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691 - Chapter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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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1화

“괜찮아. 네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야. 가게에서 일하는 입장이면 우리 가게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지.”온하준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여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한테는 다 오래된 친구들이니까 굳이 네가 챙기지 않아도 돼. 가서 볼일 봐.”“응... 그래...”이하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한껏 가련한 표정을 지은 채 몸을 돌렸다.강지연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예상대로 곧 모든 화살은 최아현에게로 향했다.먼저 입을 연 건 이승우였다.“최아현, 넌 왜 매번 이하나한테만 그렇게 짓궂어? 걔가 너한테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볼 때마다 얼마나 친절해?”최아현은 냉정하게 웃으며 말했다.“지금 네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것 자체가 걔가 나한테는 친절하지 않다는 증거야!”“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야?”이승우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무슨 논리냐고? 여자는 여자가 잘 알아. 넌 멍청해서 이해 못 해!”최아현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너...”이승우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사실이잖아!”최아현은 디저트를 집어 한입에 베어 물었다.“온하준, 강지연. 말 좀 해봐! 최아현이 너무 억지 아니야?”이승우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그제야 온하준이 입을 열었다.“별것도 아닌 일로 우리끼리 이렇게까지 싸울 필요 있어?”“그러니까.”이승우는 든든한 편이라도 생긴 듯 우쭐거리며 강지연에게 물었다.“강지연, 네가 말해 봐.”“나?”강지연은 손에 든 컵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난 원칙이 있는 사람이야.”이승우는 그녀 역시 자기편에 서는 줄로 알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계속 말해 봐.”“내 원칙은 간단해.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 나도 잘해주는 거야.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난 무조건 최아현 편이야.”강지연은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물론 너희가 다른 사람이 더 좋으면 그 사람 편들어도 돼. 상관없어. 우린 모든 선택에 공정한 편이야. 대신 둘 다 챙기려 하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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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온하준과 이하나가 함께 영어 스피치 대회에 나간다는 소식은 아직 공식 발표가 되지 않았지만 3학년 사이에는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누군가는 별 관심 없다는 반응이었고, 누군가는 온하준은 원래 잘하니까 당연하다고 말했으며 또 누군가는 선발 기준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제기했다.결국 이 일은 학교 익명 게시판에까지 올라가며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논란이 커지자 학교 측은 소문을 전면 부인했으며 이번 주 금요일 전교생을 대상으로 교내 영어 스피치 대회를 열겠다고 공식 발표했다.각 반에서 두 명씩만 신청할 수 있고 최종 선발된 우수한 두 명이 학교를 대표하여 외부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강지연은 망설임 없이 신청서를 제출했다.최종적으로 누가 뽑히든 상관없었지만 두 자리 중 하나는 반드시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사실 스피치 대회에 선뜻 나서려는 학생은 많지 않았고 특히 고등학교 3학년이라면 더더욱 그랬다.만약 입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눈에 띄는 스펙이 되는 대회라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혹은 예체능 대회였다면 공부에 부담 없이 재미로 참가하려는 학생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번 대회는 영어 스피치 대회였고 게다가 어디서 후원하는지도 모를 아무런 가치도 없는 대회였다.대부분 학생들은 힘만 들고 얻을 건 하나도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하여 강지연의 반에서 지원한 학생은 단 두 명 강지연과 차유준이었다.차유준은 문과반에서 손꼽히는 우등생이었기에 그의 지원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하지만 강지연은 의외였다.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런저런 말이 오가고 있었다.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조차 굳이 왜 지원하는 거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강지연은 알고 있었다.그들은 자신이 절대 뽑히지 못할 거로 생각한다는 걸.그녀는 이 시공간에서 자신의 1년 동안의 성적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성적으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만약 일반 수능으로 대학에 간다면 명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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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이하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강지연, 안녕!”마치 조금 전 험담에 끼어들지 않았다는 태도였다.강지연은 그 자리에서 더는 따지려 하지도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시선을 거둔 채 그녀 앞을 지나쳐 나왔다.그날 강지연은 식당에서 또다시 이하나와 마주쳤다.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다가오더니 마치 오래전부터 허물없이 지내온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강지연, 왜 날 피하는 거야? 오늘 우리가 했던 말 오해한 거 아니지?”“너희가 무슨 말을 했는데?”강지연이 되묻자 이하나는 당황해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이내 다시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강지연의 손을 잡으려 했다.“강지연, 우리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냥... 다들 예체능에 대한 편견이 있잖아. 우리도 널 걱정해서 그런 거야. 어차피 나랑 온하준도 대회에 나가니까 우리 같이 연습하고 원고도 같이 외우면 좋지 않을까 해서...”강지연은 그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고마워. 그럴 필요는 없어.”그 순간 이하나는 마치 강지연이 일부러 세게 밀기라도 한 것처럼 손목을 감싸 쥐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악!”그녀의 눈시울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이내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이하나는 한층 더 가늘고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강지연, 난 진심으로 너랑 친구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앞으로는 귀찮게 안 할게...”강지연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이하나가 이 정도로 완벽하게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누군가 보고 있다는 뜻이었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이라면 이런 연기가 나올 리 없었다.강지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예상대로 바로 뒤에 온하준이 서 있었고 모든 장면을 지켜본 얼굴이었다.다음 순서도 뻔했다.‘하준아, 강지연 탓하지 마.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야. 내가 괜히... 다 내 잘못이야...’그녀의 머릿속에는 이하나가 다른 시공간에서 했던 말들이 또렷이 재생되고 있었다.그리고 이번에도 강지연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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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이번에도 강지연은 승부수를 던졌고 만약 실패한다면 다른 대책을 세울 작정이었다.지금 상황을 보면 이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지는 않은 기분이었다.한참을 서로 노려보듯 마주 서 있던 끝에 먼저 침묵을 깬 건 온하준이었다.“갑자기 왜 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거야?”“조금 전에 식당에서 있었던 일은 안 물어봐?”강지연은 그가 먼저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볼 거로 생각했다.온하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녀가 계속 답을 기다리는 듯 바라보고만 있자 결국 입을 열었다.“중요하지 않아.”“중요하지 않다고?”‘무슨 뜻이지?’온하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강지연, 난 한 번도 네가 이 정도로 우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요즘 왜 그래?”강지연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그와 알고 지낸 시간 동안 그녀는 늘 그림자처럼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조용히 곁에 머물러 있었고 크게 웃지도 슬퍼하지도 않았었다.“만약 내가 이하나를 싫어한다고 하면, 네가 걔랑 가까워지는 것도 싫다고 하면... 넌 어떻게 생각할 건데?”강지연의 물음은 너무 노골적이었고 대담했으며 이 나이의 강지연이라면 절대 꺼내지 못했을 고백에 가까운 선언이었다.온하준은 그녀의 물음에 어이없다는 듯 웃기만 했고 당연히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강지연, 우리 일 년 동안 서로 대화도 안 했어.”일 년 동안 말 한마디 섞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혹시 최아현이 너한테 뭐라고 한 거야?”강지연은 그제야 깨달았다.자신이 최아현 편을 들고 대신해 나선 거로 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최아현은 이하나를 싫어한다고 노골적으로 밝혔고 마주칠 때마다 날을 세워왔다.하여 온하준의 오해는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온하준, 아까 나한테 왜 대회에 나가느냐고 물었지?”그는 그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널 이기려고. 그리고 당연히 이하나도 이기려고.”순간 온하준의 얼굴에는 또다시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그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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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거의 아무도 강지연의 실력을 믿지 않았다.그녀가 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들은 최아현은 영어 참고서를 한 아름 끌어안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지연아, 네가 나가면 내가 나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이하나 하나쯤은 이길 수 있어. 난 그렇게 믿어!”이하나를 향한 최아현의 반감은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그녀는 강지연의 대회 원고를 함께 써주겠다고 찾아온 것이었다.최아현의 진지한 표정에 강지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학년 전체를 통틀어 선생님까지 포함해도 그녀가 이번 대회에서 이하나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단 두 명 최아현과 차유준 뿐이었다.강지연은 담담한 태도로 나지막이 물었다.“아현아, 넌 날 그렇게 믿어? 그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거야?”최아현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예쁘잖아.”강지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곧바로 최아현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농담이야! 지연아, 네가 뭘 하든 난 무조건 네 편이야! 조건 같은 건 없다는 거지. 자, 이제 대회 원고나 써볼가?”“안 써도 돼. 이미 다 써놨어.”강지연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그럼 연습이라도 도와줄까?”최아현은 이번 일에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었다.강지연은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이미 너무 연습해서 목이 다 쉴 정도야. 진짜 나 생각한다면 밀크티 한 잔만 사다 줄래?”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최아현은 망설임도 없이 벌떡 일어나 교실을 뛰쳐나갔다.그 사이 차유준이 다가와 그녀 앞자리에 앉으며 물었다.“어때? 준비는 다 됐어?”강지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차유준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원래는 원고 쓰는 데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네 표정 보니까 그럴 필요 없어 보이네. 게다가 우린 서로 경쟁자잖아. 괜히 오해받을 일은 피해야 하는 건가?”강지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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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이하나의 어머니가 이 지역 병원으로 발령받으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쪽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것이었다.어쩌면 과거의 강지연이 일 년 동안 온하준과 대화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 일과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만약 그렇다면 강지연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녀 역시 똑같은 길을 걸어본 적이 있었고 몇 번이고 실망한 끝에 떠나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대회 당일, 강지연과 차유준은 문과 2반 대표로 추첨 구역에 나란히 서 있었다.번호표를 넣은 작은 통 앞에서 강지연은 마지막 번호를 뽑았고 이하나는 3번을 뽑게 되었다.“어때? 준비됐어?”7번을 뽑은 차유준이 그녀 옆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물었다.강지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무대 위에서는 2번을 뽑았던 온하준이 한창 발표 중이었다.어린 시절의 온하준은 발음이 유창하고 듣기 좋았으며 학생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멋지게 발표를 이어가고 있었다.비록 그는 평소에 냉정하고 직설적인 성격이었지만 발표만큼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듣는 이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힘이 있었다.훗날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이런 언변으로 투자자를 사로잡은 덕분이었을 것이다.온하준의 발표가 끝나자 강당은 뜨거운 박수로 가득 찼다.곧이어 이하나가 무대에 올랐다.이하나는 성적도 뛰어났고 영어 실력 역시 출중했다.그렇지 않았다면 훗날 온하준과 같은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했을 것이다.오늘 그녀가 발표할 제목은 ‘20년 뒤의 우리’였다.그 제목을 듣는 순간 강지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이하나가 자신의 원고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그녀는 확신했다.사실 강지연이 준비한 제목은 ‘10년 뒤의 우리’였다.그녀는 십 년 후의 미래에서 이곳으로 돌아온 사람이기에 그 시간만큼은 상상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살아낸 현실이었다.십 년이라는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강지연은 십 년 후의 거대한 변화부터 아주 사소한 일상까지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써 내려갔다.직접 겪었기에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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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다시 생각해 보니 차유준의 부모는 모두 무역업에 종사하셨으니 그 역시 어릴 때부터 외국인이나 외국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을 터라 그만한 실력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결국 예상대로 차유준이 판을 뒤집으며 1위를 차지했고 자연스럽게 온하준은 2위, 이하나는 3위로 밀려났다.단 두 명만 최종 대회에 나갈 수 있다면 이하나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었다.이하나의 실망한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강지연의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묘하게 후련한 감정이 밀려왔다.강지연이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이후 발표한 참가자 중 누구도 순위를 뒤집지 못했다.그녀는 무대에 오르려고 대기석으로 올라가는 순간 또다시 이하나의 도발적인 시선과 마주쳤다.강지연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내 원고 주제를 훔쳐 가 봐야 별 소용 없지 않나?”이하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더니 분노를 참지 못하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냉정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내가 이미 다 발표한 걸 다시 해 봐야 더 소용없겠지. 차유준한테 진 건 인정해. 근데 넌 나 못 이겨.”“그럼... 어디 한 번 두고 보지 뭐.”강지연은 미소를 유지한 채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때 온하준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이하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더니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강지연, 힘내!”온하준은 강지연을 찾아온 것이었다.“곧 내 차례야. 무슨 일 있어?”발표 직전 괜한 감정싸움으로 기분을 망치지 말라는 의미였다.“긴장하지 마.”온하준은 마치 교과부장이라도 된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긴장하지 말고 그냥 잘 말하기만 하면 돼. 네가 정말 나가고 싶으면 내 자리를 내어줄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그는 여전히 강지연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온하준, 넌 정말 그 대회에 올라가지 못하게 될 거야. 그건 네가 나한테 자리를 양보해서가 아니라 내가 널 이길 수밖에 없어서 못 가는 거야.”강지연은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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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강지연은 차유준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특유의 발음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같은 베르덴 억양이었다.유창하고 안정된 그녀의 발음에 온하준은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강지연의 친척이 엘리에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작 일 년이라는 시간 안에 그녀가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출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어느 날 내가 다리를 잃게 된다면’, 이 제목은 가정이 아니라 강지연이 실제로 겪어 왔던 자기 자신을 쓴 내용이었다.그래서인지 화려하거나 과장된 문장이 없었고 동정을 유발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담담한 태도로 다리를 잃은 주제를 아주 세밀하게 파고들어 발표를 이어갔다.어느 구절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모두가 숨을 죽이고 듣고 있었기에 강지연의 목소리만 강당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내용의 절반을 조용히 듣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강지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단단해졌고 불굴의 의지, 운명에 맞서는 당당함, 그리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그녀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심사 위원들까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이번 대회에서 강지연은 전원 최고점을 받게 되었다.하여 학교를 대표로 참가할 수 있는 단 두 명은 강지연과 차유준이었다.대회가 끝난 뒤, 각자 반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지연은 일부러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이하나의 앞을 천천히 지나쳤다.이하나는 원망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강지연, 너 참 뻔뻔하네. 감히 날 가지고 놀아?”강지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내 발표 제목을 알고 있던 사람이 너 하나뿐이 아니야. 그런데 하필 너만 걸렸네. 그건 너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닐까? 일종 너 같은 못된 사람을 막으려고 준비해 두었던 안전장치였어.”그때 최아현이 이과반 쪽에서 달려오더니 강지연을 와락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며 소리쳤다.“강지연! 넌 진짜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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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이하나는 그 어떤 잘못을 해도 온하준의 눈에는 언제나 옳은 사람이었고 반대로 강지연은 늘 사과해야 하는 쪽이었다.‘그럼 이번에도 이하나를 위해 따지러 온 거고 결국 나한테 사과하라고 하려는 거겠지?’강지연은 아무 말 없이 마주 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온하준은 잠시 시선을 피하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강지연, 왜 넌 항상 나를 적으로 생각해?”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전의 넌 항상 그랬잖아.’그때 마침 주문을 마친 최아현과 이승우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겨버렸다.온하준은 그저 낮은 목소리로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하여튼 총명하단 말이야.”“무슨 얘기 나누고 있었어?”강지연의 옆자리에 앉던 최아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설마 아까 대회에서 발표한 그 명장면을 얘기하고 있었어? 우리 강지연이 어떻게 널 이긴 것인지 물어본 거야?”그녀의 표정에는 드디어 해냈다는 오만함이 가득했고 그 당당함에 온하준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 맞아.”그는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강지연한테 어떻게 베르덴 억양까지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는지 배우려는 중이었어.”순간 최아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맞아, 맞아! 진짜 너무 듣기 좋았어. 내 옆에 있던 애들도 노래 부르는 것 같다고 난리였어. 강지연, 언제부터 그렇게 잘했던 거야?”강지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꿈에서 연습한 거지.”그 말은 사실이었다.하지만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았다.그때 이승우가 나름 진지하게 말을 거들었다.“강지연의 오빠랑 고모가 해외에 오래 사셨잖아. 따라 연습한 거겠지.”그럴듯한 설명이었다.심지어 온하준과 최아현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온하준.”최아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강지연이랑 내기했잖아. 기억나지?”온하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강지연의 실력을 과소평가했어. 내기에서 졌으니 약속은 지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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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그 시간쯤이면 학생들은 거의 모두 교실로 들어간 뒤였고 건물 내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강지연과 최아현은 지각할까 봐 걱정되어 계단을 뛰어오르려던 참이었다.그때 일 층 계단 뒤편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익숙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이내 이하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정확히는 울음소리였다.이하나는 숨이 넘어갈 듯 흐느끼며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이... 이번... 이번 대회는 나한테... 정말 중요해... 아니, 사실은... 매... 매번 대회마다... 모든 대회가 나한테는 다 중요하거든... 만... 만약 우리 엄마가... 내가 본선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는 걸 모... 모르면...차라리... 괜찮은데... 이미 알았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또... 또 올라 못 가면 난... 난 정말... 크게 혼날 거라고... 그러니까 난...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선에 꼭... 꼭 올라가야만 했어... 그래서... 그래서 내가... 난... 강지연이 나보다 더 잘할까 봐... 그럴까 봐 두려웠거든...”“그럼 강지연의 실력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온하준의 차분한 목소리였다.“나... 난 그냥... 추측한 거야... 걔가 신청하겠다고 그렇게까지 고집부리니까... 해외에 사는... 친척도 있고, 분... 분명.... 잘할 것 같았거든. 어쩌면... 원고도 그 친척이 써줬을... 지도 모르잖아...”이하나는 여전히 흐느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아니야.”온하준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뭐... 뭐가 아니야?”이하나는 계속 훌쩍거렸다.“그 원고는 강지연이 직접 쓴 거야.”“나... 나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거야... 누가 썼는지는... 사실... 나한텐 중요하지 않아. 난... 난 그냥... 이번 대회가 너무 중요했을 뿐이야... 그런데 넌... 넌... 겨우 이 일 때문에... 가게도 못 나가게... 하겠다는 거야?”그녀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이유는 중요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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