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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화

“엄청 예쁜 수제 가게야!”강지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다. 강지현이 위쪽에, 김태하는 한 계단 아래에 서 있었지만 두 사람의 키 차이가 꽤 잘 어울렸기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모였다.김태하는 이런 시선을 받는 게 조금 불편한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평소 그는 어디를 가든 전용 통로를 이용했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물건을 살 일이 있어도 대부분 최동윤에게 맡겼지, 이런 곳에 직접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그 모습을 눈치챈 강지현이 작게 속삭였다.“그럼 내 품에 좀 기대 있을래? 내가 네 잘생긴 얼굴 좀 가려 줄게.”가볍게 던진 장난에 김태하가 피식 웃었다.“나 그렇게 자의식 과잉 아니야.”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자 눈앞에 넓은 매장이 보였다.수제 케이크 가게였는데, 매장 규모가 꽤 커서 층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었다.강지현은 오는 길에 이미 예약해 두었다. 사장이 직접 나와 두 사람을 안내했고, 만들 케이크 종류도 함께 골라 주었다.김태하는 케이크를 만든다는 걸 알고 조금 놀란 듯 물었다.“케이크 만들려고 온 거야?”“응.”강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태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생일에는 큰 케이크 하나는 있어야지.”김태하는 부드럽게 웃었다.“난 원래 생일 안 챙겨. 케이크도 잘 안 먹고. 오늘은 네가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예전엔 안 챙겼어도 오늘부터 챙기면 되지.”강지현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앞으로 네 생일엔 매년 내가 같이 있을 거야. 오늘은 네 생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결혼기념일이기도 하잖아.”그러면서 이미 케이크 시트를 자르기 시작했다.“그리고 이 케이크는 너 먹으라고 만드는 거 아니야. 네 생일 축하해 주는 사람이 먹는 거야. 바로 나!”그녀는 말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김태하는 그런 강지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걸, 강지현은 눈치채지 못했다.“지현아.”“응?”강지현이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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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김태하는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무슨 일을 하든 금세 익혔고 무엇보다 굉장히 집중하는 편이었다.“네가 잘 가르쳐서 그래.”김태하가 담담하게 말하다가 문득 물었다.“너 예전에 다른 사람한테도 케이크 만들어 준 적 있어?”강지현은 잠시 뒤에야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전엔 나 먹으려고 만든 거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 주고 싶었던 건 네가 처음이야.”거짓말이 아니었다.강지현은 학교 다닐 때부터 스스로 생일을 챙기기 시작했다.사서 먹는 케이크보다, 생일만큼은 스스로를 돌봐 주는 기분이 좋아서 직접 만들곤 했다.이도운을 알게 된 뒤에는 그에게도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촌스럽고 품격이 없어 보인다며 거절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생각해 주고 배려해 준 적이 없었다.그녀가 직접 만든 선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강지현도 알고 있었다. 그건 두 사람의 삶이 애초부터 달랐기 때문이라는 걸.이도운은 모든 걸 돈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녀가 만든 선물은 비싼 물건보다 가치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김태하는 달랐다. 그는 누군가의 마음을 훨씬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김태하는 짧게 ‘응’ 하고 대답했지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그 모습을 보던 강지현은 문득 서지아가 떠올랐다. 이미 김태하가 자신에게 질문했으니, 그녀도 하나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태하야.”“응?”“오늘 나랑 혼인신고 한 거, 서지아 씨가 했던 말 때문은 아니지?”강지현은 서지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한 타이밍이 하필 그 말이 오간 바로 뒤였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지만 미묘하게 신경 쓰이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난 그 말 믿진 않았어. 그래도 오늘이라, 괜히 생각이 많아지네.”김태하는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눈빛은 차분했고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아니야.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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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이건 강지현이 김태하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결제할 때도 그녀가 먼저 카드를 꺼내 들었다.하지만 옷 포장이 끝나자마자 김태하는 강지현을 바로 옆에 있는 명품 주얼리 매장으로 데려갔다.그리고 커플 반지 한 쌍과 팔찌 두 개를 골랐다.반지와 팔찌는 모두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화려한 장식은 거의 없었지만, 최고급 소재와 정교한 세공 덕분에 은은하면서도 눈에 띄는 광택이 났다.강지현이 산 옷값은 6000만 원대였지만, 반지와 팔찌 세트는 거의 6억에 가까웠다.강지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오늘은 내가 너한테 선물하는 날이잖아.”김태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넌 네 선물 주면 되고 난 내 선물 주는 거지. 이건 신혼 선물이야.”그는 직접 그녀의 손에 반지와 팔찌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자신에게도 끼워 달라고 했다.김태하의 손목에는 이미 20억이 넘는 시계가 차 있었다. 강지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거 커플 팔찌잖아. 대표가 회사에 차고 가면 사람들이 웃지 않을까?”김태하는 몸을 살짝 숙여 그녀의 귓가에 낮게 말했다.“다들 알아보면 더 좋지.”목소리가 워낙 작아 옆에 있던 직원들은 들을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가까운 분위기만으로도 주변의 시선이 자연스레 모였다.어디선가 부러운 탄성이 작게 들려왔다.강지현의 귀가 또다시 붉어졌다.그녀는 얼른 김태하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었다. 하지만 시계가 있는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에 따로 끼워 주었다.가느다란 팔찌가 남자의 또렷한 손목뼈 위에 놓이자, 오히려 잘 어울렸다. 차분하면서도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까지 더해졌다.강지현은 몇 초 동안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너 손 되게 예쁜 거 알아?”김태하는 낮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손을 거두기 전에 살짝 잡았다.그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지금 알았어.”맞닿은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에 강지현의 귀가 다시 뜨거워졌다. 그녀가 손을 빼려 하자 김태하는 오히려 더 단단히 잡았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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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누가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진열대에 있는 걸 한 줄씩 쓸어 담나.게다가 몇몇 사람들이 그들 뒤에서 장바구니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사려고 했던 물건을 누가 몽땅 가져가 버린 것 같은 눈치였다.“죄송해요. 이거 가져가세요.”강지현은 얼른 몇 개를 다시 진열대에 돌려놓았다.하지만 옆에 있던 김태하는 태연하게 말했다.“좋아하면 좀 더 사. 어차피 자주 오는 것도 아니잖아. 여기 물건 많으니까 필요하면 최 비서 불러서 옮기면 돼.”강지현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태하 너, 마트 안 와봤지?”“왜?”“마트는 그냥 천천히 둘러보면서 필요한 것 몇 개만 사는 거야. 한두 개씩 사야 또 올 이유도 생기고, 물건도 남아서 버리는 일 없지.”“또 온다고?”김태하는 묘하게 그 말에만 반응했다.“나랑 같이?”강지현은 그의 깊은 눈을 마주 보다가, 순간 그가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당연하지. 네가 앞으로도 나랑 같이 와 줄 생각이면.”말을 마친 강지현은 물건을 다시 진열대에 올려놓기 시작했다.높은 선반에 손이 닿지 않자, 김태하가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대신 올려 주었다.원래라면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람들을 압도해야 할 사람인데, 지금은 그녀 옆에서 장바구니를 밀고 있었다.강지현은 문득 웃음이 났다. 이곳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눈에 띄고 멋있어 보였다.강지현이 최대한 절제하며 물건을 골랐는데도, 두 사람이 산 물건은 결국 김태하의 넓은 트렁크를 가득 채웠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지현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지순옥이었다.그녀는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혼인신고 같은 큰 일을 해 놓고도 아직 어른들께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강지현은 어릴 때부터 부모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스스로 결정하는 데 익숙했다.하지만 김태하는 달랐다.김씨 가문의 가정교육은 분명 엄격할 것이다.“태하야.”“응?”“네 가족들, 우리 혼인신고한 거 아직 모르잖아. 우리 너무 예의 없었던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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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지순옥의 말투는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거침없었다.강지현은 듣는 내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히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아 슬쩍 운전 중인 김태하를 바라봤다.김태하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그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할머니, 지현이 놀라겠어요.”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부드러웠다.“저희 지금 집으로 가는 중이에요.”“그래그래! 오는 길에 조심하고.”김태하는 전화를 다시 강지현에게 돌려주었다.강지현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오늘 네 집에서 자는 거야?”“우리 집.”그 한마디에 강지현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그렇다. 이제 김태하의 집은 곧 그녀의 집이기도 했다.“할머니께서 농담하신 거야. 오늘 밤에 머물기 싫으면 내가 데려다줄게.”“...”어느새 밤이 깊어졌다. 강지현과 김태하가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 앞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지순옥은 고용인들을 미리 밖에 대기시켜 두었다. 차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달려와 짐을 받아 들고, 두 사람을 귀한 손님처럼 정중하게 맞이했다.집 안도 눈에 띄게 꾸며져 있었다. 꽃병부터 식탁보, 조명에 달린 장식까지 하나같이 새로 꾸며져 있어 집 안 분위기가 한층 따뜻하게 느껴졌다.지순옥과 김윤석도 캐주얼 차림으로 갈아입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 분위기 속에서 강지현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자신이 정말 결혼을 했고, 이제는 가족이 생겼다는 것을.예전에 이도운과 가짜 혼인신고를 했을 때는 그저 간단히 식사만 했을 뿐이었다. 평소와 별다를 것도 없는 하루였다.이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를 달가워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도 없었다.“지현아, 오늘부터 넌 우리 집 손주며느리야. 할머니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문을 들어서자마자 지순옥이 강지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김윤석이 좋은 날에 울지 말라고 말리자 그제야 겨우 눈물을 참았다.강지현도 코끝이 시큰해졌다.“할머니, 저도 엄청 기뻐요. 이 집 며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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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촛불의 희미한 불빛이 남자의 또렷한 얼굴선을 비추고 있었다.강지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시 넋을 잃었다.촛불이 꺼지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는 얼른 지순옥과 김윤석에게 접시와 포크를 건네며 케이크를 나누어 주었다.김태하가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에게 케이크를 권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케이크는 강지현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김태하는 케이크를 나눠 준 뒤, 자기 몫도 크게 한 조각 잘라 천천히 먹었다.마지막에는 강지현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맛있다.”사실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하지만 김태하에게는 그 케이크가 유명 파티시엘이 만든 것보다 더 맛있게 느껴졌다.지순옥과 김윤석도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케이크를 꽤 많이 먹었다.케이크를 다 먹고 나자 은주희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강지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이번에는 김태하의 아버지 김무언까지 연결되었다.김무언은 김태하와 얼굴 윤곽이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김태하처럼 날카롭고 또렷한 인상은 아니었고 전체적으로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였다.영상으로 보는 탓인지, 강지현이 외부에서 들었던 것처럼 위압적인 느낌도 없었다.머리는 이미 희끗했고 반듯한 안경을 쓰고 있었다. 강지현과 이야기할 때는 웃음이 많지는 않았지만 말투는 꽤 부드러웠다. 다만 말수가 적어 그다지 살가운 인상은 아니었다.김태하는 아버지가 강지현과 오래 이야기하는 걸 원하지 않는 듯, 곧바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그런데 김무언은 강지현을 대할 때와 달리, 김태하에게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갑자기 회사 이야기를 꺼내자, 분위기가 딱딱해졌다.김태하는 강지현에게 눈짓한 뒤 휴대폰을 들고 위층 서재로 올라갔다.지순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라. 저 부자는 원래 저래. 만나기만 하면 일 이야기뿐이야.”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그다지 좋지 않았다.지순옥은 김태하가 결혼하면 조금은 나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아들은 여전히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가족들에게는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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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어머, 그게 뭐가 어때서.”지순옥은 강지현의 표정을 보자마자 금세 눈치를 챘다.연애 초반의 설레는 감정을 너무 오래 잊고 살다 보니, 강지현이 이렇게 순수한 반응을 보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김태하는 밖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유명했지만, 의외로 속은 꽤 순진한 편이었다.지순옥은 슬쩍 강지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그럼 오늘은 태하를 소파에서 재워.”“그건 안 돼요.”강지현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그러면 제대로 못 잘 거예요.”지순옥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혼인신고하고 나니까 다르네. 벌써 남편 걱정부터 하는 거야?”“할머니, 저는 그런 게 아니라...”강지현은 결국 지순옥의 팔을 잡고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됐어, 됐어. 너희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지순옥은 강지현의 손을 다독였다.“나는 우리 손주며느리가 집에서 편하게 지내기만 하면 돼. 태하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알잖아. 걱정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너도 더 잘 알게 될 거야.”그렇게 말한 뒤 지순옥은 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웃으며 방을 나갔다.지순옥을 배웅하고 난 뒤 강지현은 다시 침대 옆으로 돌아왔다.부드러운 침대 시트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 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지난 며칠 동안 김태하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계속 떠올랐다.생각할수록 심장이 자꾸 벌렁거렸다.김태하가 아버지와 통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조명 두 개만 켜져 있었다.“지현아?”김태하는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그녀가 이미 잠든 줄 알았던 것이다.“응, 여기 있어.”하지만 강지현의 목소리는 침대가 아니라 뒤쪽에서 들려왔다.몸을 돌리자, 넓은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강지현이 보였다.강지현이 몸을 일으키자 어깨에 덮고 있던 담요가 스르르 흘러내렸다.이미 샤워를 마친 상태였다. 반쯤 마른 긴 머리가 가슴 위로 흘러내렸고 하얀 레이스 잠옷이 가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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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강지현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무슨 뜻이지? 오늘 밤에 같이 잔다고?’강지현은 이도운과 그렇게 오래 사귀면서도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이 정말로 그녀의 첫날밤이 되는 걸까?그 생각이 들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강지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파고들었다.잠시 뒤 김태하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허리에 욕실 타월만 두른 채였다.침대 위에서 이불을 꼭 끌어안고 구석에 웅크려 있는 강지현을 보자 김태하는 웃음이 나왔다.지금의 그녀는 마치 단두대에 오를 어린 양 같았다.그는 손을 뻗어 이불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강지현이 가만히 있자 이번에는 한 번에 확 잡아당겼다.이불이 순식간에 벗겨졌고 강지현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대로 김태하의 몸을 끌어안았다.막 샤워를 마친 그의 몸은 아직 따뜻한 물기와 체온이 남아 있었다.김태하가 낮게 웃었다.“잠깐 나갔다 왔을 뿐인데 그렇게 보고 싶었어?”그는 몸을 숙여 그녀 위에 팔을 짚었다.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강지현의 붉어진 뺨 위로 톡 떨어졌다.강지현의 시야에는 단단하게 잡힌 남자의 몸과 숨결에 따라 미묘하게 움직이는 피부만 가득 들어왔다.그리고 그녀의 손은 여전히 그의 허리를 꽉 잡고 있었다.“김태하, 너 왜 옷 안 입고 나와...”강지현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놓지 못한 채였다.김태하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지금 이렇게 꽉 붙잡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옷 입으러 가.”그의 깊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그녀가 얼른 손을 놓자, 김태하는 돌아서서 잠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곧 다시 침대로 올라왔다.침대가 살짝 흔들리며 그의 무게가 옆에 내려앉았다.강지현의 마음이 긴장으로 조여 들었다.그때 불이 꺼졌다. 방 안에는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온 달빛 한 줄기만이 침대 끝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자자.”김태하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강지현이 상상했던 뜨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신 귀 옆에 살짝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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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그 말을 듣자 문수정은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매일 이렇게 애써 모시고 있는데, 정작 권미숙은 강지현만 떠올리고 있다니.하지만 권미숙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강지현은 사람을 돌보는 데 정말 세심했다. 도우미들 말에 따르면 강지현은 늘 잠들기 전에 권미숙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발을 따뜻한 물에 담그게 했다.방 안에는 숙면에 도움이 되는 향까지 피워 두어,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잠을 잘 자면 아침 기분도 자연히 좋아졌다.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지현은 권미숙의 생활 패턴에 따라 알람까지 맞춰 두고 차를 준비하게 했다.이 두 가지만으로도 권미숙을 기분 좋게 모시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권미숙이 종종 강지현의 집에 머물다 오곤 했던 것이다.강지현 이야기가 나오자 권미숙 역시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문수정이 다시 차를 가져오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지현이는 요즘 도운이랑 연락 안 하니?”“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혼하겠다고 먼저 나선 게 그 애잖아요. 아마 우리 도운이가 찾아와서 달래 주길 기다리는 거겠죠.”그녀가 일부러 그 이야기를 꺼내자, 권미숙의 얼굴이 곧바로 굳어졌다.노인은 입을 다문 채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달래긴 뭘 달래. 고집부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한 번이면 됐지, 매번 그러면 어떡해.”사실 권미숙은 이도운이 강지현을 달래서 돌아오게 한다 해도 크게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다만 강지현이 지분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않으니, 더 이상 끼어들 명분이 없었다.문수정이 냉소를 흘렸다.“그러니까요. 제가 늘 말씀드렸잖아요. 어머님이랑 도운이가 그 애를 너무 오냐오냐해서 저렇게 된 거라고요.”그녀는 사과를 집어 들고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버릇이면 고쳐야죠. 이번 기회에 제대로 혼 좀 나 봐야 해요. 자기가 우리 집안에 아무 쓸모도 없고, 도운이마저 상대 안 해 주면 정신 차리겠죠.”그 말에 권미숙의 마음에 잠깐 스쳤던 연민도 금세 사라졌다.노인은 한숨을 쉬며 문수정이 깎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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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처음에 강지현에게 한없이 맞춰 주고 아껴 준 것도 결국은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고 완전히 자기 손안에 넣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도운은 그 목적조차 잊어버릴 뻔했다. 강지현이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아마 회사 일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진 탓일 것이다.“맞다. 주상 투자자 쪽에 연락할 방법을 찾아봐라. 아직 신분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감사의 뜻은 반드시 전해야 한다. 주씨 가문을 제대로 붙잡아야 우리도 완전히 살아날 수 있어.”이규진은 외투를 도우미에게 넘기고 식당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이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준비해 보겠습니다. 다음 주에 보석 경매가 하나 있는데, 거기서 괜찮은 선물을 하나 고르려고 합니다.”“보석이라고?”이규진이 잠깐 놀란 듯했지만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런 게 낫지. 돈 있어도 쉽게 못 구하는 물건이어야 한다. 가격 아끼지 마라. 주씨 가문에는 성의를 확실히 보여야 해.”“알겠습니다.”이도운은 대답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날 주차장에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 여자였다.차창 너머로 잠깐 스쳤을 뿐인데도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느껴졌던 여자.여자 중에 보석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선물이라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가족이 저녁 식사를 절반쯤 했을 때였다. 이씨 가문 본가의 초인종이 갑자기 울렸다.문수정이 도우미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손님 있어요?”“없습니다.”도우미가 막 대답을 마쳤을 때, 다른 직원이 들어와 서류봉투 하나를 건넸다.“밖에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린 여자분이 와 있습니다. 이걸 회장님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이도운은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하고 있었고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이 집에는 매일같이 물건이나 서류가 들어왔다. 이규진은 인맥이 넓어 그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도 많았고, 사업 제안을 들고 찾아오는 신생 기업도 적지 않았다.“당신 거네요.”문수정도 대수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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