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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권미숙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도운과 문수정도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하지만 말을 들어 보니, 딱히 문제 삼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문수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도운을 두둔했다.“다 백하린 그 여자가 꾸민 짓이에요. 다시 도운이에게 접근해서 유혹하려는 거죠. 도운이는 회사 일이랑 집안일만 생각하다 보니, 그만 넘어간 거고요...”말을 하면서 그녀는 슬쩍 손을 들어 아들의 팔을 건드렸다.하지만 이도운은 끝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을 전부 백하린 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됐다. 내가 따지러 온 거였으면 이렇게 말 길게 할 필요도 없었겠지.”권미숙은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못마땅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애초에 강지현의 얌전하고 속 깊은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좋은 손주며느리가 될 거라 믿고 마음 놓고 노후를 보내려 했던 것이다.그런데 고작 2년 사이에 강지현마저 꽤 달라져 있었다.“백하린 일 때문에 지현이가 너한테 화가 난 모양이구나. 하지만 지금은 다 정리됐잖니. 지현이한테 가서 사과하고, 백하린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 똑똑히 설명해라. 그리고 우선 집으로 돌아오라고 해.”이도운은 잠시 머뭇거렸다.백하린에게 잘못이 있는 건 맞지만, 요 며칠 사이 강지현의 태도도 꽤 답답했다.그는 이미 몇 번이나 만회할 기회를 줬고 그녀에게 일이 생겼을 때도 감싸 주었다. 그런데도 강지현은 여전히 그에게 냉담했다.그래서 지금의 이도운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굳이 다시 사과하러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문수정도 당연히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도운을 두둔하려는 순간, 권미숙의 날카로운 시선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권미숙은 바로 강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받지 않자, 다시 한 번 걸었다.“이른 시간이라 아직 안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이도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지현이 정말 할머니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하지만 권미숙은 끈질겼다.과연 얼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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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권미숙의 공정함은 이씨 가문 사람만 걸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강지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권미숙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부부 사이에 그럴 수도 있는 거란다. 할미도 다 안다. 네가 괜히 질투심에 오해한 거지. 쌓아 둔 말이 있으면 다 털어놓고 얘기해 보거라. 너도 아직 도운이한테 마음이 있잖니.”“오해요?”“그래. 인터넷에 퍼진 그 일 말이다. 할미도 다 들었어. 그 백하린이라는 애, 꼴좋다 싶더구나.”백하린의 이름이 나오자 강지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사실대로 말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권미숙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 애는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 시집도 못 갔잖니. 네가 도운이랑 잘 지내는 게 샘나서 쓸데없는 욕심을 낸 거다. 하지만 할미가 장담하마. 우리 도운이 마음엔 지현이 너밖에 없어. 백하린은 한때 도운이 선생이었다는 걸 빌미로 곁을 맴돈 것뿐이야.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 지현아, 이런 일로 도운이를 원망하지 마라.”권미숙은 한참을 진지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내용은 백하린 탓뿐이었다. 그리고 남은 책임은 이상하리만치 전부 강지현 몫이 됐다.오히려 이도운만 괜히 억울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 지경이었다.권미숙은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휴대폰을 이도운에게 건넸다.“도운아, 이리 와 봐라. 여기서 지현이한테 똑바로 설명해라. 너랑 백하린 사이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할머니...”이도운은 억지로 휴대폰을 받아 들었지만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됐어요.”강지현이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휴대폰 너머로는 단순히 삐친 것처럼 들릴 뿐이었다.“할머니, 전에 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말씀 못 드렸던 거예요. 사실 저희는 이미 끝난 사이에요.”그 말에 권미숙과 이도운은 동시에 표정이 굳었다. “이미 끝났다고?”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쉰 목소리 사이로 떨림이 섞여 있었다.“지현아,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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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이도운도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강지현!”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순간 흠칫했다. 강지현이 굳이 이혼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녀가 두 사람의 계약결혼 사실을 알 리 없었다.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손에 쥔 것 하나 없는 처지에 자신을 떠날 생각을 할 리 없었다.어머니 말이 맞았다. 강지현은 지금 한껏 기세를 올리며 선을 넘고 있었다. 백하린 일을 빌미로 자신에게 사과를 받아내고, 이씨 가문 쪽에서도 단단히 대가를 받아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권미숙 역시 강지현이 자신이 내민 명분을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걷어찰 줄은 몰랐다. 좋게 넘어가자고 한발 물러서 줬더니, 체면이라곤 조금도 세워주지 않은 채 이혼 이야기까지 꺼내지 않는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저 강지현, 제정신인 게냐? 정말 너와 이혼하겠다는 거야?”“할머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지현이가 홧김에 한 말이에요.”이도운 역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었지만, 그래도 서둘러 권미숙을 달랬다. 자칫 또 충격을 받아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권미숙은 차갑게 웃었다.“나는 그동안 네 어미 말이 다 과장인 줄 알았다. 그렇게 얌전한 강지현이 설마 저렇게까지 막무가내겠나 싶었지. 그런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저 아이, 이제는 정말 분수도 모르는구나.”권미숙이 더는 강지현 편을 들지 않자 문수정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요, 어머님. 너무 오냐오냐해서 버릇이 잘못 든 거예요. 이번엔 단단히 혼을 내야 해요. 우리도 먼저 찾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요. 그러면 강지현이 먼저 돌아오게 해 달라고 매달릴걸요.”권미숙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곧 회사 일이 떠올랐다.“그래도 지현이가 빠지면 회사 프로젝트들은 어쩌니...”집에 돌아온 뒤로 이미 여러 얘기를 들었다. 이규진이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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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설마...”이도운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쉽게 입에 올리기 어려운 이름이었다.“주씨 가문인가요?”“해원시 최고 부자라는 그 주씨 가문 말이에요?”문수정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이규진 곁으로 다가갔다.“여보, 정말 그쪽이에요?”“맞아.”이규진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말끝에는 감추지 못한 만족감이 묻어났다.“이번에 우리 회사에 크게 투자하기로 한 곳이 바로 해원시 재계 1위, 주상 그룹이야.”“세상에, 정말 잘됐네요! 그쪽이 투자해 준다면 이제 뭐가 걱정이에요? 강지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우리 이씨 가문도 해원시에서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다고요!”이규진의 말을 듣자마자 문수정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마치 이번 투자만 확정되면 이씨 가문도 주씨 가문과 같은 반열에 설 수 있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평소 침착하기로 유명한 권미숙조차 이번에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규진아, 정말 주씨 가문이 맞느냐? 대체 어떻게 주상 그룹 투자를 끌어온 거야?”주상 그룹과 협력만 해도 이씨 가문에겐 큰 전환점이 될 일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투자까지 받아왔다니, 권미숙으로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하지만 이도운은 다른 사람들만큼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문득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그는 주차장에서 우연히 주상 그룹의 딸과 마주쳤었다. 그녀는 차 안에 앉은 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떠나기 전 그의 명함을 집어 들었다.설마 그녀가 이경 그룹에 투자한 걸까?이규진은 어머니와 아내가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입가에는 참지 못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번에 나가서 여러 투자자를 만나 봤는데, 마침 주상 그룹 쪽과 연결된 사람이 있더군요. 그쪽에서 우리 회사 핵심 프로젝트를 검토하더니 바로 투자 의사를 밝혔습니다. 계약서까지 보내왔어요.”이규진은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마치 하늘에서 운이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문수정은 얼른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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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계란프라이에 베이컨, 샐러드랑 토스트.”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깔았는데, 그 바람에 살짝 풀린 셔츠 깃 사이,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가 더 또렷하게 보였다.“응.”김태하는 짧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오히려 그녀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그는 문득 손등으로 그녀의 뺨 옆을 살짝 스쳤다.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기름 자국이 그 손끝에 닦여 나갔다.손끝은 따뜻했고, 스치는 감촉은 너무 가벼워 순간 착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 짧은 접촉에 강지현의 뺨 한쪽이 금세 달아올랐다.“뭐 묻었어.”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눈빛은 사람을 빨려 들어가게 만들만큼 깊었다.강지현이 뒤늦게 손을 들자 김태하가 먼저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이제 없어.”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로 놓아주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 안쪽을 스치듯 한번 지나갔다. 이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끌었다.“가자. 얼마나 맛있는지 빨리 먹어보고 싶네.”그가 몇 마디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강지현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김태하의 큰 손에 이끌려 걸어가면서, 강지현은 문득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기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지고 괜히 안심이 됐다.아침을 다 먹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김태하는 평소보다 출근이 늦어졌다.둘이 식사하는 동안에도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그는 강지현이 괜히 신경 쓸까 봐 액정을 한번 확인하고는 전화를 전부 끊어버렸다.“같이 가자. 회사까지 데려다줄게.”강지현은 잠시 망설였다.“방향도 안 맞잖아. 아침에 할 일도 많을 텐데.”“오늘 하루 종일 못 보잖아. 너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이 남자는 이런 말을 할 때도 전혀 돌려 말하지 않았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너무 직설적으로 내뱉는 바람에 강지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태하 넌 왜 갈수록 능청스러워지는 거야...”그녀는 눈을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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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강지현은 괜히 눈물이 날까 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고마워, 하지만 난 너한테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강지현의 말을 듣자 김태하도 한결 마음을 놓은 듯했다.“걱정 안 해도 돼. 네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할게.”위로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았다.그 말투에 강지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김태하를 힐끗 바라봤다.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따라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턱은 살짝 굳어 있었고 표정도 여전히 차분하고 냉정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가운 표정 너머로 사람을 녹일 듯한 뜨거움이 느껴졌다.차는 곧 주상 그룹 본사 건물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김태하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퇴근하고 기다려. 데리러 올게.”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응.”강지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김태하는 휴대폰을 들었다.화면에는 이미 부재중 전화와 긴급 보고가 여러 건 쌓여 있었다.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끼고 차를 돌려 미래 그룹 본사 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전화를 받았다.그의 목소리에서는 평소의 딱딱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뜻밖에도 그는 먼저 사과했다.“미안합니다.”보고하던 직원은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건가? 김태하가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다니!’강지현의 기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주상 그룹에 도착하자마자 전 직원에게 밀크티를 돌렸고,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팀과 회의를 마친 뒤에는 점심으로 미슐랭 레스토랑을 통째로 예약했다.식사를 마친 뒤, 현다영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지현 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왜 이렇게 기분 좋아 보여요?”“그래 보여?”강지현은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만져 봤다.‘내가 그렇게 티 났나?’현다영이 그녀의 입가를 가리켰다.“아침에 회사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웃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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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서씨 가문이 운영하는 산업은 주상 그룹 산업망의 하류에 해당하는 기업이었고, 수많은 경쟁사 가운데서도 서씨 가문은 꽤 이름이 알려진 곳이었다.최근에는 미래 그룹과도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정말 중요한 프로젝트라면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서지아가 굳이 직접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들어오라고 해요.”잠시 생각한 뒤 비서에게 그녀를 안내해 오라고 했다.주상 그룹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그녀에게도 큰 프로젝트가 필요했다.잠시 후 서지아가 비서의 안내를 받아 강지현의 사무실로 들어왔다.오늘의 서지아는 이전에 연회장에서 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파란 체크 정장을 입고,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당당하면서도 일에 능숙한 분위기였다.강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서지아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태도는 예의 바르고 담담했다. 가볍게 악수한 뒤, 서지아는 책상 앞 회전의자에 앉았다.“강 대표님, 제가 가져온 건 이번 핵심 프로젝트입니다. 저희 쪽에서는 주상 그룹과 협력할 생각이고요. 수익 배분은 충분히 조정할 수 있습니다.”서지아는 인사치레도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지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프로젝트 이야기를 이어갔다.사실 이 프로젝트 자료는 이미 한번 검토한 적이 있었다. 조건도 좋았고 주상 그룹에서도 전담팀이 따로 붙어 검토 중인 건이었다.다만 이 프로젝트가 서씨 가문 소유라는 건 강지현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프로젝트 자체는 큰 문제 없어 보여요. 세부 조건은 제가 조금 더 검토해 보고 말씀드릴게요.”십여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 강지현이 말했다.서지아는 미소를 지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지현 씨, 이 프로젝트는 지현 씨가 직접 맡아줬으면 좋겠어요.”“제가요?”“네. 주씨 가문에서 저는 지현 씨가 제일 능력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도 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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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서지아의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지순옥이 전에 김태하에게 약혼녀가 있었다고 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서지아였던 걸까.서지아의 말을 듣고 강지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뒤에야 겨우 정신을 추슬렀다. 마음이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김태하를 더 믿고 있었다.그는 절대 누군가를 다른 사람의 대용품처럼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저는 태하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서지아 씨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더 상처 입힌 거 아닐까요?”강지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그 반응은 서지아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태하랑 알게 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렇게까지 믿어요?”“궁금하긴 해요. 하지만 서지아 씨 입으로 두 사람의 과거를 듣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과거 하나로 사람을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태하가 제 과거를 따지지 않는 것처럼, 저도 지금의 태하만 보고 싶어요.”강지현은 조용히 마음속 생각을 털어놓았다.“서지아 씨, 저희는 이미 약혼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이 결혼에 큰 기대도 없었어요. 그냥 집안끼리 맺은 결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태하가 어떤 사람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그 말을 하던 순간이었다.김태하가 그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서지아가 주상 그룹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도 먼저 찾아온 참이었다. 강지현을 찾으러 올라가기 전에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집안끼리 맺은 결혼이라니...서지아는 김태하를 보고 잠깐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곧 숨을 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지현이 계속 말하도록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얼마나 냉정한지 김태하에게 직접 듣게 하려는 속셈이었다.과연 김태하의 눈빛도 잠깐 어두워졌다.집안끼리 맺은 결혼이라니... 강지현에게 그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걸까.“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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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주상 그룹을 떠난 뒤에도 강지현의 머릿속에는 아까 김태하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지금 가서 할 거라니... 설마 지금 바로 혼인신고를 하러 가자는 걸까?’“집에 가서 서류 준비하자. 다 준비하고 나서 구청으로 혼인신고 하러.”김태하의 말에 강지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진짜 혼인신고 하려고?”“응. 오늘 신고하면 돼. 아직 시간 있어.”김태하는 앞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큰일을 말하면서도 늘 그렇듯 태연한 얼굴이었다.“할아버지, 할머니께는 말씀 안 드려도 돼? 그리고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야?”강지현도 조금 설레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급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약혼도 떠밀리듯 하게 됐는데, 혼인신고까지...“사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야. 원래는 너랑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했어. 그런데 아까 네가 한 말 들으니까 지금 당장 너랑 결혼하고 싶어졌어.”김태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번쯤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오늘 바로 혼인신고 하자. 아니라면 그냥 내가 충동적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도 돼.”그때 강지현의 휴대폰이 울렸다.지순옥이었다.그녀는 오늘 바쁘냐고 묻더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사실 오늘이 그 녀석 생일이거든. 별건 아니고, 그 애가 생일만 되면 늘 기분이 안 좋아서 말이야. 네가 바쁘지 않다면 오늘은 좀 같이 있어 줬으면 해서.”그 말을 듣는 순간 강지현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예전에 은주희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김태하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래서 그는 늘 제 생일을 원망했고 한 번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알겠어요.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전화를 끊고 나자, 조금 전 김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내가 이렇게 한 번쯤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그 말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저릿해졌다. 그에게 늘 죄책감을 주었던 하루가 기쁜 날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그래,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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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이도운은 눈앞의 장면이 믿기지 않았다.거의 반사적으로 ‘강지현!’ 하고 이름을 부를 뻔했지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말이 끊겼다.“이도운 씨! 신분증 놓고 가셨어요!”공증 사무소 직원이 뒤따라 나와 그의 신분증을 건넸다.집안의 압박 때문에 이규진은 그에게 먼저 이윤후의 출국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아이를 해외로 보내고 난 뒤에야 법적인 절차를 통해 입양을 해제하겠다는 것이었다.그 일을 처리하는 동안 이도운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할머니가 버티고 있는 이상, 하루라도 일을 끝내지 못하면 이윤후를 다시 만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결국 지금으로서는 아이를 먼저 해외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신분증을 받아 넣은 뒤 이도운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조금 전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는 곧장 구청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주변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순간, 방금 본 장면이 단지 자신의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다.강지현이 다른 사람과 혼인신고를 하다니.그럴 리가 없었다.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혼인신고 창구로 돌아가 강지현의 혼인 여부를 확인해 보려 했다.“상대방과 어떤 관계이십니까?”직원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눈빛에는 경계가 담겨 있었다.“규정상 본인이나 배우자만 유효한 신분증을 지참해야 혼인 기록을 조회할 수 있습니다.”“남편입니다.”이도운은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스스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강지현과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신분증을 보여 주세요. 조회 조건이 맞지 않으면 타인의 정보는 확인해 드릴 수 없습니다.”남자가 망설이자 직원의 말투도 한층 딱딱해졌다.뒤에는 이미 대기 줄이 늘어서 있었다. 결국 이도운은 더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자리를 떠났다.돌아오는 길 내내 그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강지현이 자신 몰래 결혼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요즘 너무 지쳐서 그런 걸까. 강지현 생각만 하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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