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01 - Chapter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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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화

“같이 들어가자. 마침 고객한테서 표를 받아놨어.”박시온이 말했다.소예지와 박시온은 여섯 시에 울림 체육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고, 정해진 시간에 합류한 두 사람은 함께 관중석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이미 검은 물결처럼 인파가 가득 차 있었고 그 속에서 특정인을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혹시 고이한 씨가 하슬이를 데리고 무대 뒤로 들어간 건 아닐까?”박시온이 묻자 소예지의 머릿속에도 곧바로 같은 생각이 스쳤다. 이용이 이미 백스테이지에 숨어 있다는 게 떠올라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예, 사모님.”“이용 씨, 저 지금 현장에 있어요. 저를 무대 뒤쪽으로 데려가 줄 수 있나요?”“네. 3번 출입구로 오세요. 바로 맞이하겠습니다.”소예지는 서둘러 3번 입구로 향했다. 잠시 뒤, 가슴에 스태프 명찰을 단 이용이 모습을 드러냈다.“이쪽입니다. 사모님.”그러자 박시온도 곧장 뒤를 따랐다. 신분증을 확인한 뒤 간단히 절차를 거쳐 안으로 들어갔고, 이용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대표님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아까 전화를 받았을 때쯤에 막 심유빈 씨의 전용 대기실로 들어가셨더군요.”“그 방으로 데려가요.”소예지는 머릿속에 고하슬의 생각밖에 없었다.‘하슬이가 그 안에 있을까?’백스테이지는 분주했다. 직원들은 각자 손에 무언가를 들고 뛰어다녔고 누가 옆을 스쳐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덕분에 소예지 일행은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그들은 조금 더 걸어 한적한 복도에 다다랐고 이용이 멈춰 서며 말했다.“세 번째 문으로 들어가면 심유빈 씨의 전용 대기실입니다.”소예지의 발걸음은 주저함이 없었다. 딸을 만나겠다는 간절함이 온몸을 이끌었다. 소예지는 문을 두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 돌린 뒤 성급히 안으로 들어섰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쪽 고급스러운 소파 위에 앉아 있던 남녀가 동시에 놀란 눈빛을 보였다.긴 다리를 느긋하게 벌리고 앉아 있던 고이한의 무릎 사이에 심유빈이 웅크린 채 있었다. 누구라도 그 장면을 본다면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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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심유빈이 자리를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문밖에서 다급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 심유빈 씨 여기 계신가요?”소예지가 고개를 돌리니 꽃다발을 안은 젊은 여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방 안 분위기를 느낀 듯 그녀는 서둘러 미소 지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방해했네요.”그 말과 함께 장미꽃을 안은 채 발걸음을 돌려 나갔다.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소예지는 이 꽃의 주인이 누구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이한의 눈빛에는 흔들림조차 없었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오늘 밤은 어머니께서 하슬이를 봐주실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소예지는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네 동생 시켜서 하슬이를 백스테이지로 보내. 지금 하슬이를 데리고 집에 가야겠어.”“공연 끝까지 보고 가게 해.”고이한은 단호했다.“전화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찾을 거야.”소예지는 차갑게 받아치며 마음속으로 단정했다. 고이한은 딸이 심유빈의 연주를 직접 보고 감탄하길 바라는 게 분명했다. 언젠가 심유빈을 새엄마로 받아들이게 만들려는 밑바탕일 터였다.소예지는 더 이상 고이한의 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박시온이 다가와 물었다.“하슬이가 안에 있었어?”“없었어.”짧게 대답한 소예지는 곧장 한 사람을 떠올렸다.‘윤하준.’혹시 윤하준도 이곳에 와 있을지 몰랐다.그 무렵, 무대 준비를 마치던 심유빈은 조금 전 꽃을 전해 준 여성을 떠올리며 기대에 찬 눈길을 보냈다.‘꽃은 혹시 이한 오빠가 보낸 건 아닐까.’“심유빈 씨, 어떤 분이 저희 꽃집에 예약하셔서 이 꽃을 보내드린 겁니다.”직원이 웃으며 설명했다.심유빈의 비서가 꽃을 받아 들었고 심유빈은 곧장 그 위에 놓인 작은 카드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심유빈의 미소는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보낸 사람은 고이한이 아니었다.‘하종호...’“꽃은 잘 보관해 둬.”심유빈은 차분히 말하며 마음을 다잡았고 이제 곧 자신의 무대가 시작될 터였다.한편, 소예지는 박시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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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소예지가 진가영을 향해 말했다.“어머니, 여기 너무 답답해서 하슬이랑 밖에 좀 나갔다가 올게요.”“연주회 곧 시작하잖니.”진가영이 조심스레 붙잡았지만 소예지는 못 들은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고수경이 얼굴을 굳히며 불만을 드러냈다.“언니, 공연 시작하려는데 하슬이를 어디 데리고 가려는 거예요?”“밖에 잠깐 다녀올 거예요.”소예지는 짧게 대답하고는 고하슬을 안아 들고 박시온과 함께 홀을 나갔다.진가영은 속이 답답해 가슴을 두드렸다. 손녀가 이 자리에 남아 음악을 접하며 예술의 분위기를 느끼길 간절히 바랐는데 허망하게도 고하슬은 눈앞에서 떠나버렸다.그때 윤하준이 휴대폰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잠깐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고수경은 순간 멍해졌다.‘왜 소예지가 나가자마자 윤하준도 자리를 뜨는 걸까?’하지만 곧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설마... 아닐 거야. 윤하준 씨는 정말로 전화를 받으러 나간 거겠지. 절대 소예지 때문일 리 없어.’밖의 광장에는 작은 장난감과 선물을 파는 노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소예지는 고하슬을 안고 박시온과 함께 노점 사이를 걸었다. 박시온은 고하슬에게 장난감을 사주었고 고하슬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하슬아, 아줌마 집에 놀러 갈까?”박시온이 물었다.“네. 저 아줌마 집에 가고 싶어요.”고하슬은 박시온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에 금세 마음을 열었다.소예지는 흐뭇하게 웃다가 문득 눈앞에 다가오는 윤하준의 모습을 발견했다. 오늘 윤하준이 여러모로 도와준 게 떠오른 소예지는 박시온에게 말했다.“하슬이 잠깐만 봐줘. 난 하준 씨한테 인사 좀 하고 올게.”박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라 얼굴은 또렷하지 않았지만 윤하준에게서는 여유 있는 재벌가 자제 특유의 기품이 묻어났다.윤하준은 소예지가 다가오자 미소를 지었다.“아까 다친 데 없죠?”“괜찮아요.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소예지는 고마움이 묻어난 눈길을 보냈다.“별말씀을요.”윤하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이제 돌아가실 건가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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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박시온은 소예지와 고하슬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고하슬은 하루 종일 즐겁게 놀고 돌아온 터라 현관으로 뛰어들며 환하게 외쳤다.“아빠, 아빠! 저 왔어요!”소예지는 고이한이 집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2층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고이한이 천천히 내려왔다.“아빠, 오늘 또 예쁜 아줌마를 만났는데 저한테 너무 잘해 주셨어요. 그래서 저도 그 아줌마가 정말 좋아요. 다음에 또 아줌마 집에서 자고 싶어요.”고하슬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을 들은 소예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고하슬의 마음속에서는 그저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면 곧바로 좋은 아줌마가 되는 것이다.아직 너무 어려서 다가오는 사람이 진심인지 아니면 위험한지 분간할 줄 모르니 결국 소예지가 나서서 심유빈 같은 사람으로부터 딸을 지켜야 했다.짧은 연휴가 금세 지나가고 사흘째 되는 날 소예지는 고하슬을 데리고 시댁에서 점심을 함께했지만 오후가 되자 곧바로 집으로 나왔다.진가영은 점점 불만이 쌓여 갔고 손녀와 관련된 일 말고는 며느리와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며칠이 흘러 5월 8일이 되었다.고하슬은 이안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소예지는 고하슬을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고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고하슬이 교문 안으로 들어가자 소예지가 돌아서는데 마침 윤하준의 차가 도착했다.윤하준이 이안을 품에 안아 내려 주었고 이안은 소예지를 보자 환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아줌마!”“이안아, 오랜만이야.”소예지도 반갑게 웃었다.“삼촌, 저 혼자 들어갈게요.”이안은 작은 가방을 메고 홀로 학교로 뛰어 들어갔다.윤하준은 조카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소예지 쪽으로 옮겼다.“학교 가시는 길이에요?”소예지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도 수업 들으러 가야 해요.”소예지가 차에 올라타 떠난 뒤, 윤하준은 불현듯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적였다.그때 지난번 주웠던 머리끈이 손에 잡혔다. 하지만 순간 바람이 불어와 끈은 손가락 사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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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소예지는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안채린, 네가 나를 못마땅해하는 건 알겠지만 말은 똑바로 해. 나랑 준석 선배 사이는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한 업무 관계일 뿐이야. 네가 말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말을 끝낸 소예지는 바로 자리를 뜨려 했지만 안채린은 물러서지 않았다.“너도 딸을 키우는 엄마라면서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지 않아? 너희 남편은 네가 직장에서 동료한테 이토록 들이대는 걸 알면 뭐라고 하겠어?”소예지는 차갑게 웃으며 돌아섰다.“내 일에 참견하지 마.”안채린은 표정이 일그러졌다.“소예지, 나도 네 체면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네가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건 알아서 하든지 상관없어. 하지만 준석 선배의 명성까지 더럽히지는 마. 애 엄마가 그렇게 행동하다니...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소예지는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나랑 준석 선배는 아무 문제 없어. 괜한 상상 좀 그만해.”“내가 괜히 상상하는 걸까? 아니면 네가 해놓고 인정할 용기가 없는 걸까? 계속 얽혀 다니면 네 남편한테 사실대로 말할 거야.”안채린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협박이 담겨 있었다.이혼을 앞둔 소예지는 불필요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에 단호하게 경고했다.“안채린, 네 일이나 잘 챙겨. 괜히 남의 가정에 끼어들지 말고.”안채린은 오히려 비웃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겁먹은 거야? 그럼 준석 선배한테서 멀리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 정말 내가 말한 대로 해줄 테니까.”소예지는 더는 쓸데없는 논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 떠났다.그 뒷모습을 보며 안채린은 오히려 스스로 이겼다고 착각했고 속으로 단정했다.‘결혼 생활도 불행하니까 저러는 거겠지. 남편도 별 볼 일 없을 거야. 그렇다고 해서 준석 선배한테 손을 대게 놔둘 순 없어.’시간은 어느새 금요일이 되었다.고수경은 소예지에게 문자를 보내 고하슬을 데리러 오겠다고 알렸다. 그날 고수경은 학교 앞에 미리 나와 있었고 마음속에는 또 한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이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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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두 아이는 금세 다시 장난을 치며 즐겁게 놀았으나 고수경의 마음속은 점점 복잡해졌다.‘하준 오빠 차에 왜 여자 머리끈이 있었던 걸까? 설마 여자 친구가 생긴 건 아니겠지?’그런 생각이 스치자 고수경의 숨이 순간 막혔다. 몰래 옆모습을 바라보니 차창 너머로 보이는 윤하준의 얼굴은 여전히 단정하고 매력적이었다. 고수경은 괜스레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대체 어떤 여자가 오빠의 마음을 끌어당긴 거지?’잠시 뒤 장난감 가게 안, 두 아이는 신나게 진열대를 오가며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윤하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고수경에게 한마디 남기고 매장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기회를 놓치지 않은 고수경은 이안을 곁으로 끌어당기며 웃으며 물었다.“이안아, 아줌마한테 살짝 말해줄래? 요즘 너희 삼촌이 어떤 아줌마 만나고 있는 거 없어?”이안은 동그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저었다.“없어요.”“그럼 혹시 삼촌 집에 놀러 오는 아줌마는?”“없다니까요.”고수경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럼 아직은 확실한 사이가 아니라는 거네... 나한테도 기회가 있어.’저녁 다섯 시쯤, 고수경은 고하슬을 데리고 고씨 저택으로 돌아왔다. 소예지도 곧 도착해 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했다. 하지만 진가영은 소예지가 고하슬을 데려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고하슬 역시 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어 했기에 소예지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소예지는 자신이 딸의 친족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훗날 양육권이 자신에게 주어진다 해도 고하슬과 고씨 가문과의 왕래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소예지가 경계해야 할 사람은 오직 심유빈 같은 불청객일 뿐이었다.그 시각, 2층 방 안.고수경과 심유빈은 윤하준 차에서 발견된 머리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아마도 그냥 비서가 흘린 거 아닐까?”심유빈이 추측했다.“그런데... 오빠 표정이 그리 단순해 보이진 않았어. 마치 그 머리끈이 굉장히 소중한 물건인 것처럼 말이야.”고수경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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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강준석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갈등이 가득했다.소예지는 눈을 깜박이며 오히려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강준석을 바라보았다.강준석은 꽉 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풀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지야, 지금 아니라 차라리 나중에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하지만 소예지는 이미 궁금증이 극도로 높아진 상태였다.“준석 선배, 우리 사이에 감출 게 뭐가 있어? 그냥 말해 줘. 저는 이 연구가 최대한 빨리 시작되길 원해.”강준석은 한참 소예지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만약 이 연구가 결국 심유빈을 살리기 위한 거라면... 그래도 참여하고 싶어?”소예지는 순간 마음이 불편했다. 심유빈을 돕고 싶지 않았으나 이 연구는 한 사람만이 아니라 수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희망이었다. 무엇보다 평생 품어온 소망인 백혈병을 정복하고 싶다는 꿈이 걸려 있었다.소예지는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연구를 포기할 순 없어. 내 감정은 철저히 다스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강준석은 놀란 듯 잠시 말을 잃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밥 다 먹고 이따가 내 연구실로 와. 보여줄 게 있어.”오후 한 시 반, 소예지는 강준석의 연구실로 들어섰다. 강준석은 문을 닫으며 비밀스럽게 서류함을 열었고 맨 아래 서랍에서 꺼낸 것은 한 뭉치의 서류였다.“이거 좀 봐봐.”소예지가 서류를 받아서 펼치자 곧장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골수 기증 계약서였다. 서류의 첫 장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이건... 우리 엄마 이름이잖아?”목소리는 떨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소예지는 도무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강준석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어머니가 기증자였어. 우리가 연구하는 건 바로 그분의 샘플이야.”소예지는 눈물이 터져 나왔고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엄마가... 언제 그런 걸 했던 거지? 왜 난 몰랐던 거야?”강준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낮게 물었다.“누가 이 계약서를 나한테 가져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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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강준석은 계약서를 펼쳐 보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아버지가 직접 서명했어. 그래서 고이한이 이 샘플을 합법적으로 가지고 있는 거야.”소예지는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의 서명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왜... 아버지가 왜 이런 선택을 하신 거지? 고이한이 대체 무슨 방법으로 아버지를 움직였던 걸까? 혹시 협박이라도 한 걸까?’소예지는 눈을 감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결혼 문제로 고이한과 여러 차례 마주 앉았던 일이 떠올랐다.‘설마... 그때의 조건 중 하나가 이것이었던 건가?’분노와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 소예지는 계약서를 내려놓고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확인해야겠어. 지금 당장 고이한에게 가서 직접 물어볼 거야. 내 허락도 없이 엄마의 샘플을 넘겼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예지야.”강준석은 차갑게 문을 닫고 나가버리는 소예지를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이 결국 현실이 된 것이다.소예지는 곧장 가방을 챙겨 주차장으로 향했고 차에 올라탄 그녀는 악착같이 액셀을 밟으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도심의 한복판으로 달려갔다.도착한 곳은 고신 그룹 본사 빌딩이었다.빌딩 로비에 들어선 소예지는 곧장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예리한 눈을 가진 안내 데스크 직원이 그녀를 막아섰다.“실례합니다. 고객님, 누구를 찾으시는지 여쭤도 될까요?”“고신 그룹 대표, 고이한을 찾으러 왔어요.”소예지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혹시 예약은 하셨나요?”“난 고아한의 아내예요. 예약 따위는 필요 없어요.”“고... 사모님이라고요?”직원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단정하고 기품 있는 외모이긴 했지만 최근 소문으로만 듣던 진짜 아내라는 사실을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얼마 전 있었던 스토커 사건 이후, 회사는 관련 경호 지침을 엄격히 강화한 상태였다. 안내 직원은 매뉴얼에 따라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사전 예약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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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김경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예지는 이미 회의실 문을 밀어젖혔다.쾅!양쪽으로 열리는 문소리에 회의실 안이 술렁였다. 의자에 앉아 있던 임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았고 맨 위 자리에 앉아 있던 고이한 역시 놀란 눈으로 소예지를 바라보았다.“나와. 지금 당장 할 말이 있어.”소예지의 분노 섞인 눈빛이 고이한을 정면으로 겨누자 임원들은 순간 굳어졌다.‘대체 이 여자는 누구길래 감히 고이한에게 저런 말투를 쓰는 걸까?’재무부서 부장이 제일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입니까? 누가 함부로 들어오래요?”이어 한 중년 남성도 거들었다.“정말 예의가 없군요. 회의실에 마음대로 들어오다니.”소예지는 그들을 차갑게 쓸어보며 단호히 말했다.“난 고이한의 아내예요. 남편한테 급히 물을 게 있어요.”그 한마디에 회의실은 얼어붙었다. 재무부장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더니 곧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대표님, 저희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그러고는 소예지에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사모님, 실례했습니다.”조금 전 큰소리를 치던 다른 임원도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사모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분위기를 눈치챈 사람들은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지금 두 사람 사이는 갈등에 도사리고 있었고 괜히 남아 있다간 불똥만 튈 게 분명했다.고이한은 미간을 좁히며 낮게 물었다.“얘기는 집에 가서도 할 수 있잖아. 왜 여기서 이러는 거야?”소예지는 주먹으로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고이한, 네가 왜 어머니의 샘플을 가지고 있는 거야? 아버지한테서 어떻게 받아낸 건데? 지금 당장 설명해.”고이한은 짐작했던 듯 눈빛이 차가워졌고 소예지은 아마도 강준석에게서 이 사실을 들었겠다고 생각했다..“강준석이 입을 열었군.”고이한의 짧은 대꾸에는 불만이 짙게 묻어 있었고 소예지의 온몸이 분노로 달아올랐다.“만약 강준석이 아니었다면 넌 평생 숨길 생각이었어? 고이한,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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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고 대표님, 사모님은 이미 제 연구팀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니 서예지 씨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강준석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흔들림이 없었고 그러자 고이한의 발걸음이 멈추며 눈매가 한층 매서워졌다.“강 박사님, 제가 10조를 투자한 건 사적인 인연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실험실에 들이려는 게 아닙니다.”“사모님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대표님, 제 말을 조금만 들어주신다면...”“하...”고이한의 입꼬리가 비웃듯 휘어졌다.“강 박사님이 저보다 제 아내를 더 잘 안다는 건가요?”“대표님이 조금만 시간을 내서 직접 살펴보신다면 분명히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강 박사님이 가르칠 필요 없어요. 분명히 말하는데... 소예지는 이번 연구 프로젝트에서 배제하세요.”고이한의 말은 냉철했고 강준석은 짧게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그건 제 권한 밖입니다. 이 연구는 이 박사님이 직접 소예지 씨를 초대한 겁니다.”그 말에 고이한의 시선이 가늘게 좁혀졌다. 고이한은 잘 알고 있었다. 장인어른인 소영욱은 이성열 박사와 오랜 벗이었고 소예지가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 인연 덕분일 터였다.“대표님, 사모님은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입니다. 연구에...”“강 박사님, 연구에만 집중하시오. 남의 아내에게 과도하게 신경 쓰다간 박사님의 명성에 금이 갈 수도 있어요.”차갑게 경고를 남긴 고이한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회의실 안, 소예지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겨우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조금 전 고이한의 태도는 소예지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더 이상 어떤 감정적 기대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문을 나서자 김경환이 다가왔다.“사모님,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소예지는 가볍게 대꾸하고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이렇게 자존심을 버리고 붙잡을 바에는 차라리 실험실에서 다른 기증자를 찾는 게 낫지. 그게 훨씬 설득력이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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