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의 모든 챕터: 챕터 211 - 챕터 220

604 챕터

제211화

“그리고 계약 외에도 할 말이 있어.”뚝!...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리자 최수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마음속으로는 수천 번도 더 거절하고 싶었지만 결국 택시를 잡아타고 신혼집으로 향했다.어쨌든 지금 그 집의 주인은 주민혁이었고 게다가 그는 두 배의 금액을 지급했다.무엇과도 맞설 수 있지만 돈과는 맞설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렇게 오래 내놓아도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집이 아니던가.집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연 건 장수미였다.거실 한편에서 주시후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아이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제가 말했죠. 여긴 내 집이라고.”어린아이 특유의 미숙한 억양 속에도 또렷한 배척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주시후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마치 최수빈이 공기라도 된 듯.“왔어?”이층 난간에 서 있던 주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실크 소재의 홈웨어 차림, 느긋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서재로 와. 계약서는 준비돼 있어. 사인하면 바로 계좌로 입금할 거야.”그의 눈빛에는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탁자 위에 놓인 계약서를 집어 들자 주민혁은 가죽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담히 던졌다.“확인해.”그녀는 고개를 숙여 계약서를 훑었다.이 상황이 참 우스웠다.한 번은 최수빈 앞으로 넘어왔던 집은 이제 다시 주민혁의 이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결국 이 모든 건, 박하린과 주시후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복수에 지나지 않았다.최수빈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서명했다.“박하린이 천공 연구원에서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평범한 대화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 속엔 명백한 추궁이 담겨 있었다.“그건 회사 고위진의 결정이에요. 이미 해고된 일에 대해 저한테 따져 묻는 건 상대를 잘못 찾은 거겠죠.”최수빈은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차라리 직접 물어보시죠. 회사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주민혁은 잠시 최수빈을 쳐다봤으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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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수많은 일들.박하린이라면 이미 주민혁에게 충분히 설명했을 터였다.그런데도 그는 굳이 모르는 척, 확답을 쥔 채 질문을 던졌다.어차피 최수빈이 뭐라 말해도 믿어줄 리 없었다.그저 박하린을 위해 대신 화내주고 대신 따져주고 싶을 뿐.신혼집을 다시 사들인 것도 결국 같은 이유였다.주민혁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차갑게 휘어진 눈꼬리, 그 냉랭한 기운이 말해주고 있었다.‘그래. 잘 알고 있네. 넌 중요하지 않아.’그의 세상에서 중요한 건 오직 박하린뿐이었다.최수빈을 향한 질문도 결국은 그녀를 위해 따져 묻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주민혁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한쪽 소매를 아무렇지 않게 걷어 올리고는 느릿하고 무심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최수빈, 감정만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그는 시선을 다시 최수빈에게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모레 보자.”최수빈이 아무리 거절 의사를 밝혀도 주민혁은 여전히 강압적이었기에 그녀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사랑받는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두려움이 없지.’한때는 주민혁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그런데 지금 그는 이렇게 잔인하게 최수빈을 짓밟아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최수빈은 너무 잘 알았다.주민혁은 한번 정한 건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자 냉혹하게 단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지금은 이혼 합의서를 무기로 최수빈을 붙들고 있으니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과는 같을 터였다.굳이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그 뒷모습은 냉담하고도 무심했다.하지만 주민혁의 눈에는 그저 투정 부리다 문 닫고 나가는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한편, 천공 연구원의 프로젝트는 요즘 유난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최수빈은 창가에 앉아 짙은 녹음으로 가득한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오늘따라 햇살은 따사롭고 매미 소리마저 유난히 선명했다.시끄럽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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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오늘 김재환 씨한테서 전화가 왔어.”육민성의 말에 최수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쪽에서 뭐라던가요? 협력에 관한 말이었어요?”“협력은 한다고 했어. 다만, 신세계 그룹이랑 운상 그룹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고 아직 세부 조율이 남아 있어서 확정되면 계약서에 사인할 거야.”정부 쪽에서 직접 나서 대기업과 중소 연구소를 연결해 주는 방식이었다.천공 연구원 같은 신생 연구소에 젊은 아이디어를 더하고 큰 기업들이 뒷받침해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결국 두 그룹과의 협업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최수빈은 들고 있던 자료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허락하셨어요?”“아직.”육민성이 대답했다.“네가 불편해할까 봐 고민 중이야.”최수빈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시선을 창밖에 던질 뿐이었다.아까까지만 해도 햇살이 환했는데 이젠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짓누르고 있었다.곧 폭풍우가 터질 듯한 분위기.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미소 지었다.“선택의 여지가 없죠.”신세계 그룹과 손잡는 건, 마치 파리라도 삼킨 듯 역겹겠지만 정부의 안목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사실 전 그렇게까지 소심하지 않아요.”최수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이혼도 곧 할 거고요. 며칠만 지나서 서류에 도장 찍으면 끝이죠.”그녀는 이미 이 관계를 거쳐 가는 ‘디딤돌’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육민성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네가 신분을 숨길 필요만 없었다면.”최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지나간 성취는 그냥 그걸로 충분해요. 지금은 새로운 제가 있으니까.”육민성은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차갑고 담백한 기운, 그리고 어딘가 기품 있는 그 얼굴, 아름다우면서도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기운.최수빈은 한때 국가 군수 산업에서 손꼽히는 업적을 남긴 소피아였다.아직 그 누구도 뛰어넘지 못한 성과.만약 그때부터 업계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국책 핵심 연구팀의 주축이 되어 있었을지도 몰랐다.최수빈이 말하는 과거를 내려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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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마이바흐 운전석 쪽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려운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내밀었다.“빨리 타세요. 이러다 늦겠습니다.”최수빈의 발걸음이 뚝 멈춰버렸다.차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았지만 최근 감기에 걸려 비를 맞는 게 내키지 않았다.그럼에도 이내 그녀는 차가운 바람과 빗줄기를 뚫고 달려갔고 차가운 습기가 전신을 스며들자 너무 추워졌다.주민혁이 뒷좌석에 앉아 있다는 걸 아는 최수빈은 곧장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빗방울을 털어내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본 려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최수빈이 이렇게 태연히 조수석에 앉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어... 이건...”려운은 본능적으로 백미러를 흘깃 보았다.뒷좌석에 있는 주민혁은 올블랙 차림에 냉철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곧 늦는다면서요? 어서 출발하세요.”최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루라도 빨리 이 자리가 끝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뒤로 와 앉아.”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뒷좌석에서 흘러나왔다.“앞자리도 괜찮은데요.”최수빈의 대답 역시 차가웠지만 남자의 인내심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했던 말은 반복하지 않을게. 결과는 네가 잘 알잖아.”아직 이혼은 끝나지 않았다.만약 주민혁이 아이의 양육권을 무기로 나선다면 지금의 최수빈에겐 대적할 힘이 없었다.불필요한 자존심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그녀는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차 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은 채, 조용히 박씨 저택으로 향했다.비에 젖은 대문 앞, 하얀 천과 흰 등롱이 걸려 있었고 침울한 분위기가 빗줄기와 함께 짙게 내려앉았다.주씨 가문의 차가 연이어 도착했고 진서령과 원금영, 그리고 주나연이 우산을 들고 내렸다.“수빈아!”최수빈을 발견한 원금영은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이리 와서 나랑 같이 들어가자.”오랜만에 본 최수빈이 반가운 듯 목소리엔 애정이 가득했고 당연히 그녀도 순순히 따랐다.적어도 주민혁 곁보다는 할머니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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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박씨 가문은 인원이 적어 손님 접대가 다소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조윤미가 조심스레 말했다.“어르신께서 돌아가시니 박씨 가문은...”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코를 훌쩍이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실례 많았습니다.”박혁준과 원금영의 사이는 꽤 좋았다.하지만 박씨 가문은 인원이 적어 후손도 많지 않고 든든한 남성 일원도 없었다.그래서 장례식에 참석한 대부분은 고인의 오랜 지인들이었다.진서령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주민혁을 바라봤다.“민혁아, 너희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잖아. 네가 하린이 좀 잘 챙겨 줘.”말을 마친 그들은 장례식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모두 박하린을 챙기라며 신경 쓰는 가운데 최수빈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주나연이 등을 곧게 펴고 냉랭한 눈빛으로 최수빈을 쓱 바라봤다.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겉으로는 차분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한눈에 봐도 원금영을 제외한 대부분이 박하린과 주민혁을 이어주려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주민혁은 오늘 이런 상황이 올 걸 알면서도 일부러 최수빈을 데려왔다.결과적으로 최수빈은 이 자리에 있어도 마치 장례식장에 찾아오면 안 되는 사람처럼 보였다.자리를 잡고 조용히 차를 마시던 그는 박하린이 바쁘게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뒷받침하고 있었다.마치 박씨 가문의 사위가 된 듯한 느낌으로 말이다.박하린이 단기간에 이렇게 초췌해진 모습을 보며 주민혁의 마음이 아픈 건 분명했다.주나연은 그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차를 홀짝였다.전에 주민혁이 최수빈 할머니 제사에 갔던 것을 겪고도 그녀는 그저 태연하게 상황을 견뎌냈다.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런 사소한 비교는 훨씬 극명하게 드러났다.주민혁이 지금 보이는 모습과 그때 최수빈의 할머니 제사에서 보인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주나연은 최수빈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여자가 능력이 없으면 남편 마음을 잡을 수도 없지.”“아무리 높은 위치에 서 있어도 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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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최수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를 흘깃 보았다.그 시선이 지나치게 차가워서 주나연은 순간 멍해졌다.예전에는 자기 앞에서 결코 이런 태도가 아니었는데 말이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최수빈이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게.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결국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장례식장의 공기엔 타들어 가는 종이돈과 향냄새가 뒤섞여 숨이 막히듯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최수빈은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주나연이 어떻게 생각하든, 주씨 가문의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이제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원금영은 그녀를 한번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얼른 갔다 와.”그때 진서령이 코웃음을 치며 투덜거렸다.“며느리라고 뭐만 시키면 다 불평불만을 하네. 주씨 가문 며느리라더니 차 심부름 하나 못 받아들이고 말이지.”그녀의 말투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이제 두 마디 했다고 나한테 성질까지 내네?”원금영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버렸다.“며느리는 네 부하처럼 부리려고 들이는 게 아니야. 집안일시키고 싶으면 가정부나 더 고용해.”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날카롭게 덧붙였다.“네가 주씨 가문에 들어왔을 때, 내가 눈치를 줬니?”진서령은 시어머니의 직설적인 말 앞에 입을 꾹 다물었고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결국 조용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최수빈은 더 이상 이런 자리에서 신경 쓸 마음이 없었다.잠시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다 중요한 순간에만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었으니까.밖에서는 어린 남자아이가 리모컨 비행기를 가지고 놀고 있었지만 조종기가 말을 듣지 않는지 비행기는 전혀 날아오르지 않았다.그래서 아이는 축 처진 어깨로 잔뜩 풀이 죽은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이거 방수 기능 없는 모델이네.”최수빈이 다가가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물이 들어가면 회로가 타버려서 당연히 안 날지.”“정말요?”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마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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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얘가 발목을 삐었나 봐요.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오늘은 박씨 가문의 장례식이니 남이준이 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남이준은 다시 한번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아이를 안은 채 발걸음을 돌려 떠났다.밖에는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그제야 최수빈은 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몸을 움츠렸다.‘좀 춥네?’바로 그때, 누군가 최수빈에게 검은 외투를 걸쳐 줬다.옷에 배어 있던 체온이 천천히 피부로 스며들어 온몸은 금세 따뜻해졌다.깜짝 놀란 최수빈이 고개를 돌려보니 냉랭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남자의 표정엔 별다른 감정 기복이 없었고 이내 담담히 말했다.“이제 들어가야지.”상대가 주민혁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최수빈의 표정은 잔뜩 굳어버렸다.그녀는 곧장 외투를 벗어 그의 품에 내던졌다.“필요 없어요.”주민혁은 외투를 받아들며 검은 눈동자로 최수빈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그러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짧게 말했다.“들어가자.”박씨 가문의 장례식에 찾아온 조문객은 적지 않았고 대부분 주씨 가문의 체면을 보고 온 사람들이었다.자리 배치상, 박씨 가문의 직계 친척들은 주석 자리를 차지했고 주씨 가문은 그 옆에 자리를 마련했다.“하린아, 이쪽에 와서 앉아.”진서령이 손짓으로 박하린을 곧장 주민혁 옆에 앉게 했다.원금영은 그 광경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두 집안은 원래 각별했으니 어느 자리에 앉든 상관없는 일이었다.한편 손을 씻고 돌아온 최수빈은 사람들이 둘러앉은 식탁에 자기 자리가 없는 걸 발견했다.사실 굳이 이 식사 자리에 끼고 싶지도 않았으니 그냥 돌아갈 생각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수빈아, 이제 왔니?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라.”하지만 원금영은 그녀를 보자마자 불러 세웠고 결국 최수빈은 할 수 없이 다가가 옆에 앉았다.식사 중,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이 잇따라 술잔을 들고 찾아왔다.주씨 가문은 진정한 권력가 집안, 평소라면 적당히 거절할 수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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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주민혁은 술만 취하면 사람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채 어린애처럼 술주정을 부렸다.최수빈은 더 이상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고 두 손으로 그를 거칠게 밀어냈다.차 안에 그가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미리 알았으면 절대 안 탔을 건데...’주민혁은 잠시 멍해진 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그 틈을 타 최수빈은 몸을 돌려 차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그는 손으로 최수빈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으며 다시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최수빈의 몸무게는 이제 그에게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그래서 그녀가 몸부림치면 칠 수록 주민혁은 팔에 힘을 더 세게 줬다.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가슴팍이 그대로 최수빈의 몸에 밀착되었고 거친 호흡은 차 안을 가득 메웠다.“주민혁 씨!”최수빈은 눈을 치켜뜨며 이를 악물었다.그러나 남자의 차가운 입술이 갑작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짓누르듯 덮쳤다.순간, 최수빈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지금 내가 누군지는 알고 이러나?’“너무 슬퍼하지 마.”낮고 쉰 목소리는 마치 누군가를 위로하듯 웅얼거렸다.하지만 그 위로는 분명 박하린을 향한 것이었다.차창 밖에는 흰 상복과 꽃상여, 바람에 날리는 종이돈이 보였고 슬픔을 알리는 음악 소리와 조문객들의 웅성거림이 얇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그러나 차 안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미쳤어요? 정말 왜 이러세요!”최수빈은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다가 이를 악물고 주민혁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순간, 입안 가득 피 맛이 번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혁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숨결과 체온이 뒤섞이며 방금 전까지의 서늘했던 공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절망감에 가까운 억눌린 숨이 최수빈에게서 새어 나와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그렇게 그녀는 주민혁에게 꽉 붙잡혀 그의 품속에 갇혀버렸다.똑똑!다행히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주민혁의 모든 행동이 순간 멈춰버렸고 희미하게 흔들리던 눈빛도 금세 맑아졌다.그 짧은 틈을 놓칠세라 최수빈은 그를 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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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어차피 민혁 오빠랑은 같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술 마셨을 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일찍 들어가서 쉬게 해요.”박하린의 말에 최수빈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았다.여기선 차도 잡히지 않았다.“그럼 지금 기사님 좀 불러 주세요. 바로 가고 싶어요.”이곳에선 단 1분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박하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민혁 오빠, 내가 기사님 불러올게.”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에 최수빈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미안해.”남자의 목소리는 거칠고 탁했기에 손잡이를 잡은 최수빈은 멈칫했다.“주 대표님, 이런 일... 이번이 처음이 아니죠. 다음부턴 제발 사람 좀 제대로 구분하세요.그리고 저희는 이미 이혼 절차 밟고 있는 거 아시죠? 제발 선은 지켜주세요.”최수빈은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고 눈빛과 표정에 드러난 혐오감은 너무도 분명했다.오늘 최수빈은 주민혁이 보여준 광적이고 절망적인 한 면을 똑똑히 보았다.아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야만 나올 수 있는 집착일 것이다.그 사랑은 박하린을 향한 것이었다.그리고 그가 내놓는 위로는 언제나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봤다.차창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난다.단 30일, 그런데 왜 30일이 이토록 길게 느껴지는 걸까?최수빈은 휴대폰을 켜서 달력을 확인했다.30일 후는 마침 월요일이었다.‘이혼하기 더없이 좋은 날이네.’...최수빈이 떠난 뒤, 장례식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기에 남아 있는 건 가까운 친지들뿐이었다.“수빈이는?”할머니가 떠날 채비를 하면서 물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주민혁이 낮게 대답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갔습니다. 하린이한테 인사하고요.”예의상 인사를 하고 떠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하지만 원금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배웅도 안 해? 여기 계속 있을 게 뭐가 있다고.”“어머니, 하린이가 지금 많이 힘들어합니다. 둘이 워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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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다음 날은 박혁준의 입관식이 있었지만 최수빈은 참석하지 않았다.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그 시간, 그녀는 천공 연구원에서 짧은 회의를 마쳤고 회의가 끝나자 성지연이 따라붙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박하린 씨 해고 건에 대해 사실 직원들 사이에서 말이 많아요. 아무래도...”말끝을 흐렸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업계에서 박하린은 능력을 인정받는 인재였다.그런 사람이 있으면 회사로선 확실히 득이 되는 법.최수빈은 종이컵에 든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성지연을 바라봤다.“그렇게 박하린 씨가 마음에 들면 사직서 쓰고 따라가면 되죠. 박하린 씨가 들어간 회사로 다 같이 옮기면 될 거예요.”단호한 말투에 성지연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사실 최수빈이 막 연구원에 들어왔을 때 성지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겉으로야 화해했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냥 직원들이 이해할 만한 이유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리더로서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다들 마음을 다잡지 않겠어요?”“이유요?”최수빈은 커피를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눈썹을 살짝 올렸다.“눈 달린 사람이라면 다 봤을 겁니다. 박하린 씨는 들어오자마자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면서 동료들을 무시했어요. 맡긴 업무도 죄다 거부하고요. 그런 사람이 저희 회사에 과연 필요할까요?”말투는 꽤 가벼웠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날카로웠기에 성지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물론 저도 알아요. 대표님이 사적인 감정 섞을 분 아닌 것도 잘 알고요.”애써 부드럽게 말했지만 속내는 여전히 복잡했다.겉으로 보기엔 최수빈과 박하린 사이에 개인적 원한은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유 없이 자른다고 보기엔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전 그저 대표님께서 사람들 마음을 못 얻을까 걱정될 뿐이에요.”최수빈은 전날 비를 맞은 탓인지 가벼운 감기에 걸려 있었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 두통을 달래며 담담히 대답했다.“불만 있으면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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