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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291 - 챕터 300

394 챕터

제291화

그 말을 들은 하씨 부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하종현이 혀를 찼다.“저 녀석은 계집애 하나 제대로 못 잡아서 쩔쩔매니, 원. 나 때는 한 달도 안 돼서 오씨 가문의 아가씨를 내 사람으로 만들었는데.”오가은은 그런 하종현을 흘겨보았다.“어휴, 됐네요. 우리 정략결혼 아니었으면 내가 당신한테 시집왔을 것 같아요?”하종현이 능청스럽게 오가은의 어깨를 감쌌다.“과정이 어쨌든 결과는 똑같잖아? 그나저나 둘이 문제없다니, 전용기 띄우라고 할게. 오늘 밤 바로 떠나자고.”오가은은 하종현의 제안을 거절했다.“떠나긴 어딜 떠나요. 정훈이 저놈 때문에 남지 속이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티를 안 낼 뿐이지. 자식이 친 사고를 해결할 생각은 않고 어떻게 놀러 다닐 궁리만 해요!”영문도 모르고 타박을 들은 하종현은 울컥했지만 차마 아내에게 대들 수도, 송남지에게 뭐라 할 수도 없어 그 화풀이를 고스란히 하정훈에게 향했다.“저 한심한 자식! 남지가 윤씨 가문으로 시집갈 때 죽네 사네 난리를 치길래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걱정했더니만. 나중에 윤씨 가문에 일이 터져 남지랑 결혼하겠다 했을 때도 우리가 다 밀어줬잖아. 그 결심이 얼마나 굳은가 했더니만 이제 와서 뒷걸음질이나 치고! 내가 어쩌다 저렇게 쓸모없는 아들을 낳았을까?”하종현은 일부러 오가은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그러자 오가은이 눈을 부라렸다.“이제 와서 내가 낳은 아들이 별로라는 뜻이에요?”하종현은 멋쩍게 웃으며 오가은의 손을 잡았다.“에이, 그럴 리가. 당신이 낳은 아들이라 이만큼 대단한 거지! 서경은 물론 전국을 다 뒤져봐. 이 나이에 이 정도 규모의 그룹을 키워낸 놈이 정훈이 말고 또 누가 있겠어!”오가은은 그제야 콧방귀를 뀌었다.“흥. 그건 맞는 말이네.”2층 침실.송남지는 구급상자를 든 채 꼭 어린 간호사처럼 하정훈 앞에 섰다.하정훈은 멋쩍은 얼굴로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옷 벗어요.”송남지가 말했다.하정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품에서 나는 향기가 그리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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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2화

흠집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해서 맞은 흔적은커녕 작은 상처조차 없었다.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헛것을 봤나 싶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자세히 본 그녀는 마침내 말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안 맞았네요?”하정훈은 뜨끔해서 고개를 돌리며 해명하려 했지만,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그녀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일부러 맞았다고 거짓말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송남지는 속았다는 생각에 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나 놀리는 게 재밌어요?”‘망했다.’하정훈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송남지는 서둘러 요오드와 면봉을 옆에 있던 구급상자에 도로 집어넣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하정훈이 급히 뒤따라갔지만 매정하게 닫힌 문에 가로막혔을 뿐이었다.그는 문에 기대어 손톱으로 문을 살살 긁으며 말했다.“남지야, 일부러 너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송남지는 문을 등지고 서서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복잡했다.‘일부러 속이려던 게 아니었다고? 그럼 걱정돼서 눈물까지 흘리며 허둥지둥 구급상자를 찾아온 나는 뭐가 되는가. 그냥 바보 같은 광대일 뿐이지.’그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밖에서 하정훈은 초조하게 서성일 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다시 한번 애타게 불렀다.“남지야, 내 말 듣고 있어?”송남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듣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아요.”하정훈은 고개를 젖히고 찌푸린 미간을 문질렀다. 그는 마침내 천천히 말했다.“알았어, 나랑 말하기 싫으면 내가 서재로 갈게. 그러니까 너도 그만 좀 나와. 어?”송남지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하기도 전에 문밖에서 하정훈이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그녀는 문을 살짝 열어 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역시, 하정훈은 이미 서재로 가고 없었다.밤 아홉 시 정각, 이미란이 야식을 가져왔다.“도련님께서 사모님이 저녁을 거의 못 드셔서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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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3화

이혼에 대해 해명하려던 찰나, 최미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남지야, 윤씨 가문 쪽에서 나한테 연락이 왔는데 내일 윤씨 가문에 한 번 들리라더구나.”“윤씨 가문에는 뭐 하러요?”윤씨 가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송남지는 거부감이 들었다.그 지긋지긋한 인간들이 자신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니 결국 최미경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내일이 윤해진의 생일이잖아?”최미경이 상기시켰다.송남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일이 윤해진의 생일임을 기억해냈다.윤씨 가문은 자신들의 추악한 짓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죽은 사람이 윤강현임에도 불구하고 생일이 내일이랍시고 가식적인 추모 행사를 열려는 것이었다.“엄마, 저 가기 싫어요.”윤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송남지는 속이 불편했다.최미경은 난처한 듯 말했다.“남지야, 이건 오랜 전통이야. 네가 윤씨 가문 사람들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고인의 생일이니 한번은 다녀와야 하지 않겠니.”송남지는 당연히 최미경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서경에는 확실히 그런 전통이 있었고 게다가 윤씨 가문은 보통내기들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가지 않는다면, 윤씨 가문이 어떤 헛소문을 퍼뜨릴지 모를 일이었다.손윤영과 윤해진은 원래 음험한 속내를 품은 자들이었으니 말이다.송남지는 짧은 숙고 끝에 나직이 응했다.“알았어요, 엄마. 저 내일 다녀올게요.”‘윤씨 가문이 기어코 이 위선적인 쇼로 나를 끌어들이려 한다면, 기꺼이 그들의 장단에 맞춰주리라. 마지막에 누가 더 바닥인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최미경이 안쓰럽게 말했다.“남지야, 조금만 견디자꾸나. 내일 하루만 무사히 넘기면, 윤씨 가문도 더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게다.”그러나 송남지의 상념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탁자 위의 디저트에 머물렀고 머릿속은 온통 지금 이 순간 하정훈이 무얼 하고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디저트 한 조각을 맛보니 과연 보기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운 단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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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4화

송남지의 얼굴은 그의 가슴팍에 파묻혔다.조금 흥분한 듯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참 묘한 기분이었다.하정훈이라는 남자의 감정은 평범한 사람과는 분명 달랐다.때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한없이 고양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영문 모를 침체에 빠지곤 했다. 송남지는 그의 감정선을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서재와 안방은 지척이었고 욕실과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구조였다.이젤 앞에 앉은 송남지는 안방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아련하게 들을 수 있었다.원래는 하씨 가문 기사의 딸에게 줄 아기 양 유화를 그리려던 참이었지만 막 물감을 짜놓고 나니 마음이 어쩐지 뒤숭숭했다.자잘한 물소리에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송남지는 심호흡을 몇 번이나 했지만, 붓을 들자마자 하정훈의 흠 잡을 데 없이 매끈한 등 근육이 머릿속에 떠올랐다.탄탄한 어깨와 날렵한 허리, 은밀한 치골 라인까지. 그녀의 화풍은 순식간에 전복되었다.자신의 붓이 하정훈이 셔츠를 벗어 던지던 그 순간을 그리고 있음을 자각한 순간, 송남지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송남지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그림을 몸으로 가렸다.하정훈은 젖은 머리를 털며 서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머리칼을 타고 흘러 쇄골에 아슬아슬하게 맺혔다. 조명 아래, 그의 숨결에 따라 쇄골의 물방울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아찔하게 움직였다.“뭘 그렇게 가려?”하정훈이 물으며 고개를 기울여 훔쳐보려 했다.하지만 송남지가 이젤을 빈틈없이 가로막는 바람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하정훈은 더욱 궁금해졌다.‘도대체 뭘 그렸기에 보여주지 않는 걸까?’송남지가 우물쭈물하며 변명했다. “전에 기사님 딸에게 그려주기로 약속했던 아기 양이요.”머리의 물기를 다 닦은 하정훈은 살짝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때문에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주인공 같았다. 그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추측했다.“너무 잘 그려서 보여주기 아까운 거야?”송남지는 도리깨처럼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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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5화

‘밝히는 여자, 혹은 남자에게 굶주린 여자로 보면 어떡하지?’송남지가 긴장과 불안에 떨고 있을 때, 하정훈은 그녀의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그녀의 그림에는 분명 압도적인 재능이 있었다.누구든 한눈에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유화의 정체를 파악한 하정훈은 도저히 입꼬리를 누를 수 없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그녀는 섞이지 않은 원색의 파랑과 노랑으로 시각적인 착란을 일으켜 더욱 생동감 넘치는 색채를 창조해냈다.붓의 흔적은 짧고 날카롭게 끊어져 있었다.하정훈은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남지야, 네가 서경 미대의 모네라 불리는 이유를 알겠어.”그녀는 빛과 그림자를 쓰는 게 거의 신의 경지였다.그야말로 보석 같은 존재였다.송남지는 잠시 멍해졌다.‘그는 진심으로 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거야?’하정훈이 자기 맨몸을 그린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송남지는 온몸의 피가 식는 듯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변명을 쥐어짰다.“아까 아기 양을 그리려는데 영감이 안 떠올라서 그냥 아무거나 그려본 거예요.”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하정훈은 전혀 다른 쪽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 자체에 큰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이 그림, 나 주면 안 돼?”송남지는 살짝 당황했다.“마음에 들어요?”지금 그가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차라리 이 모습을 그리는 편이 아까 그림보다 훨씬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때로는 자신의 그림 실력보다 하정훈처럼 완벽한 신체 조건을 가진 모델이 더 중요할 때도 있었다.하정훈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마음에 들어.”만약 경매에 나온 그림이었다면, 그는 얼마를 부르든 반드시 손에 넣었을 것이다.“마음에 들면 그냥 가져요. 그림 한 장일 뿐인데요, 뭐.”송남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정훈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네 손끝에서 탄생한 건, 단순한 그림 따위가 아니야.”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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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6화

그 목소리는 하정훈이 벌일 모든 행위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였다.결국 두 사람은 침실로 돌아갈 새도 없이 서재를 전장으로 삼았다.딱딱하기만 하던 그 검은 소파가 이 순간만큼은 더없이 유용했다. 하정훈은 탐욕스럽게 그녀의 목덜미에 얼룩덜룩한 흔적을 남겼다. 송남지의 필사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한밤의 야수와도 같은 남자의 탐욕을 막아낼 재간은 없었다.달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고 휘영청 밝은 달은 문득 흘러가는 구름에 반쯤 가려졌다.평소 하정훈의 열기만으로도 송남지는 온전히 받아내기 힘들었다. 하물며 오늘 밤, 그의 탐닉은 끝을 몰랐다.송남지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몇 번이고 울려 퍼지고 나서야 마침내 하정훈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나직이 물었다.“오늘 밤 나의 표현에 만족했어?”송남지는 소파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꽉 붙잡은 채, 하정훈의 귓가에 부드럽고 여린 목소리로 속삭였다.“만...족해요.”기진맥진한 두 사람은 결국 소파 위에서 서로를 껴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잠에서 깼을 때도 두 사람은 여전히 서재 소파 위였다.하정훈은 처음으로 서재 소파가 꽤 편안하다고 생각했다.그는 막 잠에서 깬 송남지를 놓아주기 싫다는 듯 껴안으며 사람을 홀리는 듯한 나른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더 자.”송남지는 서재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보았다. 벌써 아홉 시였다.그녀는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그녀가 기어코 일어나려 하자, 하정훈이 의아한 듯 물었다.“소훈이랑 일 때문에 약속 잡았어?”전에 임소훈이 송남지와 나눌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미뤄졌었다. 그는 당연히 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송남지가 진짜 이유를 설명하는 순간, 다정함이 깃들어 있던 하정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졌다.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지야,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윤씨 가문이든 그 누구든 너에 대해 왈가왈부 못 하게 막아줄게.”송남지는 당연히 서경 전체에서 하정훈이 가진 힘이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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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7화

송남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었다. 만약 오늘이 정말 윤해진의 제사라면, 그녀가 검은색 옷을 입고 참석하는 것은 당연했다.하지만 그녀는 미망인이 아니었으니 빨간색 가방을 드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하정훈이 의아한 듯 물었다.“그렇다면 입고 있는 옷은 왜 다른 색으로 안 갈아입어?”송남지는 거울 속 하얀 피부의 자신을 보며 하정훈에게 뒤돌아 웃어 보였다.“이 색이 제 피부를 더욱 희게 보이게 하지 않나요?”사실 그녀는 검은색을 좋아해서 입었을 뿐, 윤씨 가문에게 예를 차리려던 것이 아니었다.하정훈이 다가와 고개를 숙여 키스를 구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언제 네가 가장 하얘 보이는지 알아?”송남지는 그의 키스에 정신이 조금 혼미해져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하정훈의 목울대가 굵게 꿈틀거렸다. 깊고 수려한 그의 눈동자에 들불 같은 욕망이 타올랐다.“내 아래에 있을 때.”...윤씨 가문은 대외적인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는 집안이었다.좋은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고인의 생일조차 성대하게 치렀다.유명한 법사를 모셔다 묘원에서 제를 지내고 윤씨 별장에서는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여는 등, 그야말로 시끌벅적했다.송남지는 이 광경을 보고 나직이 비웃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윤씨 가문에서 죽은 아들이 어지간히 지독한 악귀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이렇게 요란하게 판을 벌이는 걸 보면.”하정훈은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주차하고 자연스럽게 송남지의 말을 받았다.“그러게. 이 광경을 보니 찹쌀이라도 한 줌 흩뿌려야 할 기분이 드는데.”송남지는 비꼬는 어조의 하정훈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죽거리는 순간마저 이토록 매력적이었다.“찹쌀로는 살아있는 귀신은 못 쫓아내죠.”농담은 농담이었지만 하정훈은 여전히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내가 같이 들어가 줄까?”송남지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귀신은 무서워도 사람은 안 무섭거든요.”그녀는 태연해 보였지만 하정훈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오늘 저곳에 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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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8화

하정훈은 마치 모든 것을 계획하는 교수 같았고 송남지는 아직 미숙한 학생처럼 보였다.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송남지는 하정훈의 생각보다 훨씬 영리했고 자신을 지키는 방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윤씨 가문이라는 막장극에 기꺼이 뛰어들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녀는 악을 악으로 갚아줄 시나리오를 완성해 둔 상태였다.유일한 변수는 허상미가 그 더러운 스캔들을 무기로 윤씨 가문에 기생하려 들 줄은 몰랐다는 점이다.송남지는 불을 무서워했다.윤씨 가문이 지옥의 불구덩이임을 알기에 한번 탈출한 뒤로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하지만 허상미는 돌머리인 게 분명했다. 그녀는 불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니 말이다.그러나 허상미는 자신 역시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불이 몸에 붙으면 결국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정훈은 윤씨 가문 저택으로 향하는 송남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가녀린 모습이었지만 등은 꼿꼿하게 펴져 있었다.솔직히 말해, 그녀가 입은 검은색 정장은 초가을의 떨어지는 단풍과 어우러져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녀가 고른 빨간색 가방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손목에 걸친 앙증맞은 빨간 가방은 그녀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하정훈은 그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송남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아쉬운 듯 시선을 거두었다.고개를 숙이니 오지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하정훈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 매제가 오늘 저녁에 서경에 오거든. 그래도 승진했으니 얼굴은 비춰야지 않겠어?”오지훈이 말하는 매제는 당연히 하슬기의 남편, 서정우였다.서정우는 하씨 가문과 정략결혼을 했고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은 실로 막대했다. 지방 도시인 남성에서 단번에 권력의 심장부인 서경으로 자리를 옮겼으니 그의 앞날은 창대할 것이 자명했다.본래 노는 물이 남달랐던 서정우가 서경의 대표적인 한량 오지훈과 어울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그러나 하정훈은 일말의 흥미도 느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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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9화

의식을 제대로 치러야만 고인의 영혼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고들 했다.송남지는 멀쩡히 살아있는 윤해진을 보니 헛웃음이 났다.정말이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대체 무슨 낯으로 자신의 이 제사에 참석한 걸까?’하긴, 죽은 척하며 형 대신 형수와 아이를 만들 생각을 한 사람인데, 낯가죽이 성벽보다 열 배, 백 배는 더 두꺼울 터였다.그러니 자신의 생일에 참석하는 것쯤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닐 것이었다.송남지의 등장은 윤씨 가문 친척들의 수군거림을 불러일으켰다.“저 사람, 얼마 전에 꽤 유명했던 그 천재 그래피티 작가 아니야? 듣자 하니 윤씨 가문에서 쫓겨난 뒤에 웬 늙은이를 만나서 지참금 몇 푼에 자기를 팔아넘겼다던데...”이런 말들은 송남지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소리였다.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전부 윤씨 가문 사람들이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차려입은 꼴을 보니, 그동안 그림 그려서 돈 좀 꽤나 번 모양인데?”“흥, 그 돈을 그림으로 번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번 건지 누가 알아.”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터져 나온 천박한 웃음은 ‘다른 방법’이 품은 저급한 의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송남지를 향한 비난이 잦아들 무렵, 화상을 입은 허상미가 휠체어에 앉은 채 윤씨 가문 가정부의 손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냈다.윤씨 가문의 친척들은 허상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뒷담화를 하고 싶었지만, 아직 가문에서 그녀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라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의미심장한 눈빛만 주고받을 뿐이었다.허상미는 검은 마스크로 얼굴의 화상 자국을 가렸지만 눈은 가리지 못했다.송남지는 그녀의 눈에서 짙은 증오를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그 분노의 화살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면, 허상미는 상대를 단단히 잘못 고른 것이라고 송남지는 속으로 비웃었다.허상미는 이제 겨우 유산과 화상을 입었을 뿐, 목숨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 불구덩이에서 알짱거리다간 그 목숨도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위패 옆에서 음울한 시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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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0화

손윤영의 얼굴색이 완전히 변했다.그야말로 가관이었다.허상미가 유산하면 윤해진이 송남지한테 가서 매달릴 거라는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송남지가 그걸로 자기 뒤통수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늘 제삿날을 핑계로 송남지의 기를 꺾어놓으려 했는데, 오히려 제대로 한 방 먹은 꼴이 된 것이다.손윤영은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속으로 눈을 몇 번이나 흘겼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그 자리에서 폭발하지 않은 게 용했다.송남지는 손윤영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팔레트보다 훨씬 더 다채롭다고 생각했다.제사가 끝나자 윤씨 가문은 손님들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다. 음식은 아주 풍성했다.윤씨 가문은 친척들과 지인들 앞에서 항상 체면을 차렸다. 고작 제사 하나도 극진하게 치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었다.테이블 위에 놓인 킹크랩과 온갖 종류의 랍스터를 보자, 송남지는 순간 윤씨 가문의 남은 아들이 또 결혼식이라도 올리는 건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윤씨 가문에서 허씨 가문의 사람들을 정식으로 초대한 건지, 아니면 그들이 초대도 없이 뻔뻔하게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허상미의 오빠 허세준까지 온 가족이 총출동한 꼴이었다.송남지는 그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차해연이 다정한 척 허상미에게 흰죽 한 그릇을 떠주며 말했다.“상미야, 요즘 상처가 아물 때라 이런 해산물은 먹으면 안 돼. 당분간은 이런 담백한 것만 먹어야 해.”송남지는 맞은편에서 벌어지는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속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진짜 걱정이라면 흰죽 한 그릇 떠주면서 상처에 안 좋으니 해산물을 먹지 말라고 상기시켜주는 게 전부가 아닐 테니까.송남지는 그날 병원에서 허상미가 허씨 저택에 걸었던 전화를 떠올렸다.허씨 일가족은 아이를 잃은 허상미를 위로하기는커녕, 왜 아이를 지키지 못했냐며 그녀를 죄인 취급했고 윤씨 가문에서 쫓겨나면 집안에서도 내치겠다고 했다.지금 보니, 허상미가 꼭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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