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홍문동에서 보였던 당황함은 온데간데없고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진영숙은 그런 유경원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경원이 보고 좀 배워!”진영숙은 일부러 유영을 자극하려고 비웃음을 날렸다.나긋나긋하고 온순한 유경원과 비교하니 사사건건 자신과 부딪히는 유영이 더 한심하고 추악해 보였다.물론 유영이 과거에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이미 까맣게 잊은 진영숙 여사였다.유영이 뒤돌아서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끼고 사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려는 진영숙을 내버려두고 현관을 나섰다.꼴에 부부라고 어쩜 저렇게 비슷한 말을 하면서 속을 뒤집어 놓는 건지!진영숙은 가슴을 부여잡고 통증을 호소했다.“쟤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그렇게 가르쳤는데 하나도 보고 배운 게 없어!”“이래서 서민은 들이면 안 된다는 거야!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애들과는 비교도 안 되지!”진영숙은 말할수록 짜증만 치밀었다.유영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대문을 나섰다.유영이 돌아간 뒤, 유경원은 진영숙을 위로하느라 진땀을 뺐다.“아줌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어차피 곧 이혼할 건데 그 여자한테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나요?”“그렇긴 하지만 쟤 하는 걸 보면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내가 그동안 그렇게 가르쳤는데 하나도 달라진 게 없잖아.”“그래요. 아줌마는 좋은 마음에 잔소리 좀 한 건데 이유영 씨가 나빴네요.”유경원은 진영숙이 무슨 말을 하든 일단은 치켜세웠다.그제서야 진영숙의 노기가 조금은 사그라들었다.그녀는 만족스러운 눈빛을 하고 유경원을 바라보았다.유영이 외부인과 짜고 세강을 물먹인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외출하고 돌아온 강서희는 유경원과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디저트를 만드는 진영숙을 보며 순간 표정이 표독스럽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언니 왔어? 오기 전에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딸을 본 진영숙의 표정이 조금 더 환해졌다.“경원이 좀 보고 배워.
반면, 강서희는 목에 가시가 찔린 것처럼 불편했다.유경원을 향한 적의가 눈빛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진영숙이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갈무리했다.유영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이한과 엮인 여자는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진심으로 유경원과 잘 지내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한동안 대화가 오간 뒤, 유경원은 집으로 돌아갔다.둘만 남게 되자 강서희는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물었다.“엄마, 경원 언니… 정말 오빠 짝으로 괜찮은 거 맞아? 해외에서 오래 살다 왔는데… 뒷조사는 다 해봤어?”물론 근거 없는 의심은 아니었다.예전에도 진영숙은 며느리감으로 점찍은 사람이 해외 유학 경험이 있다고 하면 뒷조사를 철저하게 진행했다.하지만 유경원은 예외였다.유경원은 출국하기 전부터 강이한을 짝사랑했었고 그가 아니면 시집을 안 간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소홀한 점도 있었다.진영숙은 굳은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조사는 안 했지만 너도 봤잖아. 애가 아주 사근사근하고 품위가 몸에 배었어. 저 정도면 해외에서도 얌전히 공부만 했을 것 같은데?”강서희가 말했다.“그렇긴 하지만 외국이 어떤 곳인지 엄마도 알잖아. 경원 언니야 얌전한 성격이지만 외국 남자들이 좀 개방적이야? 그쪽에서 작정하고 꼬시면 순진한 언니가 안 넘어가고 견디겠어? 엄마도 빨리 손주를 보고 싶잖아. 난 그래도 조사를 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강서희는 진영숙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진영숙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도 맞아. 환경이 사람한테 끼치는 영향도 무시는 못 하지. 나중에 따로 조사를 해봐야겠어.”손주 얘기가 나오자 또 짜증이 치밀었다.그날 유영이 아이의 유골이 담긴 펜던트를 자신의 얼굴에 던질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그때 보였던 강이한의 충격 어린 표정으로 보아 유영은 여태 그 비밀을 강이한에게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진영숙은 유영이 강씨 가문의 아이를 낳게 할 마음이 추호
그런데 이혼할 때가 되자 위자료 운운하는 것도 못마땅했다.왕숙은 강서희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계속해서 말했다.“아까 오셨을 때 비싼 차에서 내리더라고요. 저는 잘 모르지만…포르쉐면 비싼 차 아닌가요?”“포르쉐요?”강서희가 충격에 빠진 얼굴을 하고 다시 물었다.진영숙이 불쾌한 표정을 하고 왕숙에게 물었다.“걔가 포르쉐 끌고 온 거 아줌마가 직접 봤어?”“네. 상태를 보아 새것처럼 보였거든요!”진영숙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강이한이 전에 BMW를 사줬을 때도 못마땅했지만 어디 나가는데 너무 싸구려를 타고 다니면 세강의 체면을 깎는 것 같아서 참았다. 그런데 또 포르쉐를 구매했다니!강서희의 얼굴에도 질투가 가득했다.딸 강서희가 몇 번이고 졸랐는데도 진영숙이 사주지 않았던 게 포르쉐였다.양녀를 귀하게 키우긴 했지만 포르쉐를 흔쾌히 사줄 정도는 아니었다.강서희는 줄곧 갖고 싶었던 차를 유영이 타고 다닌다는 말에 얼굴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진영숙이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강서희도 굳은 얼굴로 말했다.“오빠가 너무 잘해줘서 그래. 둘이 정말 이혼하는 거 맞아?”“어떻게든 하게 만들어야지!”진영숙은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더는 이런 애를 집안에 계속 둘 수는 없어.’한편, 어제 고배를 맛본 강이한은 회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어떻게든 동교 프로젝트 주변 개발권이라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 시설은 다른 회사가 꽉 잡고 있었고 박연준 쪽에서도 개발에 박차를 가할 거라 그들에게 돌아올 기회는 많지 않아 보였다.내년의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고 산하의 부동산 기업들도 먹고살아야 하니 어떻게든 다른 방안을 연구해 내야 했다.어떻게 하면 손실을 메꿀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진영숙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차피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 성격이기에 강이한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요?”“너 걔한테 차 새로 사줬어?”진영숙이 다짜고짜 물었다.자초지종을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진영숙이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반면 강이한은 엄마랑 다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지.”그는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유영 그 계집애가 포르쉐를 끌고 집에 왔다니까?’지금도 아까 했던 진영숙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계좌부터 확인해 보았지만 거금이 빠진 내역은 없었다.그렇다는 건 그녀가 다른 사람의 카드로 차를 구매했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녀에게 한도 없는 신용카드를 선물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지출이면 은행에서 확인 전화가 와야 마땅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고 입출금 내역도 깔끔했다.카드로 산 게 아니라면 그 차는 누구의 것일까?소은지를 제외하면 유영은 청하시에 친구가 없었다.소은지 같은 직장인이 그런 호화 외제차를 구매했을 리는 없을 텐데 대체 누굴까?렌트한 것일까?아니면 해외에 있는 그 남자?점점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면서 그의 주변으로 차가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조형욱은 상사의 호출에 긴장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섰다.“대표님.”“로열 글로벌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어?”“보고서를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조형욱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답했다.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기에 조용히 메일로 보낸 것이었다.강이한이 눈을 확 부릅뜨자 조형욱은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며 식은땀이 났다.강이한은 메일에 접속해서 첨부 파일을 열었다. 안에는 로열 글로벌 회장의 가족 사항이 들어 있었다.자료에 의하면 그는 아내와 사이가 꽤 돈독했으며 부인은 첫째 딸을 출산한 뒤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했다.정국진은 몸 약한 아내를 배려해서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그래서 회사는 점점 몸집이 커졌지만 아들은 없고 의학을 공부하는 딸 한 명이 전부였다.그는 딱히 스캔들에 휘말린 적도 없고 외부 활동에도 딱히 특별한 점이 없었다.그토록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이 왜 유영과 그런 관계를 맺었는지 이해
“네, 다 확인했어요.”남자가 담담하게 말했다.“승소할 수 있을까요?”지금 그녀의 관심사는 이혼 소송에서 이기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남자가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저도 모르게 오싹해지는 아주 매서운 눈빛에 유영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눈빛 하나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변호사라면 믿고 일을 맡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양승호가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승소는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상대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네요.”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유영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낼 정도면 그는 눈치가 참 빠른 사람이었다.강이한은 청하시에서 아무도 이 사건을 맡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유영은 그의 모든 착각을 깨부술 생각이었다.생각해 보면 강이한도 참 악랄한 수단으로 소은지를 소송에서 제외했다.대체 언제부터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열하게 변했을까?유영이 생각에 잠긴 사이, 바깥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잠시 후, 스튜디오 문이 거칠게 열리고 강이한이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조민정도 굳은 표정으로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들어가면 안 된다니까요?”조민정에게도 이 정도로 막무가내인 사람은 처음이었다.로열 글로벌에서 일할 때는 직원들 모두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민정 씨는 일단 나가봐요.”유영이 담담히 말했다.조민정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강이한은 유영과 옆에 있는 양승호를 번갈아보더니 두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반면, 유영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어차피 왔으니까 소개할게. 우리 이혼 소송을 맡아주실 양 변호사님이야.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양 변호사님 통해서 입장을 전달하면 돼.”‘또 이혼 얘기야?’강이한은 치가 떨렸다.어느 정도 압박을 가하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지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그가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어디 로펌이지?
안 그래도 화가 났던 강이한은 그 말을 듣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폭력?그게 그렇게 심각할 정도였나?“내가 왜 손찌검까지 했는지 정말 몰라?”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유영은 날이 선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받아쳤다.“매번 한지음 얘기가 나올 때마다 당신은 나한테 폭력을 썼어. 이유가 뭐였는지 그게 중요해?”무슨 이유였든 폭력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일반인도 다 아는 논리를 그는 왜 자꾸 무시하는 걸까?유영은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서류를 검토했다.진지한 모습이 평소의 그의 모습과 아주 흡사했다.강이한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양승호가 앉았던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다.“일단 그 서류 내려놓고 얘기 좀 해!”그는 더 이상 그녀의 무시를 견디기 어려웠다.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와 함께한 10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직장 일을 해본 적 없었다.대체 뭐가 그녀를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었을까?유영은 마지막 서류에 사인한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용건이 더 남았어?”“내일 있을 할머니 칠순잔치에 나랑 같이 가.”“오늘 아니었어?”“내일이야!”날짜까지 착각한 유영을 보고 강이한은 더 큰 짜증이 몰려왔다.하지만 그 자신조차도 전에는 날짜를 헷갈린 적이 많았기에 그녀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유영이 말했다.“봐서 알겠지만 나 요즘 굉장히 바빠.”강이한의 옆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유영의 일 처리 방식은 그를 많이 닮았다.과거 강이한이 바쁠 때 모든 일에서 예민하게 굴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그러했다.하지만 강이한은 그녀가 이 자리에 앉기까지 그 남자에게서 받은 지원을 생각하면 다시 화가 치밀었다.“그 사람이 당신을 정말 예뻐하나 봐. 그 사람은 당신 결혼한 유부녀인 거 몰라?”그 남자 얘기만 나오면 그는 화가 났다.유영이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 남자가 유영에게 잘해준 것 또한 사실이었다.믿어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다른 남자에게서 그 수많은 것들을 받은 주제에 이 여자는 뭐가 잘났다고 아직도 이렇게 당당한 걸까?유영은 들고 있던 펜으로 책상을 내려찍었다.“내일 칠순잔치에 안 갈 거야. 아직 시간 있을 때 다른 파트너 알아봐. 한지음이 적당하겠네.”한지음 얘기가 나오자 유영의 눈빛도 차갑게 식었다.시력을 잃었다는 것마저 가짜였는데 강이한은 끝까지 그녀를 믿었다. 오히려 그녀의 추악한 본모습을 까발리려는 유영에게 폭력까지 썼다.한지음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얼굴도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둘 사이에 언제부터 이렇게 간극이 심하게 벌어졌는지 하나하나 따지려니 끝이 없었다.그녀를 빤히 노려보던 강이한이 말했다.“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본가에 가는 거야.”경고와 협박이 담긴 명령이었지만 유영은 더 이상 그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여론전은 계속되고 있었다.유영에 대한 온갖 비난글이 인터넷에 폭주했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그녀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가끔 그녀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글도 보이긴 했지만 곧 수많은 악플 공격을 받고 사라졌다.퇴근하려고 밖에 나가자 정국진이 보낸 경호원이 바깥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유영을 취재한다고 찾아왔던 기자들도 전부 그들이 처리했다.한편, 청하병원.강서희는 틈만 나면 한지음의 병실로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유영을 빨리 이 집에서 내쫓을지 의논했다.TV를 틀자 기자들에게 포위된 유영이 묵묵히 차에 오르는 모습과 경호원이 그녀의 주변을 지키는 모습이 나왔다.강서희는 그 모습마저 불만이었다.“저런 인간을 경호하는 경호원이 다 있네.”솔직히 유영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전에는 강이한이 지켜주더니 나중에는 해외에서 만난 남자가 그녀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아직도 이혼을 안 하고 있는 걸까?생각할수록 강서희는 짜증이 치밀었다.한지음은 와인잔을 흔들며 강서희에게 질문을 던졌다.“해외에 있는 그 남자랑은 둘이 진짜 뭐가 있어?”“당연히 뭐가 있으니 저렇게까지 지원
돌변한 한지음의 표정에 강서희가 화들짝 놀랐지만 유영을 처리하겠다는 의지에 다시 표정을 수습했다.그녀는 오랜 시간 그들이 이혼할 날만 바라보며 살아왔고 더 이상 기다리기 싫었다.절대 실패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그 시각, 유영은 순정동으로 돌아왔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은지가 오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주방장에게 부탁해서 간단한 요리도 준비했다.소은지는 그녀의 강아지를 안고 순정동으로 방문했다.해외에 있을 때 가장 그리웠던 것들 중에 반려견도 포함되어 있었다.소은지는 강아지를 안은 채 유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전에는 네 외삼촌이 그냥 벼락부자인 줄 알았는데….”지금은 정국진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바뀐 순간이었다.포르쉐만 해도 조카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순정동을 방문하자 이런 멋진 삼촌이 다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이런 외삼촌이라면 트럭으로 가져다 줘도 환영할 것 같았다.유영은 강아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뭉치 이리 와.”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뭉치와 보낸 시간은 참 힐링되는 시간이었다.뭉치는 소은지네 집에서 대접 받고 지냈는지 전보다 무게가 더 나가는 것 같았다.소은지가 물었다.“외삼촌 결혼하셨어?”“그건 왜?”“아니, 결혼 안 하셨으면 나는 어떠냐 해서.”소은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항상 차분하고 냉정함을 않는 친구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정국진이 얼마나 유영을 총애하는지 알 수 있었다.유영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친구를 흘기며 답했다.“외숙모 건재하시거든? 안 그래도 외삼촌 때문에 강이한이 아버지 뻘 되는 남자 만난다고 나 엄청 욕했단 말이야.”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강이한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하지만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냥 강이한이 멍청한 것 같기도 했다.소은지도 비슷한 상상을 했는지 유영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강이한 그 자식, 그분이 네 외삼촌인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난 전혀 궁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