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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661 - 챕터 670

777 챕터

제661화

송남지는 김서윤의 팔을 붙잡은 채 스위트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방 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하지만 객실 서비스로 말끔히 정돈된 방에는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조차 없었고 하정훈의 물건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송남지는 스위트룸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인피니티 풀이 더없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직원이 난처한 어조로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다.“손님, 정말 죄송하지만 남편분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김서윤을 올려다보았다.“도대체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왜 이렇게까지 나를 피하는 건데요?”자신을 피하는 하정훈, 침묵하는 비서, 텅 빈 방, 그리고 낯선 타국. 이 모든 상황이 그녀를 정신적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고 있었다.호텔 직원이 난처한 기색으로 김서윤을 쳐다보았다.“김서윤 씨...”목소리에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서윤은 직원을 데리고 객실 밖으로 나갔다.문밖에서 김서윤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이 방을 예약해주세요. 아무래도 사모님은 이곳에 머무시는 게 조금이나마 더 마음 편하실 것 같아서요.” 직원이 떠난 뒤 김서윤은 송남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이 방은 제가 예약해 두었습니다. 전에 계속 이곳에서 지내셨으니 낯선 곳보다는 여기가 훨씬 익숙하실 거예요.”송남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디서 자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정훈 씨를 만나는 거예요.”그녀는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김서윤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김서윤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그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송남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안 된다는 거죠? 그럼 전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바로 서경으로 쫓겨나듯 돌아가야 한다는 건가요?”김서윤이 차분하게 대답했다.“사모님, 그렇게 빨리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맨성에서 좀 더 머물며 바람이라도 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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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2화

심야의 맨성 공항.듬성듬성한 인파 속에서 송남지는 누구보다도 피곤해 보였다.“사모님, 차라리 내일 아침에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제가 내일 아침 일등석으로 예약해 드릴게요.”송남지는 김서윤의 말을 뒤로한 채 카운터에서 항공편을 문의했다.“서경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직항편이 언제죠?”직원이 안내한 가장 빠른 비행기는 다섯 시간 뒤였다.김서윤이 옆에서 계속 무어라 설득했지만, 송남지는 이미 다섯 시간 뒤의 표를 끊어버렸다.김서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호텔로 돌아가 눈이라도 붙이고 내일 아침 쾌적하게 비행기를 타면 좋을 텐데, 송남지는 공항에서 다섯 시간을 버티는 쪽을 택했다.은회색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송남지를 보며 김서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랑 호텔로 돌아가요.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모셔다드릴게요. 여기서 다섯 시간이나 고생하시는 건 너무 힘들어요.”송남지는 고개를 저으며 김서윤의 제안을 거절했다. 오히려 이제 그만 가보라며 김서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이미 공항에 왔으니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전 어디에도 안 갈 거예요. 제 안전은 충분히 챙겨주셨으니 이제 가보셔도 돼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힘없고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정훈 씨가 워낙 바쁘니, 그 비서인 김서윤 씨도 무척 바쁠 거 아니에요.”김서윤은 멋쩍은 듯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송남지는 그를 곤란하게 할 생각이 없었기에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가보세요. 제가 무슨 범죄자도 아닌데 김 비서님이 계속 따라다니니까 기분이 너무 이상해요.”김서윤이 떠나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공항 직원이 송남지에게 다가왔다. 맨성에서 서경으로 직항하는 임시 항공편이 곧 이륙할 예정이라는 안내였다.처음엔 그저 운이 참 좋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비행기에 올라타고 나서야, 송남지는 넓은 기내 좌석이 텅 비어있다시피 한 풍경을 마주하고 깨달았다. 1년 중 가장 붐비는 이 성수기에 승객이 이토록 드문드문 앉아 있는 것은 그녀는 직감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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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3화

무사히 착륙해 마주한 서경 공항은 설맞이 스티커와 장식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른 아침의 고요한 공항을 빠져나온 송남지는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서경의 눈발은 멈출 기미 없이 오히려 더 굵어져 가고 있었다.얇고 가벼운 옷차림의 송남지는 공항 안에서 마치 이방인처럼 보였다.주차장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한 친절한 행인이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도움이 필요하세요?”송남지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요, 괜찮아요. 방금 맨성에서 돌아오는 길이라서요...”설명을 마친 그녀는 주차장에서 서둘러 자신의 차를 찾아냈다.차에 올라타자마자 히터를 틀자 그제야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송남지는 지체 없이 하씨 저택을 향해 차를 몰았다.주차장을 빠져나와 신호 대기를 하던 중, 송남지는 백미러 속에 비친 자신을 훑어보았다.부스스한 머리, 피로가 가득한 눈빛, 거뭇하게 내려앉은 눈가까지.이렇게나 초라하고 엉망인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다.교차로에 선 송남지는 핸들을 꺾어 고가도로를 빠져나왔다. 하씨 저택이 아닌 친정으로 목적지를 바꾼 것이다.송씨 저택 앞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흰 눈을 듬뿍 뒤집어쓰고 있었다.주차를 마친 송남지는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아파트 입구를 향해 질주했다.추위에 떨 여유조차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집 문 앞에 서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매서운 바람에 노출되었던 그녀의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얼어붙은 손가락 끝은 사정없이 떨렸고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잘못 누른 끝에야 비로소 도어락이 해제되었다.세 번째 시도 끝에 들려온 전자음에 최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그녀는 경계하며 불을 켜고 날카롭게 물었다.“누구야?”하지만 영하 10도의 눈보라가 치는 날씨에 얇은 옷차림으로 나타난 딸의 모습에 최미경은 아연실색했다.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덮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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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4화

최미경은 송남지에게 입힐 겨울옷 한 벌을 골랐다.부드러운 흰색 니트 위에 회색 코트를 매치했지만, 어딘가 너무 밋밋해 보였다.고민하던 최미경은 빨간 목도리를 하나 꺼내 송남지의 목에 정성스레 둘러주었다.선명한 붉은색이 더해지자 그제야 송남지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았다.송남지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창백한 안색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이 빨간 목도리가 아니었다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초췌해 보였을 터였다.곁에 선 최미경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걱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그녀가 송남지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남지야, 손이 왜 이렇게 얼음장 같아?”말을 마친 최미경은 송남지를 온기가 도는 안쪽으로 이끌었다.“하씨 저택엔 조금 이따 가렴. 우선 몸부터 녹여야지, 이 찬바람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최미경의 눈에 안타까움이 가득 고였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지내고 있던 딸이었는데, 어째서 평온하던 일상이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린 건지.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캐물을 때가 아니라는 것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송남지는 손을 내저었다.“아니요, 지금 바로 가봐야 해요.”단 1초라도 빨리 진실을 알고 싶었다.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최미경은 할 말을 삼킨 채 한숨을 내쉬며 송남지의 목에 감긴 목도리를 더 단단히 여며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 듯 딸을 배웅했다.건물 밖으로 나온 송남지는 곧장 차로 향했다.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쳤고 그 사이로 차가운 눈송이가 섞여들었다.짓궂은 눈송이가 목도리 틈으로 떨어져 목덜미에서 소리 없이 녹아내리자 살갗을 파고드는 서늘한 습기에 송남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하씨 저택.이른 아침의 눈은 아직 햇살을 받지 못해 딱딱하고 하얗게 굳어 있었고 표면에는 얇은 얼음층까지 얼어 있었다.눈을 치우는 고용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히 움직였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송남지가 도착했을 때 길은 아직 말끔히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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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5화

오가은은 깊은숨을 내쉬며 송남지의 시선을 피했다.차마 송남지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없는 듯했다.송남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종현에게 시선을 돌렸다.하종현이라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찻물 안개가 걷히자 하종현의 눈빛이 드러났다. 오가은과 다를 바 없는 눈빛이었다.두 사람의 눈에는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다.그 회피가 송남지에게는 절망으로 다가왔다.“제게는 최소한의 알 권리도 없는 건가요?”송남지의 시선이 하종현과 오가은을 번갈아 훑었다.오가은이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송남지의 손을 잡았다.손이 닿자마자 오가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남지야, 손이 왜 이렇게 얼음장 같니?”오가은은 서둘러 가정부들에게 난방 온도를 높이라고 지시했다.하지만 송남지는 그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력한 눈빛으로 오가은을 바라보았다.“어머님, 제 마음이 온통 시리다 못해 얼어붙고 있는데 손 좀 차가운 게 무슨 대수겠어요?”오가은은 연신 한숨만 내쉬었고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비애가 감돌았다.목이 메어 입을 떼지 못하는 아내를 대신해 하종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의 표정은 더없이 장중했다.“남지야, 정훈이가 너와 혼인한 이상 설령 그룹에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이혼을 시키고 다른 이와 혼례를 올리게 하는 비겁한 짓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하씨 가문은 그런 비겁한 짓을 할 집안이 아니었다.실리만을 쫓는 이들이었다면 애초에 하정훈과 송남지의 결혼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터였다.그 순간, 송남지의 머릿속을 메우고 있던 유일한 가설이 산산조각 났다.그녀는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럼 대체 왜... 왜 정훈 씨가 저를 피하는 거죠?”하종현과 오가은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송남지는 애타는 눈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고 끝없는 정적이 그녀를 삼킬 듯 짓눌렀다.숨이 턱 막힌 송남지는 결국 바닥에 쓰러졌고 그 모습에 오가은이 당황해 비명을 질렀다.“남지야! 남지야! 정신 좀 차려봐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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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6화

“정훈 씨... 나 버리지 마요... 정훈 씨...”송남지는 헛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고 손으로는 이불을 꽉 거머쥐었다.그 처연한 모습에 하종현과 오가은의 얼굴엔 수심이 깊게 내려앉았다.유경태 역시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정훈이는 동남아 출장 중이 아니었나?’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니 이번 출장은 확실히 기간이 너무 길었다.유경태가 데려온 의사는 간단히 진찰을 마쳤다.“몸살감기에 열이 좀 심하시네요. 약 드시고 푹 자면 금방 호전될 겁니다.”의사가 약상자에서 약을 짓는 사이 유경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아저씨, 아주머니. 혹시 정훈이랑 남지 씨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요?”하종현과 오가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고 하종현은 유경태와 짧게 인사를 나눴다.그사이 오가은은 침대맡으로 가 송남지의 이불자락을 갈무리해 주고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머릿결을 쓸어 넘겼다.“미련한 것, 어쩌려고 이 지경으로 병이 난 거야? 네가 이러면 우리가 네 부모님들께 면목이 없잖니.”창백한 송남지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오가은은 가정부가 가져온 따뜻한 수건으로 조심스레 땀을 닦아주었다.유경태는 하종현과 오가은이 누군가를 이토록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외동아들인 하정훈이야 워낙 강인하게 자라온 탓도 있겠지만, 가녀린 며느리에게 쏟는 두 사람의 정성은 확실히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평소 같으면 누군가 아프다 해도 의사만 부르면 그만이었을 이들이었다. 하종현과 오가은이 이토록 곁을 지키며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모습은 유경태에게도 생경한 풍경이었다.오가은은 송남지에게 직접 약을 떠먹였다.약 기운 덕분인지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진정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하종현은 유경태를 데리고 아래층 거실로 내려왔다. 가정부에게 차를 새로 내오라 일렀지만 하종현의 짙은 눈썹 사이에 맺힌 수심은 좀처럼 가실 줄 몰랐다.유경태는 혹시 은씨 가문과의 일이 성은 그룹을 뒤흔들어 하정훈과 송남지 사이에 문제가 생긴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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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7화

어둠이 막 내려앉은 시각, 하정훈의 예전 모임 멤버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웠다.룸은 눈이 시릴 정도로 밝게 불이 켜져 있었지만 그 적나라한 밝음이 되레 불길한 예감을 자아냈다.보통의 술자리라면 어둠과 소음이 가득했어야 했지만, 정적 속에 쏟아지는 불빛은 뒤늦게 들어온 오지훈과 최보라마저 긴장하게 했다.곽지민이 분위기를 띄우려 농담을 던졌다.“경태야, 너도 네가 한동안 한턱 안 낸 거 눈치챘냐? 그래서 설 전에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은 거야?”다만 오지훈과 최보라의 안색이 잔뜩 굳어 있는 것을 보고서야 곽지민은 상황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워낙 직설적인 성격인 곽지민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하정훈은? 그 오지 같은 동남아에서 아직도 안 돌아온 거야?”유경태가 천천히 입을 열어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전했다.“송남지가 몸져누웠어. 안색이 말이 아니더라고. 집안 분위기도 냉랭했어. 정훈이랑 송남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아마 그래서 하정훈이 아직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 같아.”그 말에 최보라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남지가 아프다고요? 어느 병원이에요? 상태는 어때요? 지금 당장 가볼래요!”유경태는 최보라에게 눈짓을 보내며 일단 진정시켰다.“감기 기운 때문에 열이 나는 정도예요. 곧 나을 테니 걱정 마세요. 지금 더 중요한 건 하씨 가문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점이에요.”곽지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성은 그룹이 어떤 곳인데 문제가 생겨? 거기가 흔들리면 서경 경제가 마비될 텐데.”평소에는 덜렁거리는 오지훈이었지만, 이런 중대한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신중하고 진지했다.“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겠어. 성은 그룹이라고 아무 문제 없으리란 보장은 없잖아. 안 그러면 정훈이가 그 동남아에 박혀서 안 돌아올 이유가 뭐가 있겠냐고. 본인인들 오고 싶지 않겠어?”곽지민은 단호한 기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절대 그럴 리 없지. 정훈이가 그 고생을 다 해가며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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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8화

최보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송남지는 늘 속이 깊고 고분고분해서 손 한 번 갈 일 없는 동생이었다.흔한 중2병도 없이 자란 아이였고 미술이면 미술, 공부면 공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우등생이었다.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는 이 착한 동생이 윤씨 가문이라는 구렁텅이에서 겨우 빠져나와, 자신만을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 이제야 겨우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은씨 가문이 끼어들다니.만약 은씨 가문이 과거의 약속을 빌미로 하씨 가문을 압박하고 있는 거라면, 그들은 도덕적 양심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최보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남자 뺏는 것도 모자라 재스민까지 탐내다니? 이건 정말 남지를 말려 죽이겠다는 소리잖아!”오지훈은 최보라가 너무 흥분하자 어깨를 짚으며 진정시켰다.“화병 나면 너만 손해야.”하지만 최보라의 분노는 그 누구의 위로로도 식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를 세차게 내리쳤다.“말도 안 돼! 아무리 은씨 가문이 막무가내고 하씨 가문이 낯짝 두껍다 해도, 하정훈이 설마 재스민을 은지영 손에 넘어가게 보고만 있겠어? 그건 진짜 인간 된 도리가 아니지!”재스민은 송남지의 심혈이 고스란히 담긴 결정체였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재스민을 지켜온 시간만큼, 재스민은 이제 송남지에게 결코 떼어낼 수 없는 분신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곽지민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천억 투자? 하정훈이 진짜 치사하게 나오면 우리끼리 조금씩 보태서라도 해결해 줄 수 있어!”오지훈도 맞장구를 쳤다.“맞아. 돈이야 어디에 두든 투자지, 재스민에 투자하는 거라면 나도 대찬성이야.”유경태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보탰다.“은지영에게 재스민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일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말려 죽이려 들다니. 도덕적으로 너무한 처사야. 설령 재스민에 관심이 없었더라도 이건 도와야겠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친구들의 든든한 말에 최보라는 마음이 놓였는지 감격스러운 듯 읊조렸다.“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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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9화

오가은은 이미란을 쳐다보며 그런 소리까지 할 필요 없다는 눈치를 주었다.최보라는 가슴이 뭉클했다. 자신이라 해도 남지의 곁을 밤새 지키기는 쉽지 않았을 터였다.“우리 남지 돌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고생 많으셨어요.”오가은이 손을 내저었다.“고생은 무슨, 다 한 식구인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죠. 어서 가서 얼굴들 보세요. 다들 걱정 많이 했을 텐데.”오지훈은 최보라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섰다.창가에 놓인 붉은 작매는 유독 선명해서 그 곁에 누운 송남지의 창백하고 야윈 얼굴을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다.그 선명한 대비를 마주한 최보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슬픔과 안쓰러움으로 물들었다.그녀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송남지의 손을 꽉 쥐었다.“바보 같은 녀석,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거야. 곧 명절인데 네 꼴이 이렇다는 걸 이모가 알면 설날이고 뭐고 가슴이 미어지실 텐데.”오지훈은 최보라에게 의자를 내주며 곁을 지키게 했다.“여기 앉아서 남지 좀 보고 있어.”그러고는 창가로 다가가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송남지의 가냘픈 실루엣을 촬영해 하정훈에게 보냈다.[정말 안 올 생각이야? 남지 상태가 심상치 않아. 열이 안 잡혀서 다들 비상이야. 자칫하면 이번 설을 병원에서 보내야 할 판이라고.]하정훈이라면 견디지 못할 것임을 오지훈은 잘 알았다. 설령 천지가 개벽하고 성은 그룹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하정훈은 남지 곁을 택할 사람이니까.오지훈은 하정훈의 답장을 기다렸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자 하종현과 오가은은 두 사람에게 식사를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하지만 오지훈은 정중히 거절했다.“남지만 보고 가려고 들른 거라 더 머무는 건 실례인 것 같아요. 일이 잘 해결되면 그때 보라랑 같이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하종현도 굳이 더 권하지 않았다.두 사람을 직접 배웅하고 돌아서는 하종현과 오가은의 뒷모습에는 쓸쓸함이 역력했다.오지훈은 하씨 가문의 기사에게 차 키를 건네받아 운전석에 올랐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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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0화

송남지는 결국 설 전날까지 앓아누웠다.고열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그 밤, 온 세상이 등불을 밝히고 명절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그녀만은 병원의 창백한 조명 아래 오롯이 홀로 남겨졌다.고열에 시달리며 정신이 몽롱한 탓에 제정신인 날이 드물었고 깨어날 때마다 하정훈이 왔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아니라는 말뿐이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송남지는 기운 없는 눈을 떠 곁을 지키던 오가은을 바라보았다.“어머님, 정훈 씨... 왔나요?”오가은은 깊은숨을 내쉬며 슬픔을 참아냈다. 송남지의 차가운 손을 맞잡은 오가은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그 내용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아직 안 왔어.”송남지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며칠째 영양제 수액에만 의지해온 탓에 송남지의 체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꺼풀 한 번 들어 올리는 일조차 온 힘을 다해야 할 만큼 기력이 쇠했다.오가은은 눈에 안쓰러움을 가득 담은 채 그녀를 다독였다. “남지야, 정훈이는 일 마무리되는 대로 돌아올 거야. 정훈이 기다리느라 네 몸 망가뜨리면 안 된다. 죽 좀 써왔으니 조금이라도 먹으렴.” 이미란이 죽을 들고 다가왔으나 송남지는 힘겹게 말을 가로막았다.“아니에요, 도저히 못 먹겠어요.”사실 못 먹는 게 아니라 음식을 넘길 기운조차 없는 것이었다.이미란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슬픈 목소리로 애원했다.“작은 사모님, 제발 조금만 드세요. 요 며칠 새 너무 마르셨잖아요.”송남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자신은 비록 죽어갈 듯 파리한 상태였지만, 걱정하는 오가은과 이미란을 위해 되레 타인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었다.“정말 괜찮아요. 열만 좀 내리면 입맛이 돌아올 테니까 그때 많이 먹을게요.”송남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미안해요, 미란 이모. 매년 설에는 휴가받아서 가족분들이랑 보내셨다면서요. 저 때문에 올해는 쉬지도 못하시고...”이미란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보온 용기를 내려놓고 침대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힘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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