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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엇갈린 발소리

Autor: 데이지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3-12 21:32:59

복도는 누군가 숨을 참은 채 천천히 걸어갈 때의 그 길고 얇은 긴장처럼 모든 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행동 인력 세 명이 나연을 둘러싼 순간, 공기 자체가 아주 작게 눌리는 듯했다.

그들의 그림자가 나연의 발끝에 닿더니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잡힌’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 들어간 자리인 것처럼.

“움직입니다.”

맨 앞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말투는 사무적이었고, 어디에도 감정이 없었다.

나연은 그 말이 신호가 되어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네. 갈게요.”

그녀는 자기 발로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이 어쩌면 그녀가 가진 마지막 용기였는지도 몰랐다.

강산은 그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유나연 씨.”

그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 속삭임에는 붙잡고 싶은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나연은 잠시 멈춰 강산을 바라봤다.

“…왜요.”

“아직…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가 조심히 말했다.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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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179화. 나 자신에게 가까워진 선택

    아침은 생각보다 조용히 시작되었다.알람이 울리기 전, 민영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밤의 온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몸의 안쪽에서 아주 느리게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불을 걷어내며 민영은 잠시 손을 멈췄다.어젯밤의 감정이 꿈으로 흩어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손바닥에 남아 있는 미묘한 따뜻함이 여전히 현실이라는 걸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창문을 열자 아침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차갑지도, 날카롭지도 않은 공기.밤과 낮의 경계에서 한 번 더 숨을 고르게 만드는 온도였다.민영은 그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숨이 어제보다 조금 깊어졌다.‘괜찮아,’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출근 준비를 하며 거울 앞에 섰을 때, 민영은 자신의 얼굴을 조금 오래 바라봤다.화장을 덜 했고, 머리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그런데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눈매가 아니라, 표정이 아니라 기운의 결이 바뀌어 있었다.회사로 향하는 길은 평소와 같았다.지하철 안의 사람들, 광고판의 문장들,출근 시간 특유의 분주한 공기.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민영은 자신이 조금 덜 흔들린다는 걸 느꼈다.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꺼냈다.메시지는 와 있지 않았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이미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회사 로비에 들어섰을 때, 익숙한 기척이 먼저 다가왔다.“…좋은 아침입니다.”최강이었다.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로비 한쪽에 서 있었다.민영은 그가 일부러 기다렸다는 걸 묻지 않았다.그럴 필요가 없었다.“좋은 아침이에요.”두 사람의 인사는 짧았지만, 그 안에 어제와 오늘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어색함도, 과한 의식도 없었다.엘리베이터에 함께 타며 민영은 자신의 손이 괜히 몸 옆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꼈다.잡고 싶어서도, 피하고 싶어서도 아닌 어디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다는 확신을 찾는 움직임이었다.최강은 그 변화를 눈치챘지만 말하지 않았다.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178화. 잠들지 않는 온기

    문이 닫힌 뒤에도 민영은 바로 불을 켜지 않았다.현관에 남아 있는 공기가 아직 조금 전의 밤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코트를 벗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자심장이 이제야 제 속도를 되찾는 듯 천천히 박동을 고르기 시작했다.손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아까까지 다른 온기가 머물러 있던 자리.이미 식어야 할 시간인데도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민영은 그 감각을 지워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불을 켜고 거실로 들어서자 익숙한 공간이 조용히 맞아주었다.소파, 작은 테이블, 창가에 놓인 화분.모든 것이 어제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 안에 서 있는 자신만은 어제와 같지 않았다.민영은 가방을 내려놓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오늘 하루를 정리해야 할 이유는 많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느껴지는 것들을 그대로 두고 싶었다.휴대폰이 조용히 진동했다.화면을 켜자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잘 도착하셨죠.]문장은 늘 그렇듯 담백했다.하지만 민영은 그 문장 하나에 얼마나 많은 확인과 배려가 담겨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네. 덕분에요.]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에도 민영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곧 또 하나의 진동.[오늘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민영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이렇게 마음을 풀어줄 수 있다는 걸 예전의 자신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이미 충분히 괜찮아요.]그 답장은 상태 보고가 아니라, 솔직한 마음에 가까웠다.민영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열었다.밖의 가로등 불빛이 창문에 반사되어 실내로 스며들고 있었다.그 빛은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았다.딱 지금의 마음 같은 밝기였다.‘내일이 조금 달라도 괜찮아.’그 생각은 희망이라기보다는 허락에 가까웠다.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확신이 매 순간 선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허락.침실로 들어가 천천히 옷을 갈아입으며 민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177화. 속도를 줄여 당신을 기다리는 밤

    카페를 나섰을 때, 밤은 이미 도시의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가로등 불빛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잘게 부서졌고,민영은 그 빛의 조각들이 마치 말이 되지 못한 마음처럼 발끝에 흩어지는 걸 보았다.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걸었다.아까보다 조금 느린 걸음이었다.서두를 이유도, 앞질러 갈 필요도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미 생겨 있었기 때문이다.“…집이 이쪽이세요?”최강이 민영의 보폭에 맞추며 물었다.질문은 방향을 묻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함께 끝까지 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네.”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조금만 더 걸으면요.”그 조금은 거리의 길이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오늘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에 가까웠다.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멈춰 섰다.빨간 불이 시간을 붙잡고 있는 동안,민영은 문득 자신의 심장이 유난히 또렷하게 뛰고 있다는 걸 느꼈다.‘지금이라면’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말하지 않으면 영영 이대로 흘러가 버릴 것 같은 순간이었다.“…대리님.”민영이 다시 불렀다.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더 단단했다.“네.”“아까 같은 방향이라는 말.”민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서 말했다.“그게 저한테는 생각보다 큰 말이었어요.”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지만, 민영은 곧바로 발을 떼지 않았다.최강 역시 같이 멈춰 섰다.“저는”민영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항상 누군가의 기대나 역할에 맞춰 방향을 정해왔던 것 같아요.”그 고백은 조용했지만 오래 쌓인 무게를 담고 있었다.“그래서 같이 간다는 말이”민영은 조심스럽게 웃었다.“누군가에게 맞춰 가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을 선택하는 거라는 걸 오늘에서야 실감했어요.”최강은 그 말을 한 문장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민영의 얼굴에 머물렀고, 그 시선에는 판단도, 재촉도 없었다.“정 사원님.”그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저는 누군가를 끌고 가고 싶지 않습니다.”민영의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176화. 같은 방향의 숨

    퇴근길의 공기는 낮보다 한결 가벼웠다.해가 완전히 기울기 전의 시간은 항상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조심스러운 여백을 남긴다.민영은 그 여백 속에 자신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걸 느꼈다.두 사람은 말없이 건물을 나섰다.손은 여전히 맞닿아 있었지만,잡았다는 의식보다 함께 걷고 있다는 감각이 더 먼저 전해졌다.누가 먼저 발을 내딛지 않아도 보폭은 자연스럽게 맞아갔다.회사 앞 인도는 퇴근 인파로 붐볐지만, 그 소음은 이상하게도 둘을 비껴 가는 듯했다.민영은 주변의 소리를 하나하나 구분하지 않았다.지금은 옆에서 느껴지는 숨의 리듬이 전부였다.“…춥진 않으세요.”최강이 아주 낮게 물었다.말투는 늘 그랬듯 담담했지만, 그 질문에는 확실한 온기가 있었다.“아니요.”민영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이 정도면 괜찮아요.”그 말은 날씨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고, 지금의 상황에 대한 솔직한 응답이기도 했다.최강은 그 의미를 굳이 나누지 않았다.버스 정류장 앞에 섰을 때, 민영은 문득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했다.집으로 향하는 길은 늘 같았지만 오늘은 그 길의 시작점이 조금 달라 보였다.“…오늘은 같이 걸을까요.”민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어디까지요.”“정해놓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그 말에 최강은 짧게 웃었다.그 웃음은 부담을 덜어내는 표정이었다.“그럼 방향만 맞추죠.”두 사람은 버스를 타지 않았다.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보도블록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민영은 걸으면서 자신의 숨이 예전보다 깊어졌다는 걸 느꼈다.말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고, 침묵이 허전하지도 않았다.“…대리님.”민영이 조용히 불렀다.“네.”“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같이 걷는 게 괜찮은지 가끔 헷갈려요.”최강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괜찮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그 말은 명확한 정의는 아니었지만, 민영의 마음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175화. 도망치지 않는 손의 온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기계음이 낮게 울렸다.층수가 바뀌는 동안 민영은 손끝의 감각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의식하는 순간, 지금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지 너무 분명해질 것 같아서였다.최강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자세로 앞을 보고 서 있었다.하지만 민영은 그의 어깨선이 아주 미세하게 긴장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 역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서 있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이 오간 뒤였다.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민영은 한 박자 늦게 발을 내디뎠다.그 작은 지연은 망설임이라기보다 마음을 한 번 더 정리하는 동작에 가까웠다.사무실 복도는 이제 퇴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기척으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의자 밀리는 소리, 컴퓨터를 끄는 손놀림, 가볍게 오가는 인사들. 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민영은 지금 이 순간이 이상할 만큼 조용하게 느껴졌다.“…정 사원님.”최강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래서 복도의 소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네.”“아까 말씀하신 거”그는 “지금 바로 대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민영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그의 표정에는 기다림과 조심스러움이 함께 있었다.“다만”최강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정 사원님이 어디에 서 있는지는 알고 싶습니다.”그 질문은 선택을 요구하지 않았다.그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지만 확인하려는 말이었다.민영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복도 끝의 창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고,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그 빛의 끝에 자신의 발끝이 닿아 있었다.“…저는요.”민영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더 이상 도망치고 있지는 않아요.”그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최강은 그 문장을 조용히 받아들였다.“그럼”그가 아주 낮게 물었다.“조금만 다가가도 될까요.”민영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그 질문은 손을 잡겠다는 말도, 관계를 정하겠다는 말도 아니었지만그 모든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었다.“…네.”민영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174화. 마음이 머무는 자리

    오후의 공기는 오전보다 조금 더 느슨했다.업무 화면 위로 내려앉는 햇빛이 모니터의 글자들을 살짝 흐리게 만들었고,민영은 그 흐릿함이 지금의 마음과 닮았다고 느꼈다.집중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었지만 굳이 완벽하게 몰입하고 싶지는 않았다.지금은 모든 감각이 일의 속도보다 조금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마우스를 쥔 손이 잠시 멈췄다.민영은 숨을 고르듯 어깨를 한 번 내렸다.생각을 정리하려는 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그때 메신저 알림이 조용히 떴다.[강 팀장님: 잠깐 이야기 가능할까요.]문장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맥락이 담겨 있었다.민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잠시 화면을 바라보며 자신의 반응을 하나하나 확인했다.피하고 싶지는 않았다.다만 지금의 대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고,그 예감이 조금 더 솔직해질 용기를 요구하고 있었다.[네. 회의실로 갈게요.]전송 버튼을 누른 뒤, 민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류를 한 장 집어 들었다.손에 쥔 종이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지만,빈손으로 나서는 게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회의실 문을 열자 강산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는 민영을 설명 없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시선에는 기다림과 결정이 함께 담겨 있었다.“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아니에요.”민영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저도 정리해야 할 말이 있었어요.”강산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는 곧바로 말을 잇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제 그리고 오늘 점심까지.”그는 문장을 고르듯 말했다.“정 사원님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민영은 부정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이미 하나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그래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강산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말했다.“제 마음이 아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그 질문은 담담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민영은 손에 쥔 종이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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