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641 - 챕터 1650

1726 챕터

제1641화

소예지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평소에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든든하고 강해 보이던 고이한이 지금은 기댈 곳 하나 없는 아이처럼 느껴졌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소예지의 마음도 저릿하게 아파 왔다.자신 역시 슬펐지만 삶과 죽음만큼은 누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고이한이 필요로 할 때 잠시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 주는 것뿐이었다.소예지는 어깨 부분의 옷이 고이한의 뜨거운 눈물에 조금씩 젖어 드는 걸 느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들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할머니가... 가시려나 봐.”고이한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그 안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가득했다.그 한마디에 애써 억누르고 있던 소예지의 슬픔도 함께 터져 나와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눈가가 붉게 젖은 진가영이 나왔다.“다들 들어와.”두 사람은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안에서는 고수경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침대 위의 최현숙은 마치 잠든 것처럼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하지만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마치 깊이 잠든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소예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고 눈물이 저절로 뺨을 타고 흘렀다.진가영을 따라 고이한과 고수경이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 뒤에서는 급히 들어온 의사들이 최현숙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소예지도 천천히 고이한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사이 문득 오래전 기억들이 떠올랐다.장거리 비행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산후조리를 도와주던 최현숙의 모습과 늘 따뜻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봐 주던 눈빛, 다정한 목소리가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목이 꽉 막혀 왔다.소예지에게 최현숙은 친할머니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소예지는 무릎을 꿇은 채 곁에 있는 고이한을 바라봤다.고이한은 최현숙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준 뒤 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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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2화

집에 도착했지만 아직 고하슬을 데리러 갈 시간은 아니었다.소예지는 서재로 들어가 소파에 앉은 채 한동안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예전 일들이 자꾸 떠올랐고 고씨 집안 사람들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오후가 되어 딸을 데려온 뒤에는 최대한 감정을 추슬렀다.아직 고하슬은 너무 어렸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아빠가 돌아오면 직접 이야기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고하슬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연구소에도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소예지는 고이한에게 전화를 걸까 잠시 고민했다. 혹시 자신이 도울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그래도 고이한이 있으니 자신이 따로 나서지 않아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오후 두 시 반쯤, 소예지는 양희순과 고씨 집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양희순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그때 밖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양희순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차고 쪽을 바라봤다.“사모님. 대표님이 오신 것 같아요.”소예지도 몸을 일으켜 현관 밖으로 나갔다.이지가 운전해 온 차가 앞에 멈춰 있었고 뒷좌석 문이 열리며 고이한이 내렸다. 젤리는 그를 보자마자 먼저 달려가 반갑게 맞았다.양희순이 소예지를 향해 말했다.“사모님도 가서 좀 부축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소예지는 고이한이 몹시 지쳐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고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이문혁이 소예지에게 말했다.“소 박사님. 고 대표님 좀 부탁드립니다. 밤새 한숨도 못 주무셨어요.”마침 고이한의 몸이 살짝 휘청이자 소예지는 한 걸음 더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생각해 보면 어제 아침 휴게실에서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인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제대로 잠들지 못한 셈이었다.고이한이 고개를 돌려 소예지를 바라봤다.핏발이 잔뜩 선 눈에는 피로와 고통이 짙게 배어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소예지를 안심시키려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나 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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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3화

고이한은 몸을 낮춰 딸과 눈을 맞췄다.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딸을 향한 깊은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났다.“학교 공부는 어때? 숙제는 있어?”“네! 저 다 할 수 있어요.”고하슬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한층 더 의젓해진 모습이었다.그때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제가 국수 한 그릇 끓여 드릴까요?”고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부탁드릴게요.”소예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이한이 딸과 조금 더 함께 있기를 바랐고 고하슬도 지금은 아빠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지금 고이한에게는 마음을 붙들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딸은 앞으로 고이한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터였다.양희순이 국수를 끓여 가져오자 고이한은 딸과 함께 조금씩 먹었다.밤 열 시가 되자 고이한은 딸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혀 주었다.“아빠. 저한테 이야기 하나 해 주시면 안 돼요?”고하슬이 부탁하자 고이한이 소예지를 바라봤다.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슬이랑 조금 더 있어 줘.”소예지는 고이한이 안방에서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두고 서재로 나와 잠시 앉아 있었다.어느덧 열 시 이십 분이었다.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하니 이제는 고하슬을 재울 시간이었다.고이한은 집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한 찻집 2층 VIP실에는 하종호와 윤하준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세 사람이 이곳에 모인 건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종호와 윤하준은 그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의 곁을 지켜 주러 온 것이었다.이럴 때는 어떤 위로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오랜 친구 사이에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고이한이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룸 안에는 은은한 조명만 켜져 있었다.고이한은 창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윤하준은 말없이 차를 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고요한 침묵만 이어졌다.하종호와 윤하준의 시선이 이따금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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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4화

그 뒤로 고이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소예지도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의 집에는 가지 않았다.밤 열 시쯤 고이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은 별장에 안 들어가. 본가에 있을게.]소예지는 한동안 그 메시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마음이 복잡했다.고하슬은 이미 잠들었지만 소예지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내일은 최현숙의 장례식이었다.눈을 감으면 생전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최현숙은 늘 인자하고 너그러웠다. 소예지에게 단 한 번도 모질게 굴거나 불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그래도 한편으로는 큰 고통 없이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그것 역시 고이한이 내린 결정이었다.억지로 생명을 연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지막을 맞도록 한 것이다. 덕분에 최현숙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품위를 지킨 채 떠날 수 있었다.그러다 문득 최현숙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다시 떠올랐다.어둠 속에서 소예지의 눈빛이 흔들렸다.마음속에는 어느새 또렷한 생각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이한 같은 사람이라면 아들을 낳아 줄 여자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여자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그러니 최현숙의 마지막 바람을 이루어 주는 편이 맞았다.다음 날 아침.소예지는 고하슬에게 검은색 원피스를 입혀 주었다.처음으로 온몸을 검게 차려입은 고하슬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엄마. 우리 오늘 어디 가요?”소예지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딸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하슬아. 오늘은 엄마랑 왕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갈 거야. 잘 보내 드리고 오자. 괜찮지?”고하슬이 잠시 소예지를 바라보다 물었다.“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처럼 돌아가신 거예요? 이제 앞으로는 영원히 못 만나요?”소예지는 순간 멈칫하며 딸을 바라봤다.고하슬의 눈에도 슬픔이 어려 있었다.“저 왕할머니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생각할 거예요.”옆에서 듣고 있던 양희순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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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5화

잠시 뒤 임씨 집안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자 소예지는 딸의 손을 잡고 고이한에게 다가갔다.고이한은 몸을 낮춰 딸의 손을 잡았다.“아빠랑 가서 증조할머니께 향 올리자.”고하슬은 아빠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갔고 소예지도 곁에서 함께했다.고이한은 딸이 향을 피우는 걸 도와준 뒤 세 번 절하게 하고 향로에 향을 꽂도록 했다.소예지도 같은 방식으로 최현숙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그때 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슬이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고하슬도 고씨 집안의 일원이니 지금은 아빠 곁을 지키는 게 맞았다.“그럼 나는 밖에 나가 있을게.”고이한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예지는 아직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오늘도 그저 조문객의 한 사람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소예지가 돌아서 나간 뒤 고하슬은 아빠의 손을 잡고 함께 조문객들에게 인사했다.찾아온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어린 고하슬에게 향했다. 그중에는 몇 초씩 더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그 눈에는 호기심과 아이를 가늠하려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진 채 앞으로 남다른 삶을 살아갈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는 시선이었다.물론 고이한이 딸을 곁에 세운 데에는 분명한 의미도 담겨 있었다.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선언과도 같았다.고하슬이 앞으로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어린 고하슬도 아빠 옆에 서자 제법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데도 불안해하거나 겁먹지 않았다.작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아빠를 따라 조문객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가는 손님들을 배웅했다.소예지는 이미 밖으로 나와 있었다.바깥에는 조문객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의자와 간단한 음식이 마련돼 있었다.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소예지에게 향했다.진가영의 사촌 남동생인 방재근의 아내 조미란이었다.조미란은 소예지를 실제로 처음 보는 순간 내심 놀랐다.검은색 긴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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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6화

조미란은 곁눈질로 소예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확인했다.그러자 더욱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에 제 사촌 형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도 병문안을 갔었거든요. 그분의 마지막 소원이 이한이가 자식 복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가능하면 아들을 셋 낳으라고까지 하셨어요. 적어도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고 하셨죠.”옆에 있던 사모님이 자연스럽게 맞장구쳤다.“그렇긴 하죠. 이렇게 큰 집안인데 아들이 하나도 없으면 아무래도 그렇잖아요.”“그런데 벌써 십 년이 다 돼 가는데 그 유언도 아직 이루지 못했어요. 게다가 제가 듣기로는 이번에 돌아가신 어르신도 마지막까지 고씨 집안에 아이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대요. 남자 손주도 바라셨고요. 이러다 아이를 더 못 낳으면 먼저 세상을 떠난 두 분 모두 한을 품고 가신 셈이잖아요.”조미란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하지만 소예지가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소예지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최현숙의 마지막 말은 자신도 직접 들었다.하지만 고이한의 아버지 역시 비슷한 유언을 남겼을 줄은 몰랐다.사모님이 말했다.“괜찮아요. 고 대표님도 아직 젊은데 아들 낳는 게 뭐 어렵겠어요? 원하면 계속 낳으면 되죠.”그녀는 조미란이 너무 걱정한다고 생각했다.고씨 집안 정도라면 셋은커녕 열 명이라도 부족함 없이 키울 수 있을 터였다.조미란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모르시나 봐요. 제 형님도 그것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이는데요. 이한이가 아이를 더 낳는 데 별 관심이 없대요. 이혼한 지도 삼 년이나 됐는데 그동안 다른 여자를 만난 적도 없고요.”사모님이 웃으며 말했다.“남자는 나이가 좀 들어야 생각이 달라지기도 해요. 지금은 젊어서 그렇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바뀌면 얼른 아이 잘 낳을 만한 여자 찾아서 서두를 수도 있죠.”조미란은 곁눈질로 소예지가 여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걸 확인했다.속으로 코웃음을 쳤다.‘소예지 같은 전처가 길을 막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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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7화

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있어요.”“좋아. 그럼 그때 다시 연락하자. 나도 이제 가봐야겠어. 오후에 수업이 있거든.”양정화를 배웅하고 돌아서려던 순간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소예지 씨.”소예지는 놀라 뒤를 돌아봤다.검은 정장을 입은 윤하준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하종호도 같은 차림으로 서 있었다.하종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오랜만이에요. 소예지 씨.”“하준 씨, 종호 씨. 오랜만이에요.”소예지도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하종호가 윤하준에게 말했다.“그럼 넌 소예지 씨랑 어머니 얘기 좀 나눠. 난 먼저 갈게.”윤하준이 소예지를 바라봤다.“바빠요?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요?”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윤하준은 어머니의 근황을 이야기했다.그의 미간에는 깊은 걱정이 어려 있었다.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이제 그의 곁에 남은 가족은 조카 이안과 어머니뿐이었다.그래서 윤하준은 무엇보다 어머니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었다.“의사들이 새로운 치료 방안을 마련했어요. 다음 주부터 시작할 거예요.”윤하준의 목소리는 낮았고 피로가 묻어 있었다.“다만 효과가 어떨지는 아직 장담하기 어렵대요.”소예지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제 연구도 아직 핵심 데이터 몇 가지가 더 필요해요. 최대한 빨리 돌파구를 찾아볼게요. 아주머니께도 희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그럴 거예요. 난 믿어요.”윤하준이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빛에는 굳은 믿음이 어려 있었다.잠시 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이한이랑은... 잘 지내요?”소예지는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윤하준은 어느 정도 짐작한 듯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난 이한이랑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어요.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요. 한번 마음먹은 건 쉽게 바꾸지 않아요. 특히 소예지 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요.”“고마워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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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8화

우산 아래에는 고이한과 소예지 둘뿐이었다.빗방울이 젖은 땅을 두드리는 동안 직원들은 비석을 세우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그사이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직원 한 명이 고이한에게 다가와 말했다.“고 대표님. 먼저 돌아가셔도 됩니다. 여기는 마무리하려면 한 시간 넘게 더 걸릴 것 같습니다.”고이한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소예지를 바라봤다.“우리 먼저 내려가자.”소예지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우산을 쓰고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소예지는 걷는 내내 자신도 모르게 우산을 고이한 쪽으로 조금 더 기울였다.그러자 고이한이 손을 뻗어 우산 손잡이를 받아 들었다.“내가 들게.”짧은 말이었지만 거절하기 어려운 힘이 실려 있었다.고이한이 우산을 받아 들자 자연스럽게 소예지 쪽으로 기울였다. 덕분에 소예지는 비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한쪽 어깨는 그대로 빗속에 드러났다.두 사람은 빗물에 젖어 미끄러운 산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다 소예지의 발이 순간 미끄러지자 고이한이 곧바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붙잡았다.그 뒤로 그는 팔을 풀지 않은 채 소예지를 감싸고 산길을 끝까지 내려갔다.장례식장으로 돌아온 두 사람에게 직원이 깨끗한 수건을 건넸다. 소예지가 얼굴과 머리카락에 묻은 빗물을 닦는 동안 고이한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남았다.마침 업무 전화가 걸려 오자 소예지는 전화를 받기 위해 바깥 정원으로 나갔다.통화를 하던 중 무심코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에 정원 한쪽에 서 있는 고이한이 들어왔다.그는 벽에 기대 선 채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빗안개와 뒤섞여 그의 모습을 흐릿하게 감쌌다.문득 외로워 보였다.그런데도 쉽게 무너질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떤 비바람이 닥쳐도 묵묵히 버텨 낼 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그런 고이한의 강인함은 그가 가진 지위나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쉽게 꺾이지 않는 의지와 단단한 내면이 지금까지 그를 버티게 해 온 힘이었다.소예지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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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9화

소예지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지만 고이한은 그녀의 마음이 다시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마치 또다시 자신을 떠날 것만 같아 불안감이 엄습했다.“고이한.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도 알아. 하지만 오늘 마음을 정했어. 우리 다시 시작하지 말자. 재결합할 생각도 없어.”고이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흔들리는 눈빛에 순간 감추지 못한 동요가 스쳤다.“왜? 왜 다시 함께하면 안 되는데? 재혼하지 않아도 돼. 내가 말했잖아. 혼인신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야...”고이한은 가쁜 숨을 한번 내쉬고 말을 이었다.“그냥 우리가 함께 있으면 돼.”소예지는 이번에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뒤 팔짱을 꼈다.마치 스스로 선을 긋듯 단호한 태도였다.“고이한. 내가 왜 다시 당신이랑 엮여야 해? 난 혼자서도 잘 살고 있어. 사람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야. 지금 나한테 사랑은 짐일 뿐이야. 남자도 마찬가지고.”마지막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내 남은 인생에는 일과 딸만 있으면 돼.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말을 마친 소예지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고이한이 다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소예지는 재빨리 피했다.그의 손은 허공만 스쳤다.그 순간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소예지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고이한이 다시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았다.놀란 소예지가 뒤를 돌아본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고이한이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그의 눈에는 고통과 차마 놓지 못하는 미련이 뒤엉켜 있었다.“예지야... 가지 마. 제발 나 버리지 마.”잔뜩 잠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소예지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고이한이 언제 무릎을 꿇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의 모습은 그대로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소예지는 곧바로 손을 뻗어 그를 일으키려 했다.“고이한. 일어나.”하지만 고이한은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그녀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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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0화

소예지는 돌아가지 않았다.하지만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조금씩 정신이 들었고 그제야 자신이 말을 꺼낼 때를 잘못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오늘은 고이한의 할머니가 하관된 날이었다. 가장 힘들고 마음이 무너져 있을 그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지금 다시 찾아가 사과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다. 어차피 고이한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려면 언젠가는 이렇게 해야 할 일이었다.그런데 조금 전 고이한의 얼굴에 닿았던 오른손에 아직도 뜨거운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소예지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정상적인 체온이었나?’‘아니면... 고열이 난 건가?’한번 떠오른 생각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소예지는 조금 전 고이한의 상태를 차근차근 되짚어 봤다. 생각해 보니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기운도 없어 보였고 감정도 불안정했다. 게다가 자신이 떠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성인이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갈 테고 피곤하면 알아서 잠을 잘 것이다.설마 계속 무릎을 꿇고 있을 만큼 미련하게 굴지는 않을 터였다. 자존심이 그토록 강한 사람이었으니 분명 벌써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을 것이다.어쩌면 씻고 침대에 누워 쉬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가는 동안 품에 안긴 딸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자꾸 뒤척였다. 소예지는 혹시라도 악몽을 꿀까 걱정돼 딸을 조금 더 꼭 안아 줬다.고하슬이 다시 깊이 잠들고 나서야 소예지도 밀려드는 졸음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다음 날 아침.소예지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양희순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고수경이 와 있었다.“예지 언니. 엄마가 하슬이 보고 싶대요. 제가 데려가서 엄마랑 좀 있게 해도 될까요?”소예지는 잠시 생각했다.진가영과 최현숙은 고부 사이가 무척 좋았으니 지금 진가영도 몹시 힘들 것이다. 고하슬은 고씨 집안의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아이였으니 딸이 곁에 있으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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