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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는 남자들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21 - チャプター 30

83 チャプター

20화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던 서우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뺨의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깨웠다. “아윽, 그러게…… 아픈 건 아픈 거네.”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린 그가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무채색의 대리석과 금속재가 조화를 이룬 주방은 도윤의 성격과 닮아 있었다. 그런데 정갈하게 정돈된 그 완벽한 질서 한가운데, 서우의 눈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같은 모양의 색만 다른, 머그컵 두 개. 검은색 하나, 핑크색 하나. “안 어울리게.” 그의 시선이 검은색 머그컵과 핑크색 머그컵 사이를 유영했다. 그리고 곧 핑크 컵을 집어 들어 물을 따랐다. 해인의 입술이 닿았을 자리에 제 입술을 겹쳐 대고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한기가 묘한 쾌감을 안겼다. 컵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이제 커플 컵 아니네.” 도윤이 이 컵을 볼 때마다 떠올리게 될 것은 이곳에 입을 댄 자신의 비웃음일 터였다.그는 핑크색 컵을 식탁 한가운데 삐딱하게 놓아두고, 수납장을 열었다. 언제 갖춰놓은 건지 2인용 식기들이 나란히 들어차 있었다. “아주 살림을 차리셨네.” 고개를 기울인 그의 시선이 복도 끝 방문을 향했다. “예쁜이 방은…… 아무래도 저기인 것 같고.” 홀린 듯 해인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달콤한 냄새가 훅 끼쳤다. 향수나 화장품 냄새가 아닌, 자몽같이 상큼하면서도 복숭아처럼 달달한, 그러면서도 햇볕에 잘 말린 이불처럼 포근한 살 냄새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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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집무실을 나선 세 사람의 걸음이 로비를 가로질렀다. 정오의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며 해인을 눈부시게 비췄다.로비를 지나던 직원들의 시선이 채영에게 머물다, 이내 해인에게 흘러갔다.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살짝 구겨진 드레스, 그리고 그 사이로 비치는 하얀 살결.해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지금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여자’ 같은 분위기가 묻어 나고 있었다. 혼자 걷고 있었더라면, 그 안쓰러움을 감싸주려 다가서는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해인의 가슴골과 매끈한 다리 라인을 훑었다.“…….”도윤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채영의 허리를 감싸 쥐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해인의 뒤태에 머무는 남자들에게 향했다.“아, 덥네.”도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자켓을 벗어 내렸다. 채영이 의아한 듯 쳐다보았지만, 도윤은 대답 대신 제 자켓을 해인의 어깨에 툭, 던지듯 걸쳐주었다.“……어?”해인이 놀라 고개를 들자, 도윤은 이미 시선을 돌린 뒤였다. 그는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리며 무심하게 말했다.“네가 들어.”그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무거우니까 그냥 입어.”“아…… 응, 오빠.”해인은 얼떨결에 자켓을 여몄다. 묵직한 원단 사이로 도윤의 체취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채영의 시선이 그 모습을 조용히 훑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정오의 햇살이 아스팔트 위에서 번들거렸다. 도윤의 차가 식당 앞에 멈추자 발렛 직원이 서둘러 다가왔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차 키를 건네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차분한 향이 감도는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낮은 조명과 짙은 고재 나무로 된 인테리어가 조용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직원이 세 사람을 프라이빗한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도윤이 먼저 의자를 당겨 상석에 앉았다. 채영이 그의 오른쪽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고, 해인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해인이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도윤이 무심하게 손을 뻗었다.“벗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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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맛있으세요?”해인의 뜬금없는 물음에 채영의 눈썹이 움찔했다.“뭐?”“그거, 오빠가 저 주려고 시킨 거잖아요. 매운 거 못 먹는, 분식은 싫어하는 사람이 굳이 특별히 추가해서.”해인은 되려 채영의 행동을 감상하듯 담담하고도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의자에 기댔다.“약혼녀라면서요. 그런데 오빠가 저한테 보여주는 이런 구질구질한 다정함이 그렇게 부러운가? 남의 것을 뺏어 먹고 싶을 만큼?”“……너, 말이 좀 짧다?”채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하지만 해인은 멈추지 않았다. 밑바닥에서 사람을 상대하며 배운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웃고 있는 저 거만한 표정 뒤에 숨겨진 추악한 불안을.“흘리고 다닌다라……. 본인이 약혼녀로서 대접을 못 받으니까 세상 모든 게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고?”“이게 진짜……!”채영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손마디가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지만, 해인은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며 채영의 반응을 즐겼다.“어머, 조심하세요. 오빠 곧 들어올 텐데. 지금 표정, 보여줘도 되겠어요?”해인은 도윤이 주문한 떡볶이 그릇을 다시 제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채영이 먹던 떡볶이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부분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그때, 미닫이문 너머로 도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채영이 황급히 표정을 다시 고치는 사이 문이 열리고 도윤이 들어섰다. 그는 룸 안의 묘하게 달라진 공기를 단숨에 알아차렸다.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해인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정갈하게 내려놓았다.“맛이 없네.”해인의 무심한 한마디에 도윤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고정되었고, 채영도 당황한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내 취향이 그렇게 오빠한테 맞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따로 먹자. 이게 뭐야, 분식도 요리도 아닌 어중간한 거 싫어.”“……윤해인.”도윤이 낮게 경고하듯 이름을 불렀지만, 해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쐐기를 박았다.“그만 가볼게. 생각해보니까 서우도 배고플 텐데, 그 생각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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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서우는 해인의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해인의 체취와 품 안에 안긴 그녀의 낡은 일기장을 만끽하던 그때였다.띠리릭, 띠리릭.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서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일기장을 재빨리 캐리어 깊숙이 찔러 넣은 그가 후다닥 거실로 뛰쳐나갔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해인이었다.“벌써 왔어?”“응. 너 배고플 거 아냐.”해인은 신발을 벗으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그 얼굴로 나가서 먹기는 힘들 테니까. 집에서 간단하게 먹자. 내가 금방 차릴게.”해인은 가방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려던 찰나, 다시 한번 현관문 너머로 익숙한 기계음이 들려왔다.띠띠딕.해인과 서우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으로 쏠렸다. 문이 열리고 들이닥친 건,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친 도윤이었다. 그의 손에는 슈트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비닐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오빠?”“밥 먹자.”도윤은 식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대리석 상판 위로 던져지듯 내려놓은 검은 비닐봉투가 부스럭거리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도윤의 손끝이 봉투 안을 헤집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일회용 용기들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맵싸하고 달큰한 향이 순식간에 거실의 차가운 공기를 뒤덮었다. 서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용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비틀렸다.“……초밥이 아니라 분식이야? 형도 이런 걸 먹어?”서우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도윤의 턱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서우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채, 뚜껑을 열어 떡볶이의 붉은 양념을 드러냈다. “이제부터 좀 바꿔보려고.”낮게 깔린 도윤의 목소리는 식탁 너머 해인에게로 향했다. 고개를 들어 해인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호흡은 거칠지 않았으나, 내쉬는 공기마다 날 선 금속음이 섞여 있는 듯 서늘했다.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어색한 눈빛은 또 뭐야?’서우가 흠칫 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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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엄마, 나 이 약혼 안 해. 못 하겠어.”찻잔을 매만지던 엄마의 손길이 멈췄다. 하지만 기대했던 걱정이나 당혹감 따위는 없었다. 엄마는 그저 안경 너머로 채영을 차갑게 훑었을 뿐이었다.“권도윤이 에이펙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나기라도 했니?”“그게 아니라…….”담담한 물음에 채영의 입술이 굳었다가 다시 움직였다.“그 인간, 나 사랑 안 해. 아니, 사랑 안 하는 건 상관없는데, 딴 여자가 있다고!”채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엄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그래서?”“그래서라니?”엄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기울였다.“너 지금 연애질 하니? 도윤이가 밖에서 누굴 품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네가 그 집 안주인 자리에 앉아 우리 집안 뒷배를 지키는 게 본질이지.”“엄마!”“에이펙이 망한 게 아니면 이 결혼에 이변은 없어.”이미 대화를 끝냈다는 듯, 엄마는 다시 찻잔을 들어올렸다.“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그만 들어가.”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채영이 천천히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었다.도윤에게는 허울뿐인 장식품, 부모에게는 거래처.자신이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입술을 깨물며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선 채영은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 안에 건조하게 울렸다.화장대 앞에 앉은 채영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완벽하게 가공된 외모.흠잡을 데 없는 피부, 정교하게 다듬어진 눈매.명문대 학위, 좋은 집안.그런데, 왜.‘그년은 도대체 뭔데?’윤해인.그 이름이 입안에서 모래처럼 씹혔다.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살갗 아래가 간지러울 만큼 불쾌했다.권도윤은……, 그럴 수 있다.우린 서로 사랑했던 적은 없었으니까.그런데 강서우는 왜?마음은 없었어도 몸정은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윤해인을 만나고 온 직후에 자신에게 돌아섰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아.”마침내 채영의 입에서 허탈하게 웃음을 터졌다. 퍼즐이 맞춰졌다.도윤이 그토록 완벽하게 오빠 연기를 하는 이유.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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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은 지나치게 넓었다.현관엔 서우가 아무렇게나 벗어던져 놓은 슬리퍼 한 짝이 널부러져 있었고, 시계를 보니, 도윤의 퇴근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가족.”해인은 거실 소파 끝에 걸터앉아 입술을 달싹였다.“아니면 뭐라는 말이야.”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청소기를 손에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탓이었다.게다가 이 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다운 일이기도 했으니까.먼지가 빨려들어가는 것만큼 자신의 머릿속도 점점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팔을 걷고 먼지털이를 든 채 도윤의 서재로 향했다.문을 열자 서늘한 냉기와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해인은 책장 구석구석을 털어내다, 유독 빽빽하게 꽂힌 책 사이에서 삐져나온 서류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왜 이것만 이렇게 삐져나와 있는 거지.”제대로 꽂아주려고 책을 살짝 밀어내서 공간을 확보했다고 생각한 순간,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내용물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해인의 심장을 멈추게 할 이름 석 자가 튀어 올랐다.[을 : 이명희]“엄마 이름이 왜……. 채무 면제?”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서류 안에 적힌 내용들은 해인의 생각을 뛰어넘었다.‘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이유가, 사실은 이거였던 거야?’떨리는 손으로 다른 종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2016년 ~ 2025년 : 학비 및 생활비 정기 송금 내역]뭔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의심은 했었다. 대체 엄마가 무슨 돈으로 저렇게 비싼 옷을 걸치고, 매일 잃었다면서도 다음 날이 되면 무슨 돈을 가지고 도박장을 가는 지.그저 또 물주를 하나 물었나 하고 넘겨버렸다.자신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괜히 들쑤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런데 그 돈이 사실은 오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보낸.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만나자마자 왜 대학은 가지 않았냐는 그 물음이.“……거짓말.”해인은 휴대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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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윤해인이 권도윤의 심장이야.]조금 전 채영이 내뱉었던 말을 씹어 삼키듯 되뇌었다.“심장 같은 소리 하네.”서우가 낮게 읊조리며 혀끝으로 터진 입안을 훑었다.누군가를 제 몸의 일부처럼, 아니 그보다 더 아껴서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구는 감정은 모두 가식이고 허상이다.“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벌써 세 번째 였다.“아, 왜 자꾸 전화질이야. 짜증 나게.”액정에 뜬 이름은[권도윤]. 서우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어디야.]인사도 생략된 채 차가운 음성이 귀에 꽂혔다.도대체가 이건 물어보는 건지, 명령하는 건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되는 말투였다.[클럽 앞. 왜? 나 보고 싶어서 병이라도 났어?][술 처먹고 돌아다니지 말고, 10분 내로 들어와.][와, 갑자기 왠 보호자 노릇? 그럴 거면 용돈이나 주고 하던지.][9분 남았다. 내 집에서 살고 싶으면 하라는대로 해.]툭. 하고 끊긴 신호음 너머로 서우는 기묘한 고양감을 느꼈다.‘가족 행세를 제대로 작정하고 하시네. 웃기지도 않아.’서우라고 모를 리 없었다.저를 이토록 서둘러 불러들이는 건, 아마도 해인과 단둘이 남겨진 상황에서, 스스로가 통제 불능이 될까 봐 겁이 난 권도윤이 자신을 방패막이로 쓰기 위해서라는 것을.한편으로는 그 비겁한 부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그래, 가서 구경 좀 해볼까? 그 위태로운 성인군자 놀이.”..[9분 남았다. 내 집에서 살고 싶으면 하라는 대로 해.]서슬 퍼런 말을 내뱉고 전화를 끊은 도윤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고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고요한 거실, 그 정적을 뚫고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건, 일정하게 바닥을 때리는 해인의 샤워소리였다.그 작고 사소한 물소리가 이토록 자극적이일 수 있을까.닫힌 욕실 문 너머로 김 서린 거울과, 뜨거운 물줄기 아래서 붉게 달아오른 해인의 하얀 어깨가 의지와 상관없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아까 제 품에 안겨 잘못했다며 울먹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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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샤워를 마치고 도윤의 가운을 대충 걸친 서우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젖은 머리카락에서 아직도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내렸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화장품은 뭐…….”말을 하던 서우의 입술이 눈 앞의 광경에 그대로 멈췄다.“……와.”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넓은 거실 한복판, 카펫 위에 두툼한 요와 이불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어때? 꼭 캠핑 온 거 같지 않아?”베개를 안고 나온 해인이 해맑게 물었다.“캠핑……, 보다는 난민촌에 가깝지 않아?”“뭐? 그건 좀 너무 했어!”새초롬한 말투와 달리 해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란히 베개 3개를 놓았다.“아무튼 우리 오늘 여기서 다 같이 잘거야.”“어?”서우가 토끼눈을 하고서 도윤을 쳐다봤다.“내 제안 아니야. 해인이가 하자니까 하는 거지.”도윤은 여전히 수트 차림이었다. 넥타이만 간신히 풀어 내린 그는, 젖은 머리로 서 있는 서우를 불쾌한 듯 훑어내렸다.“난 씻고 나올 테니까, 허튼짓하지 말고 있어.”도윤은 경고하듯 서우를 쏘아보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묵직한 방문이 닫히자마자, 거실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서우야, 이리 와봐.”이불 모서리를 정리하던 해인이 손을 까딱이며 서우를 불렀다.“서우야, 이리 와봐.”이불 모서리를 정리하던 해인이 손을 까딱이며 서우를 불렀다.“왜?”툴툴거리며 서우가 다가서자, 해인은 그를 제 방쪽으로 끌고 갔다.“뭐 하려고?”“로션 발라야 한다며, 내꺼 쓰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오빠꺼 쓰면 상처 아플 걸?”“아, 됐어. 그럼 그냥 안 바르면 되지. 무슨 여자꺼까지.”“안 돼. 어차피 연고도 발라야 하니까, 이리 앉아봐.”해인은 기어이 서우를 화장대 앞 보조 의자에 앉혔다. 그는 이 상황이 황당하면서도, 제 팔목을 잡아끄는 해인의 손길이 의외로 단단해서 순순히 엉덩이를 붙였다.“머리는 또 왜 이래. 수건으로 대충 털기만 하면 다야? 나중에 대머리 된다.”해인이 드라이기를 꺼내 전원을 켰다. 우우웅. 소음이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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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나, 난 자유로운 영혼이야.”엉겁결에 내뱉어버린 서우의 말에, 해인이 잠깐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뭐야, 결국 짝사랑이네. 너 지금 얼굴 빨개졌어.”큭큭거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에 서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소라면 능구렁이처럼 넘겼을 텐데, 해인의 저 무방비한 웃음 앞에선 자꾸만 페이스가 말렸다.“아니거든! 내가 누나처럼 짝사랑이나 하는 줄 알아?”“짝사랑?”순간, 해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거실엔 차가운 적막이 감돌았다.아차 싶었다.낮에 훔쳐봤던 그녀의 스케치북이 화근이었다.페이지마다 빼곡하게 채워져 있던 권도윤의 얼굴들.그 집요함을 목격한 탓에 자연스럽게 윤해인이 권도윤을 좋아했다고 생각했으니까.“내가 누구를 좋아하는데?”해인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았지만 서우는 태연히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런 목소리로 받아쳤다.“연예인 덕질 말이야. 그…… BTM 준이 좋아하지?”“어, 어떻게 알았어?”해인이 놀란 얼굴로 흠칫하며 물었다.어떻게 잔머리는 이렇게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지.서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 잔머리를 자찬했다.사실 그저 최근 떠들썩하게 에비뉴 백화점에서 팬 사인회를 한 아이돌을 지목했을 뿐이었다.직원이라면 실물을 봤을 거고, 실물보고 안 반하면 그게 좀 이상할 정도의 인기와 외모였으니까.“그러니까 내 말 들어. 여자들은 저런 착한 얼굴을 한 늑대한테 제일 잘 잡아먹히는 거야. 알겠어?”“늑대는 무슨……. 왜 자꾸 훈수야? 자기는 연애 얼마나 해봤다고, 흥.”해인의 핀잔을 배경음악 삼아 TV를 응시하던 서우의 눈동자가 잠시 흐릿해졌다. 화면 속 소음 대신 귓가에는 채영의 서늘한 목소리가 겹쳐졌다.[가져, 서우야. 네가 윤해인을 완전히 가져버려. 그때 권도윤이 지을 그 처참한 표정을 생각해봐.]이 여자를 이용해 도윤의 완벽한 인생을 진흙탕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서우가 이곳에 온 목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유치한 가족 놀이가 주는 작은 안도감이 자꾸만 그의 발목을 붙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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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정적은 독이었다.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도윤은 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낯선 감각들에 마비될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팔 안에 가득 들어찬 말랑하고 가녀린 곡선, 콧끝을 집요하게 간질이는 보드라운 머리카락, 그리고 얇은 잠옷 너머로 여과 없이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하지만 곧 그것이 무엇인지 자각하자마자 , 도윤의 등골로 서늘한 소름이 돋아 올랐다.‘……!’제 품에서 고른 숨을 내뱉고 있는 건, 세상에서 유일하게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였다.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다행히 해인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도 없었다. 지금이다. 지금 이 팔을 거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된다.하지만 머리와는 달리, 도윤의 팔은 해인의 허리를 더욱 견고하게 옭아맸다.‘잠시만…… 아주 잠깐만 이러고 있으면 안 될까.’비겁한 변명이 이성을 갉아먹었다. 어차피 해인은 잠들었고, 이건 그동안 못다 한 오빠로서의 포옹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해인의 목덜미에 코끝을 묻자, 달콤한 복숭아 향이 폐부 깊숙이 박혀 들었다.문제는 몸이었다.오빠라는 가증스러운 이름 뒤로 숨으려 할수록, 정직한 육체는 반항하듯 뜨겁게 달아올랐다.아랫배가 뻐근해지며 부풀어 오르는 노골적인 열기. 도윤은 제 몸의 변화를 느끼며 수치심으로 입술을 짓씹었다.해인이 깰까 봐, 혹은 이 추악한 흥분을 들킬까 봐 전신에 무리하게 힘을 주자 손가락 끝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어둠 속에서 도윤의 눈동자가 지독한 자기혐오로 번들거렸다.‘그냥…… 죽어버려, 권도윤.’제 여동생 같은 아이를 품에 안고 수컷의 본능을 내비치는 스스로가 시궁창보다 더럽게 느껴졌다. 이성을 붙잡으려 눈을 부릅뜬 찰나였다.퍽!“억……!”어둠 속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도윤의 팔과 머리를 거칠게 걷어찼다. 예상치 못한 타격에 도윤의 몸이 튕기듯 옆으로 밀려났다.그 덕분에 해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둔탁한 통증에 도윤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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