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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스스로에게 단단해지는 감정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5 06:24:32

기차가 파리 북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을 스치는 바람은 며칠 전보다 훨씬 차가웠다.

도시의 공기는 여전히 바쁘고 무심했지만 그 안에서 유리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숨을 쉬고 있었다.

손에 든 가방은 가벼웠지만, 마음 안엔 무언가가 조금 더 단단히 들어찬 기분이었다.

민우와의 여행이 끝난 지금,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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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04. 다시 열리는 창문 하나

    파리의 아침은 희미한 빛으로 시작되었다.하늘은 짙은 회색을 품고 있었지만, 그 속엔 햇살이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늘진 창가에 앉아 있던 유리는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실내에 머물다 오랜만에 천천히 겉옷을 챙겨 입었다.오늘은 밖으로 나가보자고 마음먹은 날이었다.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그저 냉장고 안의 채소가 다 떨어졌고,따뜻한 바게트 하나쯤 갓 구운 걸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하지만 유리는 알고 있었다.그 단순한 이유 속에 자신이 조심스럽게 세상에 닿아보려는 마음을 담았다는 것을.마르셰 시장은 생각보다 활기찼다.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03. 스스로를 위한 스튜의 온도

    비가 올 듯한 파리의 아침. 유리는 천천히 커튼을 걷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창밖의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고, 돌바닥을 밟는 사람들의 걸음도 어딘지 모르게 조용했다.오랜만의 일상이었다. 그녀는 다시 이곳에 있었다.그동안의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이 아침은 평범했고 또 낯익었다.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그녀의 마음은 예전보다 조용했고,그 조용함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끼려는 결심 때문이었다.냉장고를 열었다. 몇 가지 야채들과 어제 사온 닭고기, 그리고 토마토 페이스트가 눈에 들어왔다.유리는 무언가 오래도록 부드럽게 끓이는 요리를 하고 싶었다.시간이 걸려도 괜찮은 것. 급하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02. 스스로에게 단단해지는 감정

    기차가 파리 북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을 스치는 바람은 며칠 전보다 훨씬 차가웠다.도시의 공기는 여전히 바쁘고 무심했지만 그 안에서 유리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숨을 쉬고 있었다.손에 든 가방은 가벼웠지만, 마음 안엔 무언가가 조금 더 단단히 들어찬 기분이었다.민우와의 여행이 끝난 지금,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고 그 혼자라는 말은 예전처럼 외롭지 않았다.택시를 타지 않고 유리는 천천히 걷기로 했다.몇 정거장쯤 되는 거리를 낯선 이방인의 발걸음처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이 거리, 이 골목, 예전엔 그 모든 곳이 이현과의 기억으로 묶여 있었지만지금은 그마저도 부드럽게 바래진 감정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01. 여행은 계속된다

    작은 마을의 저녁은 생각보다 더 조용하고, 생각보다 더 깊었다.하루 종일 비추던 햇살이 서서히 사그라지며 하늘에는 바다색에 가까운 남청빛이 번져 있었고,민우와 유리는 언덕 아래 작은 길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바람은 차가웠지만, 서로의 어깨 사이엔 서서히 다가온 온기가 있었다.말없이 앉아 있는 시간이 이제는 익숙해졌고,서로의 숨소리만으로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조용한 평화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민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내일이면… 돌아가네요.”유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생각보다 빨리 지나갔어요. 여긴 시간도 공기도… 다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그녀의 말에 민우는 작은 웃음을 보였다.“유리 씨 덕분에 더 조용히 흐른 것 같아요. 그 조용함이… 저한텐 고맙고요.”그 말은 어떤 기대도 없었지만, 유리는 그 안에 조용히 담긴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여전히 유리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대신 그녀가 스스로 다가올 수 있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는 사람이었다.그건 이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이현은 사랑하는 방식이 강했고, 그 강함은 어느 순간 유리를 아프게 했다.하지만 민우는, 그녀가 흔들릴 수 있는 공간을 비워두는 사람이었다.유리는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채 낮게 말했다.“…저, 그동안 계속 생각했어요. 이 여행이 끝나면 다시 혼자일 수도 있다는 거요.”민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처음엔 그게 익숙했어요. 그게 제 자리라고 믿었고…그게 저를 지켜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거든요.”그녀의 말에 민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대신, 그녀가 끝까지 말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렸다.“그런데 민우 씨랑 있는 이 며칠 동안…그 조용함이 꼭 외로움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함께 있어도 숨이 편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요.”유리는 조용히 그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의 눈은 여전히 조용한 물처럼 고요했고,그 고요함 안에서 자신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게 사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00. 어디에도 끌려가지 않는 아침

    파리의 겨울은 늘 그랬듯 차갑고 무표정했다.하지만 이현에게 그 계절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었다.그저 하루를 지나기 위한 시간, 숨을 쉬고 있는 듯하지만 어딘가 부유하는 감정의 무게 속에서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카페의 창 너머로 낮게 깔린 빛이 번졌다.그는 혼자 앉은 채 식지 않은 커피에 손을 대지도 못한 채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날, 한 동료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그의 내면을 처음부터 다시 뒤흔들어 놓았다.“이사님, 들었어요? 그… 조유리 씨. 남프랑스로 여행 갔다던데요.같이 갔던 남자 분이… 꽤 가까워 보였다고 하던데.”가벼운 농담이었고, 아무 의도도 없었지만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99. 어디에도 끌려가지 않는 아침

    아침 햇살은 유난히 부드럽고 따뜻했다.창을 반쯤 연 틈으로 레몬나무 향이 살짝 스며들었고,그 향기만으로도 이곳이 잠시 머물다 가기에 충분히 좋은 곳이라는 것을 유리는 느낄 수 있었다.민우는 이미 일어나 간단한 아침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토스트 위에 버터와 무화과 잼, 한 잔의 오렌지 주스, 그리고 그녀를 위한 따뜻한 홍차 한 잔.유리는 부스스한 머리로 부엌 문가에 서 있다 민우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일어났어요? 조금 전까지 아주 깊이 자던데요.”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오래간만에… 어디에도 끌려가지 않는 아침이었어요.”민우는 무슨 말인지 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8. 요동치는 북소리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7. 무너지는 틈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6. 귀를 세운 마음

    은별의 미소 속엔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회장님이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매일 이곳에 오시는지.”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비서님, 일은 일이고, 제 사생활은 좀 놔두시죠.” 라고 말했다.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들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가 한순간 식당 안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가게 정리 중, 유리는 문을 닫으려다 또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진상님, 진짜… 오늘은 왜 안 가세요.”이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보고 가려고요.”유리는 한숨을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5. 오해의 미소

    “조유리 씨,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신경 많이 쓰세요?”그 말에 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손님 관리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고 받아쳤다.이현은 피식 웃었다.“잘못은 아닌데요, 굳이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잖아요.”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휘젓다 턱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그 와중에도 심장이 자꾸만 빨리 뛰는 게 더 화가 났다.문득 식당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조은별이었다.완벽한 정장 차림, 미소를 얹은 얼굴,그러나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누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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