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631 - 챕터 1640

1726 챕터

제1631화

고이한은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지었다.소예지는 워낙 업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라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오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당장이라도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고이한은 애써 참았다.적어도 소예지의 인간관계와 사교 활동만큼은 존중해 주고 싶었다.발코니에서는 소예지와 장요한이 제법 이야기가 잘 통하는 듯했다.장요한은 머리 회전이 빠른 데다 자기만의 견해도 뚜렷했다. 소예지의 연구 이론도 미리 공부해 온 터라 두 사람의 대화는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소 박사님, 혹시 시간 되실 때 저희 연구소에 오셔서 학술 교류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연구팀 모두 소 박사님의 지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소예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S시 연구소는 관련 분야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곳이었다.잠시 후 그녀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적당한 시간이 나면 저도 기꺼이 참여할게요.”“정말 잘됐네요.”장요한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그럼 혹시 연락처를 교환해도 될까요?”소예지도 휴대폰을 꺼내 장요한과 번호를 교환했다.바로 그때 절묘한 타이밍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지야.”소예지가 고개를 들었다.어느새 고이한이 바로 곁까지 다가와 있었다.고이한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미소 지었다.“이분은?”말투는 더없이 정중했지만 행동에서는 은근한 소유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소예지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소개했다.“이쪽은 S시 연구소 연구원인 장요한 씨야.”장요한 역시 고이한을 무척 존경하는 듯했다.“고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이어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방금 소 박사님과 전문 분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희 연구소를 대표해 시간 되실 때 학술 교류를 해 주십사 정식으로 초대드린 참입니다.”말을 마친 장요한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그럼 두 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장요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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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2화

곧이어 안으로 들어오던 기자 몇 명까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이들은 이 회장이 초대한 기자들이었다. 잠시 뒤 이 회장 부부를 인터뷰할 예정이었는데 들어오자마자 재계의 거물인 고이한과 그의 전처 소예지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몰려드는 기자들을 본 소예지의 몸이 순간 굳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어깨에 걸친 고이한의 재킷을 단단히 여몄다.거의 동시에 고이한이 소예지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그는 커다란 체구로 그녀를 완전히 가린 채 거침없이 들이대는 카메라와 기자들을 막아섰다.“죄송하지만 인터뷰는 어렵습니다.”고이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날카로운 시선이 기자들을 훑었다.평소라면 주변에 늘 경호원들이 있었고 김경환도 곁을 지키고 있었다. 기자들을 막는 일쯤은 고이한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웠다.한 여자 기자가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소 박사님! 고 대표님과 재결합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다른 기자도 곧바로 질문을 쏟아냈다.“소 박사님의 투자금 대부분을 고 대표님 측에서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두 분이 재결합하신다면 혹시 경제적인 이유도 있는 겁니까?”이번에는 한 남자 기자가 노골적으로 악의가 담긴 질문을 던졌다.“고 대표님! 심유빈 씨와의 과거에 대해서도 답변해 주실 수 있습니까?”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에 소예지는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그녀가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순간 고이한의 서늘한 시선이 마지막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꽂혔다.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비켜.”목소리는 크지 않았다.하지만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강한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겁도 없이 달려들던 기자들이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차는 이미 호텔 직원이 로비 입구까지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은 기자 한 명이 소예지의 뒤쪽으로 돌아가며 끈질기게 질문했다.“소 박사님!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고이한은 긴 팔을 뻗어 소예지를 자신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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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3화

소예지는 정말 몸이 좋지 않았다.아랫배가 묵직하게 당기며 아팠다. 최근 스트레스가 심했던 탓인지 호르몬 균형도 흐트러진 듯했고 생리 주기도 들쭉날쭉했다.차가 출발한 지 몇 분쯤 지났을 때 고이한이 침묵을 깼다.“아까 기자들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소예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작게 대답했다.“응.”고이한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잠시 망설이던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먼저 입을 열었다.“심유빈 일에 대해 아직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있으면 다 말해 줄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게.”소예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더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미안해. 이유가 뭐였든 그때 내가 한 행동이 당신한테 상처를 줬어. 나 때문에 밖에서 온갖 소리까지 들어야 했고 당신을 힘들게 했지.”“내가 용서해 달라고 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알아. 앞으로 평생 갚으면서 살게.”그의 말에는 자신을 변명하려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과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온전히 인정하고 있었다.그제야 소예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앞으로 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마.”고이한의 눈에 짙은 후회가 스쳤다.“그래. 이제 안 할게.”차는 주택 단지 안으로 들어가 소예지의 집 앞에 멈춰 섰다.고이한은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다. 이어 손을 내밀어 소예지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소예지는 몸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그에게 건넸다.“당신도 돌아가서 쉬어. 나 챙길 필요 없어.”고이한은 재킷을 받아 들고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머리 위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래.”집으로 들어온 소예지는 뜨거운 물로 씻은 뒤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그 뒤로는 다시 아래층에 내려가지 않았다.그런데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 아래층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주머니가 다시 왔나?’방을 나온 소예지는 계단 모퉁이에 서서 오픈형 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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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4화

“고마워.”소예지는 나직하게 말한 뒤 자리에 앉았다.따뜻한 한방차가 담긴 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고이한도 맞은편에 앉았다.아직 돌아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그저 말없이 소예지를 바라볼 뿐이었다.그 눈빛은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처럼 부드러웠다.따뜻한 차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몸도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아랫배는 아직 아파?”고이한이 걱정스레 물었다.소예지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소예지는 눈을 내리깔았다.“응.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았어.”그 뒤로 소예지는 말없이 차를 반쯤 마셨다.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더 가져오려던 순간 고이한이 먼저 잔을 집어 들었다.그는 주방으로 가서 차를 더 따라온 뒤 소예지 앞에 내려놓았다.소예지는 원래 이런 한방차를 좋아하는 편이라 어느새 한 잔을 깨끗이 비웠다.그때 맞은편에서 줄곧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그런데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얼굴이 아니었다.소예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그녀는 눈을 흘기며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봤다.“어딜 보는 거야?”그제야 소예지는 씻고 나온 뒤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얇은 면 잠옷만 입고 있어 가슴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고이한은 주먹을 입가에 대고 가볍게 헛기침했다.“일부러 본 건 아니야.”그렇게 말하면서도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오히려 그의 눈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소예지는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한때는 누구보다 가까운 부부였다. 그때라면 이런 시선조차 부부 사이의 소소한 장난으로 넘겼을 것이다.하지만 이혼한 지도 벌써 삼 년이었다.한때 아무렇지 않았던 일도 이제는 괜스레 낯설고 민망하게 느껴졌다.소예지는 잔을 내려놓았다.“다 마셨어. 나 올라가서 잘게. 당신도 일찍 가서 자.”어젯밤 고이한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밤을 꼬박 새웠다.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터였다.고이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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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5화

소예지는 한동안 뭐라고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괜히 최현숙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걱정됐다.“할머니. 이제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제가 모시고 나갈게요.”소예지가 말했다.최현숙은 숨을 한번 크게 내쉬더니 조금 지친 듯 소파에 앉았다.“너 먼저 가거라. 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갈게.”소예지는 곁에 더 있어 드리고 싶었지만 최현숙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가봐. 나는 내 보물들 조금만 더 보고 갈 테니.”소예지는 더 머물지 않고 수장고를 나왔다.두꺼운 나무문을 살며시 닫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불안감이 남았다.‘아까 할머니 말씀... 왜 꼭 유언처럼 들렸지?’‘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식당으로 가보니 고이한과 진가영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고하슬은 옆에서 놀고 있었다.고이한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할머니는 아직 안 오셔?”“수장고에 조금 더 있고 싶다고 하셔서 나 먼저 나왔어.”소예지가 대답했다.그러다 문득 방금 전 최현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잠시 후 진가영이 자리를 비우자 소예지는 고이한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좀 마음에 걸려.”“무슨 말씀?”고이한이 그녀를 바라봤다.소예지는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자는 눈짓을 보냈다.두 사람은 정원으로 나갔다.소예지가 최현숙과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자 고이한의 표정도 무거워졌다.“내가 가서 볼게.”소예지도 그를 따라 다시 수장고로 향했다.최현숙은 여전히 오래된 소파에 앉아 있었다.고개를 살짝 젖힌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방 안 가득한 소장품을 바라보고 있었다.기척을 느낀 최현숙이 고개를 돌렸다.“밥 먹을 시간이냐? 지금 갈게.”최현숙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런데 평소보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렸다.일어서던 순간 몸이 살짝 휘청이기까지 했다.고이한이 얼른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할머니. 천천히 일어나세요.”“괜찮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좀 저린 것뿐이야.”최현숙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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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6화

한밤중이었다.잠결에 어렴풋이 차가 나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소예지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다시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세수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고하슬이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뒤이어 준비를 마치고 내려오던 소예지는 고하슬과 양희순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할머니. 아빠 어디 가셨어요? 왜 집에 안 계세요?”“아빠가 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나가셨어.”소예지가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물었다.“아침 일찍 나간 거예요?”양희순이 뒤를 돌아봤다.“아니에요. 대표님은 어젯밤 한밤중에 나가셨어요. 아마 두 시쯤이었을 거예요. 제가 잠깐 깼을 때 시간을 봤거든요.”소예지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그럼 어젯밤에 들은 게 꿈이 아니었어? 정말 한밤중에 나간 거야?’“하슬아. 오늘은 엄마가 학교 데려다줄게. 가자.”고하슬은 고개를 끄덕이고 엄마를 따라 집을 나섰다.집에서 학교까지는 차로 불과 오 분 거리였다.소예지는 고하슬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그대로 연구소로 향하려 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고이한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소예지는 차를 출발시키기 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하슬이 데려다줬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고이한의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방금 데려다줬어. 그런데 당신 어젯밤에 무슨 급한 일 있었어?”고이한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할머니가 어젯밤에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끼셨어. 지금 병원에 모셔 와서 검사받고 있어.”순간 소예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어느 병원이야? 나 지금 바로 갈게.”“조은병원이야. 너무 서두르지 말고 운전 조심해.”“알았어.”전화를 끊은 소예지는 곧바로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내내 어제 최현숙이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설마 할머니가 정말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셨던 건가?’불길한 생각을 떨쳐 내려 해도 마음속 불안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소예지가 병원 VIP 병동에 도착했을 때 고이한은 복도에서 담당 의사와 낮은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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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7화

잠시 뒤 최현숙이 천천히 눈을 떴다.침대 곁에 손자와 손녀 그리고 소예지까지 있는 모습을 본 최현숙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다들 왔구나. 난 괜찮다. 그냥 늙어서... 이제 예전 같지가 않네.”“할머니...”고수경은 침대 곁에 쪼그려 앉아 최현숙의 손을 꼭 잡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그 모습을 보던 소예지의 눈가도 저절로 젖어 들었다.고이한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최현숙의 야윈 손을 잡았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할머니. 의사 말 잘 듣고 편하게 쉬세요. 괜찮아지실 거예요.”“바보 같은 녀석.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야.”오히려 최현숙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이한을 달랬다.그러고는 소예지와 진가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됐으니 다들 그렇게 울상 짓지 마라.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하지만 최현숙이 담담하게 받아들일수록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소예지가 앞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 의사 선생님이 잘 쉬면서 치료받으시면 금방 퇴원하실 수 있다고 했어요.”“그래. 너희 말 들으마.”최현숙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고이한과 소예지를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이제 나도 늙었으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너... 콜록... 너랑 예지다.”고이한이 소예지를 바라봤다.소예지도 저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고이한이 나직하게 말했다.“할머니. 저희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는 몸만 잘 돌보세요.”최현숙은 다시 소예지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예지야. 너도 곁에 누군가가 필요해. 하슬이도 아직 어리고. 설령... 이한이와 다시 함께하지 않더라도 우리 가족은 언제든 네가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야.”소예지는 말없이 최현숙의 이야기를 들었다.목이 꽉 메어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할머니. 말씀 잘 들을게요.”고이한의 시선이 다시 소예지에게 향했다.그 눈빛이 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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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8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가 앓던 유전병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남긴 책임을 홀로 짊어져야 했던 삶과 여동생과 딸에게도 그 유전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까지. 거기에 일에서 오는 엄청난 압박도 있었다.고이한이 짊어지고 살아온 것은 너무나 많았다.그는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 했고 매 순간 계산하고 판단하며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옵션 투자라는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충분한 돈을 벌어야 했다.이제는 최현숙의 병까지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고이한은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강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만 보여 왔다.하지만 지금 소예지의 어깨에 기대 잠든 그의 얼굴에는 감추지 못한 피로와 지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어느새 삼십 분이 흘렀다.소예지의 어깨도 조금씩 저려 왔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이한은 잠든 뒤에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좀처럼 편안한 표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예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의 미간을 쓸어내렸다.찡그린 미간을 펴 주고 싶었다.고이한도 무언가를 느낀 듯 눈썹을 살짝 움직였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오히려 긴 팔을 들어 소예지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 쪽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숨결도 한층 느리고 깊어졌다.따뜻한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소예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최현숙의 병 때문인지 오늘따라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동안 중요하다고 여겼던 많은 일도 지금 이 순간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그때 고이한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그의 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예지의 허리에 내려앉더니 그대로 허리를 감쌌다.소예지는 순간 그가 깨어난 줄 알았다.하지만 고이한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소예지는 몸에 들어갔던 힘을 풀고 고이한이 편히 잘 수 있도록 그대로 있어 주었다.얼마 뒤 복도에서 간호사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조금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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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9화

밤이 되어 고하슬이 잠든 뒤에도 소예지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최현숙의 상태를 딸에게 말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아직 어린 고하슬에게는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른 일이었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고하슬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고이한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오후였다.연구소에 있던 소예지에게 고수경의 전화가 걸려 왔다.“예지 언니. 병원에 와줄 수 있어요? 할머니가 언니한테 하실 말씀이 있대요.”고수경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할머니가... 할머니가 이제 얼마 못 버티실 것 같아요.”그 말을 듣는 순간 소예지는 숨이 턱 막혔다.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마침 그때 이지원에게도 전화가 걸려 왔다.고이한이었다.고이한은 소예지가 직접 운전하는 게 걱정된다며 이지원에게 그녀를 병원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네. 고 대표님. 제가 소 박사 모시고 병원으로 가겠습니다.”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소예지는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과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쇠약해진 최현숙의 모습이 보였다. 숨도 전보다 가빠 보였다.“예지야. 이리... 와.”최현숙이 힘겹게 손을 내밀었다.소예지는 밀려드는 슬픔을 애써 억누르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할머니. 저 여기 있어요.”최현숙의 앙상한 손이 소예지의 손을 꼭 붙잡았다.손에 들어간 힘은 너무나 약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간절함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초점이 흐려진 눈으로도 최현숙은 애써 소예지의 얼굴을 바라봤다.“예지야. 할머니가... 이제 며칠 못 갈 것 같구나. 그래도 할머니는 네가 이한이와 다시... 함께했으면 좋겠어. 네 곁에 널 돌봐 줄 사람이 있으면 할머니도 마음 놓고 갈 수 있을 것 같아...”말을 마친 최현숙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그 눈에는 간절한 바람이 어려 있었다.병실 안이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진가영은 손으로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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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0화

진가영은 한숨을 내쉬며 최현숙을 달랬다.“어머니. 그렇게 먼 미래까지 걱정하지 마세요. 하슬이 하나만 있어도 충분해요. 이한이랑 예지가 잘 키울 거예요.”최현숙의 흐릿하던 눈에 잠시 또렷한 빛이 돌아왔지만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됐다. 그럼 아이 얘기는 더 하지 말자. 그저 저 두 아이가 다시 함께하기만 하면 좋겠구나.”진가영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시어머니가 걱정을 내려놓길 바라며 나직하게 말했다.“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한이가 있으니 우리 집은 괜찮을 거예요.”최현숙은 훌륭하게 자란 손자를 떠올렸다.고이한은 분명 집안의 자랑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홀로 집안의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했던 손자가 그동안 마음 편히 살아 본 날이 과연 며칠이나 있었을까 싶었다.병실 밖 복도는 고요했다.소예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조금 전 최현숙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아들이면 더 좋겠구나.’그 말 한마디가 마음에 작은 돌멩이처럼 떨어져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소예지는 최현숙의 마음을 이해했다.고씨 집안의 사업 규모는 막대했다. 훗날 고하슬이 그 모든 것을 혼자 짊어져야 한다면 얼마나 큰 부담이 될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최현숙은 집안과 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집안이 번성하고 대가 이어지기를 바랐으며 가능하다면 남자 후계자가 있기를 원했다. 그런 바람 역시 집안에 대한 책임감과 후손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하지만 소예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계획해 두었다. 고하슬이 자신의 유일한 아이였고 앞으로는 자신의 일과 연구에 집중하며 살아갈 생각이었다.그러니 고씨 집안 어른들의 기대에 맞춰 줄 수는 없었다.어쩌면 그것은 최현숙만의 바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진가영 역시 같은 생각일 가능성이 컸다.예전에도 아이를 더 낳으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고하슬도 어렸기에 소예지는 적당히 대답하며 넘어갔을 뿐이었다.조금 전까지 눈물로 젖어 있던 소예지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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