가갔다.창호지 문 너머로는 희미한 촛불이 흔들릴 뿐, 인기척은 없었다.이헌은 문턱 한 걸음 앞에 멈춰 섰다.그의 억센 손이 가슴팍으로 향했다. 비단 주머니 너머로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아가씨. 드디어 복권 교서의 최종 초안이 완성되었습니다.’이헌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이 마지막 절차만 끝나면, 아가씨는 다시 누구도 함부로 천인이라 부를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 지옥 같은 대군저를 벗어나 당당히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셔도 아무도 아가씨의 신분을 다시 빼앗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조선의 모든 군사를 통제할 수 있는 호부(虎符)와 병권 이양 각서.그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들이 집무실 취선당의 서안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왕의 손발을 자르고, 훈구파의 숨통을 끊어내며, 지방의 거대한 자금줄마저 완벽하게 말려 죽였다.이제 이 조선 땅에서 섭정 이헌의 허락 없이는 군사 한 명 움직일 수 없었고, 엽전 한 닢조차 마음대로 굴러갈 수 없었다.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서늘한 서류 몇 장으로, 그는 명실상부 조선의 모든 권력과 무력을 거머쥔 유일무이한 군주로 올라선 것이다.“…….”하지만 이헌의 시선은 그 대단한 호부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그는 서안의 한가운데, 가장 정갈하게 깔린 눈꽃처럼 하얀 설화지(雪花紙) 한 장만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벼루를 쥐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스극, 스극.먹이 갈리는 서늘한 마찰음만이 텅 빈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조선을 집어삼킨 절대 권력자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해 붓을 집어 들었다.이헌의 핏발 선 눈동자가 허공을 한 번 맴돌더니, 이내 하얀 종이 위로 거침없이, 그러나 한없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사면 및 신원 복권법(赦免 及 伸寃 復權法) 기안.]첫 줄을 써 내려가는 이헌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건원 12년에 발생한 호조 판서 서상서의 역모 사건은, 훈구파와 지방 토호들의 추악한 조작과 무고로 빚어진 희대의 오판이었음을 천명한다.]붓끝에 묻은 짙은 먹물이 종이 위로 스며들며, 십 년간 굳게 닫혀 있던 진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기 시작했다.[이에 율법의 이름으로 서상서 가문에 씌워진 모든 반역의 죄를 영구히 소멸시키고, 삭탈 당한 관직과 품계를 사후 복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